국경선평화학교 대표 정지석 목사
민통선 안 DMZ평화문화광장에서 침묵예배를 드리는 정지석 목사와 국경선평화학교 학생들
국경선 평화학교가 있는 DMZ평화문화센터 앞에서 정지석 목사와 학생들
국경선평화학교 수업
한반도는 갈등의 땅이다. 동족끼리 70년 가까이 총구를 겨냥하고 있는 민간인통제구역(민통선)이 그 상징이다. 경기도 북부 동두천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50분을 달리면 백마고지역이 나온다. 6·25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여기서 철마는 더는 달리지 못한다.
지난 8일 백마고지역에서 비무장지대(DMZ)로 향했다. 드넓은 벌판엔 유명한 오대미로 이름을 달고 나갈 모들이 살랑살랑 춤을 춘다. 길가엔 제주에서 출발한 화쟁코리아 순례단이 걷고 있다.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이곳은 남북한 병력 150만명 중 30만명이 집중 배치돼 있는 곳이다.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평화의 씨앗’을 찾으러 민통선에 들어가다니. 아무래도 미친 짓인 것만 같다. 국경선평화학교 대표 정지석(55) 목사가 3년 전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가 민통선 안에서 평화의 씨앗을 심을 ‘평화 일꾼’을 기르겠다고 했을 때 한 유대인 학자도 그랬다. “미친 상상”이라고.
10여분을 달리니 ‘디엠제트(DMZ)평화문화센터’와 광장이다. 국경선평화학교가 강원도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곳이다. 1층 세미나룸에서 정 목사가 학생 10여명과 둘러앉아 수업을 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달려온 전영숙 전도사와 대안학교 중퇴자인 이주영군 등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다. 캐나다에서 온 대런과 크리스틴 커플도 함께하고 있다. 공부 뒤 매일 오후 3시엔 북녘 땅이 훤히 보이는 소이산까지 ‘평화 기도순례’를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크리스천아카데미 등에서 일한 정 목사가 평화학교의 꿈을 꾼 것은 기독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의 평화영성을 접하고서다. 우리나라에서 퀘이커는 함석헌 선생이 선택한 종파로 알려져 있다. 1999년 갈등 분쟁지인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와 퀘이커 공동체인 버밍엄의 우드브룩에 갔던 그는 구체적인 평화교육 실천 사례를 많이 지닌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AFSC)를 공부해보라는 영국 퀘이커들의 조언을 받고 미국 필라델피아 퀘이커공동체 펜들힐에 1년간 머물며 공부했다.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는 1, 2차 세계대전 때 아군과 적을 넘어선 인도주의 봉사를 하며 구체적인 갈등 해소에 기여한 공로로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최근 펜들힐에서의 체험일기를 토대로 <퀘이커리즘으로의 초대>(대한기독교서회 펴냄)를 출간할 만큼 퀘이커는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처음엔 이상한 사이비 종파의 하나로 알고 경계했지만, 초대 기독교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 현실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를 움직인 것은 깊은 퀘이커들의 침묵과 실천이었다. 정 목사는 “정통신학에선 목사를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실천하지 않을 것은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침묵 속에서 경청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실천하는 그들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영국 우드브룩에 머물 때 침묵 예배에서 한분이 일어나 ‘이라크 전쟁은 하나님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했다. 예배 뒤 몇명이 그의 주위로 가더니 뭔가를 숙의했다. 그래서 며칠 뒤 교회 앞에 모여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는 팻말을 들고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너무나 싱거웠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맞는 행동을 그
렇게라도 반드시 실천했다.”
철원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금학산 매바위에 오른 정지석 목사와 학생들
금학산 등반순례 때 힘들어하는 이주영군의 손을 잡고 오르는 캐나다인 다렌과 크리스틴
정지석 목사가 최근 펴낸 책
정 목사는 10년 만인 2010년 다시 펜들힐을 찾았다. 그곳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인생 2막의 비전을 침묵 속에서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한반도에 평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 민통선으로 가라’는 내적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2011년 9월 초 귀국 다음날 바로 철원으로 갔다. 용인의 노인요양병원 의사로 일하던 아내는 황당해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터를 잡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과정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실험단계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변화되는 학생들을 보며 그는 이제 희망이 현실이 되어 가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중학교 1, 2학년 두 딸도 이곳 삶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는 남북관계 변화의 시기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느낀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갈등을 목도한 그는 경제 논리나 정복식 통일의 후유증을 누구보다 잘 안다.
“북한인들도 사람인데 남한 사람들이 다 뺏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다. 내 이익만 취하려다간 또다른 갈등과 분란을 가져올 뿐이다. 먼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경선평화학교는 서로 증오하고 달리 살아온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화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탐구해 실행하기 위한 곳이다.”
정 목사는 이 평화학교를 모델 삼아 연천·파주·인제·고성·화천·김포·강화·옹진 등 민통선이 있는 15개 시군에서도 누군가 이런 학교를 만들어가길 희망한다. 아니 남쪽만이 아니라 북쪽의 접경 지역에서도 평화학교가 세워지길 희망하며 기원한다.
“길게 봐야 한다. 70년간 증오했으니, 적어도 70년간 남북 화해 프로그램을 지속해야 한다.”
철원/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