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삶] 전 세계 권투챔피언 홍수환씨
‘4전5기의 전설’ 홍수환, 샌드백을 향해 힘 빼고 ‘원투’…스트레스가 훨훨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온 국민을 흥분시켰던 전 세계챔피언 홍수환씨는 그날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도 샌드백을 치고, 제자를 키우며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넥타이도 풀지 않았다. 입고 있던 와이셔츠도 벗지 않았다. 구두도 운동화로 갈아 신지 않았다.
손에 글러브를 끼더니 샌드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뚝뚝’ 하는 경쾌한 소리가 한동안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오른손 왼손 훅이 육중한 샌드백을 출렁거리게 한다. 물론 전성기의 몸은 아니다. 이미 60대 중반의 나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빠른 양손 스트레이트는 한때 그가 세계 프로권투계에서 두 체급 정상에 올랐던 세계적인 주먹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국제 전화로 외치고, 4번 다운 당하고도 벌떡벌떡 일어나 ‘지옥에서 온 악마’를 때려눕히던 믿지 못할 정신력과 체력을 지닌 홍수환(64)씨는 아직도 당시의 패기와 열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체육관 현관에는 특이한 경고문이 붙어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들어오지 마세요.”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체육관은 통유리로 내부가 훤히 보인다. 주변의 술집에서 술을 먹고 지나가던 취객은 체육관 내부에서 땀을 흘리며 후진을 양성하는 홍씨를 쉽게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에 체육관에 ‘마구’ 들어와 인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붙인 문구이다. 그만큼 그는 아직도 ‘영웅’이다.
그가 넥타이와 와이셔츠 차림으로 샌드백을 치는 이유는 권투를 생활 가까이 접근시키기 위해서다. 누구나 쉽게 체육관에 들어와 가볍게 몸 풀고 샌드백을 치는 행위만으로도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지난 25일 체육관에서 만난 홍씨는 “이제 권투는 가난한 청년이 신분 상승을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하는 운동이 아니라 건강을 찾고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세계 챔피언이 8명이나 있는 일본은 ‘오야지(아저씨) 복싱’이 인기라고 한다. 넥타이를 매고 하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복싱’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이다.
“샌드백을 치면 그 진동이 온몸의 혈관을 자극합니다. 퇴근 후 체육관에 들러 가볍게 샌드백을 치는 것만으로도 온갖 혈관 질환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의 스트레스도 날려 버립니다. 줄넘기를 하면 뱃살을 쉽게 줄일 수 있습니다. 굳이 링 위에 올라 상대방과 주먹을 교환하지 않고도 누구나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권투에 대한 기존 관념이 바뀐다.
홍씨가 강조하는 것은 가벼운 원투 스트레이트. 어깨의 힘을 빼고 팔을 일직선으로 뻗는 양손 스트레이트는 홍수환 권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김기수 카퍼레이드 보고 권투 입문
8년만에 챔프 오르고 4전5기 신화 써
쭉 뻗는 스트레이트가 일궈낸 기적
샌드백 진동은 온몸 혈관 자극하고
스텝은 하체 단련, 줄넘기는 뱃살 쑥
이젠 눈물의 격투기 아닌 건강 운동
“무하마드 알리, 슈거 레이 레너드 등 세계적인 선수는 물론 저의 4전5기 신화도 결국 원투 스트레이트로 이루어졌어요. 자세는 앞으로 약간 숙이고, 턱을 당겨서 왼쪽 어깨 쪽으로 돌립니다. 시선은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며 다리의 폭과 무릎이 주먹을 뻗을 수 있는 자세가 되었나 봅니다. 이제 눈을 감고 잽-잽-원투 스트레이트 뻗어 보세요. 이 자세가 완성되면 세계 챔피언도 가능합니다.”
그에게는 동년배에겐 흔한 만성질환인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없다. 선수 시절 상대방에게 머리를 많이 맞지 않아서인지 기억력도 팔팔하다.
1977년 파나마에 가서 당시 11전 11승 11케이오승의 ‘지옥에서 온 악마’ 엑토르 카라스키야에게 어떻게 4전5기의 신화를 쓸 수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목소리 톤이 더욱 높아진다.
“당시 카라스키야가 신설된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에 오르면 파나마는 모두 4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게 되고,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하는 등 파나마는 축제 분위기였어요. 총기 소지가 허용됐기 때문에 제가 2회에 4번 다운이 되자 경기장은 공중에 쏘아대는 총소리로 난리였어요. 마침 그 경기는 무제한 다운제를 미리 약속했기에 주심이 경기 중단을 선언하지 않았어요. 4번씩이나 다운되니 정신은 멍했고, 링 바닥이 올라오고…. 그런데 연습한 게 아깝더군요. 그리고 2회를 마칠 때 상대방의 체력이 바닥난 것을 느꼈어요.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어졌어요. 그래서 한 회만 더 뛰자는 심정으로 붙었어요. 그리고 방심한 상대방은 저의 원투 스트레이트에 허물어졌어요.”
서울 중앙고에 다니던 홍씨가 권투로 입문하게 된 계기는 바로 1966년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김기수(작고) 선수의 축하 카퍼레이드를 책가방을 들고 길거리에서 본 경험이었다. “정확히 8년 뒤 제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원정 가서 아널드 테일러를 꺾고 챔피언으로 귀국해 카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됐어요. 꿈을 실현한 것이죠.”
그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다. 세계 정상에 두번 올랐으나 추락했고,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이혼과 재혼, 그리고 이민과 역이민. 미국에서는 택시 운전과 옷 장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거침없이 산다. 전국을 돌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기 강사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용기를 내고 이겨 보자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도 끈질기게 버티고 일어났던 그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어차피 한번 살고 가는 인생, 즐겁게 사는 것이 저의 인생관입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그 곤경을 극복하면 더 큰 즐거움이 온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현재에 미쳐서 살면 활기찬 내일이 열립니다.”
다시 권투 예찬이다. “권투는 전신운동입니다.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스텝은 하체 근육을 탄탄하게 만듭니다. 스트레이트와 훅은 어깨와 팔의 군살을 제거하고 강화시킵니다. 상체를 움직이며 상대의 주먹을 피하는 자세는 배와 허리, 허벅지 군살을 없애줍니다. 링 위에서 상대방과 맞붙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 없어요. 그냥 혼자 하는 권투만으로도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어요.”
홍씨는 선수 시절 항상 같은 다리 폭을 만들기 위해 철도 침목을 뛰었고,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철로 위를 끊임없이 걸었다. 버스를 타도 손잡이를 잡지 않은 채 두 발로만 지탱하며 강한 하체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체육관에선 연습이 끝날 때까지 잡담도 안 했다고 한다.
“나이를 먹어도 천천히, 그리고 정확한 자세로 샌드백만 치더라도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홍씨는 침체한 한국 프로권투를 살리는 게 남은 인생의 목표라고 말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