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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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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仁義)의 길, 우국(憂國)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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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논어 명장면]<7>인의(仁義)의 길, 우국(憂國)의 길
 
 或問子西 (子)曰 彼哉 彼哉
 (혹문자서 (자)왈 피재 피재)
  -<논어>‘헌문’편 10장

 어떤 사람이 자서의 사람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아, 그 사람, 그 사람…. 
  
  

 1. 봉황새야, 봉황새야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난 속에서도 의연히 ‘군자고궁’(君子固窮)의 참뜻을 설파한 공자는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초나라 변경 지대에 이르렀다.① 멀리 성문 위로 초나라 깃발이 보이자 제자와 짐꾼들 사이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 초나라다!” 
 “영도(초나라 서울)에 들어서면 초나라 왕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우리 선생님을 맞이할 테니 고생 끝 행복 시작이겠구나!”
 모처럼 공자 일행에게 웃음꽃이 만발했다.  
 당시 초나라는 북방의 진(晋)나라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강국이었다. 공자는 애초 진나라로 가려 했으나 진나라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강대국을 상대로 유세하려 한 것은, 자신의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국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겪은 정치적 좌절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자로는 그때마다 탁자를 치며 울분을 토했다.
 “이럴 바엔 중앙 무대로 직행합시다! 거기엔 훨씬 뛰어난 임금과 대부들이 우리를 제대로 평가해줄 겁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말은 안 했지만 자로의 주장에 공감했다. 특히 초나라 소왕(昭王)은 나라 일에 헌신적인 군왕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자를 존경하고 있다지 않은가.
 공자 일행이 저마다 부푼 기대감에 젖어 발걸음도 가볍게 초나라 국경도시를 지나갈 때였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얼굴은 숯을 칠한 듯 검은 사내가 조용히 공자의 수레에 접근했다. 그는 수레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거리의 소음 때문에 노랫소리가 멀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쇠똥받이 삼태기를 들고 수레 옆을 걷던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고개를 내밀고 수레를 모는 자공에게 물었다. 
 “사야,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 어디서 나를 부르는 것 같구나.”
 자공이 공자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우리를 따르며 노래를 합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지나간 일은 그렇다쳐도, 다가올 일은 충분히 알 만하지 않은가. 
 그만두시게! 그만두시게!
 지금 정치에 뛰어드는 건 위험천만이라네.
 (鳳兮 鳳兮 何德之衰. 往者 不可諫, 來者 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 殆而.)
 
 노랫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공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친구는!’
 공자가 급히 수레에서 내려서며 외쳤다. 
 “유야, 사야, 저분을 모셔오너라! 내 그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사내는 공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내가 모습을 감추자 공자가 길게 탄식했다.
 “초나라에 올 때 내심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늘 그가 떠났으니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이상 ‘미자’편 5장②)
 “선생님, 아는 사람입니까?” 
 자로가 물었으나, 공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공자와 함께해 온 자로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아마 육통(陸通)일 것이다.’
 눈치 빠른 자공이 자로에게 물었다. 
 “아까 그 미친 사람을 아십니까? 선생님더러 쇠덕 운운하다니 몹시 불경합니다. 정치를 하면 위태롭다는 건 또 뭡니까? 초나라에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육통이라면 초나라 조정과 등진 채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숨어 산다는 은사(隱士)이다. 언젠가 선생님이 “일어나 세상을 떠나간 은자가 일곱 있다”(‘헌문’편 40장③)고 하셨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육통 아니던가? 오늘 선생님의 태도를 보니 일찌기 육통과 아는 사이가 틀림없다. 그런데 육통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가버린 것일까?
 
 자로는 느닷없는 육통의 출몰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보시게 자공, 이제부터 수레는 내가 몰 테니 그대는 먼저 영도로 들어가 초나라 조정에 무슨 일이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게. 지금은 전쟁 중이니 매사 신중하게 살펴가며 선생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자공을 태운 말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남쪽으로 내달릴 즈음, 운명은 엇갈린 채 달리고 있었다. 초나라 소왕이 전선으로 가는 군대와 함께 비밀리에 영도를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때는 공자가 63살인 서기전 489년, 전선의 백골이 시든 풀에 덮이기 시작하는 늦가을 무렵이었다. 
 

공자2.jpg
*공자와 제자. 출처: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2. 일모도원(日暮途遠)

 초나라 소왕은 오나라가 초나라의 위성국 진(陳)나라를 침공하자 원군을 보내면서 자신도 최전방 군사도시인 성보로 갔다. 소왕은 왜 왕성을 비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출전해야 했을까? 소왕에게 오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오나라 왕 합려(闔閭④)가 초나라 망명객 오자서(伍子胥⑤)의 보좌를 받아 영도를 함락시킬 때 초나라 임금이 바로 소왕이었다. 
 소왕의 아버지 평왕은 역사에 두 가지 오점을 남겼다. 하나는 아들의 비로 맞이한 외국 여인(진(秦)나라 사람으로 소왕을 낳았다)을 자신의 후비로 삼은 것이고, 또 하나는 간신의 참소를 믿고 충신 오사와 그의 아들 오상을 무고하게 죽인 일이다. 이때 오사의 작은아들 오운이 복수를 맹세하며 달아났으니, 그가 희대의 책사 오자서이다. 
 오자서는 망명지를 전전하다 합려의 쿠데타를 도운 공으로 오나라 재상이 된다. 오자서는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와 함께 오나라 군대를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조련하여 망명 19년 만인 서기 전 506년(공자가 46살 때였다) 조국 초나라로 쳐들어간다. 소왕은 오나라의 침공에 수도를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고, 죽은 평왕의 무덤은 오자서가 파헤쳐서 시체에 채찍질을 300번이나 했다. 원한에 사무친 오자서는 충신을 알아보지 못한 썩은 눈이라며 평왕의 시체에서 두눈을 뽑아버리기까지 했다. 그 후 오자서는 초나라 충신 신포서(申包胥)가 자신의 행위를 비판하자 사과의 뜻을 전하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사기> 오자서열전) 오자서의 죽마고우였던 신포서는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반드시 돌아와 초나라를 뒤엎을 것”이라고 했을때, “노력하시게, 자네가 초나라를 뒤엎는다면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부흥시킬 걸세”(<좌전> 노정공 4년)라고 말한 인물이다. 소왕은 신포서가 진(秦)나라 궁정 뜰에서 칠일칠야를 엎드려 간청한 끝에 구원병을 얻어 와서야 영도로 돌아올 수 있었고, 끝내는 오나라를 피해 더 먼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수모를 치렀다. 즉위하자마자 오사를 참소했던 간신 비무기를 죽여 오자서의 분노를 달래려 했던 소왕은 이로써 오나라와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되었다. 

  
  3. 자서, 공자를 저지하다 

 국경도시에서 초광접여(楚狂接輿·육통)를 만난 뒤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공자 일행 앞에 영도로 먼저 떠난 자공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자로가 놀라 물었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사형, 영도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왕이 영도를 떠나 전방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 어디로 갔다고 하던가?” 
 “제가 알아본 바로는 성보라고 합니다.”
 “성보라? 차라리 잘 됐다. 성보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다.”
 “그런데 그게….”
 자공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초나라 재상 자서(子西)가 선생님의 초왕 면담을 취소시켰다고 합니다.”
 “무엇이?” 자로는 땅을 쳤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선생님을 음해했단 말인가?”
 
 자서는 소왕의 이복형이자 초나라의 영윤(재상)이다. 애국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경륜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명재상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자기 임금을 공자와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전말은 이러했다.
 공자가 초나라로 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공자를 제후의 예로 맞이할 결심을 했다. 자공이 들은 바로는 소왕이 초나라 서사(書社) 땅 700리⑥를 공자에게 봉해 다스리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 순시 중이던 자서가 이 소식을 듣고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급히 영도로 돌아왔다. 자서는 왕실의 맏형이자 재상으로서 오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초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재 등용 기준은 오로지 부국강병이었다. 
 ‘공구, 자네의 그 인의(仁義)란 우리에게는 사치나 다름없네. 미안하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오자서 같은 책사와 손무 같은 병법가라오.’
 자서는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어린 동생이자 군주인 소왕을 앉혀놓고 물었다.
 “전하께서 사신으로 삼아 다른 제후에게 보낼 만한 사람으로 자공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를 보필할 신하로 안회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수감으로 자로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관감으로 재여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서가 일어나 소왕 앞에 엎드려 말한다.
 “전하! 우리 초나라 조상께서 나라를 여실 때 국토가 50리에 불과했습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중원을 차지할 때도 그 출발은 사방 100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삼황오제의 치국 방법과 주공과 소공(주나라 창업공신 형제)의 사업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자에게 700리나 되는 땅을 하사하여 현명한 제자들과 함께 다스리도록 한다면 인심이 어디로 흐르겠습니까? 장차 전하께서는 조상이 물려주신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이상 <사기> ‘공자세가’)
 소왕은 형의 말을 듣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뜩이나 오나라에 눌려 자기 대에서 사직을 잃을까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소왕은 자서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비록 공구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조상이 물려준 종묘사직과 바꿀 수는 없지….’
 ‘아, 과인이 어리석어 잠룡(潛龍)에게 날개를 달아줄 뻔했구나….’
 

 4. 이것이 운명이라면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공자는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소왕이 비록 나를 존경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가 처한 정치 현실은 참으로 엄혹하기만 하다. 자서의 행위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초나라 왕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공자는 분연히 일어나 수레에 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는 초왕을 만나야 한다. 전쟁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보라. 나, 공구는 밝은 덕으로 정치를 아름답게 밝혀 고단한 인민들을 더 높은 선(善)의 세상으로 이끌고자 한다.⑦ 비록 그곳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라 해도 나, 공구는 한순간도 인(仁)을 이루는 길을 외면할 수가 없구나!(‘이인’편 5장⑧)
 
 “가자, 성보로! 유야, 사야, 어서 성보로 가자꾸나!”
 
 공자 일행이 다시 행로를 바꿔 성보로 향하던 중 또 다른 급보가 전해졌다. 한번 엇갈린 운명은 갈라진 강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초소왕이 성보 진중에서 급사한 것이다. 군왕의 자질을 가졌으나, 시운을 만나지 못한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그의 기개 어린 최후가 초나라에 전해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병이 잦았던 소왕이 어느날 병석에 들었을때 하늘에 불길한 기운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해석하는 이가 없자, 주나라 태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점을 치게 했다. 태사는 소왕에게 불길한 징조이니 제사를 지내 그 징조를 신하들에게 돌리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하자, 소왕이 말했다. "내 병을 없애려고 그 병을 신하에게 옮겨놓는 것이 초나라에 무슨 득이 되겠는가? 나에게 큰 잘못이 없다면 하늘이 어찌 나를 죽게 내버려 둘 것이며, 죄가 있어 벌을 받는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고 옮겨지는 것이겠느냐?”
 진중에서 소왕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태사가 “황하의 신이 저주하니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왕이 웃으며 거절했다. 신하들이 나서서 거듭하여 권하자 소왕이 말했다.“나는 초나라의 군주다. 내가 빌 곳이 있다면 우리 초나라의 강산이지, 중국의 강산(황하는 초나라가 아니라 주나라에 속한 강이라는 뜻이다)이 아니다. 내가 비록 부덕하나, 남의 나라 귀신에게까지 죄를 짓지는 않았다.”
 
 훗날 공자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왕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초소왕이 대도(大道)를 알았으니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은 실로 당연하다.(이상 <좌전> 노애공 6년)
 
  소왕은 임종에 앞서 자서에게 전위하려 했다. 그러나 자서는 소왕의 어린 아들(혜왕)을 옹립한 뒤 비밀리에 영도로 철군해 무사히 소왕의 장례를 치렀다. 소왕의 부음을 노상에서 들은 공자는 수레를 멈추고 영도를 향해 예를 갖춘 뒤 탄식했다. 
 
 지난번에는 북방의 황하를 건너지 못하더니(진나라로 가려다 못 간 것을 말한다) 이번엔 남방의 평원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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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제자. 출처: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5. 초광접여가 노래를 부른 뜻은

 공자 일행은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초나라 국경도시를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새삼 초광접여의 노래가 떠올랐다. 
 
 그 미친 자가 부른 노래의 뜻을 이제야 짐작하겠구나….
  
 초광접여, 즉 육통은 소왕의 등극을 반대한 가문 또는 파벌에 속했거나, 아니면 자서가 집권할 때 반대 세력에 속한 인물이 아닐까 추정된다. 집권 세력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일급 지식인이던 육통은 문둥병 환자처럼 꾸며 타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방식으로 일신을 보존했다. 그것은 자신을 탄압하는 조정에 대한 야유의 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나, 이생이 훗날 여러 경로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공자는 35~37살 무렵 망명지 제나라 수도 임치에서가 아니면, 46살때 주례(周禮)를 배우러 갔다가 노자(老子⑨)를 만나게 된 주나라 도읍지 낙양에서 육통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여 혼란스런 천하를 구하는 도(道)에 관해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때로는 울분에 젖어 통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통이 조국 초나라로 돌아간 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초광접여라는 은자의 이름으로 공자 앞에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일만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육통에 대한 나의 추론은 어디까지나 한 구경꾼의 상상력에 불과하다. 다만 ‘초광접여의 노래’⑩만큼은 단순한 은자의 풍자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그가 풍자 이상의 실제적 그 무엇을 공자에게 암시하려 했다고 믿는다.
  
 여보게 중니, 예전의 총기를 잃었는가? 진(晋)나라의 대부 두명독과 순화의 죽음(공자는 이 두 사람의 피살 소식을 듣고 진나라행을 포기했다)을 보고도 모르겠나? 지금 초나라에 가면 도를 펴기는커녕, 뼛속까지 군국주의자이자 맹목적 왕당파인 자서에게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네. 중니, 그대는 이미 세상과 서로 어긋나 뜻이 맞지 않거늘, 다시 수레를 몰아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⑪ 그대는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본령인 교육에 전념하시게. 천하에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지금 자네가 실천해야 할 천명일세. 내가 아는 한 그 사업은 중니, 자네 같은 봉황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네. 
 

 6. 자서 그 사람, 그 사람

 위나라로 돌아간 공자는 거기서 5년 여를 더 침잠한 뒤 6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국 노나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자와 초소왕의 만남을 가로막은 자서는 공교롭게도 공자가 죽은 해(서기 전 479년)에 같이 죽었다. 
 자서의 죽음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원한의 굴레였다. 오자서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초소왕의 아버지요, 소왕의 아버지를 죽인(시체를 욕보인) 이는 오자서이다. 오자서는 자기가 도운 왕의 아들(부차)에 의해 자살을 강요당한 뒤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소왕은 복수의 일념 속에 살다 진중에서 죽었다. 아버지(초평왕)에게 여자를 빼앗기고 쫓겨나 죽은 태자(소왕의 이복형)의 아들은 아버지의 한을 풀려다 이를 반대한 숙부 자서를 살해하고 자신도 진압군에 쫓기다 자살했다. 자서는 두 번이나 왕위를 마다하고 공자의 인의마저 사양하며 조국의 부흥을 도모하다가 조카의 손에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고자 했음에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이들에게도 천명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까?
 
 일흔셋 노경의 공자는 봄볕이 짙어갈수록 종종 가뭇없는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문병을 하던 차에 문득 자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 말인가….

  
 陸通避世 子西憂國 夫子懷仁
 後聞於曾子 君子不思出其位  
 
 육통은 세상을 피했고, 자서는 나라를 근심했고, 선생님은 인을 추구하셨다.
 훗날 증자에게 들었다. 군자는 다만 자기 직분에 헌신하는 자이다.(‘헌문’편 28장⑫)
    

 

                                                          

 <원문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논어> 원문의 한글 번역은 <논어집주>(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편)와 <안티쿠스 클래식6-논어>(한필훈 옮김)를 나란히 싣는다. 각각 신구 번역문의 좋은 사례로 생각되어서이다. 표기는 집(논어집주)과 한(한필훈 논어)으로 한다. 이와 다른 해석을 실을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사마천은 공자가 초소왕의 초빙을 받아 초나라에 간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후대 학자 중에는 공자가 초나라를 방문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최술의 <수사고신록> 참조.
 
  ②미자편 5장 
 楚狂接輿歌而過孔子 曰 鳳兮 鳳兮 何德之衰. 往者 不可諫, 來者 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 殆而. 孔子下欲與之言趨而避之 不得與之言.
 집-초나라 광인인 접여가 공자 앞을 지나며 노래하였다. “봉이여,봉이여! 어찌 덕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간할 수 없거니와 오는 것은 오히려 따를 수 있으니, 그만둘지어다,그만둘지어다! 오늘날 정사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다.”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리시어 더불어 말하려고 하셨는데, 빨리 걸어 피하므로 함께 말씀하시지 못하였다. 
 한-공자가 초나라로 가려고 할 즈음이었다. 어느 날 길을 가고 있는데, 일부러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해 사는 초나라의 은자 접여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갔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쇠한 덕을 어찌할까.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오늘 일은 하기 나름이지. 그만두라,그만두라, 요즘 정치 위태롭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그는 급히 달아나 버렸다.
 
 ③헌문편 40장
 子曰 作者七人矣.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 은둔한 자가 일곱 사람이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혼란한 세상을 피해 숨어버린 사람이 일곱 명이다.”
 주자는 집주에서 ‘일곱 사람이 누군인지 알 수 없으니, 굳이 찾아서 채우려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 중에는 <논어>의 다른 편에 등장하는 주나라 시대의 현인 또는 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대체로 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이며, 이밖에 장저, 걸닉, 장인, 신문, 하궤, 의봉인과 더불어 접여가 꼽힌다. 

  ④오나라 제 24대 왕. 이름은 광(光, 서기전 515~496))이다. 오나라의 제1 왕자였으나 부왕이 죽은 뒤 형제계승원칙에 따라 왕위을 이은 삼촌이 죽고 왕위가 사촌동생 요(僚)한테 넘어가자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오자서(?~서기전 484)와 의형제 사이인 자객 전제(專諸. 전저라고도 한다)가 연회 도중 생선 뱃속에 감추고 들어간 비수로 왕을 찔러죽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합려는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고, 대전략가 손무(孫武. 병법의 대가. 훗날 손자라고 불렸다. 생몰미상)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패배시키는 등 남방의 패자로 군림했다. 월나라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게 되자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맹세시켰다. 부차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침실에 땔나무를 깔아놓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시종에게 ‘부차야, 아비의 원한을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했다. 훗날 부차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월나라 왕 구천이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날을 준비했던 일과 더불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이룬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앙숙관계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도 탄생시켰다.(<사기> 오태백세가, 자객열전)
  
   ⑤초나라 출신의 책략가이자 명장. 오나라 왕 합려와 부차를 남방의 패자로 끌어올린 공로로 오나라의 원훈으로 추앙받았다. 부차에게 항복한 월나라 왕 구천을 죽여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촉구했으나, 중원의 패자를 꿈꾼 부차가 듣지 않았다.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던 태재 백비와 대립하다가 부차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았다. 오자서는 부차가 내린 촉루검으로 자살하면서, 자기의 두 눈을 뽑아 성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이 말을 전해듣고 격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 자루에 싸서 강물에 던지도록 했다. 훗날 부차는 월나라 구천에게 패하여 나라를 잃게 되자, 저승에 가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했다.(<사기> 오자서열전, 오태백세가, 월구천세가)
 
 ⑥원래 ‘서사’(書社)는 영토 안의 인명과 토지를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25가구가 사는 지역을 묶어 1사(社)라 한다. 따라서 서사 7백은 1만7500가구의 인구를 가진 지역을 말한다. 이를 땅 700리 라고 한 것은 사마천의 착오라는 것이 정설이다.
 
   ⑦<대학> 3강령에서 차용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⑧이인편 5장 차용
 子曰 …君子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군자는 밥을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떠남이 없으니, 경황중에도 이 인에 반드시 하며, 위급한 상황에도 이 인에 반드시 하는 것이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밥 한숟가락을 먹는 동안에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당황스럽고 절박할 때에도 양심을 지켜야 하고, 몸이 위태로울 때에도 양심을 지켜야 한다.”
 
  ⑨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이담이며, 노자는 후대의 존칭이다. 흔히 <노자>로 불리는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한 도가(道家)의 창시자로 전해진다. 사마천은 노자가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⑩<장자> (임동석 역주) 인간세편
 孔子適楚 楚狂接輿遊其門曰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天下有道 聖人成焉 天下無道 聖人生焉. 方今之時 僅免刑焉.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畵地而趨! 迷陽迷陽 無傷吾行! 극(틈 극)曲극曲 無傷吾足!
  공자가 초나라에 이르자 초나라 광인 접여가 공자의 문 앞을 지나며 노래를 불렀다.
 “봉이여 봉이여,어찌하여 그대 덕이 쇠하였는가! 오는 세상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 세상은 뒤쫓을 수 없는 것.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루는 것이며,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물러갈 뿐이로다. 지금의 이러한 세상이라면, 겨우 형벌을 면하면 그만, 복은   
  새의 깃털보다 가볍지만, 그 누구도 이를 실을 줄 모르고, 화는 땅보다도 무거운데, 아무도 이를 피해 다닐 줄 모르는구나. 그만 그치게,
  그만 그치게, 덕을 남 앞에서 내세우는 짓은!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 땅을 나누어가며 무언가를 쫓아다니는 짓이여! 밝음을 가리며 미혹에 빠져, 나의 갈 길을 손상하지 말지니! 굽은 발길을 물러나고 조심하여 나의 발에 상처를 입히지 말기를!”
  
   ⑪<도연명 전집>(이치수 역주) ‘귀거래혜사’에서 차용
 …歸去來兮 請息交以絶游.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돌아가자. 사귀는 것을 쉬고 노는 것을 끊으리라. 세상이 나와 서로 어긋나 맞지 않거늘 다시 수레를 몰아 무엇을 구할 것인가?
  
  ⑫헌문편 28장
 曾子曰 君子 思不出其位.
 집-증자가 말씀하였다. “군자는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증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자기 직분을 벗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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