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통감의 심리를 넘어선 감통의 귀일/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세월호 사건 이후 국민들 마음속에 느껴온 공통 감정의 울림은 ‘미안하다!’는 4자로 압축된 감통(感通)이었다.
감통은 말과 글을 매개로 하는 소통 없이도 생각과 느낌이 상대편에게 직접 통한다는 뜻이다.
애도기간을 끝내면 ‘감통’은 ‘거룩한 분노’에로 전환이 이뤄져야 하고 마침내 ‘창조적 변혁’으로서 결실해야 한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온 국민은 상례를 치르는 심정으로 지난 45일을 함께 마음 아파했고 가슴앓이했다. 온 국민의 마음속에 에밀레 종소리의 공명처럼 느껴온 공통 감정의 울림은 단연 ‘미안하다!’는 4자로 압축된 감통(感通)이었다. 그런데, 그 감통의 본질과 근저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 결핍되었다는 생각을 요즘 금할 수 없다. 평면적인 통감의 심리가 아닌 사람들의 밑동에 있는 귀일(歸一)로서 감통이었다.
*안산의 세월호 합동분향소.
빈소를 찾아 한 송이 국화꽃을 제단에 올려놓던 시민이나 집안살림과 일터에 매여 빈소를 직접 찾지 못했던 사람이나 맘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미안하다!’는 가슴의 울림을 느꼈다. 그 가슴의 순수 울림은 도덕적 책임추궁과 정치적 비판의 차원보다 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인간성 ‘내면의 소리’요 ‘큰 하나’(大我)의 울음이었다. 선박 침몰 원인 조사, 부패구조의 혁파, 그리고 대통령의 ‘최종 책임자로서 자백과 인정’ 등이 절대 중요하고 의미 있다. 하지만 정부 조직 개편과 책임자 처벌을 강화하는 법률 제정만 아니라 나라살림의 근본 뿌리에 대한 성찰이 이뤄져야 한다. ‘근본이 바로 서야 살길이 열린다’(本立而道生)고 성현이 말했다.
감통이라는 단어는 말과 글을 매개로 하는 소통 없이도 생각과 느낌이 상대편에게 직접 통한다는 뜻이다. ‘신령의 감통’을 느꼈다고 말하는 종교적 표현처럼, 일상생활의 인과관계나 합리적 논리구조를 넘어 어떤 외경해야 할 실재 차원과 접촉을 느낄 때, 영혼들의 상호공명(相互共鳴)을 감통이라 부른다. 한마디로 말해서 감통(感通)은 통감(痛感)이라는 감정 상태와 다른 것이다. 통감이라는 단어는 “사태의 중요성을 통감하다”는 언어 표현처럼, 마음에 사무치게 느끼는 절실한 감정을 표현한다. 물론 지난 45일 동안 온 국민은 세월호 비극 속에서 ‘통감의 감정’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통감의 심리학과 감통의 귀일론이 동일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
통감은 어떤 사실 또는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접하여 점증적으로 증폭되어가는 대중들의 희비애락 혹은 분노의 공동심리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통은 마치 쓰나미 파도가 밀려오듯, 번갯불이 번쩍 뇌성벽력 발하며 지상을 뒤흔들듯, 암반 아래 수맥 물줄기가 지표 위로 솟구쳐 나오듯, 그렇게 홀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하면서 하나로 연대하게 하는 공동체의 집단무의식적 마음 표출이다. 동학농민군 봉기, 기미년 만세운동, 8·15 광복의 대동적 환희, 4·19와 6·10 시민혁명의 파토스, 5·18 민주항쟁 열기 등 민중경험이 그렇다. 예로 든 지난 역사의 경험을 돌아보면, 자발적이고도 거족적으로 어떤 ‘거룩한 실재’에 접촉된 것처럼, 이해득실 주판알을 튕겨보는 사특한 생각 따위를 초월한 ‘내면의 울림’을 전체 국민들은 느꼈다. 그때, 이심전심 한맘으로 통하는 일치의 감정이 감통이다. 마음이란 공명하는 신비로운 악기다.
감통의 원인을 분석하여 기성세대들의 무력감, 죄책감, 정치적 분노, 개인의 회한 때문이라고 지식인들은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감통의 집단심리 공명현상은 지식인들의 설명을 넘어선 다른 그 무엇이 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갖게 되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진다”고 말하거나 “죄책감은 공격성과 분노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회심리학자들 견해는 인간성을 모독하는 발상이다. 도리어 정파, 종파, 직종, 사회신분, 성별, 세대 차이를 초월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던 “미안하다!”라는 이 민족적 감통의 의미를 오래오래 되새김질해야 한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의 눈물.
바르게 말하자면, 집중적 애도기간을 끝내면 ‘감통’은 ‘거룩한 분노’에로 전환이 이뤄져야 하고 마침내 ‘창조적 변혁’으로서 결실해야 한다. ‘감통’은 감상적 슬픔을 넘어선 ‘존재의 소리’를 들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눌님의 심방을 받은 존재론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못마땅히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보수적 여당 쪽의 당황스러움, 반대로 그 기억이 쉽게 사그라져 정치적 쟁점을 잃게 될 것을 걱정하는 야당 쪽의 염려스러움, 그 양쪽의 정치적 발상은 모두 순수하지 못하다. ‘감통’에 대한 성찰은 행동심리학적 관점 혹은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뿌리박고 있는 비인간적 가치지향성과 사회적 삶의 구성방법에 대한 ‘존재론적 회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상적인 생활’이라고 여겨왔던 것에 대하여 문제 있다고 감통하여 통감하고 있는데, 적당한 애도기간을 끝낸 후에 다시 이전의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자고 권고한다는 것은 자가당착 논리 아니면 ‘양의 탈을 쓴 늑대 무리의 설득’이다. ‘정상생활’이라고 미화하는 ‘정상적’이라는 허위의식 그 자체 속에 세월호 침몰의 근본 원인이 은폐되어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난 5월19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의 진정성과 정부 대책의 실효성을 따지는 국회 활동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나라살림 철학’과 우리 시대 ‘삶의 의미 철학’을 가지고 진지한 대토론이 일어나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이라는 큰 배가 항해하는 목표지향성에 근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은 외로운 단독적 실존이면서 동시에 항상 사회연대적 존재이다. 개인이 타락하면 사회가 타락하고, 사회가 병들면 개인도 병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경쟁과 양극화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라고 통칭하는 잘못된 세계관에 더 이상 맹종하는 것을 거부해야 산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얽혀지면서 운영되어간다. 실패를 경험한 전체주의적 공산사회가 비인간적 사회임을 이미 인류사는 경험했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계가 선도하는 “내 탓입니다!”라는 개인윤리적 회개와 자성의 차원을 넘어서야 할 때이다. ‘제3의 길’을 계속 묻고 찾고 추구해야 하는 사회적 회개, 곧 나라살림의 가치지향 차원에서 근본적 방향전환을 세월호 참사는 촉구한다.
둘째, 일체의 제도, 규칙, 조직은 생명의 역동성과 그 존엄한 가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철저한 의식혁명을 요청한다. 이른바 생명현상학에서 ‘형태와 역동성 딜레마’(Dilemma of Form-Dynamics)이다. 조직기구와 법률적 규제를 강화하면 생명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죽고, 반대로 그것을 지나치게 약화시키면 방임과 부패와 태만이 공동체를 망친다. 생기 넘치는 동식물은 최소단위인 세포로부터 유기체 몸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조직형태를 지니면서도 조직의 경계막은 유연하고 열려 있고 변용하는 역동성 그 자체다. 역동성이 조직형태를 이루고, 조직형태가 역동성을 가능케 한다. 국가를 큰 생산공장 같은 기계조직의 제도 운영과 다름없다고 생각할 것인가? 세포와 생체기관들의 집합적 유기체로 생각할 것인가? 부국강병을 위하여 개인 생명의 존엄성과 역동성은 희생되어도 용인된다는 국가지상주의 신봉자들의 경직된 의식 자체가 먼저 혁명되어야 한다.
*세월호 실종자들의 생환을 종교인들이 기원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셋째, 광활한 우주 속에서 유한성과 우연의 폭력성을 이기는 유일한 힘은 ‘사랑’뿐이다. 침몰하는 어두운 배 안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엄마 아빠 사랑해!”라고 마지막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는 아이들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임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다가오는 6·4 선거는 경제적으로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맘몬숭배 철학인가, 사람얼굴 갖춘 사회를 형성하겠다는 생명가치 철학인가, 둘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한판 싸움이 되어야 한다. 준엄한 한표 한표 투표실천을 통해 새로운 ‘정의와 사랑이 더불어 숨 쉬는 사회’를 이루어 나갈 때, 진도 바다에서 희생된 304명 생명들이 죽음 너머 영생하는 삶으로 승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