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교수의 아하!
이단의 판단 기준은
세월호 참사와 관계해서 속칭 구원파의 이단성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그들이 이단인가, 이단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보고 무엇을 생각해봐야 할까?
크게 교리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자. 보도에 따르면 구원파는 ‘깨달음’을 강조한다고 한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종파로서는 특별나다. 보통 불교가 깨달음을 강조하고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의 내용이다. 구원파는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날이 구원받은 날이고, 일단 구원을 받았으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고 한다는데, 이런 교리는 그 의도가 어떠하든 오남용될 위험 소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가 줄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자의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단 구원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에서 교리라는 것이 절대적일 수 없다. 교리라는 것은 한 종교 집단의 필요와 그 시대의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런 교리를 영구불변의 진리 자체로 절대화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가 말한 것처럼,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어느 종교든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 자기들의 교리를 발전시키고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냉철히 검토되지도 않은 편향된 교리를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결국 경신(輕信), 맹신(盲信), 광신(狂信), 미신(迷信)으로 빗나가기 일쑤다. 이렇게 될 때 종교는 조화로운 사회,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하려는 인류 전체의 노력에 걸림돌이 된다.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 종교가 영리사업에 직접 뛰어들어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예외적인 일이다. 그것도 어느 일가의 축재를 위한 문어발식 사업이라면 더더욱 곤란하다. 어느 스님이 이야기했다. 요즘 한국에서는 종교가 기업보다 정직하지 못하다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돈을 버는 데 반해 종교는 거룩함을 앞세우면서 뒤로는 기업보다 더 악착같이 돈 벌기에 열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어느 종교가 이단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종교가 생명·평화·평등·정의·화해·나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심층 차원과는 관계없이, 터무니없는 액수의 돈을 받고 복을 빌어주는 것을 주업으로 한다든가, 임박한 종말로 사람들을 위협하여 재산을 헌납하도록 한다든가, 교주나 정치지도자를 신격화하든가, 자기 종파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런 종교는 분명 이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판단기준을 적용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종교들이 이단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제 종교가 종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충실한가 스스로를 돌보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오강남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