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복음의 기쁨이 한국에 온다
김인국 옥천성당 주임신부
*프란치스코 교황. AP뉴시스
한국 천주교회의 가슴이 뛰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다. 염천 팔월의 상봉인데도 아지랑이 피는 봄날의 만남처럼 마냥 설렌다. 우리 마음의 꿈틀거림에는 남다른 뜻이 있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대뜸 불역낙호(不亦樂乎)로 맞장구치는 게 아니다. 그의 한국 방문이 “교회여, 밖으로 나가자”고 호소해온 탈출정신의 구현, 그것이라고 믿어서 그렇다. “안위만을 신경 쓰는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지는 교회”가 되자고 촉구하는 교황의 실천이 이 땅에서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자못 기다려진다.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인다. 손님에게 보일 살림살이 때문이다. 파업은 무조건 불법, 해고는 반드시 합법이 되는 기업독재국가.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의 우울하고 살벌한 불행국가. 복지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꼴찌면서 국방비 지출은 세계 10위인 군사국가. 4대강 사업처럼 대대적인 환경파괴를 서슴지 않는 자연성형국가. 힘없는 자를 마음껏 포식하는 신자유주의의 천국. 어디 이뿐이랴. 세월호의 비극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정말 끔찍한 것은 교회들이 이런 무서운 현실과 원만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비하면 교황 영접의 또다른 주인공인 대통령이 대다수 신부, 수도자들로부터 사퇴를 요구받는 인물이라는 점은 별일도 아니다. 어수선하고 심란하다. 그러나 목자의 순정은 설움의 땅으로 쏠리게 마련이고, 진창에서 연꽃이 피듯 복음의 기쁨은 비탄의 터에서 가장 빛나는 법이다. 어서 오시라!
교황의 방문지 가운데 쌍용차, 밀양, 강정 등 국가와 자본, 양대 권력으로부터 심한 타격을 입은 곳들이 죄다 빠진 것과 판문점 가까운 곳에서라도 분단의 현실을 매만질 수 있도록 하지 못한 점은 퍽 아쉽다. 이런 안타까움을 애써 지적해야 할 이유들 가운데 방한의 주요행사인 순교자 시복식도 들어 있다. 먼저 천주교회가 굳이 광화문 한복판을 가로막는 민폐를 끼쳐가며 그것도 엄청난 인적, 물적 예산이 지출되는 대규모 행사를 치르려는 까닭을 물어보고 싶다. 연속되는 고통과 좌절을 이겨낸 자신의 빛나는 저력을 과시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리라. 자고로 교회가 자신이 당한 야만을 기억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당대의 야만성을 들여다보고 뉘우치기 위함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란과 재앙에는 눈감은 채 과거 자신의 그것만을 똑 떼어 자랑하려 든다면 이는 옛날을 보상받아야겠다는 얄팍한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 1791년부터 약 100년 동안 이어졌던 천주교 박해는 그 무엇보다 열린 사회를 바라던 간절한 꿈을 짓밟아버린 몹쓸 짓이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런 폭력체험의 바탕 위에서 생겨나고 자라났다. 70년대 이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즐거이 동참하였고, 지금껏 참담한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므로 시복식부터 아시아청년대회까지 교황과 함께 거행하는 모든 행사가 시장 신격화의 현실에서 낙오되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오늘과 다른 미래를 제안하는 대담하고 기발한 담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지나친 바람일까. 하지만 교황 방한이 속 빈 강정 같은 국빈방문이 아니라, 평형수를 빼버리는 바람에 복원력은 물론 영혼마저 잃어버린 채 가라앉기만 하던 자들을 위한 새벽의 달음박질이 되려면 그래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한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던 자들이 이제는 세상의 버림받고 박해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주는 따뜻하고 거룩한 언덕, 거기가 명동성당.”
(1998년 <엠비시 스페셜> ‘명동성당 백주년’의 클로징 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