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의 통통통]
거리의 청소년들 사진 <한겨레> 자료
수도권 진보교육감들 사진 <한겨레> 자료
김재준이 교사로 있던 간도 명동촌의 은진중학교 1937년 봄소풍 사진 <한겨레> 자료.
근대 선의 중흥조 경허 선사 사진 <한겨레> 자료
진보 교육감들의 등장으로 교육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다. ‘먹고사니즘’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는 교육 기득권층에게 옆에서 가타부타하는 말이 귀에 들릴 리 없다.
1960~70년대 산업화로 농업고가 ‘똥통학교’라고 놀림을 받을 때에도 6남매를 모두 자신이 가르치는 홍성풀무농고에 보낸 홍순명 전 교장선생님 같은 사표도 있지만, 지금의 지도층에게 이런 솔선수범을 기대하긴 어렵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자도 “용기가 없어 두 아들을 외국어고에 보냈다”고 했다. ‘학문은 먹고살기 위함이 아니라 인격수양을 위함’이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던 주자(1130~1200)도 제자들에겐 과거시험 응시를 만류한 15년간 자기 아들에겐 몰래 과거시험 준비를 시켰다. 조선을 비롯한 근대 동아시아의 세계관과 교육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주자가 그랬으니 대의명분만을 내세우면 교육은 겉 다르고 속 다른 탁상공론이 되고 만다.
보수건 진보건 교육감, 정치인, 언론인의 자녀들도 우리 사회에서 ‘혜택받은 소수’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교육 소외자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는 점이다. 초·중·고교 학교를 떠나서 ‘국가 안의 국외자’로 떠도는 아이들이 무려 6만여명이나 매년 생겨나고 있다. 학교에 다닌다 해도 실업계 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고교까지 한 한급에서 소수를 제외하곤 다수가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누렇게 변색되어가는 낙엽처럼 우울한 미래로 향해가는 다수 아이들을 버려둔 교육 논의는 ‘그들만의 리그’ 놀음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는 ‘맹자의 3락’과 기득권층의 이기심이 만든 ‘그들만의 리그’조차 모범생들을 모아 창의성 없는 로봇이나 포효하지 못하는 고양이로 만든다는 도마에 올라 있다.
사자를 길러내는 교육가들은 자세부터 다르다. 한신대 설립자 김재준(1901~87) 목사는 10가지의 ‘삶의 신조’ 를 내세워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고 했다. 1960~80년대 국내외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그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강원룡을 길러냈다.
그에 필적할 불교계 인물이 경허 선사(1846~1912)다. 훗날 조선 총독인 미나미에게 호통을 쳐 간담을 서늘하게 한 만공 스님(1871~1946)이 10대 때 당대의 학승 진암 스님에게 출가하려 계룡산 동학사를 찾았을 때다. 먼저 진암이 “나무도 비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아니하고 반듯한 그릇이라야 쓸모가 있다”고 설법했다. 뒤이어 나온 방랑승 경허는 “비뚤어진 나무는 비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다”고 했다. 만공이 누구라도 부처로 키울 경허를 스승으로 택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도 학교생활을 못하고 고2 때 학교를 뛰쳐나와 자퇴했다. ‘싹수가 노랗다’는 낙인이 찍힌 16살 소년이 애타게 찾던 것도 ‘내 안에도 발견되어야 할 다이아몬드 광맥이 숨어 있다’고 믿어주는 교육, ‘너도 쓸모있는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스승이었다. 이제라도 버려진 수많은 아이들도 그런 교육, 그런 스승을 만나 쓸모를 발견해야 한다.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