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미켈란 젤로의 <천지창조>
요즘 이런 저런 일로 ‘신의 뜻’라는 말이 유행한다. 인간사에 일어나는 일 중 명쾌하게 이해하기 힘든 일을 두고 ‘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아름다운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뜻’이라 하던 ‘천명(天命)’이라 하든, 일상적인 이성을 넘어서는 차원의 통찰 같은 것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 뜻’을 비우는 것이 우선이다. <장자>에서 말하듯, 마음을 굶기는 ‘심재(心齋)’의 정신이랄까, 기독교 찬송가에 나오듯 ‘고요한 중에’ 기다리는 차분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런 지고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오남용할 때 그 결과가 극히 위험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 그런가? 우선 두 가지만 예거해 본다. 첫째, 공적인 일에서 신의 뜻을 들먹이는 경우다. 예를 들어 영향력이 큰 종교인이나 정치인이 분명 빗나가는 행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으려고 한다. 물러나라고 하는 사람도 그를 나가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며 계속 나가라고 주장한다. 어쩔 수 없이 양 쪽은 신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서 피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 ‘신의 뜻’은 이처럼 이현령비현령,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격용, 혹은 방어용 무기로 사용되기 일쑤다.
이럴 경우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내 뜻을 신의 뜻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 아닌가? 내 뜻을 신의 뜻으로 여긴다는 것은 나를 신의 위치로 치켜올리는 일이다. 내가 나 자신을 신으로 모시는 자기 우상숭배다. 무서운 일이다.
둘째,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를 두고 신의 뜻을 함부로 들먹이며 그것을 최종적 해답으로 사용할 경우, 거기에 대한 깊은 성찰은 증발하고 만다. 오늘 왜 비가 오느냐? 그것이 신의 뜻이라 한다면 더 이상 기압골이니 뭐니 하는 기상학 같은 것을 논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 사회가 왜 가난을 면하지 못하냐?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면 수요공급이 어떻고 하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있을 수 없다. 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등장했는가? 단순히 신의 뜻이라고 하면 그 당시의 국제 관계라든가 이성계, 정도전의 역할 같은 것을 따져보는 역사학 같은 것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
이럴 경우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어디에나 신의 뜻을 들먹이는 것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의 배경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따져보는 건전한 학문적 노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시 무서운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 복잡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산적한 문제를 앞에 놓고 자기 생각을 신의 뜻이라 절대화하며 서로 싸우고, 신의 뜻을 앞세우며 문제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등한시하거나 방기해도 좋은가?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는 모든 것을 신이 결정한다는 신정론(神政論, theocracy)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함부로 ‘신의 뜻’을 들먹일 일이 아니다.
오강남 ‘경계 너머 아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