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내 탓이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어젯밤 꿈 이야깁니다. 내가 아주 좋은 자전거를 타고 인천 용현동 고개를 넘다가 힘이 들어 내려서 끌고 가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들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아이들이 내 자전거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꿈에도 이들과 맞섰다가는 아주 개망신을 당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마침 어떤 아주머니가 길가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뒤쫓아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어느새 마당까지 따라 들어와서 나를 빙 둘러쌌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급박한 나머지 담장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했지만 힐끗 보고는 다들 제 갈 길을 갔습니다. 사이사이 보이는 낯익은 얼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한겨레>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넘으면서 횟수가 거듭될수록 글쓰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쓰기도 쉽지 않지만 그보다는 ‘삶의 창’이라는 꼭지에 딱 어울리는 주제를 잡는 일이 몇 곱절 더 어렵습니다. 이왕에 험한 꿈에 시달리다가 깨어 다시 잠들기도 그른 것 같아 오늘 새벽에는 작심하고 가부좌를 틀고 요즘 내가 왜 이런가를 곰곰이 성찰해보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갖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었습니다. 몇가지 어렴풋이 잡히는 게 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내게서 ‘삶’이 없어졌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차츰 나이가 들고 사제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이래저래 꾀만 늘고 사람들의 땀내 나는 삶의 현장과는 되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몇년째 전쟁 중인 강정과 밀양에도 인사치레로 꼭 한번 다녀왔을 뿐, 신도들의 모금 봉투를 전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게 다입니다. 팽목항은 고사하고 안산의 합동분향소에 가는 것도 요리조리 빼면서 이런 나라도 나라냐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세월호 특별법 서명용지에 이름 올리는 것으로 면피하려 했습니다. 내 방에 텔레비전 없는 게 무슨 큰 자랑거리라고 만나면 텔레비전에서 봤다는 이야기가 전부인 이웃들을 수준 미달로 여겼으니 바리사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저 말로만 성스럽게 설교하고 점잖게 훈시하면 됐습니다.
전과는 달리 내 주변에는 이런 나를 뼈아프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사제의 기득권을 누리며 느긋하고 걱정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이게 마약입니다.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 쇄신을 위한 몸부림은 어느덧 나 아닌 너에게만 해당되는 훈수로 둔갑해버렸습니다. 멀리 예수님까지 갈 것도 없이 사람이 좋아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먹고 마시며 평생을 사셨던 정호경, 정일우 신부님의 흉내라도 내보겠다던 다짐은 세월과 함께 차츰 희석되어 갑니다. 온몸으로 사는 ‘삶’이 없이 머리 몇번 굴리고 문장 두세번 다듬어 ‘삶의 창’을 만들어내려니 잘 안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는 교회보다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새삼스럽지 않은 권고가 번갯불 같은 죽비로 느껴지는 까닭은 그동안 나의 삶이 껍데기뿐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유병언 회장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죽었을까요? 죽였을까요? 아니면 두 눈 멀쩡히 뜨고 어딘가에 살아있을까요? 우리나라가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불신공화국이 되는 데 명색이 사제인 나도 일조했습니다. 가슴을 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