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혹스 신부
가톨릭회관 대강당에 메튜 폭스의 강연을 들으러온 청중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창조’란 말이 부쩍 떴다. 그러나 그 ‘창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도 안갯속이다. 진정한 창조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말해주는 인물이 한국을 찾았다. 미국 오클랜드에 창조영성대학을 설립한 매슈 폭스(74) 신부다.
그는 여성성과 창조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원죄론 위주의 교회를 ‘우주적 그리스도’의 창조적 교회로 변화시켜야 함을 역설하는 개혁가다. 그가 말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란 우주 만생명 자체가 바로 하느님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가톨릭 도미니칸 수도회 소속의 신부로서 34년 동안 지냈으나 그런 개혁적 발언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돼 1995년 축출됐다. 이후 성공회가 그를 영입했기에 그는 성공회 신부다.
그러나 지난 19~24일 그의 제자 고혜경 박사의 소개로 그를 초청한 것은 가톨릭 쪽이었다. 지난 2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 에코포럼의 세시간 강연엔 가톨릭 사제·수녀 100여명을 비롯한 400여명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차 ‘새로운 교회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그는 <우주 그리스도의 도래>, <원복> 등을 통해 책으로만 소개됐을 뿐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성가를 지난 23일 한 호텔에서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창조영성가답게 ‘직관’을 중시한다. 그는 “하느님이 매 순간 천사, 즉 직관을 쏟아붓고 있는데 우리가 문을 닫아걸고 있다”며 “직관에 도움을 청하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직관이 가부장적 질서나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때 꽃필 수 있다고 본다. 불교의 선승다운 면모다. 내공을 갖추고서도 허례 같은 걸 요구하지 않으면 진정한 문답이 가능해진다.
첫 질문은 그의 전문 특허인 창조성에 대해서다. ‘인간들의 창조성이라는 게 탐욕을 이루기 위해 자연과 생명, 즉 ‘우주적 그리스도’를 해치는 데 더 많이 쓰이지 않느냐’는 거였다.
“맞다.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핵무기를 만들 때도 창조성이 발휘된다. 인간이 그렇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인간의 악이 모든 동물들의 악보다 더 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를 보라. 그런 파괴적 힘은 다분히 가부장적이어서 소수의 이익만을 섬기는 것이다. 신의 모성성으로부터 나온 창조는 정의와 자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소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생명까지 위하는 창조성이어야 한다.”
폭스 신부는 모성성과 창조성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세상에 더욱 확산되어가는 ‘근본주의 경향’을 꼽는다.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인 근본주의에 대해 그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주위에 깊은 참호를 파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매스컴과 인터넷으로 세상이 동시에 소통되고 있는데 왜 근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질서와 통제만을 선호하고, 혼돈을 싫어한다. 질서와 통제가 극대화한 사회가 파시즘이다. 옛날엔 혼돈을 여신과 동일시했다. 혼돈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다. 아이가 태어날 때 보라. 피범벅이 되어 혼돈 그 자체다. 생명은 그곳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혼돈을 싫어해 여성성의 발현을 이단이라며 마녀사냥을 했다. 동성애자나 성소수자도 핍박한다. 다양성을 인정치 않는다. 본래 자연 그 자체는 다양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는 것도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 때문이다. 그는 “전임 두 교황(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도 16세)은 이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적으로 열려 있으며, 다양한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는 근본주의적 종교재판의 희생양이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선 부정과 군사기지 건설, 환경 파괴 등에 반대해 정의를 외친 신부·수도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종북’으로 비판을 받는데, 그들에게 해줄 말이 있느냐”고.
“예언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논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소수 권력자를 만족시키는 현 체제는 당연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물건너간 것이고 핍박을 자처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랬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죽어서까지 3번이나 파문을 당했다. 에크하르트도 그토록 비난을 받았고, 힐데가르트 수녀도 700년이나 유폐됐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반대한 시위에 나섰을 때 흑인 목사들조차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비난했다. ‘설사 상사가 잘못된 일에 동조하라고 하더라도 양심에 따라야 한다’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현시대의 응원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 그런 위대한 선조들과 순교자들, 예언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누구도 수동적으로 있어선 안 된다”는 행동파다. 억압받고 창조성을 억누르면 우울해지고 비관주의만 팽배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서와 통제의 우상인 가부장적 하느님이 아니라 모성적인 창조적, 우주적 하느님을 발현해 가라고 독려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직관적 창조주의자다운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는다.
“가능성, 즉 대안이나 출구가 없을 때 절망하게 된다. 예언자들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논쟁과 비난에만 매몰되지 말고 위기를 타개할 대안을 만들어내고 조직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논쟁보다 기쁨을 좋아한다. 좋아한 것을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창조적이니 못할 게 없지 않은가.”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