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에겐 통영 가마솥 시래깃국 식당이 있습니다. 그 식당은 2.5평 남짓으로 비좁습니다. 시래깃국 값은 4천 원입니다. 그 식당엔 손님이 끊이질 않습니다. ... 그런데 이 식당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2인용이나 4인용 식탁들이 없다는 점입니다. 고기 상자였던 합판을 이어 붙여 만든 기다란 식탁이 하나 놓여있을 뿐입니다.
"우리 식당은 23년이 되었어요... 우리 식당은 평등한 곳입니다. 시장이든 판사든 내겐 막노동꾼과 똑같은 4천 원짜리 손님입니다. 밥값이 싸니까 먼저 온 사람은 뒤에 온 사람 밥값을 내줄 수 있습니다. 그럼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뒷사람 것을 내줍니다. 저는 그렇게 앞사람이 뒷사람 밥값을 내주는 것이 연달아 일곱 차례까지 이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 토요일 일요일 가게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있으면 마지막 숟가락을 서서 입에 털어 넣으면서 '여기 앉으세요'하고 먼저 권하는 것이 우리 손님들입니다. 그릇도 설거지통에 갖다 넣기도 합니다. 가게가 좁으니까요. 인생 별거 아닙니다. 밥상에서 자리 자기를 조금 좁혀서 같이 앉는 겁니다. ..."
그래요. 이것 또한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 신경을 써주는 거죠. 그런데 저는 통영 아주머니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땅에서 살고 있단 점에서 이미 아주 커다란 한 식탁에 앉아있는 셈이라고요. 우린 옆에 같이 앉아 밥을 먹는 사이인거죠.
장소의 진실성에 대해선 이렇게 우린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 말고 사람이 서식지인 경우에 대해서는 더 섬세한 관찰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서로 파괴를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입구에서 맞닥뜨리는 구절입니다.
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영원한 고통을 당하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저는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 절망만 가득한 곳이란 뜻으로 이해했었습니다. 그다음에 읽었을 때는 희망을 버리면 이 세상도 지옥이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다시 읽었을 때는 '나'가 정말 '나'로 읽혔습니다. 나를 거쳐 가는 자가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나를 거쳐 가는 자가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된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지옥인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지옥인 것입니다.
<사생활의 천재들>(정혜윤 지음, 봄아필) '인간의 서식지에 대하여-김산하(야생영장류학자)와 함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