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이순신
“천둥 번개와 함께 몰려오는 먹구름, 무시무시한 화산, 폐허를 남기고 가는 태풍, 파도가 일렁이는 끝없는 대양….”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열거하는, 숭고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무시무시한 자연의 힘은 인간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만약 안전한 곳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위압감에 눌리지 않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바로 그때 우리가 느끼는 것이 숭고다. 두려움이 숭고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칸트는 그런 숭고의 사례로 장수의 용기를 든다. “그 어떤 것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장수는 경탄의 대상이 된다. 특히 그 장수가 높은 인격의 소유자일 때 불굴의 용기는 우리의 마음을 숭고의 느낌으로 채운다. 그런 장수는 정치가보다 더 존경받는다고 칸트는 말한다.
영화 <명량>은 그 불굴의 용기에 카메라를 집중한다. 330척의 함대는 무서운 자연의 위력을 닮았고, 12척의 배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힘을 상기시킨다. 그런 불가항력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낼 때 우리 안에서 차오르는 것이 숭고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칸트가 말하는 장수의 모범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1597년 9월16일)의 일기는 긴박한 문장으로 전투 현장을 보고한다. 이순신의 배는 홀로 적선을 향해 진격한다.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총통을 쏘아대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처럼 맹렬하였다.” 이순신은 뒤에서 머뭇거리는 수하의 배들을 호령해 불러낸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안위의 배는 황급히 적진으로 뛰어든다. 이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척 적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싸웠고, 대군의 기세를 꺾었다. 그런 용기 앞에서 느끼는 것이 숭고다. 지금 이 나라에 이순신의 후예가 있는가. 출세와 보신에 목매지 않고 나라와 병사를 위하는 진짜 군인이 있는가.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