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장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호사스런 옷을 입은 사람이냐? 예언자냐? 그렇다! …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오복음서-
역대 교황의 방한은 세번째였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이한 국민의 눈길과 마음은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이 땅을 딛자마자 시작된 만남들은 잡은 손마다 영광과 기쁨보다는 서러움이고 눈물이었다. 목마른 사슴의 젖은 눈길처럼 애원이 가득한 마음이었다. 고난의 상처와 아픔을 버텨내기에는 너무 힘겹고, 얼굴을 묻고 실컷 울고 싶어도 어머니의 무릎도 품도 없는 시대에 인자한 얼굴과 넉넉한 품을 지닌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교황은 가톨릭 교종으로 아시아청년대회와 치명순교자의 시복미사를 집전하러 온 사제이며 사목자에 불과하다. 그는 경제를 살려줄 능력도 없고, 정치적 이념적 대결을 화해시켜 줄 수도 없으며, 세월호의 해법도 결코 갖지 못한 짧은 여정의 손님이요 종교지도자일 뿐이었다. 그가 결코 문제해결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울었다. 종교를 넘어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의 묵정에 빠져들게 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의 원로도 지도자도 스승도 없고, 종교의 권위도 추락하고, 국가 통치권자의 존재이유마저 느껴지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 권위 있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교황의 이름으로 만난 프란치스코는 우리 시대의 큰어른이었다. 그는 여정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성찰케 했고, 평화와 인격적 삶을 찾도록 희망을 독려했다. 또한 지도자의 덕목과 국민이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을 생각게 했다. 무엇이 사람다운 삶이고 건강한 삶인가? 조화로운 공동체의 삶, 상식과 도덕과 윤리가 살아있는 사회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반면에 물신을 우상으로 숭배토록 강요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성을 어떻게 타락시키고 비정케 만드는 악령의 시스템인지도 깨우쳐 주었다.
상류층에 안착한 세대는 호사스런 크루즈 선상의 축배로 흥청이고, 서민들은 멀리서 동승의 로망을 안고 그들에게 권력을 맡긴다. 젊은이들은 희망 없는 스펙 쌓기 경쟁에 올인하지만 여객선은 서서히 침몰중인데 ‘가만히 있으면’ 모두 죽음뿐이다. 교황은 “젊은이여 깨어 있으라!”고 소리쳤다. 가난한 자와 약자가 억울함에 분노하는 세상은 병든 사회이며 하느님의 축복이 멀다. 악행의 병폐는 빈자와 약자가 먼저 당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모두는 한국호에 동승한 공동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교황의 충고를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침몰에서 구조할 수 있다.
세계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가장 낮은 자의 마음도 함께 지닐 수 있었던 교황의 인간성은 사실은 그가 민초들과 살아온 환경과 고뇌 속에서 주름살처럼 새겨졌던 인간애의 영성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정치인들도 권위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권위란 군림이나 독존, 상류계급의 보호자가 아니라 서민에 대한 친애로서 슬픔과 억울함에 우는 이들의 보호와 배려와 섬김에서 오는 것임을 교황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진실한 존중으로 대하기만 해도 상처받은 이들에게 치유가 되고 실패한 이들의 희망이 될 수 있다.
국민의 선택이 정치를 만들고 정치가 국리민복을 만든다. 국민은 우리 수준에 맞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갖게 되니 나라꼴의 책임도 전적으로 선택자인 국민에게 있다. 역사는 언제나 훌륭한 스승이다. 교황은 떠났고 감동은 가르침으로 남아 있어 우리를 새롭게 일어서게 한다.
박기호 산위의 마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