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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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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이 시켜준 중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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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교황님, 중노동 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종교전문기자 조현입니다. 얼마 전엔 논설위원도 겸임하게 됐습니다. 사회부, 정치부에서도 일했습니다만 종교를 맡은 지만도 벌써 15년. 제가 종교담당이라면 신문사에 갓 들어온 후배들이 묻죠. “조 선배, 종교는 뭐예요?” 저는 종교인이 아닌, ‘종교 기자’랍니다.


제가 종교를 맡는 동안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이 돌아가시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 등이 즉위하는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 프란치스코 방한은 그때 썼던 기사들의 무려 10배 정도는 쓴 초특급 태풍이었습니다.


저도 교황이 방한하기 4일 전부터 매일 2면씩 교황 특집을 썼으니 태풍이 불어라 고사를 지낸 격이었지요. 저는 지난 2월부터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까지 취재했지요.


아르헨티나는 이미 1970~80년대 3만여명을 희생시킨 ‘더러운 전쟁’의 주인공인 독재자 비델라가 2011년 86살로 50년형을 선고받았고, 최근엔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한 전직 판사와 검사들의 사면권을 없애고 그들의 반인권 범죄 혐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지요.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악의 권세가 거대해도 반드시 끝이 있음을 베르골리오(교황의 본명)가 본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니라, 304명이 수장당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넉달이 넘어도 진상 하나 밝혀지지 못하는 절망 때문에 교황을 메시아처럼 기다리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불행한 사회다”라고 했지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행하다는 증거지요.


그러나 순진한 신자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종교권력의 세계란 간단한 것만은 아니지요. 교황청이나 달라이라마 궁전에서 역사적으로 적지 않은 암살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요. 권력이 있는 곳엔 투쟁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종교인들도 가면만 달리한 정치인일 경우가 많지요. 세월호 참사만 해도 ‘진상규명을 해달라, 내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조차 정치권력이 거부하면, 이를 ‘정치’라며 ‘정치 불개입’ 원칙을 내세워 신음조차 외면해버리는 ‘정치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어디 한두번 봐왔나요.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교묘한 ‘정치논리’를 뛰어넘은 진짜 종교인의 면모를 보여주었지요. 공항에 도착해 세월호 아픔에 공감을 표시한 이래 대전미사에서 유가족들과 단원고생들을 만나고,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니며, 광화문에서 유민이 아빠를 찾아내 손을 잡아주고, 이호진씨에겐 직접 세례를 주었지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10명의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의 편지까지 남기고, 유가족들이 진도 팽목항까지 순례하고 돌아와 전달한 십자가를 로마로 가지고 떠났지요.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병이 낫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출세하고, 무슨 성령을 받는다든가 견성을 한다든가 하는 걸 위해선 한달 넘게 금식도 하고, 백일·천일기도도 하고, 잠 안 자고 눕지도 않는 좌선·용맹정진도 하면서도,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가도 모르쇠하며 울어줄 눈물 한 방울 없는 수행자·종교인·신자들 보기가 지겨워 종교기자 하는 것도 신물이 나는 판에 교황은 제게도 큰 힘을 주었지요.
그래서 온종일 식사할 틈도 없이 기사를 써댔지요.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자판기를 두드려대자 나중엔 노트북이 열을 받아 한 글자 쓰면 1~2초 후에 뜨고, 편집국장은 마감시간이 지났다며 연달아 전화를 해대고, 정말 미칠 지경이더군요.
그래서 교황이 떠나던 날 마지막 기사를 송고해놓고, 국장에게 문자를 보냈지요.
“노량해전, 내 죽음을 알리니 더 이상 찾지 마세요.”
 
그렇게 죽은 듯이 잠을 자고 다시 부활해 이 글을 씁니다. 교황 방한 기간 중 교황이 기대에 부응해준 것보다 저를 더 기쁘게 한 게 있었지요. 밤 10~11시까지 기사를 쓰고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면 유민이 아빠 옆에서 수백명이 동조단식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교황이 몸으로 보여주고 말한 핵심이 ‘약자들과 연대(함께)하라’는 거였지요. 교황의 사진만 걸어놓고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도 행동을 도외시하는 건 ‘달은 못 본 채 손가락만 보는 것’이지요. 교황의 손을 잡으려 달려가는 수준에서 벗어나 약자와 연대함으로써 실제 그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는 분들이 순교할 뻔한 제 중노동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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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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