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명장면】잠룡의 시절 <5>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자왈 제일변 지어로 노일변 지어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선왕(先王)의 도(道)에 이를 것이다.”
-옹야편 22장
1. 망명조정의 동선(動線)을 따라서
앞에서도 몇차례 언급했지만, 제나라 망명 시기에 공자가 주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문장의 형태를 갖춘 기록으로 사마천의 ‘공자세가’가 거의 유일한 권위를 지니지만, 이 또한 단편적인 사실의 취합이어서 7년여에 이르는 ‘잠룡 시절’의 전모를 파악하기엔 여전히 많은 의문부호들을 남기고 있다. 나, 이생 역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노사(老師)들의 전언과 전문을 채집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사실로 확정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동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떠난 이유’가 분명하다면 ‘떠난 뒤의 행적’ 도 그 ‘이유’를 중심으로 이뤄졌을 것이 아닌가?
공자는 서기전 516년 노나라를 떠나 서기전 509년 완전히 귀국했다. 이 시기는 노나라 임금 소공이 친위쿠데타에 실패한 뒤 망명했다가 끝내 죽어서 돌아온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이는 공자의 출국이 소공의 망명에 대한 공분에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소공이 떠나자 공자가 떠났고, 소공이 죽어서 돌아오자 공자도 돌아왔다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팩트’라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공자의 망명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노나라 정치상황과 연계돼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는 공자 일행이 신분상 일개 사인(士人) 망명객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이면에서는 망명조정과 일정한 선을 유지하였고, 소공 또는 망명조정의 동선을 따라 자신들의 행로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런 전제 하에 망명조정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면 공자의 행로도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런 희망을 품고 나, 이생은 선생님의 족적을 찾아 제나라와 진나라 일대를 여행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불과 몇년이 지나지 않았다 해도 선생님의 시간으로는 벌써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과거인지라 자취를 쉽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 여정만으로도 나는 감히 선생님의 고투만큼이나 나의 고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럼 소공의 출국과 사망까지의 종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문득 그 언저리에서 두루마리 죽간을 옆구리에 낀 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키가 커다란 한 사내의 실루엣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젊은 시절의 선생님 곁에 선 문도이리라.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2. 치열한 국제외교전
서기전 516년 망명한 소공은 송나라와 위나라 공실을 동원해 맹주국인 진나라에게 계씨 정벌을 주장하는 국제회의를 열도록 부탁하면서 소공과 계씨정권 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시작됐다. 간자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계평자(계씨정권의 수장인 계손의여)가 즉각 가신들을 소집했다. 회의를 주도한 사람은 친위쿠데타를 저지할 때 계평자를 위해 맹활약한 젊은 가신 양호(陽虎)였다.
“제후동맹이 결성되는 사태만큼은 결단코 저지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처지에서 보면 명분과 실력 양면에서 국제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회담 자체가 열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진나라는 지금 맹주를 자처하고 있는데, 소국의 구원 요청을 받고도 모른 척할 명분이 없을 텐데?”
“회담 요구 자체를 묵살할 수는 없을 겁니다. 대신에 진나라 대부들을 매수해 정상회담에 앞서 총리급 회담을 여는 쪽으로 상황을 유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대부 회의를 열도록 한 다음 거기서 제후동맹을 원천적으로 무산시켜버려야 합니다.”
“훌륭한 계책이오! 그런데 공조(노소공의 이름) 그 자가 계속 사방을 들쑤시고 다닐텐데 그때마다 대부들을 매수할 수는 없을테고…뭔가 근본적인 대책은 없겠는가?”
양호가 단호히 말한다.
“화근을 잘라내야죠! 제가 맹손씨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운읍으로 가 임금을 탈취해 오겠습니다. 옥좌 위에 끌어다 놓으면 더이상 복위 운운하는 꼴갑을 떨지 못하겠지요.”
이리하여 계씨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진나라 실력자 사앙(범헌자)이 진경공의 재가를 얻어 군주 회담 대신 집정대신회의를 소집하게 되자, 노소공의 부탁을 받은 송나와 위나라 대신이 나섰다.
“ 제후들이 결맹하여 자기 임금을 축출한 무도한 신하(계평자)를 정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사앙이 회의를 중단하고 송과 위의 집정대신을 따로 불러 말한다.
“노나라 임금이 자기 나라를 떠난 것은 계평자의 책임이 아니오. 지금 계씨는 오히려 민심을 얻어 제나라와 초나라가 그를 돕고, 하늘까지도 돕고 있소.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보오. 그럼에도 두 분이 굳이 앞장서서 노나라 임금 복위를 주장한다면 내가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소. 나 또한 따라나서는게 도리이겠지요. 그러나 노성(魯城)을 포위하였다가 자칫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그곳에서 죽기로 합시다!”
섣불리 나대다가 일이 실패하면 두 사람은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맹주국의 실권자가 대놓고 을러대자 소국의 두 대신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한편 양호는 그 사이 운읍을 공격하여 소공을 탈취하려 하였으나, 운읍 백성들이 무력으로 저항하는데다 제후동맹이 결성되지 않게 되자 서둘러 철군했다. 이 공격에서 계씨 세력은 소공을 강제로 귀국시키는데는 실패했으나, 소공의 망명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양호가 노린 것도 기실은 이런 심리적 효과였다.
훗날 <논어>에서 공자를 회유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양호는 공자의 일생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인물이다. 양호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3. 치욕의 연회
제후연합도 무산된데다 군사적 공격까지 받아 위기감에 휩싸인 소공은 제경공을 만나 직접 구원을 요청하기로 한다. 서기전 515년 겨울 노소공이 임치에 나타나자 경공은 입장이 난처했다. 만나자니 울고 불고 매달릴게 뻔하고, 안만나자니 도리상 명분이 부족했다. 사돈간인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당연히 소공의 복위를 지지해야 하겠지만, 국제관계란게 어디 그런가. 실리를 따지자면 허울뿐인 소공보다는 계씨쪽과의 ‘선린우호’가 몇배나 더 이익이었다.
“노나라 임금에게 계씨 정벌을 주장할 기회를 주어선 안됩니다.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면 요구를 피할 명분이 없습니다.”
제나라 조정이 짜낸 묘안은 향례(饗禮①)였다. 국빈의 예를 갖춰 맞이하는 것이니 소공이 사사롭게 경공과 대면하기 어려운 의전이었다. 제나라가 소공을 향례의 예로 맞이 하겠다고 하자, 의도를 간파한 소공의 총신 자가자가 노련하게 되받았다.
“아이고, 사돈간에 번거롭게 무슨 향례란 말입니까? 그저 술 한 잔 나누면 되는 연례(宴禮)로 족합니다.”
번거로운 형식은 사양한다는 손님의 겸양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어 연례를 받아들인 제나라 조정은 잠시 난감해졌으나 곧 누군가가 묘안을 만들어냈다.
연회가 열리는 날, 소공쪽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 소공이 경공에게 직접 술을 따르며 본격적인 읍소작전을 펼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 연회가 본격화되려나 싶은 즈음에 경공이 먼저 소공을 위로하는 말을 한 다음 재상에게 시관을 시켜 소공에게 술을 따라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공이 약간 찝찝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아 마시는 걸 본 경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 쉬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경공의 행동은 소공과 노나라 대신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같은 임금끼리 직접 술을 따라주지 않고 신하를 시켜 술을 건네게 한 뒤 나가버린 것은 상대방을 같은 임금의 반열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제나라가 소공에게 읍소기회를 주지않기 위해 짜낸 임기응변이었지만, 양국의 대부들과 귀족들이 다같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소공을 욕보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임치까지 와서 경공을 겨우 만나기는 했으나 도와달라는 말조차 붙여보지 못한 채 중인환시리에 모욕을 당했으니, 소공과 망명조정이 느꼈을 모멸감과 분노는 이루말할 수 없었으리라.
4. 사라진 재상
소공이 경공에게 충격적인 하대를 당한 소식은 노나라 망명객들에게도 곧 전해졌으니, 그들이 느꼈을 공분과 모멸감 또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자기 나라 군주에 대한 이유없는 모독은 곧 국가에 대한 모욕을 의미하던 시대였으니 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공자의 망명생활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소공이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게 되었고, 이어서 공자도 제나라를 떠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무렵 공자는 임치에서 고장(고소자)이라는 세력가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젊은 외국인 공자가 임치의 손꼽히는 권세가를 직접 알지는 못했다고 보는게 현실적이라면, 공자는 노나라 망명조정의 유력자들-나는 그가 강경파의 수장이며, 공자 집안과도 인연이 있는 장소백이라고 본다-추천으로 고소자의 막하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임치에서는 노나라 망명조정 사람들이 제나라 권세가들을 상대로 계씨 정벌을 위한 군사·외교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갖가지 공작을 펼쳤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때, 유력자의 막하에 들어간 공자 역시 그런 정치상황과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공자는 박학다식한 신진학자였으므로, 곧 두각을 나타내어 유수한 가문의 자제나 젊은 대부들, 각국에서 온 유세객 등과 교분을 나누었을 것이 틀림없다.
훗날의 전승을 보면, 공자가 이때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이들 중에는 제나라 최고 실력자 가문인 진씨가의 후계자로서 공자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진항(陳恒)도 있었던 것 같다. 진항은 훗날 제나라 최고실권자의 지위에 오른 전성자(田成子)로서, <논어>에도 그 이름이 보이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 제나라 귀족들은 소공의 복위와 계씨 토벌을 주장하는 노나라 망명인사들의 호소에 대해 겉으로만 호응하는 시늉을 했을 뿐 실제 행동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씨가 역시 유명무실한 노나라 공실보다는 같은 막후 실권자인 계씨와 배짱이 더 맞았다. 문무를 겸비하고 나름 격을 갖춘 인물이었던 진항도 자신보다 연배가 약간 높은 정도이면서도 엄청나게 박식하며 인품이 높은 공자를 존중하였겠지만, 자기 가문의 이익을 수호해야 하는 후계자의 입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겉과 속이 다른 제나라 귀족사회의 이중적 태도는 결국 경공이 노골적으로 소공을 하대하는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잠복해 있던 두 나라 공실간의 불신이 폭발하면서 전체적인 신뢰관계도 파탄나고 말았다는 것이 나, 이생의 추정이다.
그 분기점이 되는 연례 사건을 주도한 사람은 막부의 실권자 진기(진항의 아버지)와 조정의 재상 안영이었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당시 68살로 추정되는 재상 안영이 연례 사건이 나기 직전인 서기전 516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서 홀연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안영의 이 ‘소리 없는 퇴장’이 어쩌면 연례 사건과 관련이 있을 지 모른다는 상상도 해보고 있다. 즉 안영은 어떤 이유로 인해 정사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어떤 사고에 의한 반신 불수 상태를 가정해 볼 수 있다)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례 사건에 심한 의분을 느낀 노나라 망명지사의 ‘사고를 가장한’ 테러 공격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고’는 진씨가의 수장을 상대로도 계획됐겠지만, 소탈하고 격의없는 안영과는 달리 엄중한 무장 경호를 받는 진씨에게는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안영이 이 무렵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②
5. ‘치이자피’의 진실
전편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때와 관련하여 주목해 볼 전승이 하나 더 있다. 묵가들에 의해 중원 전체로 퍼져나간 이 전승에 따르면,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 진항의 집 앞에 자신이 제나라를 떠난다는 사실과 아울러 경공과 안영의 위선을 성토하는 ‘치이자피’(저+鳥 夷子皮)를 남겼다는 것이다(<묵자> ‘비유’편③).
치이자피의 전승은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 무엇인가 제나라에 대한 울분에 찬 비판을 쏟아낸 정황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그 비판은 소공의 복위 지원 약속을 배반한 제나라에 대한 노나라 망명조정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 “밥을 지으려고 일어놓은 쌀을 도로 건져 급히 제나라를 떠났다( 孔子之去齊 接淅而行)”(<맹자> ‘만장’ 하편)고 한 것도 어쩌면 소공 환국운동에 참여하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자 계씨 쪽 사람들을 피해 황급히 제나라를 떠나게 된 저간의 사정이 남긴 편린은 아닐까? 사마천의 ‘공자세가’에서는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 하였고 공자도 이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제나라 대부들은 계씨 쪽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전문들이 모두 이때의 일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정황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모든 전언들은 이 무렵 공자를 비롯한 노나라 망명조정 관련 인사들이 "밥을 먹으려다 말고 달아나듯"다급하게 제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모종의 사태’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6. 진나라로 간 공자
제경공에게 환멸을 느낀 소공이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간 것은 서기전 514년, 공자가 제나라 임치에 온 지 3년째로 접어든 때였다. 소공이 진나라로 가자 많은 망명인사들도 제나라를 떠났다. 소공이 진나라로 오자 진경공은 ‘불청객’ 소공이 진나라 도성에서 얼쩡대며 골치 아픈 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 싫은 나머지 소공을 간후 땅에 머물도록 했다. 간후는 당시 진나라 세력 가문인 위(魏)씨 가문의 영지로서, 조정의 실력자인 위서(위헌자)가 임금의 곤란한 처지를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제공했던 것 같다.
위헌자는 한선자에 이어 진나라 집정대신의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공명정대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집권한 뒤 사사로운 관계보다 인품과 능력 중심으로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더욱 찬사를 받았다. 이때 등용한 인재 가운데 자신의 서자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내 자식을 쓰는 건 사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자 한 대부가 나서서 “무(위헌자 아들의 이름)는 이미 세간에 현능한 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무릇 인재를 뽑는 기준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직 현능함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친소를 막론하고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면 그뿐입니다.(夫擧無他 唯善所在 親疏一也)”라고 한 대답이 사서에 올라 있다. 이런 위헌자에 대해 “인재를 씀에 가까이로는 친속을 버리지 않고, 멀리로는 쓸 만한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니 도의에 맞다고 할 만하다(仲尼聞魏子之擧也 以爲義曰 近不失親 遠不失擧 可謂義矣)”고 칭찬한 사람이 공자였다. 그런데 공자의 이 말은 이듬해 진나라가 형정(刑鼎·형법을 기록한 청동솥)을 주조한 사실을 공자가 비판한 말과 함께 2년에 걸쳐 사서에 잇따라 기록됐다④. 이는 대부 이상의 신분이 아니면 대부분 기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당시 역사 기록 관행으로 볼때 매우 이례적인 ‘편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때의 공자 말이 훗날 ‘중니의 말씀’으로 사적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은, ‘성인’ 공자가 젊은 시절에 직접 한 말씀으로 세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이 ‘기록’은 공자가 소공을 좇아 제나라를 떠났으며, 그가 간 곳은 노나라가 아니라 진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셈이다.
7. 객사한 소공
진나라로 간 소공은 간후에 머물다가 서기전 513년부터는 운읍과 간후를 오갔다. 진나라와 제나라 어느 공실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소공이 간후와 운읍을 오락가락하자 운읍의 백성들은 마음이 지친 나머지 소공에게 반기를 들었고 남은 신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간후에서도 식량이 부족해 시종들이 굶주리는가 하면, 소공이 엉뚱한 이유로 태자 공위를 폐하자 신하들이 더욱 동요했다. 진나라는 계평자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미 고립무원 상태나 다름없는 소공을 귀국시키려 했으나 망명조정의 강경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소공은 주변국들은 물론 신하들 사이에서마저 신망을 잃고는 간후 땅에서 죽고 말았다. 소공이 죽자 진경공이 사관에게 물었다.
“계씨는 임금이 나라 밖을 떠돌게 하였는데도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제후들이 도우며 임금이 외국에서 죽었는데도 계씨에게 죄를 묻는 이가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노군은 안일 방종하고 계씨는 대대로 근면을 수행하였으니 백성들은 임금을 잊었습니다. 임금이 비록 외국에서 죽었으나 누가 그 임금을 가엾게 여기겠습니까? 사직에 군주가 영구히 고정된 적이 없고, 군신 사이에 그 지위가 영구히 고정된 적이 없었던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社稷無常奉 君臣無常位 自古以然).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언덕이 되듯이(高岸爲谷 深谷爲陵) 삼후(순·우·상 3대의 임금)의 자손이 지금은 서민이 된 것을 군주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三后之姓 於今爲庶 主所知也)”(<좌전> 노소공 32년)
8. 삼변(三變)의 도(道)
서기전 509년 7월 소공의 장례가 노나라 공실 묘지가 있는 감읍에서 거행됐다. 소공의 무덤은 아버지 양공을 비롯해 역대 임금들의 무덤이 있는 북쪽에 가지 못하고 남쪽에 자리잡았다. 이는 소공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계평자의 증오심 때문이었다. 계평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묘역에 도랑을 파서 소공의 무덤을 아예 격리시키려고도 했다. 아무튼 멀리서 이 장례 광경을 지켜보는 일행이 있었으니 7년 전 곡부를 떠났던 공자와 자로를 비롯한 문도들이었다. 공자가 소공의 상여가 묘도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정명(正名)의 길… 요원하구나….”
이로부터 꼭 10년 뒤 공자는 노정공의 조정에 참여하여 사구(司寇·법무장관)가 되자 공실 묘역부터 정비했다. 소공의 묘 밖으로 도랑을 파서 소공의 묘가 역대 임금들의 묘역 안에 있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노소공의 장례를 계기로 공자는 7년 만에 완전 귀국하여 다시 교사의 길을 걸었다. 공자는 망명 기간에 제나라를 비롯해 진나라와 주나라, 송나라, 위나라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았다. 약소국의 비애와 국제정치의 냉혹함도 목격했다. 특히 제나라에 머물 때 공자는 제나라의 풍부한 산물과 발달된 산업에 감탄하는 한편, 그 이면에 도사린 현세주의와 물질주의의 타락을 직시할 수 있었다.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면서 문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질과 실리를 중시하는 제나라 기풍을 한번 혁신하면, 인의예지를 중요시하는 노나라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또 노나라가 자신의 기풍을 한번 더 혁신하면, 이상적인 도덕사회에 이를 수 있다.”(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옹야’편 22장⑤)
제나라의 현실주의와 노나라의 정신주의가 변증법적으로 지양, 통합된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는 이 깨달음은 공자가 젊은 시절 7년을 투자해 얻은 소중한 배움을 한마디로 압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공자는 외국에서의 출세보다 귀국하여 제자를 양성하는 길이 자신의 사명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곡부에 돌아온 43살의 공자는 양호의 집요한 회유를 뿌리치고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 출사를 결심하게 될 때까지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위대한 교육철학을 열정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그리하여 수년이 흐르자 궐리(闕里·공자가 살던 곡부의 마을)의 학사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박학군자로서 공자의 명성은 노나라 밖으로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잠룡의 시절’ 끝)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논어> 원문의 한글 번역은 <논어집주>(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편)와 <안티쿠스 클래식6-논어>(한필훈 옮김)를 나란히 싣는다. 각각 신구 번역문의 좋은 사례로 생각되어서이다. 표기는 집(논어집주)과 한(한필훈 논어)으로 한다. 이와 다른 해석을 실을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이번 호부터 논어 영어번역을 싣는다. 표기는 영문 L로 한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필자의 지우 이택용 박사가 본인이 제작한 프린트 책자를 선물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감사드린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향례 향(饗)은 ‘임금이나 또는 임금을 대신한 대행자가 사신, 또는 관리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지위 고하에 따라 격에 맞게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의식’을 말한다.(네이버, 한국고전용어사전)
②안영은 서기전 500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춘추좌씨전> 소공26년조(서기전 516년)를 끝으로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몰년이 맞다면 당시에도 이미 유명한 재상이었던 안영의 마지막 16년간의 행적을 알 수 없는 셈이다.
③ 묵자 비유편(박문현, 이준령 해역) (…)孔乃에(圭+心, 성낼 에) 怒於景公與晏子 乃樹치(근본저+鳥·솔개 치)夷子皮於田常之門(…)) 歸於魯. 공모가 마음 속에 화를 내고 경공과 안자에게 화가 나 이에 치이자피를 전상의 문하에 소개하고(…)노나라로 돌아갔다. 일본의 시라카와 시즈카에 따르면, ‘치이자피’는 가죽으로 만든 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 중국의 무축(巫祝·무당과 박수) 의식과 관련있는 말이라고 한다. 신판(神判)에서 진 쪽의 판결대상자와 판결문을 가죽부대에 담아 강물에 흘려 보내는 의식이 그것인데, 여기서 추방, 망명 등의 뜻이 유래되었다는 것이 시라카와의 견해이다. 역사적으로는 오나라의 오자서가 오왕의 의심을 받아 자살을 한 뒤 그의 시체가 가죽 부대에 담겨 강에 던져진 사건, 월왕 구천의 책사 범려가 훗날 구천 곁을 떠나 제나라로 와서 거부가 되었는데 그의 바뀐 이름이 치아자피였다는 전설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일은 모두 나중에 벌어진 일이니, 공자가 이때 실제로 치이자피를 세웠다면 시라카와가 말하는 무축의 의식과 관계가 있을 듯하며, 꾸며낸 이야기라면 무축의 의식과 오자서의 죽음, 범려의 거부 전설 등이 버무려져 만들어진 허구일 개연성이 크다.
④이 두 사건은 <좌전>노소공 28년, 29년조에 보이는데, 서기전 514년과 513년에 해당한다. 공자가 노소공을 쫓아 망명한 뒤 3~4년 지난 때의 일이다.
⑤옹야편 22장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선왕의 도에 이를 것이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명예와 실리를 중요시하는 제나라의 기풍을 한 번 혁신하면,예의의 신의를 중요시하는 노나라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또 나아가 그런 노나라의 기풍을 한 차례 더 혁신하면, 이상적인 도덕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L-The Master said,“Ch’i, by one change, would come to the State of Lu. Lu, by one change, would come to the a State where true principles predomin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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