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을 따라서 난 신작로말고는 거의 평지라고는 없는 이 고장, 부자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건 빈자들의 오막살이건 모두 다 산비탈에 뻗치고 있었다. 그 산비탈에 등불들이 나돋아서 부자 빈자 구별 없이 아름다웠다. 옛날, 일개 편벽의 갯촌이었고 고성군에 달린 관방에 불과했던 이 고장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당포와 한산도의 대첩을 거두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삼도통제사 군영이 이곳 갯촌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바로 통영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통영에는 벼슬아치들을 따라서 서울의 세련된 문물이 흘러들어왔을 것이며, 팔도 장인들의 구름같이 모여들었을 것이며 나라를 구하겠다는 지순한 영혼들이 이곳을 향해 팽배했을 것인즉, 그 위대한 힘과 정신이 마침내 찬란한 승리의 꽃을 피게 했던, 그것은 편벽한 갯촌의 엄청난 변신,변화였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귀향을 서둘렀겠지만 해류관계인지 천하일미를 자랑하는 해물이며, 아름다운 풍광, 온화한 기후, 넘실대는 바다, 아득한 저편에 대한 동경, 그러한 생활의 터전을 사랑했을 감성 풍부한 장인들 자유인들이 잔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상상키 어렵지 않다. 그들이야말로 남쪽 끝머리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른 통영의 주역들이며 뿌리가 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 유례 없는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자랑하는 통영 갓, 전국에 명성을 떨친 통영 소반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나전칠기며 독특한 목공예가 뿌리 없이 되어진 것은 아니다. 선자방 칠방 주석방 등 공방이 이곳에 국영으로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이들 자유와 창조의 정신들은, 고기 배 찔러먹는 뱃놈이라 하시를 하면서도 그 바다에서 신선한 활력을 받아 쇠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피는 맥맥이 흘러 이 땅에서는 아직 숨쉬고 있다. 자긍심 높은 후손들이 치욕을 씹으며 그러나 오기를 잃지 않고 거닐고 있다. 사람들은 성지, 충렬사의 붉은 동백꽃을 마음으로 몸으로 수호하며 이순신이 팠다는 명정리의 쌍우물,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해서 가뭄 때는 통영사람들 유일한 식수가 되는 명정리 우물을 바가지로 퍼올리는 아낙들 마음은 늘 경건했다. 왜국 군선들이 몰리었던 판데목, 어마지두한 왜병들이 손으로 팠다는 판데목, 사람들은 그곳에 설치한 해저터널을 다이코보리라 부른다. 그것은 일본의 참패를 상징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우람한 기둥의 세병관이 학교 교실로 쓰이며 퇴락해가는 것을 슬퍼한다. 어떤 여인이 일본인과 동서한다 하여 그의 부모가 집밖 출입을 아니하고 형제자매 일가친척이 여인을 외면하며 고장사람들 모두가 그 여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 파문으로 철저하게 응징하는 그 치열함, 여하튼 일제 치하의 통영, 남쪽 멀리 멀리 날아가버린 자유의 새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 자랑스러움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 활기에 넘쳐 있다, 통영은. <토지 17> (박경리 지음, 나남출판사) 중에서
|
↧
통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