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고 섬기고 희생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드러나지 않은 힘, 곧 신을 깨달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티아그라하란 무엇인가? 기쁨이나 고통에 따라서 요동하지 않고 반대자에게서 선함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개개인에게 있는 선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사티아그라하의 기초이다. 베푸는 것을 실천하는 모든 과정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르보다야(간디와 비노바 바베가 추진했던 사회운동의 총칭)의 모든 과정도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함을 보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선함을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신의 모습을 단번에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번에 신의 한 부분을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우리의 육신이 존재하는 동안 계속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간디 선생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의 탐구는 계속된다."실제로 선생의 모든 행위는 하나의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티아그라하의 힘이 고통을 참아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티아그라하를 실천할 때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을 인내할 각오를 하는 것과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역량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필요한 경우에는 고통을 참아낼 각오를 해야한다. 그러나 진리를 세우는 일에서 고통 당하는 것을 하나의 조건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사티아그라하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에서 사티아그라하는 그 의미가 지극히 분명하고 강렬하고 건설적이어야한다. 따라사 사랑만이 건설적인 사티아그라하의 주류가 될 수 있다. 반대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클수록 사티아그라하가 더 강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실상 그런 압력은 작고 사랑의 요소가 클 때 사티아그라하는 더욱 강하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 기술 시대에 만일 사티아그라하가 상대를 괴롭히는 방법이 된다면 모든 것은 혼란스로워질 것이며, 사람들은 이성저긍로 생각하는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사티아그라하라는 말에 붙일 수 있는 형용사는 `격렬한, 더 격렬한, 지극히 격렬한'이 되어서는 안되며, `숭고한, 더욱 숭고한, 지극히 숭고한'이 되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고도 원하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폭력은 더 격렬해지며, 그렇게 해도 효과가 없을 때는 끝없이 격렬해진다.
동종요법 이론은 약물의 잠재력이 모체가 되는 병원체의 양만큼 증가한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비록력 운동도 마찬가지다. 비록력 전투는 외적으로 일어나는 싸움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그리고 반대자의 마음 가운데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홀로 걸어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예담 펴냄, 비노바 바베 글, 구탐 바자이 사진, 김진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