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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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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그많은 사람 미워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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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주대사

        

                  조오현


 진작 찾아야 할 부처는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저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 있구나


<적멸을 위하여>(권영민 엮음)


죽이기도 살리기도 쉬운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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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jpg


 또 명절이네요.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나이를 먹으니 “설, 추석, 설, 추석…. 왜 이렇게 명절 밖에 없느냐고요.”

 명절이 왜 이렇게 자주 오느냐는 것입니다. 명절 때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갈등이 붉어지지않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명절이 애초 만들어진 취지대로 축제가 아니라, 비극의 서막인 경우도 적지않습니다.

 

 명절증후군을 겁내는 이들은 많습니다. 일단 남녀불평등한 구조로 인한 아내들의 불만, 왜 시가집에서만 꼭 명절을 지내야하고, 이 많은 노동을 여자들만 감당해야하는지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남성들도 명절 전부터 스트레스지수가 높아지는 아내의 눈치를 살핍니다. 아내를 달래기 위해 장인장모에게 용돈을 얼마나 드려야할지 작은 지갑을 몇번이나 들여다보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왜 명절은 재미도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야하는지 입이 댓자는 나옵니다. 자식들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부모들도 자식들 눈치를 살피며 산뜻하지 못한 표정들을 보고, “내가 저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서운한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게 됩니다. 그런 부모를 보면 형제 자매들은 또 오빠를 향해 “엄마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오빠 지가 그럴 수가 있노”라거나 “새언니는 뭐한게 있다고?”며 마음 상해합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그런 시누이를 향해 “왜 쟈는 시가집에 안가고 친정집에 와서 남의 가슴이 불을 지르노”라며 열을 냅니다. 

 

 이 뿐이겠습니까. 서로 종교가 다르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지, 그래서는 안된다는지, 성묘플 가서도, 절을 해야한다든지, 절을 안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든지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남들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 상하고,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 없지요. 가족들은 너무 가깝고 애증이 깔려있고,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소중하지만, 명절 때만은 가족들과 다름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만큼이나 ‘그럴수도’를 믿어보면 어떨까요. ‘오빠가 언니가,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기 막혀하기보다는 일단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한자락, 말 한마디에 따라 이왕 모인 가족들이 축제의 장을 펼쳐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고 용기를 줘 실의에서부터 일으켜세워줄수 있지요. 그러나 마음 하나 말 한마디 삐딱하게 나감으로써 깊은 상처를 주고, 축제를 비탄의 장으로 만들어버리고, 서로 고통과 증오에 휩싸이게 하고, 싸움판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 하나가 여러사람을 죽이는 살인도가 될수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수술칼과 같은 활인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쉽고, 죽이기도 쉬운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찌그러지지않고 원만한 보름달같은 마음을 쓰도록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의 <조주대사>(불세출의 선승 이름)란 시를 나눕니다. 어찌 이 명절에조차 우리는 이토록 살인검을 휘두르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있구나'란 대목에서 퍼뜩 정신이 듭니다.

 

 ‘진작 찾아야 할 부처는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저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 있구나‘

행복을 느끼지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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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기 방에 혼자 조용히 머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에서 행복공장이 운영하는 홍천수련원의 독방에 쓰여있는 파스칼의 글

불생불멸하는 참마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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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혜충국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남방의 불법이 크게 변해버렸다. 그들은 4대로 구성된 몸속에 신령한 성품이 들어 있어 불생불멸한다고들 한다. 또 이 4대가 파괴되더라도 성품은 파괴되지 안는다하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견해는 인도의 외도들과 같은 것이다.'


 또 장사 스님 같은 분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을 식별하지 못하고 그저 옛사람들이 말해 놓은 신령한 말만 좇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수행자들이 6진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그림자를 자기의 참마음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풍조를 지적한 것입니다. 즉 <능엄경>에서 `백천의 큰 바다는 알지 못

하고 한 방울의 물거품을 전체 바닷물로 안다'고 한 것과 상통합니다. 또 진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리들이 `시방세게가 그대로 바로 나이다. 이 성품은 허공을 둘러싸고 온 법계에 두루하여, 고급과 범성을 가릴 것 없이 두루하고 삼라만상에 가득하다'고들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옛사람이 `한 줄기 풀을 들면 그것이 장육금신이다'라고 하고, 또 `한 털끝마다 부처님 나라가 나타난다'고 한 등등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음식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역시 배는 고픈 것이며, 의복에 대해 말하더라도 추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어찌하겠습니까? 모름지기 깨달음이란 직접 스스로 겪어봐야 합니다. 또한 설사 그대가 깨달았다는 그 자취마저 싹 쓸어버려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알음알이가 도리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찌르고, 좋은 약을 고집하다가 도로어 병을 얻고 마는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언어나 문자로 통할 수 있고 의식으로 도달하여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한량없이 오랜 세월 이전부터 흘러온 생사의 굴레를 금일에 완전하게 끊어버리고, 또 그대가 끊어버렸따는 사실조차도 단박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작은 근기, 천박한 재주로써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정말로 그대의 미혹을 더욱 부채질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생사의 굴레에서 헤매는 것이 너무도 애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선을 그저 말로만 하려는 자들이 얼굴을 돌려 나에게 침을 뱉는다 한들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혜충국사=육조혜능의 법을 이은 남양혜충(?~775)선사를 말한다. 당자곡에들어가 40여 년을 은거했으며 후에 세상에 나와 현종,숙종,대종의 3대 임금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는 대증선사이다.


01 성철 스님이 가려 뽑은 한글 선어록

<천목 중봉 스님의 산방야화-선을 묻는 이에게>(감역, 벽해 원택, 장경각 펴냄)

예수 "내게 만약 사랑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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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람들의 언어와 심지어 천사의 언어를 말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소리나는 징이나 요란한 괭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내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있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서   <고린도전서>1장13절

경쟁심과 선망에 압도되지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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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친이 감사할 일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 하세요

확신에 찬 남친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성, “헤어져야 할지…”


남친은 자신이 99% 맞다 확신

뭐든 잘하는 여성이 이상형


억지로 맞추려 하면 피해의식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사진2.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남친은 30대 중반이 되면서 너무도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고 느꼈기에 본인의 생각이 99% 맞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남친이 처음에는 멋지고 당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로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대화 시간이 길어져 너무 힘이 듭니다.

지나고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얘기로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남친은 파스타 잘하는 여자가 좋은데 제가 맛있게 못 만들었어요. 그럼 맛이 없다는 얘기를 돌려서 얘기합니다. 그러고선 안 먹죠. 후에 이 일로 얘기하다가 그때 자기는 짜증 나고 화나고 속상했다. 처음부터 잘하지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느냐고. 제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으냐. 요리를 해주는 것이 고맙지 않으냐 물으면, 하나도 고맙지 않다. 그걸로 재료가 낭비된 것이 아니냐란 식으로 얘기합니다.


남친은 뭐든지 잘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 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상형이 아니라 나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맘에는 안 차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일로 말다툼을 하거나 제 의견을 얘기하면 언제나 기승전패입니다. 대부분 제 말이 틀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답답하다, 속상하다, 다 후회된다는 말을 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저의 죄책감을 이용해 저를 통제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중간에 이별할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그러기엔 서로 좋은 마음이 많아 다시 조율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상황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헤어지는 것이 답일까요? 풀꽃


상대를 만족시키거나 도움 주는 걸 유독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얼른 알아채서 준비해줍니다. 풀꽃님의 사연을 읽으니 문득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친절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합니다. 나의 편의를 우선으로 생각해주는 건 참 좋은 일이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친절에는 대부분 상응하는 대가가 청구된다는 점에서 불편합니다. 그들은 상대가 감사와 고마움을 표현해주기를, 자신의 친절로 상대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오로지 상대의 호의적인 반응에서 자신이 한 행동의 가치를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친절에 대해 자기도취적인 면이 있어서 자기 식대로 친절을 베풀면 당연히 상대가 고마워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일에 상당히 지쳐 있다는 것을요. 매너와 예의를 지키는 것도 일종의 감정노동과 같아서, 자신이 느끼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표현하는 데서 오는 감정의 부조화를 경험합니다. 고맙지 않지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것,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야 하는 일에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엔 정말 고마운 일이 있어도 진심을 표현하는 일이 힘들어집니다. 긍정적인 감정이 위선과 뒤섞여 오염되었고, 너무 많은 인사치레에 지쳐버렸으니까요.


풀꽃님! 남친이 지나친 원칙주의자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감사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논리적 생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입니다. 감정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억누르고 가짜 감정을 말해야 할 때, 내면에서는 그만큼의 분노가 생긴답니다.


그리고 풀꽃님! 남친이 감사하게 생각할 일을 하지 마시고,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파스타를 만드는 일이 자신에게 먼저 즐거운 일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까지 그에게 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 그만큼의 피해의식이 내면에 쌓이고, 그 피해의식이 바로 상대의 칭찬과 인정을 요구합니다.


여성들이 당당한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면 대부분 그가 당당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도우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주인공과 조력자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당한 남성들은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으며 그 조력자들이 사랑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재능이 모두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남친은 뭐든지 잘하는 완벽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여친에게 당당히 밝히는 사람인가 봅니다. 추측건대 당신은 그런 남친의 이상형에 부응하려고 애쓰고 있고요. 이런 관계에서는 풀꽃님이 계속 위축될 수밖에 없고, 동등한 동반자로서의 관계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풀꽃님! 남친의 이상형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이제 그만두세요. 그의 이상형을 당신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늘 부족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이성, 그러니까 남성 내면의 여성상이나 여성 내면의 남성상은 대부분 비현실적 이상형입니다. 어찌 보면 신적인 존재지요. 그런 이상형과 경쟁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냥 당신입니다. 당신이 그것과 경쟁하는 순간 당신 자신을 잃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경쟁심이나 존경심, 선망 등을 갖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기소외가 시작됩니다. 자신의 본성을 외면하고 그와 동일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헤어질까를 고민하기보다 먼저 당신이 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지키는 법을 찾아보세요. 논리로 그와 논쟁하지 마세요. 우리의 욕구와 느낌, 감정 등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구와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명하세요. 나는 내 의도를 높게 평가해주는 사람이 좋아. 난 그런 사람이야. 난 당신이 친절할 때 행복해져, 그냥 난 그래, 라고 말입니다. 당신의 논리는 반박하지 못하겠지만 완전히 인정하긴 어려워,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 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마치 당신의 남친처럼 당당하게 말이지요. 그렇게 그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당신이 사표쓰기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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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식능력, 심미안, 소양, 감각 등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제4 자본


창의자본 또는 매력자본으로 불려


자유직업인에게 꼭 필요한 자본


---자본독립1.jpg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확실히 계절이 변한 것같습니다. 콘크리트 숲에 갇혀 있던 도시인들을 유혹하는, 너무나 매혹적인 바람입니다. 사무실 밖 먼 하늘을 바라보는 횟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요즘처럼 신비한 하늘색이 계속되는 날에는 대책없는 탈출 욕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1인 기업을 꿈꾸는 사람들, 글과 강연을 하며 ‘스토리 유목민’으로 살고 싶다는 직장인들로부터 부쩍 자문 요청이 많아졌습니다. 멋진 로망이지만, 일과 수입 없는 독립과 자유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기에 저는 우선 이 질문부터 던집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자본이 있나요? 혹시 제4의 자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당황하거나 반발합니다.


자본이 있으면 큰 사업가가 되지 왜 굳이 프리랜서(자유직업인)가 되겠느냐, 조직과 거대 자본을 피해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기 위한 것인데 웬 자본이냐고 항변합니다. 또 자본 없이 오직 맨주먹으로 시작해 성공한 사람들도 많은데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며 흥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자본이라는 단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듯싶습니다.


하지만 독립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열정이 지속가능해야 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독립했다가 차가운 현실 앞에 머리 숙이고 다시 조직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목격합니다. 물론 사업이나 독립에는 운이 따르지만, 그것은 따로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 또는 자산인데, 다만 제가 생각하는 자본의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자본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토지, 건물 같은 부동산 자본입니다. 부모에게 유산으로 받은 땅이 있거나 건물이 있을 경우, 그 부동산을 활용한 자영업을 하면 됩니다. 취향을 살려 커피집, 선물가게, 예술 공방을 여는 경우입니다. 자기 건물이니 임대료가 없고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금융자본과 동산(옮길 수 있는 재산)입니다. 문자 그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 자동차나 중기계, 은행 예금, 증권이나 그림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에 특허, 영업권, 자격증 같은 것들이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잘 아는 자본입니다.


독립을 선언하는 직장인들은 대부분 첫번째와 두번째 자본이 별로 없습니다. 특별히 유산을 받지 않은 다음에야 대개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무형자본(기능, 저작권처럼 형태가 없는 자본)에 특별한 관심을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선 사회 자본입니다. 소위 인맥이라 하는 네트워크의 힘이지요. 특정 업종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긴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사회자본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관시’(关系)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중국에서는 이 자본을 무척 중시합니다. 한국에서도 마케팅, 홍보, 영업, 정보를 다루는 직종이 더욱 그렇습니다. 1인 출판사를 꿈꾸는 이들도 예외는아닙니다.


조직 생활의 인간관계에 지쳐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리랜서 생활은 혼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해야 하기에 오히려 세번째자본이 더 중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유명작가, 인기 작곡가, 많은 팬을 거느린 웹툰작가 등 인기 창작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수요가 몰리지만 그들은 지극히 예외적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회자본에도양면성이 있습니다. 맥주의 거품처럼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허세를 조심해야 합니다. 화려한 인맥을 과시하거나 주고받은 명함의 숫자를 자랑하고, 동창회, 사회인 모임에서 얼마나 많은 감투를 썼는지 떠벌리고 다니는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함은 휘발성이너무도 강하다는 그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직장 문을 나오는 즉시 명함의 효력 또한 끝납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면이기도 합니다. 사회자본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사회독(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이라 하는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네번째는 ‘문화자본’ ‘매력자본’이라 말하는 무형자산입니다. 문화자본은 프랑스의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을 원용한 개념인데, 특히 학술,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본입니다. 특정한 학위, 전공, 외국어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감식능력, 심미안, 소양, 감각, 창조적인 아이디어 같은 비정형화된 것들도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창의자본’이라 할수도 있습니다.


매력자본은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교수였던 캐서린 하킴이 발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논문 <매력 자본>(Erotic Capital)을 바탕으로 펴낸 책 제목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 건강하고 매력적인 몸, 뛰어난 사교술, 유머감각, 패션 스타일 등을 말합니다. 방송, 강연 등 대중을 상대로 하는프리랜서에게 더 중요시되는 자본입니다.


실력 못지않게 매력이 중시되는 세상이기때문입니다. 글과 말에도 남다른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스타일,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지식, 문화, 예술 분야에 종사하길 원하는 프리랜서들에게는 특히 이 네번째 자본이 중요합니다. 이 자본은 계량화하고 객관화하기 힘들다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주관적 가치와 시장이 평가하는 객관적 가치의 차이 때문입니다.


많은 프리랜서들이 겪는 혼란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독립을 원한다면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제4의 자본을 갖고 있겠지요, 물론?


당신이 사표쓰기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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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식능력, 심미안, 소양, 감각 등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제4 자본


창의자본 또는 매력자본으로 불려


자유직업인에게 꼭 필요한 자본


 

---자본독립1.jpg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니 확실히 계절이 변한 것같습니다. 콘크리트 숲에 갇혀 있던 도시인들을 유혹하는, 너무나 매혹적인 바람입니다. 사무실 밖 먼 하늘을 바라보는 횟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요즘처럼 신비한 하늘색이 계속되는 날에는 대책없는 탈출 욕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1인 기업을 꿈꾸는 사람들, 글과 강연을 하며 ‘스토리 유목민’으로 살고 싶다는 직장인들로부터 부쩍 자문 요청이 많아졌습니다. 멋진 로망이지만, 일과 수입 없는 독립과 자유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기에 저는 우선 이 질문부터 던집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자본이 있나요? 혹시 제4의 자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당황하거나 반발합니다.


자본이 있으면 큰 사업가가 되지 왜 굳이 프리랜서(자유직업인)가 되겠느냐, 조직과 거대 자본을 피해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기 위한 것인데 웬 자본이냐고 항변합니다. 또 자본 없이 오직 맨주먹으로 시작해 성공한 사람들도 많은데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며 흥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자본이라는 단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듯싶습니다.


하지만 독립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열정이 지속가능해야 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독립했다가 차가운 현실 앞에 머리 숙이고 다시 조직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목격합니다. 물론 사업이나 독립에는 운이 따르지만, 그것은 따로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 또는 자산인데, 다만 제가 생각하는 자본의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자본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토지, 건물 같은 부동산 자본입니다. 부모에게 유산으로 받은 땅이 있거나 건물이 있을 경우, 그 부동산을 활용한 자영업을 하면 됩니다. 취향을 살려 커피집, 선물가게, 예술 공방을 여는 경우입니다. 자기 건물이니 임대료가 없고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금융자본과 동산(옮길 수 있는 재산)입니다. 문자 그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 자동차나 중기계, 은행 예금, 증권이나 그림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에 특허, 영업권, 자격증 같은 것들이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잘 아는 자본입니다.


독립을 선언하는 직장인들은 대부분 첫번째와 두번째 자본이 별로 없습니다. 특별히 유산을 받지 않은 다음에야 대개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무형자본(기능, 저작권처럼 형태가 없는 자본)에 특별한 관심을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선 사회 자본입니다. 소위 인맥이라 하는 네트워크의 힘이지요. 특정 업종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긴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사회자본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관시’(关系)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중국에서는 이 자본을 무척 중시합니다. 한국에서도 마케팅, 홍보, 영업, 정보를 다루는 직종이 더욱 그렇습니다. 1인 출판사를 꿈꾸는 이들도 예외는아닙니다.


조직 생활의 인간관계에 지쳐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리랜서 생활은 혼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해야 하기에 오히려 세번째자본이 더 중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유명작가, 인기 작곡가, 많은 팬을 거느린 웹툰작가 등 인기 창작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수요가 몰리지만 그들은 지극히 예외적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회적 자본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맥주의 거품처럼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허세를 조심해야 합니다. 화려한 인맥을 과시하거나 주고받은 명함의 숫자를 자랑하고, 동창회, 사회인 모임에서 얼마나 많은 감투를 썼는지 떠벌리고 다니는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함은 휘발성이너무도 강하다는 그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직장 문을 나오는 즉시 명함의 효력 또한 끝납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면이기도 합니다. 사회자본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사회독(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이라 하는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네번째는 ‘문화자본’ ‘매력자본’이라 말하는 무형자산입니다. 문화자본은 프랑스의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을 원용한 개념인데, 특히 학술,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본입니다. 특정한 학위, 전공, 외국어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감식능력, 심미안, 소양, 감각, 창조적인 아이디어 같은 비정형화된 것들도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창의자본’이라 할수도 있습니다.


매력자본은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교수였던 캐서린 하킴이 발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논문 <매력 자본>(Erotic Capital)을 바탕으로 펴낸 책 제목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 건강하고 매력적인 몸, 뛰어난 사교술, 유머감각, 패션 스타일 등을 말합니다. 방송, 강연 등 대중을 상대로 하는프리랜서에게 더 중요시되는 자본입니다.

실력 못지않게 매력이 중시되는 세상이기때문입니다. 글과 말에도 남다른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스타일,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지식, 문화, 예술 분야에 종사하길 원하는 프리랜서들에게는 특히 이 네번째 자본이 중요합니다. 이 자본은 계량화하고 객관화하기 힘들다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주관적 가치와 시장이 평가하는 객관적 가치의 차이 때문입니다.


많은 프리랜서들이 겪는 혼란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독립을 원한다면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제4의 자본을 갖고 있겠지요, 물론?


컬트(사이비)와 공동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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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트(사이비 단체)가 공동체와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개인의 독립적인 영적 성장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영적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로 구성된 컬트에서는 개인의 독립적인 영적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지도자가 개인의 무지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이용하여 맹목적인 추종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공동체를 수단으로 하여 개인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공동체의 성장을 추구하거나 지도자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은 모두 컬트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대안적 생활을 고민하는 생태공동체 만들기

  <더 나은 삶을 향한 여행, 공동체>(코린 맥러플린, 고든 데이비드슨 지음, 황대권 옮김, 생각비행 은혜공동체 펴냄)에서.

인간은 이기적이기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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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그러한 이기심을 극복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종이라고 거의 단정하고 있다. 이제껏 내가 들은 말들을 생각해도 희망을 느끼기란 분명히 어렵다. 이를테면 `적자생존'이 그렇다. 삶이란 결국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며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상당수 과학자들이 새로운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신뢰와 협력의 문화가 오히려 진화론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저서 <지구 정복자>에서 진화론은 협력하는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윌슨은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인간의 유래>는 <종의 기원>이 발간된 지 12년 후에 출간되었는데 다윈은 이 책을 통해 인류 진화의 핵심이 바로 협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잠깐,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하지 않았나? 이를 두고 우리는 결과야 어떻든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런데 사실 다윈은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분명히 말해서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허버트 스펜서였다. 그리고 존D.록펠러가 기업경영을 `적자생존'으로 표현하면서 초기 자본자들이 이 말을 접하게 되었다. 록펠러는 적자생존을 자연의 법칙이자 신의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앤드류 카네기는 1889년에 출간한 저서 <부의 복음>을 통해 적자생존이 인류를 위한 최선이라는 믿음을 내보였다.


 이렇게 해서 적자생존의 기운이 우리 안에 흐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윈은 오히려 "이기적이고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지만, 협력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때문에 협력이 진화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놀랍지 않은가? 다윈의 주장은 인간이 협력적이고 협동적일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세실 앤드류스 지음, 강정임 옮김. 한빛비즈 펴냄)에서

대화의 진정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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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의 진정할 역할이란 상대의 본질을 끌어내고, 그렇게 찾은 본질에 동의와 지지를 보내고,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세실 앤드류스 지음, 강정임 옮김, 한빛비즈 펴냄)에서

남한산성 치욕 담은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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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굴욕1.jpg

 

일요일인지라 서울시내 도로가 휑하다. 덕분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유시간만큼 잠실 석촌호수 둘레길을 걸었다. 어르신은 건강때문에 젊은이는 다이어트를 위해 걷는다. 필자는 시간이 남아 걷는다. 같이 걷고 있지만 걷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태극기 세대는 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치이야기를 나누고 맞은 편 놀이공원에는 기계음과 함께 자지러지는 소리가 합해지면서 또다른 조화음을 만들어 낸다. 왁자지껄한 경상도 사투리 한 팀이 지나가더니 이내 젊은 새댁과 어린 딸이 눈을 맞추며 일본말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걸어간다. 뒷모습은 한국의 여느 모녀와 다를 바 없다. 심심찮게 서양인도 걷고 있고 게다가 승복까지 끼어들었다. 두 대의 유모차가 지나가는데 한 대는 아이가 타고 한 대는 비었다. 반려견이 같이 걷고 있는 것을 보니 개 유모차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호수가의 새로운 길거리 문화로 진화 중이다.

 

본래 호수가 아니였다. 한강 본류인 송파강과 지류인 신천강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었다. 지류는 본류가 되고 본류는 지류가 된 것이다. 이내 지류에는 퇴적물이 쌓이면서 물흐름이 더 느려졌고 1970년대 일부 인위적 매립을 거친 후 호수로 바뀌었다. 강남시대가 열리며 대로가 뚫였고 호수 가운데로 다리가 생기면서 호수마저 동서로 나뉘었다. 물에는 유유히 오리배가 다니고 교각 위로는 줄지은 차들의 행렬이 바쁘게 지나간다. 이런저런 주변 풍광에 취해 있는데 호주머니 안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약속시간인데 어디냐?”고 묻는다. 이런! 너무 멀리 와버렸군. 땀나게 반대편을 향해 급히 걸었다.

 

본업을 마친 뒤 다시 잰걸음으로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찾았다. 500여년 전 당시 청나라 황제공덕비는 비석의 규모도 만만찮고 돌의 품질도 최고급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거북받침은 두 개다. 한 개는 홈만 파여있을 뿐 등짝은 비어 있다. 황제비석을 올리기에 너무 작다고 퇴짜를 맞은 증거물이라고 구전은 전한다. 하지만 몇백년의 세월이 흐르니 주변의 빌딩숲에 가려 큰 강가에 우뚝한 돌비석을 세우니(有石巍然大江之頭)”라는 비문의 마지막 구절이 무색할 만큼 왜소해졌다. 비석보다 백배이상 높은 길 건너편의 123타워에 대한 수식어로 더 어울리는 문장이 되었다.

 


삼전도 비석1.jpg


삼전도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패전기록이다. 승자가 알아서 기록하면 될 일을 굳이 패자의 손을 빌어 기록하게 했다. 침략자의 대륙적 배포와 관대함 그리고 은혜를 찬탄하는 것이 기본골격이다. 문장가들은 두고두고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 보다 잠시 비겁한 게 낫다는 계산아래 서로 손사레를 쳤다. 현존 비문도 지은이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임금의 분부를 받자와할 수 없이 쓴 비자발적 글이라는 상투적 형식을 빌어 면피하고자 했다.  명필 역시 이 글씨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붓을 잡지 않았다고 야사는 전한다약소국의 힘없는 석수장이와 문인 그리고 명필의 침묵시위가 알게 모르게 서려있는 셈이다.


비석 역시 뒷날 땅에 묻히기도 하고 한강물에 던져지고 혹은 스프레이로 화풀이를 당했지만 용케도 큰 훼손없이 오늘까지 건재하다. 우여곡절 끝에 고증을 거쳐 이 자리를 차지했고 철골기둥과 캐노피 지붕까지 덧씌워진 국가문화재가 되었다. 조선도 청()도 이미 없어진 나라이며 굴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심리적 여유도 한 몫 했으리라. 한문 만주어 몽골어로 동시 기록된 글로벌 비석이지만 한글이 없는 관계로(가끔 사극이나 소설로 환기되긴 하지만) 우리에겐 이미 잊혀진 과거사가 되었다. 석촌호수가 예전에는 한강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아버지 이신은 왜 그런삶을 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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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JPG» 이은선 교수가 아버지 이신 목사가 그린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뛰어난 화가이자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한국 교회의 주류로부터 철저히 소외를 자처한 삶을 택한 이신(1927~81)의 초현실주의(슐리얼리즘)을 조망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돌을 맞아 탐욕과 맘몬이 신을 대신하는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영감을 주는 이신의 삶을 탐구하려는 신학자들의 공부모임을 통해 탄생했다. 이신박사의 딸인 이은선(세종대· 전여신학자협의회장)교수와 남편 이정배 전감신대 교수·목사(전기독자교수협의회장)가 강원도 횡성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택에서 여는 현장아카데미의 공부모임엔 김성리(인제대) 교수, 박일준(감신대) 교수, 손원영 한국영성예술협회 예술목회연구원장, 신익상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은록 미술비평가 및 기획가, 이경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 등이 함께 했다.

 

이신.JPG» 이신 화가 목사전남 여수돌산에서 태어난 이신은 일제 때 명문인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던 은행에 취직했지만, 결혼까지 한 몸으로 상경해 감신대에 입학해 새 삶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직전 신학대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이신은 6·25가 터지자 고향인 전라도로 돌아가 활동하며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환원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한국 교회의 고질병이던 모든 교파의 분열을 거두고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 외국 선교사의 입김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교회로서 일치하자는 성령 운동이었다. 그는 주류 교단을 두고, 소수파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고난의 삶을 선택했다. 서울과 충청도 일대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이신은 40살이라는 늦깎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서울 명륜동 산동네에 두고 온 아내와 4남매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하는 고달픈 유학생활을 하며 미국 남부의 명문 밴더빌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71년 귀국했다.

 

 미국 출신 박사가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의 출셋길은 보장됐다고 여겼다. 그는 영어와 일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능통한 지성이었지만, 소수파였기에 산동네 목회를 계속 해야 했다. 그는 산동네에서 정신지체아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평생 ‘한국적 그리스도교회’를 꿈꿨던 이신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억압과 침략으로 늘 깨달음 없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한민족이 신앙마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가 성서를 읽고 깨달은 대로 성서가 우리들의 역사와 삶에 가르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오직 ‘밥’만이 추구됐던 60년대 미국 유학도로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믿음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갖기 이전부터 이미 믿음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믿을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주어진 자유로 인해 자유로운 존재다.

 

  -스위스의 사상가 막스 피카르트의 글


 

 다음은 딸인 이은선 교수의 글이다.

 

 -이신책.jpg» 이신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책 아버지 이신은 이 믿음으로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택했고, 6‘25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가족이 흩어지는 경험 속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갔으며, 그 교회에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성서 해석과 성령 이해의 차이로 그나마 안정된 자리를 떠나야 했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일, 돌아와서도 여전히 안정과 안위 대신에 산동네 무허가촌의 궁핍한 삶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그 거쳐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산골로 내겨가신 일,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믿음의 열매들이었다고 할수 있다. 

 

 그는 당시 미국 유학까지 한 박사였지만 주변에는 항상 가난한 민중과 학벌이 높지 않은 변방의 목회자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지만 병원에 가는 대신 기도원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의 한 좁고 허름한 방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은(天恩)”을 말하며 가족들에게 잘 지낼 것을 당부하고 기쁜 모습으로 가셨다. 어디에서 그런 믿음의 지속하는 힘이 나왔으며, 어디에 근거해서 그는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읽고 쓰고 선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지않으면서 또 동료들을 모아 세상의 달라짐과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그의 믿음이 단순한 그의 의지가 아니고 주어진 것이고, 그 믿음이 ‘신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비록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기원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앞서 주어진 것에 대한 의식을 잘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자아의 주관으로 돌리고, 그래서 신도, 전통과 권위도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하나의 기적처럼 보인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인간 삶을 어쩔 수 없이 ‘조건 지어진 존재’로 보지만 그 삶의 활동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행위’라고 하면서 그 행위는 ‘결과의 예측불가능성’과 ‘과정의 환원불가능성’ 그리고 ‘작자의 익명성’이라는 불행한 요소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이신의 딸 이은선 (세종대)교수

 

 <환상과 저항의 신학-이신의 슐리얼리즘 연구>(김성리·박일준·손원영·신익상·심은록·이경·이은선·이정배·정혁연 함께 씀, 현장아카데미 편, 동연 펴냄)에서

 

죽고 사는 것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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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을 할 때는 가장 먼저 생사심(生死心)을 해결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내야한다. 그리고는 바깥 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 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主宰)하는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만약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이 순간순간 멈추지 않고 따라다니니, 이것을 어떻게 쫓아 버릴 수 있겠는가?


 오직 이 한 생각만을 수단 방편으로 삼아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아닐 길을 찾듯 해야 한다. 한 발자국도 잘못 걸어서는 안 되고, 한 발자국도 그대로 머물러서도 안 되며, 한 생각도 다른 생각을 내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타오르는 불도 돌아보지 말고 목숨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이 도와주기를 바라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도 말고 잠시 머물러 있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는 곧장 앞으로 달아나 우선 불길 밖으로 뛰어나오는 길만이 묘수이다.


 03성철스님이 가려 뽑은 한글 선어록

<박산무이 스님의 참선경어-참선수행자를 죽비로 후려치다>(감역, 벽해 원택, 장경각 펴냄)에서

예수는 이혼에대해 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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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가 여성의 존엄성을 옹호하기 위해 했던 가장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결혼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그의 결혼관은 엿어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는 생각이었다. 유대법에 따르면, 여성은 두 명 이상의 남편을 소유할 수 없었지만, 남편은 법적으로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다.(물론 일부다처제가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도 흔한 문화는 아니었지만 종종 그 예를 찾을 수는 있다. 헤롯이나 요세푸스가 바로 그 예다.)


 이혼도 남성이 주도하는 아주 단순한 행위였다. 이 두 행위 모두에 있어 여성은 남성이 원할 때 그리고 그럴 능력이 있을 때 취해지고 버려지는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중적 도덕률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일부일처제를 주장하고 이혼을 기본적으로 제한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해 전통적 문화에 도전했다: 다른 말로 여자와 남자 모두 서로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의 견해를 보다 정확히 그리고 확실하게 알기 위해선 당시 랍지들간의 논쟁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샤마이(shammai)학파는 여자가 간음했을 경우에만 이혼이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힐렐(Hillel)학파는 어떤 이유든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유대문화에 팽배해있던 문화는 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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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어를 포함한 여러 고대 언어를 연구한 학자인 앤 나일랜드의 최근 연구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어떤 이유에서건 남편이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느냐를 물었던 것이고 예수는 성적 부도덕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는 단지 무차별적인 이유로 이혼을 악용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예수의 대답이, 그가 살던 당시나 그 후로, 사람들이 `성적 부도덕'이 아닌 이유로는 절대 이혼을 하는 사례가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견해에 관한 이 잘못된 인식이 향후 기독교 교회 내에 자리를 잡으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서양 기독교 교회가 잘못된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아주 엄격한 법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이혼 행위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예수가 이미 마태복음 19장9절(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에서 부정한 경우에 대해 분명히 허용한 이혼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동방교회에서는 이처럼 과도할 정도로 엄격한 이혼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혼은 적법하게 허용되었다.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레너드 스위들러 지음, 이성청 옮김, 신앙과지성사 펴냄)에서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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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유형 -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

핵심동기 :기쁨

자신의 시각 :즐거움, 열정, 호기심

 

타인의 시각 :회피, 다재다능, 낙관적








7유형 사람들은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김인숙1.jpg

7유형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밝은 에너지로 좋은 분위기를 내고 모든 것을 활기 있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기분을 들뜨게 하지요. 스스로도 ‘에너지를 주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우울한 사람이 7유형의 친구를 만나면 그들의 밝은 에너지를 받아 활기를 되찾습니다. 여행에 대한 열망이 무척 강한 이들은 여행의 동반자로 참 좋은 친구이지요. 


낙관주의자인 7유형 사람들은 삶을 철저히 향유하고 체험하려 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즐거움을 주는 일은 무엇이건 중단하기 어렵습니다.


사례 1> 7유형의 영화나 TV채널 선택은?

         - 즐기는 것 : 코믹, 로맨틱, 액션, SF, 예능, 밝은 드라마, 맛집, 여행 등

         - 회피하는 것 : 뉴스, 토론시사, 병원 이야기, 전쟁, 슬픈 다큐멘터리 등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는 7유형은 현실의 고통도, 고통스런 과거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장벽을 장벽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험악한 현실 속에서도 환상적이고 달콤한 이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곤경은 어떻게든 해소가 된다고 믿지요. 


사례 2> 7유형이 난민 혹은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면? 

         - 가상공간에서라도 현재를 잊고 상상의 세계를 만든다. 


7유형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두루두루 잘 지내려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합니다. 대부분의 7유형은 유머감각과 언어유희가 좋아 마치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마신 것처럼 분위기 연출을 잘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이들이 노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낯선 사람과의 어색함이 싫어서 더 열심히 즐겁게 노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픔을 나눌 겨를이 없습니다.  


사례 3> 부부싸움을 한 후, 먼저 화해를 청함.  

       

사례 4>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 7유형의 친구를 찾지 않는 이유는?

         ① 오히려 그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서.

         ② 내 고통을 그가 가볍게 대할 것 같아서.  


         

이것이 지나치면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7유형 자신은 의욕과 사기를 잘 북돋아 준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타인은 함께 즐기기는 좋으나 깊은 관계 맺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7유형 스스로도 순간 순간 관계에 만족하지요.  


7유형 사람들은 모든 고통을 회피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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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유형 사람들은 삶이란 늘 즐거움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합니다. 이들은 육체적, 심리적 등 모든 고통을 회피합니다. 우울, 슬픔, 상실로 채워진 감정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사례 5> 애인과 이별했을 때 : 

         - 자유가 좋지. 진작 그 구속에서 벗어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7유형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보기 어려워하지요. 이들의 회피는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방어 기제입니다. 회피에서 오는 두려움을 대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 째,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신경을 쓰지 않거나 아예 덮어두려 합니다. 

두 번째, 항상 바쁘게 만듭니다. 여러 가지 일이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지요. 바쁜 척을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고 싶지 않기에 자신의 한계를 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합니다. 


7유형 사람들은 실패로 인한 자신의 무능함과 무능력이 드러나서 질책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본인이 힘든 것을 가족에게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곧 망할 경우라도 더 열심히 일하면서 근심, 걱정을 보이지 않게 하려 합니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 도피이지요. 


사례 6>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리운 마음을 숨기고픈 7유형의 행동은? 

         - 잠잘 시간을 최소화해 일에 매진한다.


현재의 부정적인 면을 직시하기 싫어하는 이들은 그래서 현재의 곤란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너무 슬프거나 심각해지면 능숙하게 화제를 바꾸거나 대화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그래요, 당신은 금방 좋아질 거예요.”,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니잖아.”라는 말과 같은 미사어구로 바꿉니다. 너무 깊이 빠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지나치면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7유형 사람들이 벌려 놓은 일들을 주변 사람들은 떠맡아 해결 짓기에 바쁩니다. 

때문에 7유형 사람들은 마치 책임 회피자, 책임 전가자처럼 보여 집니다. 


덜 괴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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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지 못한 인간은 허물과 함께 썩는다. 고통을 그저 걸림돌이라 여기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우리를 더욱 얕잡아보고 더욱 잔혹하게 짓밟을 것이다. 반면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 더 나은 인생으로 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보여준다면, 고통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나는 혈육을 잃었지만, 용기를 얻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 내가 증인이다. 시련은 미래가 보내주는 선물이다.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줄 았았던 일에 대한 치유보고서

 <심리학자의 인생실험실>(장현갑 지음, 불광출판사 펴냄>에서


 장현갑

 서울대 심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와 영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가톨릭 의과대학 외래교수, 한국심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명상학회 명예회장, 한국통합의학회 고문, 마인드플리스 스트레스 대처연구소 소장 등을 지내고 있다. 

 2001년부터 세계인명사전인 마르퀴즈 후즈후 5개분야에 걸쳐 9년 연속 등재되었다. 2005년 영국국제인명센터로부터 `100대 교육자'에 선정되었고, 1006년 `명예의 전당'에 영구 헌정되었다. 

 저서로는 <마음 vs 뇌>, <스트레스는 나의 힘> 등이 있고, <붓다 브레인>, <마음이 몸을 치료한다>. <이타적 인간의 뇌> 등을 번역했다.


화내는건 행복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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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특징과 대치법


용수분노.jpg


 분노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에너지 입니다. 이 에너지에 체념하거나 막을려고 하면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에너지는 맑고 분명합니다. 화가 나면 마음이 굉장히 명확합니다. 

 이 에너지는 강력합니다. 기운이 없을 때도 화가 나면 기운이 생깁니다. 자연산 각성제 입니다. 

 금강승에서는 분노의 본질은 거울같은 지혜라고 합니다. 일어나는 순간 본질을 인지하면 힘을 주고 마음을 맑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화가 나는 이유는 성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행복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행복하고 싶은 마음은 순수한 마음이며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행복하고 싶은 마음(사랑)에 장애가 생기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도 남을 싫어하는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순수하지만 분노와 미움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분노에 빠지는 것은 표출이라고 합니다. 화를 내면 후회를 하고 화내는 습관을 키우게 됩니다.

 분노를 참는 것은 억압이라고 합니다. 일어나는 마음을 막을려고 없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마음을 싫어합니다. 분노와 싸우면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불편합니다. 화를 자꾸 참다보면 병이 생기고 어느 날에 크게 폭발하게 됩니다. 화를 참는 것도 분노의 습관을 키우는 것입니다.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직접적이고 방법은 분노를 지켜 보는 것입니다. 분노속에 릴렉스 하는 것입니다. 몸에도 마음에도 힘을 빼는 것입니다. 분노의 생각을 담담하게 지켜 보는 것입니다. 분노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쉽고 평범해서 사람들이 잘 못 합니다. 그래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분노를 접하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한 것입니다. 연습, 연습, 연습! 경험을 쌓야합니다. 


 이와같이 분노와 친해지려면 화가 나는 순간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괜찮습니다. 실수로 다음에 더 잘 알아차리게 됩니다. 점차적으로 알아차림 이 더 일찍 옵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날 위험이 있을 때 분노를 기다리듯이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저는 화를 내서 화를 잘 알아차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음번에는 마음의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불꽃과 비유합니다. 처음에는 끄기가 쉽지만 그냥 두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분노를 잡을 수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도 분노도 커지기전에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으로 분노와 많이 많이 친해졌습니다. 수많은 과학 연구가 확증하는 방법 입니다. 이 방법은 어렵지는 않지만 익숙해져야 합니다. 분노는 향연기와 같이 실체가 없고 이내 사라지는 환영입니다. 분노를 따라가거나 분노와 싸우면 꽤 오래 갈 수 있지만 분노를 그저 바라 보면 향연기처럼 바로 흩어집니다. 이 방법은 특별하지 않고 평범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기대하지 마세요. 분노가 지나갔으면 이 방법을 잘 활용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방법을 활용해도 분노의 흔적이 많이 남습니다. 연습을 할 수록 분노가 남기는 부작용이 약해집니다. 저는 여전이 화는 나지만 화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분노에 속지 않고 분노의 에너지속에 몸도 마음도 쉬세요. RELAX.

홍동완 목사의 심방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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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리교회1.jpg» 강원도 홍천 산골길 끝에 있는 도심리교회



우리의 영적 성장은 의외로 보잘것없게 여겨지는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문명은 극도의 편리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이것은 쾌락주의와 허무주의로 이끕니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허무한 것들 속에서 자신을 소모하다가 죽어간다.” 는 표현이 꼭 맞는 것 같습니다. 


하루를 돌아보면 나의 생각이 얼마 나 허무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허무한 일들에 바쁘고, 허무한 것에 나의 모든 열정을 쏟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우리 육체의 절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시련을 주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허무한 것들’에게서 벗어나게 합니다. 시련은 우리의 영혼을 자극해서 허무한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작은 불편을 받아들일 수만 있어도 놀라운 영적 성장의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사 람들의 깊은 영성은 우리와 다른 환경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불 편을 불편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겼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불편함 가운데 자발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일 예배 후 마을에 심방을 갑니다. 심방을 할 때마다 늘 차 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옛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을 들고 산과 들을 발로 다닌 것을 생각하면서 걸어 다니기로 했습니다. 공동체에서 마을의 가장 먼곳은 약 4.5Km가 됩니다. 왕복으로는 약 두시간 거리입니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방문할 가정을 위해 먼저 중보 기도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도 늘 걸어 다니셨습니다. 주님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해서 당시의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던 말을 타고 다니지 않으셨습니 다. 주님은 걸으시면서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것 만큼 훌륭한 기도 시간은 없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내가 차를 가지 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놀라면서 “목사님, 제가 차로 모셔드 릴까요?”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홍 걸어.jpg» 도심리마을 반장을 겸하고 있는 도심리교회 홍동완 목사



 지금 농촌은 많은 부분이 기계화 되어 있습니다. 밭 가는 트랙터, 풀 깎는 예초기, 나무  자르는 엔진 톱 등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농기계를 구입합니다. 

 공동체 기도의 집의 난방 시설은 나무로 하는 화목 난로입니 다. 생각만큼 성능이 썩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기도의 집 난방을 하는 데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쉽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제일 큰 어려움입니다. 새벽에 불을 붙이는 것도 어렵지만 불을 잘 볼보지 않으면 쉽게 타 버리고 열은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새벽에는 불을 지피지 않고 기도회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의 집에 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춥다고 몸을 움츠리고 새벽기도 시간을 갖지 않게 되자 저의 영성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 니다. 


 어느 날, 비록 춥더라도 ‘기도의 집’에 가서 기도의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자세 였습니다. 느낌으로는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앉아 있는 시간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먼저 그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시간, 어떤 환경에 관계없이 존재합니다.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도 무소부재한 영성을 소유해야 합니 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시간, 장소 혹은 환경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방해하기 위한 수많은 환경들이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죄가 만들어 내는 환경입니다. 우리가 죄의 환경 가운데 쉽게 빠져드는 것은 죄가 주는 매력 때문입니다. 죄는 결코 우리들을 두렵게 만들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과 만족을 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것은 광명의 천사로 우리 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죄가 우리들 에게 주는 거짓 약속들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불편한 환경을 피하라고  합니다. 죄는 우리들에게 쉽게, 편하게 거짓을 행하라고 유혹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땀과 눈물을 좋아하지 않습니 다. 


 죄는 궁극적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 과 나 사이에서 제 삼자인 죄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활동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환경입니 다. 나의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어떤 환경도 극복하지 못할 환경은 없습니다. 바로 나만 극복된다면 모두 극복될 수 있습 니다. 작은 불편함의 환경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나’라는 환경을 넘 어서는 것입니다. 



-교회안.jpg» 12평인 도심리교회. 이곳은 교회나 예배당이라고 하지않고 기도의집이라고 부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맨발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 거했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눈이, 빙판길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프란치스코라고 불리는 이현필 선생은 남원에서 지리 산 줄기 “서리내”라는 산중에서 엎드려 기도할 때면 종일 땅에 엎드려서 일어날 줄 몰라 산의 까마귀들이 죽은 송장인 줄 알고 날아와 뜯어 먹으려고 부리로 쪼아 댔다고 합니다. 


 동일한  환경이지만 그것을 이기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부러 금욕과 고난의 환경 가운데로 들어간 이유는 바로 그 환경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 라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영적 여정에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무기력을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할 수 없고 어떤 환경 탓으로 돌릴 수도 없습 니다. 하나님과 연합을 위해 이제 내 주변의 작은 불편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여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그것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십시오. 거기에는 우리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편한 안락의자에서 뛰어 일어나 딱딱 한 바닥에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원수 앞에서 용기를 내어 “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수문을 열었을 때 뿜어나오는 댐의 물처럼 막혀 있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대문을 여는 데는  대문보다 몇 백 배 작은 열쇠면 충분합니다. 작은 불편이라는 열쇠를 사용해 보십시오.

몸을 깊게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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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노자는 인생의 큰 우환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라고 통찰했다. 사실이 그렇다. 몸을 가진 생명체는 먹어야 하고, 병고에 시달려야 하고, 폭력에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 노쇠의 슬픔을 감내해야 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몸이 견디는 고통은 팔만사천가지 번뇌만큼이나 무겁다. 절집 대웅전 앞에서 기와를 시주하면서 적는 소원에는 대부분이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달라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몸은 삶의 장애인가?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몸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경전 곳곳에서 몸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속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튼튼하고 힘이 넘치는 청춘도 시간이 흐르면 피부가 거칠어지고, 늙고, 쇠약해지고 흩어진다. 그러니 몸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믿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 몸에 대한 불건전하고 과도한 애욕은 타는 목마름과 같은 갈증을 주기 때문에,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 애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집착을 없애기 위해 수행자들은 몸의 속성을 낱낱이 해부하는 명상을 한다. 보기에는 아무리 예쁜 얼굴과 몸이라도 뼈와 해골, 여러 가지 내장 기관, 오줌과 똥, 피고름 등으로 이루어진 몸의 구조를 통찰하면 맹목적인 탐착에서 벗어나 청정함과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몸을 경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몸을 경건한 대상으로 사유하고 있다. 늘 건강에 유념해야 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고 한다.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수년간을 극단적으로 음식을 절제했다. 그 결과 기력은 쇠약해지고 정신은 혼미했다.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위험하고 불안한 속성을 가진 몸이지만 결코 혐오하거나 학대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몸이 건강할 때 바른 정신으로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수자타라는 소녀가 공양한 유미죽을 먹고 기운을 얻어 수행한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모니는 정신과 감각을 가진 생명은 존엄하다고 했다. 따라서 타인의 몸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생명을 죽임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이 일을 나에게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때리지 마라”. 신체적 폭력은 곧 인간 존엄성에 대한 위해임을 역설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 이르러 몸은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되고 있다. 오늘날 몸은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때로는 탐닉과 과시의 대상이 된다. 욕구 충족을 위하여 자본주의는 몸을 기꺼이 상품으로 만든다. 또 하나! 돈을 지상의 최고가는 가치로 여기는 이들은 몸에 대해 서슴없이 위해를 가한다. 가습기 사건, 살충제 달걀, 유전자 조작 식품 등이 우리의 몸을 위협하고 있다. 부끄러움도 죄스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몸은 소모품이 아니다. 몸 철학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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