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정책까지, 갈등을 변화 에너지로
[328호 커버스토리] 박지호 한국갈등전환센터 센터장
<복음과상황> 옥평호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 ▲ 2박3일간 진행된 신고리 5·6호기 시민참여단 종합토론회 장면 (사진: 박지호 제공)
어느 사회 어떤 조직이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갈등은 항존할 터, 그럼에도 한국 사회(그리고 개신교회)의 갈등지수는 특별히 높다. 2009년 어느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에서 개발한 ‘사회갈등지수’(social conflict index)에서 한국은 줄곧 OECD 국가 중 상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마다 골이 깊어진 갈등은 해소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갈등을 정의에 부합하면서도 상호 화해에 이르도록 풀어나갈 수 있을까? 이론과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지난 5년 동안 크고 작은 공동체의 갈등을 화해의 에너지로 바꾸는 일을 해온 박지호 한국갈등전환센터 센터장을 만났다. 그는 작년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에 참여하여 국민숙의 과정에 기여한 바 있다. 일상의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 분쟁부터 국가정책에 대한 갈등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충돌과 대립의 현장을 경험한 그에게서 갈등 해결의 현실성 여부를 들었다.
― 5년 전 한국에 와 갈등전환센터를 세웠다. ‘갈등전환’이라는 게 무엇인지 간결하게 설명한다면?
간단히 말해 갈등전환(conflict transformation)은 갈등을 공동체의 변화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갈등 자체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고, 그 에너지가 개인과 공동체를 건설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할 때 “갈등을 변화의 신호로 인식해야 한다”고 쉽게 설명하곤 한다. 갈등을 변화의 신호로 읽게 되면, 개인, 관계, 문화, 구조 등 어디에 변화가 필요한지 볼 수 있게 된다. ‘제거’가 아닌 ‘변화’의 렌즈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인식과 접근으로 지속 가능한 문제 해결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 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대학에서 ‘갈등전환학’을 공부했다. 생소한 학문 분야인데.
갈등해결학의 역사는 무척 짧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갈등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관리와 해결’에만 초점을 두는 한계가 있었다. 갈등을 통한 건강한 사회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변화 프로세스 구축이나, 문화나 관계적인 차원의 화해와 치유가 필요하다. 그런 근본적이고 지속 가능한 갈등 해결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 갈등해결·갈등전환학이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메노나이트의 신학과도 연관이 있나?
오랜 기간 형성된 평화주의 신학과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영성적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하지만, 갈등전환학이란 학문적 차원에서 특정 종교적 색채나 신학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거나 하진 않는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은 각기 다른 종교와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 나보다 2년 앞서 공부한 선배 중에는 아프리카 출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평화운동가 레이마 그보위(Leymah Gbowee)가 있었고,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는 르완다 대학살을 경험했던 친구, 수단 내전 중 총상을 입은 친구, 미얀마나 중동 분쟁 현장에서 온 친구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했다.
― 갈등전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미주뉴스앤조이>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한인) 교회 분쟁 현장을 경험했다. 경찰이 교회에 매주 오고, 심각한 경우 경찰 헬기도 떠 있었다. 6년 정도 취재하면서, 광기 어린 교회 분쟁 현장을 많이 보니까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분쟁 현장을 다녀올 때면 차 안에서 신나는 음악을 엄청 크게 틀어 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컸던 모양이다. 소송으로 법정을 찾는 한인교회들도 많았다. (아는 한인 변호사에게 듣기로) 미국 판사들이 한인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싸우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교회가 세상 법정에서 평화를 구걸하는 듯 보였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절망의 끝에 있을 때 현지 메노나이트 교회 허현 목사님께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소연했는데, 대뜸 “지호 형제가 해봐요” 하더라. 그래, 내가 해보자, 해서 2012년에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존 폴 레더락 교수의 책 《갈등전환》(Conflict Transformation, KAP 역간)도 번역할 기회가 생겼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 센터 설립 후 갈등전환 강의, 양성 프로그램은 물론 서울시 이웃분쟁조정센터 조정위원, 함께하는경청 기획운영위원 등 공공영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해오셨다.
갈등 관련 요청은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다. 서울시가 이와 관련한 시스템을 가장 잘 구축해가는 것 같다. 지자체 중에서 서울시가 처음 갈등조정담당관을 만들었다. 이제 6년째인데, 초기 시행착오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관련 프로세스가 꽤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 나름의 진단을 해서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외부 전문가를 위촉해 주도면밀하게 갈등을 관리한다. 최근에는 50인 이상의 집단민원은 즉시 전담부서에 전달해 관리하도록 했다. 서울시를 모델로 수원시, 대구시, 부평구(인천시) 등이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현장 조정이나 교육 등의 요청이 많아졌다.
―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상위권이라는데, 우리 사회의 갈등지수가 높은 이유는 무엇으로 보나?
일단은 갈등지수를 측정하는 방식에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전제하더라도, 4년 연속 90%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가 높다고 응답한다는 사실은, 실제로 갈등지수가 높으냐의 문제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갈등관리 역량은 낮게 나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사회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시민의 변화, 사회의 변화가 갈등을 만들어내는 측면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독재정권, 군사정권,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급격한 사회 변화가 진행됐고, 그 사이 시민들의 권리의식과 힘은 한층 강해졌다. 시장이나 구청장을 시민이 뽑는 시대다. 예전에는 공무원들이 집앞에 공사를 하면 주민들이 고생한다고 막걸리를 사줬단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겠나? 소음, 분진 등으로 민원을 안 넣으면 다행이다. 행정이 시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다. 시민과 사회가 그만큼 변했기 때문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진정한 평화는 갈등을 통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정의와 평화가 구축되는 과정으로 갈등을 보면, 갈등이 나쁜 것은 아니다.
» ▲ ⓒ복음과상황 오지은
― ‘갈등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우리나라는 ‘이견(異見) 알레르기’가 있다.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병영 문화에 젖어있었기에 다른 생각이나 다른 행동을 못 견딘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인 단체라고 다르지 않더라. 나와 다른 생각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정답사회, 집단주의 문화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그 갈등이 폭력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한 이지메(왕따) 전문가는 이지메를 만들어내는 동력은 전체주의 사고라고 진단했다. 다른 생각, 다른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가지 못하고 공격하고 억누르니까 관계의 골이 더 깊어진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입장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갈등이 생겼을 때도 그것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할 생각을 못 한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도, 정부가 처벌과 보상으로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만 하면서 관계의 골만 더 깊어졌다. 유병언 잡으러 다니고, 보상금이 얼마라는 그런 이야기만 나오고….
― 서울시 이웃분쟁조정센터 조정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일상에서 겪는 실질적인 갈등을 조정하는 경험이었겠다.
대표적인 사례가 층간소음 문제다. 사람들이 조정에 대한 개념이나 경험이 없다 보니 처음에는 정답을 찾아주길 바란다. 판사 역할을 기대하는 거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나의 역할과 정체성부터 밝힌다. 나는 문제 해결(판결)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함께 정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 ‘과정 전문가’라고 말한다. 보통은 갈등이 생기면,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감정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화가 제대로 되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다. 대화의 규칙을 이야기해주고,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대화하면서 핵심으로 들어가게 돕는다.
― 층간소음 갈등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겪는 어려움이다. 조정에 따른 효과가 있었나?
층간소음 갈등이 생겼을 때 분쟁 조정에 대해 조정 신청자와 신청자의 상대방도 동의해야 하는데, 조정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실제로 상대방이 동의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1,390여 건 신청 중 실제 조정이 성립된 것은 3%밖에 안 된다. 판결 내려주지도 않을 거 왜 하느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관계성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 조정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동의가 이루어져서 조정을 해보면 당사자들의 만족감은 아주 크다. 여기서 내가 하는 역할은 질문을 찾아주는 것이다.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서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서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소리 지르거나 욕하지 않고 문자나 전화로 소통하기’ ‘특정 시간대에 특히 조심하기’ 등 약속을 정하고 합의문을 쓴다. 물론 법률적으로 구속력이 없기에 약속을 하고도 잘 지켜지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경우 한 달 뒤에 합의문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해주기도 한다. 확인 전화를 했더니 아래층에 살던 할머니(신청자)가 윗층과 별 문제 없이 잘 지낸다며 무척 고마워하시더라.
― 조정을 넘어 화해까지 가는 경우도 있나?
쉽지는 않지만, 갈등전환 관점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관계 회복으로 이끄는 것이다. 과거부터 쌓인 감정적인 부분을 정리할 수 있도록 가이드해주고, 만족스러운 사과를 주고받도록 준비를 돕는다. 층간소음의 경우 과거부터 쌓여온 사건들과 연관되어 갈등이 증폭된 경우가 많다. 사건이 겹쳐서 감정도 뒤섞여 있는데, 사안별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구분해서 이야기하도록 돕는다. 그 과정에서 사과할 마음이 있다고 하면, 만족스러운 사과를 위해 가이드를 해주기도 한다.
― ‘만족스러운 사과’를 위한 가이드라면?
우리 사회가 사과하는 방법과 과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사과를 한다면서도 “미안하지만, 당신이 먼저 그렇게 하니까…” 이러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있더라도 그 진정성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전달되지 않기도 한다. 상황마다 다르긴 한데, 일단 자기 잘못부터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 잘못으로 인해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 이야기하고, 그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재발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약속 등이 내용에 담기면 대체로 진정성 있는 사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데 현장에서 느끼는 건, 사과를 받는 사람도 어떤 게 진정한 사과인지, 내가 만족하는 사과는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럼 그걸 찾는 과정도 돕는 게 내 일이다.
― 가족, 직장, 교회 등 일상의 영역에서 적용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공동체에서는 필연적으로 사과할 일이 생긴다. 인간은 실수를 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과의 기술이 없다 보니까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또 다른 갈등으로 비화된다. 공동체의 리더십이 가이드를 잘 할 수 있으면 좋다. 무슨 대단한 기술이 있는 게 아니다. 몇 가지 원칙과 원리만 숙지하고 계속 훈련하고 연습하면 된다. 물론 갈등 조정 프로세스는 복잡하고 세밀하지만, 일반적인 대화 모임을 진행하는 것은 금방 익힐 수 있다. 중요한 건 대화 중 적절한 질문을 만드는 거다.
― 공무원 대상 교육이나 강의를 하고, 공공영역 조정 활동을 하고 있다. 교회에 특별히 필요한 영역인 것 같은데.
교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갈등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으니까 갈등이 생기면 묻어두기 바쁘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태가 담임목사(리더십) 입장에서는 편할 수 있다. 서울시나 자치단체가 어떤 사안을 결정하기 전에 시민을 참여시켜서 숙의(熟議)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교회에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봐라. 리더십 입장에서는 번거로울 수 있다. 교인들에게 의사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대화의 장을 만들 필요도 없고. 회사도 마찬가지다.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중요하니 갈등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는 진보적이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인데, 갈등전환을 어떤 ‘기술’로 인식해서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교회, 회사, 단체들은 대화하기보다는 힘으로 의사결정을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는 다수결이 최선의 의사결정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소수 입장에서는 폭력일 수도 있다. 대화도 힘의 균형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힘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대화를 하면, 힘이 강한 쪽이 원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건 갈등을 풀어나가는 대화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정답’은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 힘의 균형이 맞아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 와닿는다.
상대방보다 자기 힘이 더 크다면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을 참사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청와대로 부른 건 왜일까. 세월호 유족이 시민들의 지지로 ‘힘’을 얻어가니까 그제서야 부른 것이다. 무조건 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실질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의 균형을 먼저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북미 관계를 갈등전환의 관점으로 보면, 미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북한이 핵을 통해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야 미국이 대화를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의사 결정을 위한 대화라는 것 자체가 낯선 과정인 것 같다.
나름 건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들도 다수결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앞서 말했지만 다수결도 다수의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강압적인 문제해결 수단이다. 투표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참여와 숙의 과정이 생략된 투표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인 정관이 건강한 교회의 핵심으로 비춰지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앙공동체가 충분한 공론화 과정 없이 어떤 결정을 하거나 누군가를 선출하면 구성원들이 폭발하는데, 이게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예방되고 해소되기보다 다른 방식의 갈등으로 비화된다. 담임목사의 결정을 구성원 전체의 숙의 과정 없이 투표에 부쳐서 통과시켰는데,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이 담임목사 논문이랑 설교 파헤쳐서 표절했다고 피켓 드는 식으로. 최종 의사 결정을 내리기까지 구성원들을 최대한 참여시키고 숙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숙의’라는 표현을 자주 쓰신다. 최근 교육부는 방과 후 영어수업금지, 자사고 외고 폐지, 수능절대평가제 도입 등 교육현안에 대해 ‘정책숙려제’를, 방통위는 주요 방송통신 정책에 대해 ‘국민숙의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숙의는 학습하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과정도 그 핵심은 숙의에 있다. ‘최초 여론조사 ― 전문가 토론 청취 ― 시민참여단 상호토론 ― 전문가 질의응답 ― 최종 여론조사’ 과정이 모두 숙의다. 471명의 ‘작은 대한민국’ 시민참여단이 2박 3일간 숙의 과정을 밟은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며 토론하는 것이다. 결과를 떠나서 이런 과정을 밟으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 수용성이 높아진다. 시민참여단 중 93%가 내 의견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걸 보면 의사 결정에서 사람들은 그 결정 내용 자체 때문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결정 과정 때문에 분노한다. 사드 배치 결정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올림픽 단일팀 이슈가 있는데, 공정성 차원의 문제 이전에 기본적으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 구조에서 갈등이 촉발됐다. 혹자는 2008년의 광우병 촛불집회를 두고 미국 소고기 먹어도 아무도 광우병 안 걸리지 않았냐며 비판하는데, 국가가 일방적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했다는 데서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게 핵심이다. 숙의하는 과정을 밟아야 하는 이유는 그런 갈등을 줄이고 같이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에 모더레이터 및 질문 취합팀으로 참여했다.
모더레이터(moderater)는 시민참여단이 자칫 논쟁에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사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되도록 돕는 사람이다. 토론의 목표에 맞게 대화가 진행되도록 돕는 역할이었는데, 토론을 공정하게 진행하려고 호명 순서까지 고려하며 상당히 예민하게 신경 썼다. 공론화 프로세스에 참여한 것이 신고리 공론조사가 네 번째였다. 2014년 국민대통합위 주최 ‘대한민국 국민에게 길을 묻다, 2014 국민대토론회’, 2015년 사용후핵연료재처리 공론조사, 2016년 국민의당 숙의배심원제 후보 경선 등에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조력자)나 기획으로 참여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 신고리 공론조사 때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니까 그 자체로 좋았다. 공론조사 과정을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공부(숙의)하고 나서 여론조사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잘 모르겠다’라는 의견은 줄어든다. 라면 한 봉지를 살 때도 가격과 성분을 비교하는데, 국가적인 중요한 사안을 충분한 정보도 없이, 공부도 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묻고 판단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 일부 전문가 그룹에서는 그런 중요한 사안의 결정을 비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제기를 했었다.
심지어 공론조사에 참여한 분들 중에서도 ‘이런 결정을 왜 우리가 하느냐, 청와대에서 해야지’라고 말하는 분이 있었다. 사실 정책 결정을 통해 주민들이 영향을 받는 사안에 대해 주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는 게 맞다. 또한 공론조사와 관련한 오해들에 대해서 <오마이뉴스>에 정리해서 올리기도 했는데, 공론조사는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고 결정을 돕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비전문가에게 판단 맡긴다? ‘공론조사’에 대한 오해들”, 2017.10.23.) 자문의 성격이 강하다. 찬성이나 반대가 약간 많다고 그대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판단을 하는 하나의 근거로 삼을 뿐이다. 신고리 공론조사 때문에 사람들이 공론조사를 의사결정 수단으로 여길까 하는 염려가 있다. 공론조사는 분쟁해결책도, 최종판결도 아니다. 신고리 공론조사는 전형 사례가 아니라 변형 적용된 사례로 보면 된다.
― 신고리 공론조사 관련 아쉬운 부분은 없었나?
보통 공론조사는 갈등 예방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는 프로세스다. 신고리의 경우 갈등이 첨예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론조사의 적절성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게다가 준비 기간이 3개월로, 너무 짧았다. 보통 프랑스의 국가공공토론위원회는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치는데, 3억 유로(약 4,045억 원) 이상의 예산이 들어가는 공공사업은 이 위원회를 반드시 거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국민 표본도 2천 명을 선발한다. 그에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막 시도해보는 단계다.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이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 원활하게 진행되고 자리 잡으려면 제도적으로도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때 대통령령으로 제정한 ‘갈등관리규정’이 전부다. 이것을 근거로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들이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정도다.
― 시민들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인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제도적 뒷받침도 이어지지 않을까?
그렇다. 공론화 프로세스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기존에 국가 행정이 독점하던 것을 시민들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방식도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사실 공무원들은 설명회 정도의 정보제공 단계, 공청회 같은 의견 수렴 단계까지밖에 생각 못 했는데 요즘은 시민들 역할이 더 확장되는 추세다. 시민들로 구성된 자문회를 두거나 공론조사를 하는 것, 시민과 행정이 함께 결정하는 조정협의체, 시민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시민배심원제 등이 있다. 모든 걸 신고리 공론조사처럼 할 수는 없고, 사안과 여건에 맞게 어떤 방식으로 프로세스를 밟을지 결정해야 한다. 최근에는 사용후핵연료 연구와 관련된 공론화 과정 설계에 참여했는데, 원자력 산업과 무관한 외부 전문가를 구성해 일종의 배심원제로 설계했다. 이처럼 이해당사자들 직접 다 만나서, 어떤 이해관심사가 있는지, 어떤 프로세스를 원하는지 묻고 그것을 분석한 것을 기반으로 프로세스를 설계한다.
―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공론조사가 자리를 잡아갈수록 ‘시민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겠다. 조언해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대화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할 수밖에 없다. 중간에서 ‘잘 모르겠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을 설득할 때에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하는 태도와 대화하는 방식도 또 다른 메시지가 된다. 내용이 아무리 옳더라도 상대를 조롱하거나 인신공격성의 비아냥거리는 태도가 거듭되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공론조사의 경우 시민들이 비전문가들이지만 토론 때 의외로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낸다. 시민들끼리 토론하며 나온 질문을 전문가에게 묻고, 그 질문을 주제로 또 토론이 이어지기 때문에 준비를 정말 꼼꼼하게 해야 한다. 옳은 일이라는 확신과 별개로, 내가 옳다고 여기는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도 치열하게 해야 한다고 본다. 이상적이지만, 정부 차원에서 양측이 충분히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재정적, 환경적으로 지원하는 과정도 별도로 마련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우리가 대화하는 법을 몰랐구나 반성하게 된다.
공동체 내 대화하는 문화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로 이어가기보다는 논쟁으로 가져간다. 논쟁(debate)은 나의 옳음과 상대방의 틀렸음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이라면, 대화(dialogue)는 내가 몰랐던 상대방의 일말의 옳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진보·개혁을 외치는 공동체도 승패가 나뉘는 논쟁에는 익숙하지만, 서로를 발견하는 대화의 과정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대화는 좋고 논쟁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갈등을 통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논쟁뿐 아니라, 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안의 폭력성에 더 예민해져야 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은 물론 남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도 엄연히 폭력이다. 우리 사회는 ‘그래도 그 사람, 능력이 있잖아’ 하면서 덮고 가는 문화가 있는데, 그래선 안 된다. ‘남의 약점을 공격하는 건 나쁘지만 그래도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라는 말과,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폭력은 나쁜 거다’라는 말은 큰 차이가 있다.
― 갈등 상황 중에서 피해자가 명백한 경우에는 대화로만 끝낼 수 없을 것 같다.
갈등이 생겨나는 원인을 크게 불편(不便)하냐 혹은 불의(不義)하냐로 구분해서 본다. 피해자가 명백한 경우는 불의한 경우다. 대화로 풀 것인지, 처벌을 할 것인지, 법정에 넘길 것인지 등 상황에 맞게 과정을 밟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고, 문화의 문제일 수도 있다. 교회 내에서 재정 부정이 발생했을 때, 감사(監査)가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재정 시스템에 허점은 없었는지, 리더십 차원의 문제는 없었는지 교회 내 변화의 지점을 발견해나가는 거다. 불의에 의한 갈등과 피해 상황은 주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회복적 정의’나 ‘갈등전환’ 둘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추구하고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갈등전환은 주로 이해관계나 불편함으로 인한 갈등을 다룬다.
― 앞서 교회 분쟁을 취재하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갈등전환을 공부하면서는 회복이 되었는지.
농담반 진담반으로 어디를 가도 교회 분쟁 현장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웃음) 그런데 교회 분쟁 현장이나 다양한 갈등의 현장을 계속 경험하다보니 과거에 비해 공감하는 감수성이 현저히 무뎌지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게 트라우마 증상 중 하나일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게 갈등 현장에서는 장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갈등 현장에서 ‘거리 두기’가 자연스럽게 되니까 좀 덜 힘들기도 하고, 그래서 프로세스를 밟아가는 게 더 수월하기도 한 거 같다.
― 갈등전환 전문가로서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SNS) 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안타깝다. 만나서 대화하면 좀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고, 다양한 변화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자로 주고받게 되면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오프라인에서 건강한 공론의 장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싶다. 올해는 한국갈등학회와 연계해서 그런 자리를 만들고자 준비하는 중이다.
진행 옥평호 편집장, 정리 이범진 기자
이 글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