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일은 다만 자기에게 부여된 길을
한결같이 똑바로 나아가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길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중요한 일은 다만 자기에게 부여된 길을
한결같이 똑바로 나아가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길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요즘 ‘인생 2모작’을 많이 강조하지만, 뜻밖의 인생 2모작도 있습니다. 퇴직 후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처럼, 배우자를 바꾸고 국적을 바꾸는 사람도 증가 추세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2모작이 아닌 ‘N모작’, 즉 다모작 시대에 접어든 것이죠. 그런 움직임은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40대 후반 여성이 그러합니다.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어요. 바깥에 비치는 제 남편의 이미지와 집에서 날마다 보는 진짜 남편의 실상은 너무도 다릅니다. 남들에게는 매우 온화하고 남을 자상하게 배려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기랑 가장 가까운 저한테는 그렇게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아주 차가운 남자예요. 그동안 아이들 때문에 용기를 못 냈지만 곧 결행할 겁니다. 정말 지긋지긋해요.”
그 얘기를 조용히 듣던 중년의 남성 한 분은 맥주 한 잔을 들이켜더니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와이프와 대화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퇴근해 집에서 말이라도 붙이려 하면 드라마 시청하는 데 방해된다고 자꾸 짜증을 냅니다. 할 수 없이 골방에서 혼자 인터넷이나 하게 되는데,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와이프랑 저 사이에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벽!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젊었을 때 뭘 모르고 결혼했지만, 진정한 반려자는 아니더군요. 지금까지의 인연으로 충분하고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는 혼자 여행을 떠났습니다. 앞으로 완전히 새로운 제 인생을 살아볼까 합니다.”
분명 인생 위기입니다.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부부 관계, 소통의 단절을 말합니다. 그동안 배우자의 철저한 무관심에 지칠 대로 지쳤거나, 사회생활하느라 거의 대화 없이 살아왔던 부부 관계에 위기가 온 것이죠. 가장 가까운 줄 알았던 배우자와 소통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결혼 뒤 각자 다른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끼어드니 부인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남자는 ‘관심’이라고 하지만 부인은 ‘간섭’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이와 또 다른 문제는 중년이라는 시점입니다. 알 수 없는 분노, 서러움, 새로운 인생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서울시 산하 50플러스센터에 강연자로 초청받아 갔을 때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이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터져나오는 분노를 하소연하고 있었습니다. 그 공통점은 과연 뭘까요?
흔히 ‘중년위기’라 말하는 증상이 찾아온 겁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던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걸어온 길에 극심한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도전에 강렬한 유혹을 느끼는 현상을 말합니다. 몸은 35살에 정점을 맞고, 마음은 49살에 정점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그사이에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을 중년위기라 보았지만,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난 현대사회에서는 그 기간이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최근 <중년>(Midlife)이란 책을 펴낸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키런 세티야 교수는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에 심각한 중년위기 증상을 겪었다고 토로합니다. 그는 미국의 백인 주류사회, 그것도 정년이 보장된 대학교수, 아름다운 가족에 둘러싸여 외견상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살아왔던 길이 후회되고 밀실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공허감이 혼합된 묘한 내적 방황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중년위기란 반드시 40~50대에 겪는 증상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발간에 즈음해 미국 잡지 <뉴요커>는 역사적인 중년위기 증상을 조명하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이탈리아 작가 알리기에리 단테의 작품 <신곡> 초반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 대표적입니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에 처해 있었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게 완강했는지/ 얼마나 하기 힘든 말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
이 글을 쓸 때 단테의 나이도 서른다섯 살, 그가 살았던 14세기에는 중년에 해당합니다. 물론 종교적 모티브를 가진 작품이긴 하지만, 21세기라는 관점에서는 중년위기라고 해석하는 겁니다. 같은 피렌체 출신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40살부터 55살까지는 이렇다 할 명작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괴테는 38살 생일잔치를 하자마자 10년 동안 봉직했던 궁중 생활을 뒤로하고 홀연히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열하일기>를 쓰던 연암 박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독한 중년위기 증상을 앓았던 겁니다.
미국 작가 게일 쉬이의 <통로>(Passages)는 미국 의회 도서관이 선정한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10권 중의 한권으로 선정되었는데, 주제가 바로 중년위기입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조금 더 빨리 중년위기 증상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성장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짜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중년위기란 인생의 중간평가 시간입니다. 단테, 괴테, 미켈란젤로, 연암 모두 중년위기 증상을 겪은 뒤 오히려 더 생산적인 시기를 맞았습니다. 사춘기의 격동 뒤에 어른이 되는 것처럼, 중년위기 뒤에 진정한 창조가 찾아올 겁니다. 그 풍랑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만,
人之生也柔弱(인지생야유약)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조화로운 기운을 머금고 정과 신을 안고 있기 때문에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겁니다.
人生含和氣,抱精神, 故柔弱也(인생함화기, 포정신, 고유약야)
죽으면 딱딱하고 단단해집니다.
其死也堅强(기사야견강)
:사람이 죽으면 조화로운 기운이 고갈되고 정과 기가 사라지기 때문에 딱딱하고 단단해지는 것이죠.
人死和氣竭,精神亡,故堅强也(인사화기갈, 정신망,고견강야)
만물과 초목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萬物草木之生也柔脆(만물초목지생야유취)
:조화로운 기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和氣存也(화기존야)
죽으면 말라 뻣뻣해집니다.
其死也枯槁
기사야고고
:조화로운 기운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和氣去也(화기거야)
그러므로 딱딱하고 단단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것은 삶의 무리입니다.
故堅强者死之徒(고견강자사지도)
:이상의 두 가지 일을 통해 볼 때, 딱딱하고 단단한 것은 죽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것은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以上二事觀之,知堅强者死,柔弱者生也(이상이사관지, 지견강자사,유약자생야)
이 때문에 군대가 강하기만 하면 이기지 못하고,
是以兵强則不勝(시이병강즉불승)
:강대한 군사는 전쟁을 가볍게 여기고 죽임을 즐기지만, 피해자들의 독기가 흐르고 원한이 맺혀지니, 여러 약한 자들이 하나로 뭉쳐 강함을 이루기 때문엥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强大之兵輕戰樂殺,毒流怨結,衆弱爲一强,故不勝(강대지병경전악살,독류원결,중약위일강,고불승)
나무가 강하면 가지와 잎이 함께 삽니다.
木强則兵(목강즉병)
:나무가 강하고 크면 가지와 잎이 그 위에서 함께 삽니다.
本强大則枝葉共生其上(목강대즉기엽공생기상)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놓이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것은 위에 놓입니다.
强大處下 柔弱處上
강대처하 유약처상
:사물을 흥성하게 하고 공을 이룸에 있어, 큰 것은 아래에 놓이고 작은 것은 위에 놓입니다. 하늘의 도는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이것이 대자연의 가르침입니다.
興物造功,大木處下,小物處上,天道抑强扶弱,自然之效(여물조공,대목처하,소물처상,천도억강부약,자연지효)
» 대만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노자 그림
노자도덕경 제76장 계강(戒强)편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강함을 추구하며 강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강한 것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은 이렇게 자연과 같은 삶을 살게하는 지혜로 가득한 고전이다.
도가의 왕도로 꼽히는 이 책을 한국에선 드물게 도교와 기(氣)를 공부한 최상용 인문기학연구소장(58)이 옮겨 출간했다. <내안의 나를 키우는 도덕경>(일상이상 펴냄)이란 제목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한나라 문제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을 단 하상공본과 위나라 때 왕필이 주석을 단 왕필본을 비롯해 600여 종이 넘은 다양한 판본이 전해 내려온다. 하상공본과 왕필본이 가장 널리 읽혀왔다. 그중 하상공본인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老子道德經河上公章句)’는 유교적 해석이 가미된 왕필본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가 사상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노자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耳), 자는 담(聃)이다. 노자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않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쓴 <노자열전>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쯤 초나라의 고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의 장서실, 오늘날로 보면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공자가 젊었을 때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도덕경>이 어떻게 세상에 전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주나라가 퇴하면서 은둔하기로 결심한 노자가 서방으로 떠나는 도중 관문기지를 만났는데, 그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도(道)로 시작되는 글과 덕(德)으로 시작되는 글, 81편 한자 5천자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경>이라는 것이다.
옮긴이 최상용 소장은 “<도덕경>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고(무위·無爲),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해야 한다(자연·自然)는 무위자연을 바탕으로 도가사상을 처음 주장했다”고 한다. 겉치레를 중시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문명사회를 비판하고,약육강식의 세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는 책이라는 것이다. <도덕경>은 종교와 문학, 회화, 정치, 경영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마오쩌둥, 톨스토이, 헤겔, 하이데거, 니체,프로이트, 빌 게이츠, 마윈 등이 이 책을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도덕경 하상공본은 동양 최고의 의학서인 <황제내경>의 의학적 바탕과 <도덕경>의 사상에 기반한 황로학(黃老學)을 응용하며 ‘몸의 사용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하상공본은 당나라 시기까지 도사(道士)를 뽑는 고시의 필수과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은 물론 수련관련 문헌들에서도 많이 인용됐다고 전한다.
긴이 최소장은 9세기 송나라 때 유불도와 주역, 관상, 명리학까지 통달해 동아시아 도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진단의 내단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진단의 내단사상은 9세기 송나라 때 유불도와 주역, 관상, 명리학까지 통달해 동아시아 도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진단은 야사가 아닌 정사인 송사(송나라역사서)에 ‘무당산에 은거해 118살까지 살며 수공법(睡攻法·수개월씩 잠을 자면서 하는 수련)을 해 황제가 존경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신선이 된다며 온갖 약물들을 먹어 중독사하는 폐해가 적지않던 수련 풍토에서 먹는 외단(外丹)이 아니라 마음공부인 내단(內丹) 수련 체계를 세워 주자의 신유학과 불교의 진공묘유론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다. 최소장은 국내에 연구가 전무하다시피한 진단을 공부하면서 한자로 된 역사서들을 뒤지기 시작해 수천권의 한자책을 독파하면서 한자박사가 됐다고 한다. 그는 그 한자 실력과 도교 연구 및 수행 체험을 살려서 도덕경을 번역해냈다.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대체로 담백하게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이 책의 특징이다.
최 소장은 “노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복귀무극(復歸無極·본래의 무극으로 돌아감)이라 할 수 있다”면서 “노자의 이 사상은 도가 추종자는 물론 도교 수련가들에게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영감과 함께 심신의 수행의지를 북돋아주고 있다”고 밝혔다.
일단 태어나서 개인에게 가장 큰 사건은 죽고 사는 두가지 일이다. 이 생사 대사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선승들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과 목전의 이해 다툼에 목을 매고 있을 때 이들은 바랑 하나 매고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투신한다. 해탈열반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음)의 신세계를 열어 생사(죽고 사는 일)에 자재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60평생 화두 하나 들고 정진한 지범 스님(62·서울 동작구 상도동 보문사 주지)이 선승들의 치열한 구도행을 담은 <선원일기>(사유수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엔 그가 죽음의 고비를 넘다들며 치열하게 맞선 수행담이 담겨 있다. 또 그가 출가 이후 40여년간 유명 선지식들과 은둔 수행자들과의 만난 뒷애기들이 담겨있다.
그의 수행담은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리를 깨달아가는 구도열정을 연상케한다. 선재동자와 달리 그의 구도가 선방으로 좁혀졌을 뿐, 그는 그곳에서 본래의 긍정적인 성격대로 선승 각자가 가진 장점들을 받아들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쉬지않았다.
특히 젊은시절 도를 깨닫기 위해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범 스님은 1987년 지리산 칠불사 선원에서 일종식(하루에 한끼만 먹음)을 하면서 참선정진했다. 당시만해도 한창때라 한끼만 먹고 버티려니 늘 코피가 터지고 좌복(방속)에 앉으면 졸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덥고 뜨거웠는데도, 그런 몸 상태임에도 정진을 이어가자 어느 순간 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고, 화두가 순일해 앉아있는 것이 가볍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 변화의 계기가 된 칠불선원에서 삶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지범스님
그는 여러 무문관에서 수행도 했다. 무문관은 방 밖에서 열쇠를 채우고 보통 100일씩 두문불출하고 참선정신하는 곳이다. 그가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에 간 게 1993년이었다. 선원에 다닌지 15년이 넘고 세속 나이가 40살이 가까워지는데도 공부시늉만 하고 죽는 것이 아닌가하는 급한 생각이 든 때였다. 그는 “역대 조사들은 20대에 일찍이 생사 대사를 끝마쳤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하는 자책과 자괴로 괴로워, 이번에 끝내지 않으면 안에서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무문관에 입방했다”고 한다. 고향의 선친 묘소에 가서 이별을 고하고, 어머니 집 앞에서 삼배를 드리고, 세상이 마지막인양 눈물을 흘리며 무문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가 순일하지 못하고 혼침과 망상으로 두달 가량을 허비하는 동안 엉덩이가 헐어 진물이 나고, 피가 좌복에 스며들고,온몸이 아파왔다. 그는 당시 문득문득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고 한다.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누워있을 때 문틈 사이로 짐을 나르는 개미들을 보았다. 개미들은 턱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좌절하지않고 끝내 짐을 옮기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물들도 이렇게 해내는데 장부가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가 선 것이다. 그는 그동안 공부 열정을 컸지만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 크게 부족했음을 느끼고, 이 날부터 매일 천 배를 하면서 화두를 들었다고 한다. 그랬다니 그제서야 화두가 들리고 좌복에 앉아도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죽으려고 갔다가 크게 살아난 당시의 일을 그는 대자암 무문관의 기적으로 여긴다.
지범 스님은 1980년 출가한지 얼마되지않아 전북 순창 선운사 도솔암에 있을 때 어머니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면서 “기왕 출가했으면 서산스님 같은 도인이 되어달라”며 돈 3만원을 손에 쥐어주며 하던 당부를 잊지 못한다. 그가 수행에서 그가 나태해질래야 나태해질 수 없는 이유였다.
» 선방에서 참선정진하는 선승들
그는 그렇게 전국의 선방으로 수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스승과 선지식들을 만났다. 그가 언급한 많은 스님들 가운데도 특별한 인연으로 느껴지는 선지식들이 있다. 먼저 언급된 분이 원공 스님이다.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을 정진한뒤 지금까지 40년 넘게 단 한번도 차를 타지않고 걸어다니면서 수행하는 스님이다. 지범 스님은 고교 3학년때 ‘전남 나주 다보사에 우화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던중 광주 버스터미날에서 두분의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한 명은 우화 스님의 상좌로, 그의 은사가 된 정진 스님이었고, 한 명이 바로 천축사 무문관 수행을 마치고 도반을 찾아온 원공 스님이었다. 원공 스님은 그의 은사와 함께 서울 불광동에 병상심방원을 개원해 병들과 힘들게 살아가는 스님과 불자들을 뒷받침했고, 지금까지 무소유의 삶을 살며 빈자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그는 또 1980년대 서울 도봉산 망월사선방에 갔을 때 선원장이었던 축서사 선원장 무여스님을 ‘수행자의 표상’이라고 했다. 그는 “만약 누군가 나에게 ‘이 시대에 가장 닮고 싶고 존경하는 스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무여스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엇보다 언행일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그는 1999년 동안거 때 강원도 인제 백담사 무문관에 입방했을 때 회주였던 설악산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을 ‘대한민국 거지들의 왕이요, 포대화상’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원력보살이요 일체 상을 내려놓고 사는 오현 스님 같은 선지식이 설악산에 있어서 날카롭고 거친 도량이 이제는 공부하는 선승들로 가득찼고, 백담골 가을 단풍도 예전보다 더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 선방에서 3개월 안거를 끝내고 하산하려는 선승들
그는 또 학처럼 몸은 가볍고 공부의 기봉을 나투는데는 준엄하고 엄격했던 서옹 전백양사 방장, 오늘날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를 최고의 선도량으로 일군 서암 스님, 태산 같은 기운을 느꼈던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방장 성철 스님 등 일세를 풍미한 선지식들과의 만남도 소개했다.
이밖에 소백산 숨은 도인 봉철 스님이나 이 시대의 풍운아 월용 스님, 청빈 고고의 표상인 화엄사 종안 스님 등 열반해 다시 볼 수 없는 독특한 스님들에 대한 그리움도 담았다.
그가 선방에서 함께 지낸 다양한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인과는 달리, 아직도 피안과 영원의 세계를 향해 불굴의 용맹심을 놓지않는 수행자들이 있다는 의외의 소식에 허망한 번뇌망상을 놓고 구도열정을 불태워볼 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도 세상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그가 소개하는 선방의 풍토 변화도 마찬가지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선방엔 20~30대가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50~60대가 주축이다. 출가자수가 감소해 젊은층의 유입이 줄면서 선방도 고령화한 것이다. 수행 시간도 짧아졌다. 1980~90년데엔 고운사 선원에서는 동안거 때 100일 용맹정진을 했고, 해인사 퇴설당과 칠불사 선원, 동화사 선원, 봉암사 선원, 대승사 선원에서는 하루 12시간 이상 참선을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선원이 하루 8~9시간 참선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정진을 쉬고 삭발하고 목욕하는 날도 예전엔 보름에 한번씩이었는데, 지금은 봉암사, 송광사, 동화사 등 일부 선원을 제외하고는 10일 단위나 1주일 단위로 짧아졌다고 한다. 또 예전엔 차담을 매일 점심공양 후 대중이 함께 모여서 했는데 요즘은 각자 알아서 따로 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화에 따른 것이다.
»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안거를 난 뒤 함께 기념사진
이런 현상은 선방 숙소에도 반영이 됐다. 예전에는 소임자 외엔 개별 방이 없어서 모든 선방 대중이 한방에서 함께 잤는데, 요즘은 1인1실 혹은 2인1실이 대세다.
따라서 선방도 1인1실이 보장되고 시설이 좋고, 3개월 안거를 끝낸뒤 주는 해제비가 많은 곳은 입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요새는 통도사 선원이나 정혜사 선원, 월정사 선원, 대흥사 선원, 화엄사 선원 등이 선승들이 선호하는 도량이고, 봉암사 처럼 정진 분위기가 좋아도 시설이 좋지않고 해제비가 적은 곳은 예전에 비해 인기가 없다고 한다.
지범 스님들은 예전과 달리 능력이 없는 스님은 갈수록 선방도 뜻대로 다니기 어렵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살림이 좀 넉넉하고 유명한 선사, 즉 능력있는 큰스님이 있는 사찰은 선승들이 3개월 안거(특별참선정진)를 끝내고 나면 여비격인 해제비를 더 많이 준다고 한다. 스님들은 몇백만원 가량의 헤제비를 받아 선방을 나가서 지내는 6개월을 살아가야한다. 통상 스님들이 선방에서 정진하면 ‘아는 인연들’(반연)이 그 선방을 찾아가 선승들 식사비 등 선방운영비에 보태라며 대중공양금을 보시한다. 그러나 평소 반연이 없는 선승은 선방 운영에 보탬이 되지못해 지난 안거때 탄 해제비를 다음 안거 때 선방 대중공양금으로 보태내놓아야 해서 해제한 뒤 연명하는 것도 쉽지않다는 것이다.
요즘 인기있는 선원은 대부분 인맥이 있어야 받아주기에 인연도 없고, 화주(공양금을 받아옴) 능력이 없는 청빈한 선승은 구참이라도 방부(입방을 신청) 들이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지범 스님은 “내 주변에 인연 없이 곧게 살아온 선사들이 방부를 못들이는 것을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 보문사에서 선객들과 차담을나누고 있는 지범스님(맨왼쪽)
지범 스님은 은사 스님이 열반한 2000년부터 서울 동작구 상도동 국사봉 중턱 보문사의 주지를 이어받아 운영하면서 결제철엔 선방에 가서 수행하고 있다. 보문사는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오는 선객들이 언제든 묵을 수 있도록 객실 4~5개의 방을 따로 마련해 24시간 절 대문을 열어놓고 있다. 예전과 달리 절집 인심조차도 달라져 지방에서 상경한 스님들이 서울에서 묵을 곳도 없는 처지를 잘 알기에, 어려운 살림에도 이렇게 객실을 운영하는데서 그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인다. 그래서 철마다 보문사엔 140~150명의 선객들이 묵어간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범 스님은 잠자리와 차·별식 공양은 대접하지만 여비를 제대로 주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한다. 그런데도 몸이 아파도 병원비조차 없는 선객을 위해 수십년간 들었던 보험을 해제했고, 지리산에 머물던 처소조차 팔아야했떤 스님은 지금도 객스님들로부터 삶과 수행과 지혜를 배우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가 책날개에 내놓은 시 아닌 시가 구도심으로 일관한 담백한 수행자의 삶을 말해준다.
‘낮에는 탁발하고/밤에는 좌선으로/늦은 밤 잠에 들고/새벽에 일어난다//산중의 중노릇/고달프고 힘들어도//그래도/내가 좋아/내가 좋아’
혹자는 선방의 수행이 무슨 가치가 있냐고 비판할 수 있다. 무위도식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적인 것, 가령 적자생존을 위한 매진은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도 가능할 것이다. 어쨋든 이 세상이 동류의 인간들만이 있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1일은 부활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언제까지 부활을 기념만 할 것인가. 오직 그런 부활을 신화니 기념일로만 박제화한다면, ‘그리스도’는 만우절의 거짓이 된다. 믿는다는 것과 삶의 불일치, 자본주의에서 더욱 벌어지는 그 간극이 그 거짓신앙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피흘림,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려는 이들이 이땅에 있었다. 우리 곁에 온 예수였다. 우리 곁에 머물렀던 참그리스도인 9명의 삶이 <사랑하며 춤추라>(신앙과지성사 펴냄)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예수의 삶을 살아낸 어른들의 이야기’란 부제가 붙었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성자적 의사 장기려, 풀무원공동체의 창설자 원경선,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김용기, 광주의 여성운동 대모 조아라, 원주의 헌신적 선교사 나애시덕, 거지와 고아들의 아버지 황광은, 고난의 삶의 대변자 권정생,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나 이들 가족 혹은 제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9명의 각자의 저자로 나서 그 감동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살려냈다.
발문을 쓴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는 “지난 세기 이 척박한 땅에 태어나 한 세상 살다 떠난 그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내면의 어둠이 조금씩 스러진다”며 “그들의 삶과 실천은 온통 욕망 주위를 맴돌며 사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을 환기시키지만, 새롭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운다”고 했다. 추천사를 쓴 김상근 목사(한국방송공사 이사장)는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간 분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밝혔다. 또 김신일 박사(전 부총리,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는 “작게라도 흉내 내며 조용하고 진실하게 예수를 따르자”고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눈물의 감동만 주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택한 고난과 헌신, 사랑이 얼마나 큰 삶의 기쁨, 특히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쁨의 자장으로 끌어올리는지를 보여준다. 일화 한토막씩을 통해 그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본다.
◇대천덕(양혜원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저)
경제와 영성을 연결한 예수원 철학의 중심에는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대신부님은 ‘물만두 신학’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물만두는 다른 음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두에는 껍질이 있지 않습니다? 껍질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별 맛이 없습니다. 껍질 속에 고기가 있는데 만두의 참맛은 만두소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껍질이 없으면 속에 든 고기가 다 풀어지기 때문에 껍질로 꼭 싸주어야 합니다. 껍질이나 소나 둘 다 필요합니다.”
대신부님은 경제 정의와 성령의 은사를 연결시키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많았는데도 병든 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드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대신부님은 설명한다. 기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누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눔을 해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교인들이 서로 나우어 주고 서로에 대하여 진실한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이처럼 코이노니아는 믿는 사람들이 서로 자원하여 물질을 나누는 것이고 이러한 만두 껍질이 있어야, 만두소, 곧 하나님의 능력인 고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신부님은 이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셨다.
◇장기려(지강유철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저)
선생의 다른 인간됨은 어떤 사람을 거지, 대통령, 행려병자 등 그가 가진 권력·돈·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은 평양에서든 부산에서든 자기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했다. 겨울에는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주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복음병원장 시절, 사택에 숨어들었던 도둑이 책이라도 갖다 팔면 돈이 될까 싶어 가지고 나가려다 선생에게 들켰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 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그 책값을 쳐 줄테니…”하며 돈을 주고 놓아 주었다.
선생이 6·25전쟁 이후 고집을 부리며 무료 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은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 간질환자들의 모임을 알고 평생 그 회장직을 놓지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부보다 10년이나 먼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몇 년 뒤 보사부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을 ㅁ나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런 선생에게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 병자든 모두가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원경선(원혜영 국회의원·원경선의 아들 저)
전 세계 인류 중 4분의 1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과 2초에 1명꼴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결심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림이다. 곧 국제기아대책본부에 가입했다. 정농회 회원들, 기독동신회 교인들, 풀무원 회도도 적극 동참케했다. 아버지는 풀무원 회사의 직원들을 교육할 때마다 나에게 갈비탕 두 그릇 사 줄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사람들은 다 손을 들었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갈비탕 두 그릇 값인 만 원씩을 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마련한 기금들이 보태져 에티오피아로 전해졌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임을 갖기만 하면 자식들은 물론 손자들에게도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놓을 것인가를 적어내라고 했다. 귀가 뜨일 때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란 손자들은 월급을 받을 나이가 되자 자동이체로 통장을 등록하고 다달이 일정 금액을 기부하게 되었다.
◇김용기(김장생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교수 저)
가난안농장에서의 공동체의 일과는 새벽 4시에 김용기의 차남 김범일이 치는 개척의 종과 함께 시작된다. 개척의 종은 매일 세 번씩 10차례를 친다. 첫 번째 종은 육체의 종이다. “육체의 잠을 깨자. 육체의 잠이 들면, 나태와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종은 정신의 종이다. “정신의 잠을 깨자. 정신의 잠이 들면,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세 번째 종은 영혼의 종이다. “영혼의 잠을 깨자. 영혼의 잠이 들면, 하나님을 빼앗기게 된다.”
기상 후 애국가를 4절 까지 부르고, 4킬로, 8킬로, 12킬로 구보를 한다. 구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정신 개척’, ‘우리는 젊다’, ‘역사는 부른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7시부터 아침식사 전까지 아침기도회를 한 후 식사를 한다. 가난안농장에서의 식사는 구호로 시작을 한다. “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자.” 주식은 고구마였고 음식은 조금이라도 남길 수 없었다. 치약은 3미리, 비누는 남자 2번, 여자 3번만 사용한다. 저녁 10시까지 노동은 계속 된다. 생일이나 회갑 또한 이곳 가나안에서는 없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기쁜 일임으로 매일매일을 새로이 태어나는 자세로 살아야지 일 년에 한번 생일상을 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회갑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허례허식이 된다며 자신부터 생일이나 회갑을 없앴다.
◇조아라(유성이 한국 YWCA 사무총장 저)
여성으로 조아라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6세에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살기에도 조아라의 인생은 벅찬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들은 뒷전에 두고 버려진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했던 조아라는 평생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장로 장립을 받던 날, 조아라는 직접 안수를 하면서 울고 말았다. 기쁘면서도, 서럽고 힘들었던 세월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 땅의 수고를 모두 마친 후 그녀가 자신의 방에 남긴 것은 평생 사용했던 낡은 재봉틀과 구석구석 닳은 가방 한 개와 손수 만들어 입었던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조아라는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다. 우리도 조아라처럼 살 수 있을까. 조아라를 닮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조아라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어렵더라도, 무섭더라도,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물러서지 말아라.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섭섭해하지 말아라. 묵묵히 네 길을 가면 하나님은 늘 동행해 주신다.”
◇나애시덕(최종수 미 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
나애시덕은 2003년 케이비에서 텔레비전이 <인물현대사>에 선정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어느 감리교 목사가 자기 교인 한 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하여 자기 교인 한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하여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독실한 감리교인이니까 꼭 입원시켜 달라고 나 선생님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나 선생님은 뜻밖에도 불교신자였던 환자를 먼저 입원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감리교 목사는 대단히 화가 났다. 이 목사가 나 선생님에게, “당신은 감리교에 충성스럽지 못하다”라고 항의하면서 화를 냈다. 감리교인 대신에 불교신자를 먼저 입원시키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나 선생님은 “요양원에서 누가 먼저 입원해야 하느냐는 흉부 엑스레이가 보여주는 병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엑스레이 사진에는 감리교인, 비교인의 표시가 없지요!” 나 선생님은 고국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하여 항상 마음 아파했다.
◇황광은( 김정호 후러싱제일교회 담임목사 저)
황광은 거지들 고아들과 늘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정신을 길러줬다. 그것이 삼동 사업이었다. 종로 네거리 뒷골목에 원래가 변소였던 자리를 개조해 살 집을 마련하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지냈다. 여름에는 심한 냄새가 났었고 겨울에는 또 견딜 수 없을만큼 추웠다. 추운 겨울에도 고아들과 함께 거기서 잤고, 냄새나는 여름에도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훗날 와이엔시에이 총무를 지낸 현치호씨의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거기 음식을 한 끼도 먹지 않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데 그걸 어떻게 먹고 앉아 있습니까. 그러나 광은은 그 고약한 냄새나는 곳에서 보기에도 지저분한 음식을 함께 먹곤 했었지요. 아무튼 천성이 아니고는 못 할 일이었습니다.”
◇권정생(이철지 전 종로서적 대표 저)
이오덕 선생은 권정생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조그만 교회 한쪽에 있는 부속 건물의 방 한칸을 빌려 자취를 하고 있는 그는 내게 모든 신상 얘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한 해 동안 총 수입이 4천5백 원으로 살았다고 했다. 4천 원은 원고료 수입이고 5백 원은 어느 낯선 할머니가 주고 갔다는 것이다. 신춘문예 시상식도 못 갔단다. 입을 옷도 여비도 없었고, 건강 때문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다만 동화를 쓰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듯한 이 작가가 깜박거리는 목숨의 불을 간신히 피워 가면서 40년 가까운 반생을 온갖 신체적 물리적 또 정신적 고통 속에서 얼마나 처절한 생활을 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민족의 온갖 불행을 한 몸에 지니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어느 가을날에 그의 토담집을 다시 방문했다. 권 선생은 그의 표현대로 불쌍하게 떨어진 낙과를 주워 모았다면서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일행들은 흠집 난 곳을 피해 가며 맛있게 먹었다. 먹성이 안 좋은 편이라 주저하는 내겐 먹어보라는 흰소리도 하지 않았다.
방 한구석에는 흰쌀밥 담은 양재기가 놓여 있었다. 그 밥을 셋으로 구분하고 한쪽은 ‘누렁이’ ‘꾸구리’ 몫, 다른 한쪽은 ‘생쥐’ 몫, 또 다른 한쪽은 ‘당신’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이 없다.
◇이현필(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저)
이현필은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현필이 한국전쟁 중 설립한 동광원에서는 언님(동광원의 수녀)들이 출가 전 낳은 아이들을 고아들 속에 넣어 함께 키웠다. 자기 자식들과 고아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먹는 것도,입는 것도 똑같이 키웠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었다. 그때 아이들이 오는대로 받다보니 먹이고 재우는 아이들이 정원을 몇배나 넘는 600명이 넘었다. 제대로 허가받은 고아원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자 광주시청에서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가까운 데로 보내면 아이들이 다시 찾아온다며 멀리 순천과 목포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 돌아왔다. 걸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부의 아이들이 며칠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동광원을 걸어 찾아왔다. 고아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그곳이 배곯더라도 그 어떤 곳보다 좋았던 것이다.
심리치료란 무엇이냐, 치료를 받으면 다 낫는거냐, 하는 등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심리치료를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나 심리치료는 일상적인 것입니다.
성장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대화를 통하여 천천히 아물게 해주는 작업이라서 특별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상처가 다 아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은 묻어버리게 하고 어떤 것은 그냥 가지고 살게 해주는,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하게 해주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심리치료는 새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재활치료라고 하는 것이지요.
가끔 종교인들 중에서 새 삶을 얻었다, 혹은 부활한 삶을 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심성이 약한 사람들은 길가에서 만병통치약을 파는 사람들에게 혹한 아이처럼
대책없이 따라 가다가 더 큰 마음의 짐과 병을 얻는 일이 허다합니다.
심리치료이건 신앙생활이건 목표는 일상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속에 머물 것이다.
-톨스토이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는 괴로움도 없다.
그런 사람에겐 슬픔도 번민도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의욕도 없다.
-붓다
한 집 두 집 어울린 지 4년 곳곳에 함께 하는 ‘아지트’
파주 문발동 28통 공방골목 사람들
» 틈만 나면 '마을마당'에 요리 하나씩 가지고 나와 펼쳐놓고 포틀럭파티를 여는 파주시 문발동 28통 공방골목 사람들
8년 전 허허벌판 ‘커피발전소’가 이웃사촌 정 나누는 마중물
세월호 참사 울분으로 새 삶 눈떠, 분향소 차리고 주말마다 촛불문화제
마을책방에 하나둘 모이면서 ‘작당’, 공방 가게, ‘마당’ 탁구대, 만둣집…
빈 집터 텃밭에선 음식 나누고, 두세명만 모여도 모임, 모임…
술꾼모임이 남성합창단으로, 아내들은 속상한 마음 푸는 ‘천불회’
협동조합 만들고 마을잡지도 내, 교하·파주 등 이웃들도 점점 동참
» 문발동 28통 입구 사거리 마을책방에서 수다를 떨며 마을을 위한 작당을 하는 사람들
경기도 파주 문발동 28통 공방골목은 10여년 전부터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들이 한 집 두 집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 변두리에 하나둘 모여든 새내기 주민들이 수백년 된 전통마을에서도 보기 어려운 ‘이웃사촌’이 되었다. 8년 전 허허벌판인 이곳 사거리에 세워진 ‘커발’(커피발전소)이 마중물이다. 인근 교하도서관에서 일하던 이정은(48)씨 등이 ‘커발’ 안에 ‘마을책방’을 내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작당’이 시작됐다. 삼삼오오 수다를 떨던 사람들은 이제 매주 독서모임을 하고, 일본어 공부를 하고, 함께 여행을 한다.
‘커발’ 옆엔 ‘짝작’이라는 가게가 있다. 이 인근에서 도자기공방을 하는 김연희씨(47)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인 김영진씨(49) 등 문화예술인 12명이 조합을 만들어 낸 가게다. 조합원들이 도자기나 가죽제품 같은 자기 상품을 진열할 가게가 없어서 이 가게를 낸 게 아니다. 조합원들도 다 가게를 가지고 있는데도 공동가게를 낸 것은 순전히 ‘함께 놀기 위해서’다.
마을책방 모습과 문발동 28통 골목의 모습
맞벌이 부부 아이, 마을이 키워
‘짝작’에서 다시 몇걸음 옮기면 ‘마당’이 있다. 성공회 최석진(51) 신부가 제공한 1층 실내공간 20여평이 이 마을 ‘마당’이다. 마당 한가운데는 이사 간 이웃이 버리고 간 헌 탁구대가 놓여 있다. 이 탁구대에서는 ‘우동탁’(우리동네탁구)을 비롯해 불금엔 ‘불탁’, 청년들의 ‘청탁’, 아이들의 ‘아동탁’, 부부 복식조인 ‘부부탁’ 등의 모임이 있다. 매주 한 번씩 마을합창단 ‘파노라마’ 연습도 이 탁구대에 둘러앉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틈만 나면 온갖 핑계를 만들어 ‘밴드’에 누군가 ‘모이자’고 선동을 하면, 금방 요리 하나씩을 해서 들고 포틀럭 파티를 펼치는 곳도 이 탁구대다. 한마디로 비용 대비 효율 면에서 세계 최고인 탁구대다. 부모들을 따라온 아이들은 탁구대 주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가자’고 하면 더 놀겠다고 떼를 쓴다. 이곳에 엿을 붙여놓은 모양이다.
공방골목과 인근엔 20여개의 공방들이 있다. 이들이 문화예술인조합을 만들어 '짝작'이란 가게를 공동으로 자신들이 만든 물건들을 진열해놓고 있다.
마당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박상희(47)·박경희(43)씨 부부네 이층집 1층 공간도 마을사람들의 아지트다. 이 집에 사는 산이(13), 연이(10), 훤이(6) 등 3남매도 부모를 따라 친구들이 놀러 오는 게 반갑다. 박씨 부부가 맞벌이를 했는데도 육아 돌보미를 따로 두거나 아이를 딴 데 맡기지 않고 세 아이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마을사람들과 ‘함께해서’ 가능했다.
‘커발’의 오른편엔 또 하나의 아지트가 있는데, 이재정(51)·전영미(47)씨 부부가 하는 만둣집 ‘손수’다. 모임을 끝내 출출해진 마을사람들이 ‘만원의 행복’ 파티를 열곤 하는 곳이다. 만원 범위 내에서 먹고 싶은 것을 먹으니 이윤이 남을 턱이 없는데도 부부는 ‘주린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두 팔을 벌린다.
이래저래 마을사람들은 갈 곳 천지다. 이제 봄이 왔으니, 아직 집을 짓지 않은 땅을 빌려 텃밭도 가꿀 때다. 텃밭 가에 둘러앉아 상추튀김도 해 먹고 콩나물비빔밥도 해 먹는다. 그 옆에선 공방 사람들이 내놓은 작품들을 전시한 ‘프리마켓’도 열린다. 공릉천에서 자전거를 타는 자전거타기모임, 낚시모임, 주말이면 10여㎞를 달리는 마라톤 모임, 함께 시를 읽는 시모임 등 모임의 수를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저 두세명만 모여도 모임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성공회 최석진 신부가 개방한 '마을 마당'. 헌 탁구대에서 온갖 탁구모임이 열린다. 또 포틀럭파티와 4중주혼성합창단 연습도 이곳에서 한다.
자전거, 낚시, 마라톤, 시 읽기…
이렇게 희한한 동네로 변모한 것은 불과 4년 전부터다. 그 전까지는 만둣집 이재정씨를 비롯한 중년 남자 몇명이 심심하면 모여 술이나 마시고 당구를 치는 정도가 주모임이었다. 그런데 4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이재정씨는 세월호가 큰아들과 같은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영영 가라앉아 버리는 것을 보고 공황장애가 왔다. 그러던 중 동네 술친구들과 분향소라도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파주엔 분향소마저 없자 이들이 나서 분향소를 만들고, 주말마다 13차례의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예전엔 술 취하면 ‘내가 어쩌다 이 변두리까지 밀려났나’ 푸념하든지 ‘어떻게 돈 좀 벌어볼 방법 없을까’ 궁리하던 중년남자들이 번갈아 분향소를 지키던 중 삶이 바뀌었다. 이들이 술꾼모임이 아니라 ‘파노라마’란 남성합창단을 만든 것이 희한한 변화의 서막이었다.
세월호파주추모모임 운영위원인 박인애(49)씨는 “아이들한테 ‘공부만 하라’고 하고, ‘가만히만 있어라’고 하던 우리가 세상을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제 우리 그전처럼은 다시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된다’는 세월호 엄마들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공부 강요는 그만두고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그러자 아이들에게만 새 세상이 열린 게 아니었다. 이웃끼리도 서로의 아픔을 보고, 들어주고 나누면서 4년을 지내다 보니 피를 나눈 형제들보다 더 가까워져 버렸다.
여성들도 합창단에 끼워 달라자 파노라마는 4중주혼성합창단이 되었다. ‘파노라마’는 이제 조형근 한림대 교수의 기타 반주로 파주 일대 행사 때마다 불려다니는 귀한 몸이 되었다. 또 여성 13인은 남자들만의 낚시모임에 대항해 ‘천불회’도 만들었다. 남편·아이들 다 재워놓고 밤 10시에 생일을 맞은 여성을 ‘천불퀸’으로 모셔, 그가 남편 때문에 ‘천불이 난’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게 한다. 그러면 다른 여성들이 ‘나는 그렇게 천불이 났을 때 이렇게 했다’고 나서면 집단상담이 된다.
마을아지트인 만둣집 '손수'의 이재정 전영미 부부(맨왼쪽). 또 하나의 마을 아지트인 박상희 박경희 부부의 집
올해 3·1절엔 드디어 거사
이제 이 마을은 질적인 변화까지 시도한다. 마을책방은 이제 협동조합이 됐다. 또 북디자이너 여현미(44)씨와 사진활동가 김지하(41)·김승균(45)씨가 가담하면서 <디어 교하>라는 잡지까지 내기 시작했다. <디어 교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 동네 사람들이다. 모임의 중심축은 28통이지만, 소문이 나면서 모임 참가자들은 문발-교하-파주로 확산되고 있다.
세월호 이후 이렇게 이웃사촌이 된 이들이 지난 3·1절엔 드디어 거사를 했다. 만둣집 이재정씨를 28통 통장으로 뽑은 것이다. 28통 전주민을 놓고 보았을 때 아직 책방이나 마당 참가자가 다수라고 볼수는 없지만, 이들의 응집력이 커서 통장 교체에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이씨를 ‘촛불 통장’이라며 희색이 가득하다. 전형적인 ‘강남맨’이던 책방의 이윤식씨(50)가 ‘세월호’이후 변화된 것을 보면, 이 마을에서도 ‘촛불통장’이 탄생한 것이 의외는 아니다. 이들의 단결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 어디서 집단이주했냐’고 묻는다. 불과 4년 만에 이런 마을, 이런 삶,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도 ‘함께’하면 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이 보여줬다. 그래서 ‘문발동 28통’은 별이 된 세월호 아이들이 ‘함께’하게 해준 특별한 선물이다.
» 제주도 4·3평화공원 순례 기도회 중 쌍무지개가 떠올랐다
며칠 전 ‘밝은누리’ 길벗들과 제주도에 갔다. 작년 가을 전쟁 위기가 한창일 때,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시작해 제주도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 땅 어느 곳도 민족의 아픔에서 벗어난 곳은 없지만, 유독 제주도는 그 아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었다. 원통함과 상처가 서린 학살 현장과 묘지들을 순례하는 동안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4·3이라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도 ‘강력한 군사력(폭력)을 통한 평화’라는 거짓이 팽배한 땅에서 과연 새로운 것을 꿈꿀 수 있을까. 빗속에 기도 순례가 이어졌다.
4·3평화공원 행방불명자 묘지에 모여 기도할 때다. 오히려 슬픈 영혼들이 순례단의 비탄을 달래주듯 쌍무지개가 떴다. 한라산에도 처음 올라보았다. 제주 생명들의 한과 꿈, 신화가 서려 있는 한라산은 멀리서나 정상에서나 한결같았다. 먼바다까지 펼쳐진 섬 전체가 하나의 생명이었다.
제주도에 처음 가본 건 마흔이 넘어서였다. 어릴 때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관광지라 여겼던 곳이다. 20대에 4·3사건을 공부하면서 역사의 비극과 상처가 서린 제주도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함께한 길벗들이 가장 많이 주목하고 나눈 고백은 이 아름다운 절경 속에 어떻게 그런 비극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비극은 현재형이었다. 제주 토박이로 유기농 감귤농장을 하는 분에게도 강요된 침묵이 깊은 상처와 불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분은 원통함을 푸는 것이 먼저라고 했다. 그것만이 참된 화해와 평화를 가능하게 할 거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광리 동굴에 숨어 4·3을 겪은 할머니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사과하기 전까지는 그 오랜 세월 ‘4·3’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고 하신다. 그 고통과 원통함 속에서도 유독 웃음기가 많은 할머니 얼굴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 제주도 한라산에서 아픔의 땅 제주도를 내려다보며 기도하는 기도순례단
제주 토박이로 제주에서 공동체를 일구는 젊은 친구는 집안 어르신들이 4·3 때 제주도와 도교육청 고위 관료였다고 했다. 가해자 집안의 후손인 셈이다. 진실을 밝히고 원통함을 풀어 화해를 이루는 과정은 가해자 혹은 방관자로 살았던 삶에 대한 아픈 자기반성이 따른다. 자기 역사와 삶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도 쉽지 않고 또 다른 아픔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마땅한 길이라는 고백을 들으니 희망이 보인다.
그 아픔의 땅에도 자연농법을 지키고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 있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원통함을 풀고 남북이 화해하고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생명평화를 일구는 이들도 있었다.
제주인들과의 만남이 여전히 신음하는 슬픔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생명평화를 증언하는 땅으로 부활하리라는 소망과 기쁨도 주었다. 우리는 비극의 땅에서 기도했다. 하나 된 겨레가 비무장 영세중립 생명평화의 땅을 만들길, 모든 핵무기와 전쟁무기가 폐기되길, 판문점에 생명평화기구가 세워지길.
» 경기도 안산 세월호 분향소 기도 순례
» 제2차세계대전 도중 바르샤바에서 유대인들을 체포하는 나치군인들. 사진 픽사베이
한자에서 오지 않은 순수한 우리 말 중에 ‘길’이 있습니다. 손으로 소통하는 길은 손길, 발로 소통하는 길은 발길, 물이 가는 길은 물길, 불이 가는 길은 불길이라 하지요. 참 아름다운 말들입니다. 길은 이렇게 서로를 잇기 위해 생겼을테지만, 남의 땅을 정복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이런 길 위에 뜻하지 않게 놓여있는 것이 걸림돌입니다.
평탄한 듯 하던 길에도 걸림돌은 언제라도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 삶인 것 같습니다. 오로지 나쁘기만 한 것도, 오로지 좋기만 한 것도 없듯이, 걸림돌도 우리를 곤혹하게만 하는게 아니라,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잊고 싶은 것을 기억시켜 주기도 합니다.
독일의 동넷길에는 일부러 만들어 놓은 작은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1993년 부터 군터 뎀니히라는 한 예술가는 독일의 나치 체제하에서 추방, 고문, 자살, 학살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독일인들 자신에 대한 경고로서 ‘걸림돌 (슈톨퍼 슈타인)’이라 이름 붙인 추모비를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가로 세로10 cm가 채 안되는 놋쇠로 된 이 작은 ‘돌’들은, 그들이 게슈타포에 체포될 때까지 살았던 주택 앞 길 보도블럭의 사이에 박혀 있습니다.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라, 돌 혹은 시멘트와 놋쇠라는 서로 다른 재료와 크기 때문에 오는 시각적인 걸림돌입니다. 돌 하나에 한 사람! 이름과 생년, 체포된 날과, 언제, 어디에서 ‘살해’되었는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동네에는 한 집 앞에도 수많은 걸림돌이 박혀 있는데, 이름과 생년으로 3대가 몰살 당했음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탐사와 성금으로 주문제작 되는 이 돌들은, 공공의 보도에 설치되기 때문에 시의 허락을 받아, 작고 큰 추모식을 통해 안장됩니다. .생존 유대인들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행인들에 의해 밟혀진다고 반대하기도 했고, 나치독일이 계속 기억되는 불쾌함을 반대하는 독일인들도 많았고, 실제 700 여개의 돌들은 파헤쳐져 도난되었거나 시커멓게 페인트칠 되었기도 하지만, 유럽 전역과 아르헨티나까지 퍼져나가고 있어 2018년 현재 7만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개나리 조차 볼 수 없이 더디기만 한 봄을 재촉이라도 할 양으로 오랫만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산책하러 나갔다가, 유난히도 많은 ‘걸림돌’들이 있는 거리에 들어섰습니다. 거대한 추모비들과 달리 누구나가 사는 동넷길에 있는 이 걸림돌에는 이렇듯 무심코 걷다가 걸려버립니다. 또 다시 돌 하나 하나에 새겨진 지극히 요약된 그 누군가의 생애에 마주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았던 집을 쳐다봅니다. 우리 곁에서 살던 한 사람, 한 이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추상적인 역사로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한 사람의 삶이기에 마음으로 바로 뚫고 들어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모든 아픈 마음이 치유되길 기원합니다.
천년 제국을 꿈꾸던 나치는 10여년 만에 멸망해 버렸지만, 그 체제가 입힌 상처는 70년이 넘도록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이것은 독일에만 국한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치유는, 얼마가 걸리던 간에 아픔을 알아주고, 함께 나누며, 잊지 않을 때에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불쾌한 것,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상기시키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치유는 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할겁니다. 제발, ‘이젠 그만 됐다’고 먼저 말하지 마세요. 그말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그래서 걸림돌이 필요합니다. 간사한 마음이 잊어버리고 싶을 때, 다시 일깨워줄 수 있는 걸림돌 말이지요.
» 부탄식 예복을 입고 결혼한 홍콩배우 양조위(오른쪽)와 유가령
불교왕국 부탄에서 부탄국왕의 주례로 영화같은 결혼식 올린 양조위와 유가령 이야기
스스로 선택한 가난을 청빈이라고 한다.물질과 재산은 넉넉하지만 허영을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을 청빈이라고 한다.
한 개인이 청빈의 삶을 이루기도 어려운데 국가적으로 청빈의 삶을 살아가는 나라가 있다.히말라야의 불교왕국 부탄이 바로 그런 곳이다.
부탄은 선진국되기를 바라지 않고 경제개발을 바라지 않는 나라이다.오히려 관광객을 제한하고 등산객을 받지 않는 나라가 부탄이다.부탄은 강대국의 원조를 거부하고 외교관계도 맺지 않는다. 부탄은 비슷한 환경의 나라와만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부탄의 이러한 외교정책을 ,자발적인 고립,이라고 부른다.
경제개발보다 외교관계보다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부탄의 전통문화이며 불교신앙을 지켜가는 일이다.그리고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행복을 소중히 여긴다.
부탄은 국왕이 모범을 보여 의회민주주의를 선택하여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었다.국왕이 직접 국민들을 10년간 설득한 결과였다.
국왕의 토지는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왕궁은 국가에 돌려주었다. 그들은 조용한 별장에서 검소한 삶을 산다.그 결과로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신망을 얻고 있다.가난한 나라지만 백성들에게 고루 복지혜택을 베풀어 돈을 벌기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병원의 의사들은 국가공무원이며 병원비는 무료이다.인도나 미국에가서 암치료받는 비용도 국가에서지원해 준다.학비도 대학까지 모두 무료이다.해외 유학 경비도 국가에서 지원해준다.
그들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깃들어 사는 자연도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첫째.그들은 도로를 낼때 터널을 뚫지 않는다.자연을 큰생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둘째.낚시질을 하지 않는다.고기를 속이면 안되는데 사람을 속이겠는가?부탄에서는 물고기를 잡으면 종신형이다.
셋째.나라 전체에 도살장이 없다.부탄의 닭과 돼지들은 천수를 누리고 죽는다.필요한 육식은 수입해서 먹는다.
넷째.그들은 꽃도 함부러 꺽지 않는다. 실내장식은 조화로 한다.
부탄에서는 자연을 한 몸으로 생각하고 식물과 동물을 가족처럼 여긴다.그래서 부탄은 사람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까지도 행복한 에덴동산이다.
중화권 인기배우 양조위와 유가령이 부탄왕국에서 부탄국왕의 주례로 영화같은 결혼식을 올렸다.두사람은 독실한 불자이다.
홍콩 조폭집단 삼합회가 자기들이 요구하는 영화를 거절하자 애인 유가령을 납치하여 강간하고 나체사진을 공개하였다.양조위는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지속적인 사랑을 구애하였다.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가령도 2년간에 걸친 양조위의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여 히말라야 부탄의 왕궁호텔 해발 2400미터에 위치한 우마 파로호텔에서 부탄국왕의 주례로 불교식 결혼식을 올렸다.
믈질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행복을 중시하는 부탄의 불교문화를 존중하는 양조위는 결혼식이 끝난후에 불교사원을 찾아 기부금과 대중공양을 올리고 동자승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양조위의 부탄 결혼식이후 중국인들의 부탄관광이 크게 늘었다.
행복의 나라 부탄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치유되고 재결합 할수 있는 성소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미국 북쪽 지방에서 사는 어떤 흑인 직장인 한 명이 먼 지방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흑인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숙소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갔습니다. 예배당 계단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문 앞에서 안내를 맡은 백인이 이 흑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기 들어오지 못합니다.” 흑인은 깜짝 놀랐습니다.“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그러자 백인이 대답합니다. “여기는 백인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흑인은 하는 수 없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몽사몽간에 흰 옷을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흑인의 어깨를 두드리시며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째서 여기에 혼자 앉아 있느냐?” 흑인은 예수님의 옷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예배드리려고 이 교회에 왔는데 제가 얼굴이 검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흑인의 어깨를 다시 두드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 예배당에 못 들어갔느냐? 나도 그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단다.”
밤에 찾아가면 예수님도 못들어가는 문이 잠긴 예배당, 주님은 새벽을 기다리며 날 밤을 새십니다.
행복의 조건은 '인생의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렸다.
-<행복의 조건>(조지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프런티어 펴냄)에서
"적을 항상 용서하라. 그보다 더 적을 괴롭히는 것은 없다."
오스카 와일드
남을 헐뜯는 일은 살인보다도 더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만을 해치지만 험담은 꼭 세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즉 험담을 하는 사람 자신과 그 말을 비판 없이 그냥 듣고 있던 사람, 그리고 그 험담의 주인공이다.
-탈무드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때론 행복해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하면서
그런데 정작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아닌 다른사람이 만들어준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바라는 인생 혹은 부모가 강요한 인생 부모의 뜻을 따라 사는 인생
마치 허수아비처럼 부모의 칭찬에 목을 매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치료에서는 거짓자아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MAY SARTON 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해 여러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없어져 다른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어떤 영성가는 이런말을 하기도 햇습니다
“ 사람이 본연의 자기모습으로 돌아가는데 얼마나 오랜시간이 걸리는가?
그 과정에서 자기것이 아닌 남의 얼굴을 가면처럼쓰는일이 또 얼마나 많은가
내면 깊은곳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까지 우리의 에고는 얼마나 많이 녹아내리며 흔들림을 겪어야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래놓고는 인생의 절반을 그 재능을 내버리거나 다른사람들이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산다
혹시라도 눈을 뜨고 깨달아 잃어버린것을 갖게 되면
나머지 인생은 원래 갖고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애쓴다 ”
참으로 어려운것이 인생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지위를 얻고 성공한 인생을 만들은것 같은데도
마음이 허전한것은 그 삶이 자기삶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삶일때 그런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은총중에 가장 큰것은
내 인생길을 알려주는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멘토라고 합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기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저의 작은 이 상담카페가 길을 잃고 헤메는 외로운 영혼들에게
작은 등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올립니다
저역시 길을 잃고 어두움속을 헤매다가 멘토를 만나
비로서 나이 사십중반부터 나를 찾는 작업을 하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