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Viewing all 307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아이에게 화가 나는 이유

$
0
0


아이 통제하려는 마음 접으면 분노도 줄어듭니다

통제되지 않는 5살 딸 둔 전업주부 “나를 닮은 딸 때리는 내가 미워요”


사진14-.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잠든 아이 보며 미안하다 이야기하고 속상해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7살 아들, 5살 딸을 둔 서른두 살의 전업주부예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유치원 교사로 3년 일했고 둘째를 가지면서 전업주부가 되었어요. 아들은 말을 잘 들어주고 의젓하게 행동하는 아빠 닮은 착한 아이이고, 딸은 저를 닮아 천방지축 활발한 여자아이예요. 갈등은 늘 둘째와 생기는 것 같아요. 요구도 많고 고집 세고 감정이 세서 화가 나면 소리 지르며 우는데, 제가 그 소리를 들으면 점점 화가 나요. 그때 드는 생각은 ‘이 악쓰는 소리 정말 듣기 싫다. 다른 집에서 듣고 신고하겠다. 왜 얘는 이렇게 화가 많을까. 이 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 등등 그 소리가 너무 싫게 느껴져요.

3살, 4살 때는 온몸을 누르고 진정시킨답시고 훈육하는데, 아이는 그대로 잠들거나 제가 화를 못 참고 장난감 낚싯대 등으로 매를 들기도 했어요. 저는 부모님께 맞고 자라지도 않았고 학교 다닐 때 때리는 선생님은 이해가 안 되고 그랬는데, 제가 지금 제 아이를 때리고 있다는 죄책감이 저를 또 괴롭혀요. 얼마나 어떻게 반성해야 할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이 관계에서 승리하는 걸까요? 좋은 엄마, 고마운 엄마가 되고 싶은데, 직장과 커리어도 포기할 만큼 소중한 가족인데, 자고 있는 모습 보면 천사 같은 아인데 저를 닮은 모습일 텐데…. 이럴 때 우리 엄마는 웃으며 이해해줬는데 부족한 제 모습이 너무 속상해요. - 다연맘


A)아이 재워놓고 홀로 자책하며 이 글을 쓰셨을 다연맘 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래요. 많은 엄마들이 미숙한 엄마 노릇을 괴로워하며 남몰래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 목표지향적이고 성마른 성격, 실수를 용납하지 못했던 완벽주의 등등 정리되거나 성찰되지 못한 제 내면의 문제 때문에 아이와 격렬하게 싸우고, 상처 주고, 또 후회하기를 반복했지요. 특히 저는 첫째 아이에게 못된 엄마였는데, 아이가 제 속도를 따라오지 않는다고 고함치고 윽박질렀답니다.


제가 이런 개인사를 고백하는 이유는, 엄마들이 너무 많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많은 엄마들의 공통된 아픔이란 걸 아시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숙해도 괜찮습니다. 아이와 씨름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면 되니까요.


죄책감 때문에 괴롭다 하셨는데, 실제로 많은 육아서가 엄마의 죄의식을 우려합니다. 반성하는 건 좋지만 엄마로서 의욕이 꺾일 만큼, 우울해질 만큼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끼는 건 엄마 자신에게도, 그리고 아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우선 죄의식을 갖고 있으면 문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감정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집중하느라 아이가 왜 그토록 흥분하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죄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엄마는 활화산 같아서 아이가 자극해오면 다시 폭발합니다. 죄의식이 엄마 자신을 비난하고 감정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자책도 하지 마시고 당신의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을 가만히 느껴보세요. 아이를 위해서만 가슴 아파하지 마시고, 아이 때문에 마음고생 한 자기 자신도 위로해주세요. 아이에게 유독 화가 날 때는 육체적인 피로감을 점검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실 아이가 악을 쓰는데 그 누구도 마음 평온할 리 없습니다. 더구나 내 아이가 그렇다면 더더욱 불편하고 불안하지요. 아이의 모든 문제를 다 엄마 책임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연맘 님, 이제 그 책임감을 내려놓으세요. 직장도 커리어도 기꺼이 접으셨을 만큼 좋은 엄마, 고마운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셨겠지만, 진정으로 좋은 엄마는 아이를 자신의 책임감에서 해방해주는 엄마입니다. 두 아이를 키워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제각기 타고난 성품이 있으며, 그것은 부모가 노력한 결과가 아닐 뿐 아니라 잘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모두 책임지고 통제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만큼 분노도 줄어듭니다. 그러면 아이가 떼쓰는 걸 비교적 차분하게 지켜보실 수 있을 거예요. 가만히 바라보시면서 왜 그러는지, 불편한 게 뭔지 물어봐주세요.


관계에서 승리하는 법을 물으셨는데, 그것이 자식과의 관계일지라도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법이 있을까 싶습니다. 건강한 관계는 제패하거나 승리하는 게 아니고 서로 조율하고 수정하면서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관계엔 조화뿐 아니라 불화도 포함돼 있다는 말씀입니다.


글에서 보니 아들은 아빠를 닮아 좋은 성격을 가졌고, 딸은 엄마를 닮아 천방지축 활발하다고 서술하셨네요. 요구도 많고 고집 세고, 감정이 세다는 표현도 하셨고요. 아들과 남편의 성격을 높게 평가하는 반면 자신과 딸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고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엄마들은 자기 성격을 닮은 자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미워하는 만큼 자식을 미워하고, 자신의 성격을 감추고 억누르는 만큼 자식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가 자신의 성격 특성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다연맘 님, 자신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이제는 그 태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 어떤 성격이든 살아가는 데 유용한 점도,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타고난 성격은 호불호의 대상이 아니고, 수용의 대상입니다. 유용한 점은 잘 살리고 불편한 점을 보완하면서, 더 나아가 불편한 점이 가진 긍정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당신과 당신을 닮은 둘째 아이의 성격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세요.



남에게 친절해야하는 이유

$
0
0


남에게 친절하라. 그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현재 그들의 삶에서 가장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

아름다워지고 싶다면

$
0
0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고, 아름답다면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 추하다면 교양으로 그 추한 모습을 덮도록 하라.


-소크라테스

편견

빠른 도심서 느리게 걷다

$
0
0


철길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경의선1-.jpg» 경의선 숲길. 사진 서울시 제공


경의선4-.jpg» 경의선숲길 사진 이병학기자를 잡은 후 경의선 숲길로 가자고 했다. 낯선 이름 때문인지 기사님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재빠르게 C가 핸드폰 티맵에 검색어를 올린다. 운전을 보조하는 기계음을 따라 마포구 연남동 방향으로 달렸다. 거의 다와서야 ~ 여기요!”하면서 이제사 알겠다는 듯 차를 세운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애용하는 건축재료인 녹슨 철판에 한글과 영어로 새겨진 가로 표지판이 우리를 맞이했다. 경의선은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과 연결되면서 가장 많은 교통량을 자랑하던 황금노선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개성 평양을 거쳐 신의주로 가는 철길인 까닭이다. 압록강 철교만 넘어가면 바로 중국 단둥(丹東)이다.

 

안경을 고쳐 써가며 옆구리 면에 쓰여진 안내판을 열심히 읽던 B경의선이라고 하길래 의정부 가는 길인줄 알았더니 신의주네!”라고 하면서 탄식어를 내뱉는다. 7080세대인지라 휴전선 이남의 지명으로 국한된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한계 속에서 살아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3명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세대는 연트럴파크라고 부른다. 연남동과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합했다. 북쪽이 막혀 있으니 아예 동쪽으로 태평양을 날아다닌 경험치가 쌓인 결과일 것이다. 없어진 철길의 이미지도 그 이름과 함께 사라졌다. 너무 나가버린네이밍이긴 하지만 톡톡튀는 동서문자의 조합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폐선로공원.jpg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철길이 몇 년 사이에 어느 날 도심공원으로 바뀌었다. 철길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스쳐가는 길이었지만 공원길은 천천히 걸으면서 머무는 길이 된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시대에는 양옆으로 낡은 경계선으로 얼기설기 가려진 칙칙한 길이였지만, 천천히 걷는 시절에는 담장을 대신한 노천카페와 맛집은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상호와 인테리어가 사람들의 발길을 더 오래토록 묶어둔다. 제철을 만난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고 봄물이 오르기 시작한 연두빛 나무들 사이로 만들어진 인공물길은 아직도 건조된 상태이다. 곧 물길이 열릴 것이고 밤에는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또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촉촉하게 흐를 것이다. 그럼에도 시공자는 군데군데 레일의 흔적을 남겨 철길이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유적처럼 물증으로 기록해 두었다. ‘나를 잊지말라고 외쳤던 철길의 기능을 위해 지하철도를 새로 만들었다. 알고보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옮긴 것이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가 없어졌다고 여긴다.


경의선3-.jpg» 경의선 숲길 공원. 사진 이병학 기자


어린아이와 반려견의 행복한 나들이 표정을 바라보며 우리일행도 넓은 소매자락으로 바람소리를 내며 운동삼아 씩씩하게 걸었다. 공원 마지막 좁은 길을 따라 오르니 길 끝의 고가도로 다리 아래 펴놓은 서너개의 평상에는 해방세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몇 개의 바둑판을 마주한 채 삼매에 빠져있다. 그 뒤로 멀리서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굳은 표정으로 공원방향을 향해 재빠른 걸음으로 오는 남정네와 눈길이 마주치기도 했다.


기술에 따라 철길도 그 모양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터널 뚫기와 다리세우기 실력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산과 강의 지형에 순응하는 곡선철길이 많았다. 세태가 바뀌면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주변의 요구에 따라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직선화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폐철로가 생기면서 고철로 뜯겨 팔리거나 대장간으로 갔고 폐침목은 교외에 새로 짓는 별장의 가파른 언덕길 계단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교통량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왕복노선을 달리한 복선화도 이루어졌다. 넓어지는 철길에 반비례하며 승객과 화물의 수요가 작은 역에는 열차의 정지횟수가 차츰차츰 줄었다.


경의선2-.jpg» 경의선 숲길 공원. 사진 이병학 기자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기차가 서지않는 간이역도 점점 많아졌다. 이후 역사(驛舍)의 기능을 상실한 간이역은 철도를 이용하여 오가는 승객이 아니라 자동차를 몰고 온 관광객이 찾아가는 근대문화유산 혹은 옛추억을 찾는 장소로서의 가치가 더 부각되는 용도로 바뀌었다. 다행히 뜯기지 않고 남은 폐철로는 레일바이크(철로자전거)가 다니는 관광철도로 되살아 난 곳도 있고 노선변경으로 인하여 폐기된 터널은 와인저장고 등으로 변신하면서 지역경제의 효자노릇을 자청했다. 직선화 복선화 이후로 간이역 숫자가 늘어나더니 고속철이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거장이 간이역에 준하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몇 분 단위로 운행되는 지하철에는 간이역이 없다.

 

길은 필요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또 넓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용도가 폐기된 채 을씨년스럽게 버려진다. 반대로 없어지다시피한 토끼길, 나무꾼길, 과거시험 보려가는 길, 임금님 행차길 등 묵은 옛길을 살려 다시 둘레길로 정비되었다. 예전에 편의를 위하여 덮었던 시멘트 포장을 걷어내고 다시 흙길로 복원하기도 한다. 이처럼 길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만들고 이용하고 수리하고 교체되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순환법칙을 따라 생기고 유지하고 없어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본래 길은 없다. 내가 가면 길이 된다고 호기있게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본래 있던 길도 없어진다는 사실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경의선숲길구간.jpg

어느날 엄마가 이상해지더라도

$
0
0


엄마-.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지난겨울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를 등에 업었다. 젖먹이 때 엄마 등에 달려 있던 내가 이제 그분을 등에 업고 중환자실로 달려가야 하는 심정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소년 시절 사고를 당해 엄마 등에 업혀 병원으로 실려 갔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위기는 파도를 타고 계속 넘어온다는 말처럼, 응급실에 이어 중환자실, 장기간 재활병원 입원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길고도 추웠던 지난겨울이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자식들에게 용기를 주던 엄마가 마치 태엽 풀린 장난감 비행기처럼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시간이란 이름의 무서운 파괴력이다.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애틋하게 만드는 단어 역시 ‘엄마’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 고마운 존재인 엄마가 점차 어린애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병원을 자주 출입하다보니 사랑하는 엄마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이 든 자식들의 남모를 고통과 사연도 자주 듣게 된다.


“우리 어머니 때문에 미치겠어요. 집에 오는 간병인들이 일주일을 버티지 못해요. 얼마나 닦달해대는지 옆에서 봐도 너무 심해요. 더구나 시계나 돈이 없어졌다고 간병인을 자주 의심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보면 당신이 어느 구석에 꼭꼭 숨겨놓고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 거죠. 이분이 제가 좋아하던 엄마인가 가끔 자문해본다니까요!”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어요. 제 어머니는 밤새 한두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야 합니다. 제가 잠들려고 하면 또 화장실 가자고 하고, 자세도 바꿔달라고 하기 때문에 잠을 못 자서 도저히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드네요. 나날이 증세가 악화하는 어머니를 수발하는 사람으로 가끔은 절망에 빠집니다. 장기간 치매 노인을 돌보다 지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자식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들리는 동서는 끼고돌면서, 정작 매일 돌보는 저는 그렇게 미워할 수가 없어요. 병원에서 처방한 약 복용에 관한 주의사항을 종종 말씀드리는데, 동서는 와서 어머니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하거든요. 정말 무책임한 얘기죠. 그럴 때마다 힘이 빠지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나 한숨이 푹푹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대기 중의 혼탁한 미세먼지와 황사를 볼 때보다 더 마음이 답답해진다. 병원을 자주 드나들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얘기를 반복해 짜증 나게 만드는 일, 가끔 황당한 의심과 분노를 터뜨려 몹시도 당황하게 하는 일, 이런 비정상적 행동이 사실은 뇌에 이상이 오기 시작해 생긴 치매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옆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을 의심하거나 더 나아가 공격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목격한다. 그들도 한때는 교수였거나 인격자였으며 잘나가던 공직자였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앞에서는 과거의 학식, 지성, 인격 같은 단어들은 아무 힘이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과 “효자와 함께 사는 며느리는 반쯤 죽는다”는 시쳇말이 있다. 생업이 있는 처지로 간병과 일을 병행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역할과 책임 분담 문제로 형제간 갈등과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단계에 이르면 엄마는 더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현실이 가장 슬퍼진다.


“어머니가 너무도 힘들게 하셔서 솔직히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누군가를 향한 원망스런 마음도 가끔 생겼구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떠나고 난 뒤 온전하게 모시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요즘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들은, 그리고 딸은 엄마에게 죄인이다. 마음이 편치 않다. 최근 나는 그동안 모르고 있던 엄마의 과거 얘기를 알게 되었다. 거의 40년 전 한동네에 살던 이웃 소년이 지금은 중년이 되어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해오면서 듣게 된 사연이다.

“저희 집이 너무 가난했잖아요. 부모님이 모두 일을 나가시고 집에 없으면, 곰돌이 아줌마가 저희 집에 오셔서 저에게 밥을 차려주시고 함께 드시곤 했어요. 그러면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요. 정말 고맙고 감사해요.”

여기서 말하는 ‘곰돌이’란 내가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고, ‘곰돌이 아줌마’란 우리 엄마를 말한다. 그러니까 서울에서도 아직은 이웃 간에 오붓한 정이 오가던 시절의 일화다. 그러고보니 우리 엄마는 오래전 나를 불러놓고 마치 예언처럼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없는 형편에 너희들이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뛰어다니며 살았단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이상해진다고 하더라. 배우자를 잃고 나서, 노인이 되면서 더 그렇다고 한다. 혹시라도 내가 이상하게 말하거나 행동하더라도 그것은 내 본심이 아니라는 것, 병든 사람의 것이라고 이해해라. 상처받지 마라. 내 본 모습은 지금의 것이라고 미리 얘기하고 싶구나.”

그렇다. 그것이 엄마의 진정한 모습이다. 내게 첫걸음을 가르쳐주시던 엄마는 최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첫걸음을 내딛던 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날이 밝으면 그 환한 웃음을 보기 위해 엄마에게 달려가야겠다. 지금 아무리 힘들게 하여도 상처를 받으면 안 된다. 엄마이니까.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할때

$
0
0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 할 때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goscon@goscon.co.kr

 

1.jpg» ▲ 한 사람의 '영웅'에 기대어 종교개혁 전후사를 해석하고 우늘에 적용하려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다시 출발점에 서며

유럽인들에게 종교개혁 500주년은 기념할 만한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들에게 루터에 대한 관심은 해가 지나면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현재 누구나 다 인정하는 기독교의 위기라는 상황이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사람들에게 종교개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6세기 유럽이라는 지형도에서 펼쳐진 유럽사의 사건을 비텐베르크의 한 사람의 행위로 환원하는 것은 종교개혁 발생뿐 아니라 그 이후 전개된 종교 지형의 특성을 왜곡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혹은 일어날 수밖에 없던 콘텍스트를 읽지 못하면 종교개혁이 성취한 것에 대해서도 잘못된 이해를 낳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며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지만, 교회 개혁에 대한 관심이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이 더 큽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지만, 해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루터는 관심 밖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기념 축제이기보다는 치열한 마라톤을 앞둔 긴장이 감도는 전야제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끄럽지만 교계, 미디어, 출판계의 루터 마케팅에 휩쓸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나 할까요? 명성교회 세습 사건과 대형 신학교의 부끄러운 모습 등은 긴장의 끈을 다시 조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출발해야 할까요? 이제는 루터를 떠나보내고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더 분명하게 알려면 종교개혁 당시 유럽의 서사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주는 함의는 제2, 3의 불행한 루터를 만들지 말고 교회가 스스로 개혁해 나갈 토대를 마련하자는 역설입니다. 그렇지 않고 영웅 한 사람에 기대어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루터를 기억하는 참된 방식이 아닙니다. 루터 너머의 것을 읽지 못한다면 여전히 면벌부 팔던 시절의 가톨릭을 소환해 오늘 우리 실상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찾는 시대착오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근대, 교회와 국가의 관계 재설정

16세기 종교개혁을 가져온 가장 큰 핵심은 국민국가(nation-state)의 등장과 민족의식의 성장입니다. 이것이 루터나 칼뱅, 츠빙글리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뜬금없이 벌어진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설명해줍니다. 모국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모국어 신앙서적들이 늘어나면서 하나의 가톨릭이 다양한 성격으로 분화됩니다.

 

백년전쟁으로 알려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프랑스와 잉글랜드라는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조는 1066년 프랑스에서 건너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세운 왕조입니다. 초기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에 영토를 소유하고 그곳에 살았습니다. 잉글랜드에 실제로 살다 죽은 최초의 왕은 대헌장으로 유명한 존 왕(1166-1216)입니다. 왕실이나 귀족은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15세기까지 잉글랜드의 왕실 문서나 재판 문서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민족의식이 생겨났다고 알려집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압력으로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게 됩니다.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이를 두고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1378년 이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이 각각 세워집니다. 급기야는 동시에 3인의 교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1412년 이 해결을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립니다. 이 공의회는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시키고, 잉글랜드 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유해를 부관참시한 것으로 잘 알려진 공의회입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에서 주목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대립하는 교황들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보통 교황은 추기경단이 콘클라베라고 불리는 방식을 통해 선출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달랐습니다. 추기경단이 당연히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 국가의 성직자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었기에 유럽 전체의 의사를 왜곡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기경단 대신 국민단(nation)이라고 불리는 각 국가의 대표가 교황 선출에 참여합니다.

 

그 결과 오랜만에 이탈리아인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선출됩니다. 이 공의회는 교황이 유럽 세계의 최상위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확정판결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교황은 스스로를 유럽 세계의 통치자가 아닌 이탈리아반도의 군주로서의 세속적 지위를 강화하고자 노력합니다. 그 후 율리아누스 2세처럼 전쟁에 참여한 뒤 로마 황제의 개선식을 한 교황이 있었는가 하면, 가톨릭교회와 맞지 않아 보이는 세속 예술의 르네상스를 적극 지원하는 교황들이 등장합니다.

 

이탈리아반도의 통치자라는 것은 어디에서 증명될까요? 마르티누스 5세 이후 종교개혁기 전후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출신 교황 2명을 제외하고는 무려 455년간 이탈리아 사람만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78년에 와서야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후 연거푸 독일과 아르헨티나 태생의 교황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의 변화의 상징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가톨릭은 가톨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혀 다른 종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100년 전에 이미 가톨릭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던 역할이 끝나고 개별 국가가 종교문제를 주도하는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루터를 기준으로 시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종교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화되지 않은 가톨릭은 여전히 교황이 중세와 같은 세력을 유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종교개혁의 핵심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이 아닙니다. 핵심은 근대사회가 열리면서 생긴 교회국가사이의 관계 재정립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새로운 근대 세계 속에서 국가 세력과의 관계에 동일한 고민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 구도를 넘어섭니다. 이 구도에서 보자면 루터가 가톨릭 교황과 결별한 것은 상징적 사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 가톨릭을 다시 보자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지형도에서 교황 중심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보름스 회의에 루터를 소환했던 신성로마제국 카를로스 5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대적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보복하기 위해 1527년 로마 라테란 교황 궁전에 침입하여 궁전을 마구간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의 위상은 군림하는 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제의 군주쯤으로 전락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화는, 개신교는 개혁을 했고 가톨릭은 반동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가톨릭과 개신교는 개혁의 경쟁자였습니다. 가톨릭은 내부 개혁을 했습니다. 중세부터 위기의 시기마다 위로부터의 개혁(reformation in capite and in membris)에 성공했습니다. 예수회가 등장하고 트렌트 공의회(1545-1563)가 개최되면서 가톨릭은 효율적으로 체제 유지에 성공합니다. 개신교에서 자극받은 반동-종교개혁이라고 부르건 가톨릭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건 분명한 것은 세계사에서 가톨릭이 또 다른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지역은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잉카 문명을 파괴한 정복자 피사로 같은 자도 가톨릭을 전파했지만, 영화 <미션>에 그려진 것처럼 남미 대륙에서 포르투갈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의 모습도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648, 독일의 신·구교 사이에 ‘30년 전쟁이라는 종교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놀랍게도 유럽에서 개신교 지역보다 가톨릭 지역이 더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지고의 선이라면, 1648년의 종교 지형도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근대 세계의 가톨릭 스페인, 가톨릭 프랑스의 발전을 뭉뚱그려 무시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요?

 

물론, 일정 정도 불가피하게 내부 단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전략은 불가피합니다. 루터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개신교 국가에서는 교황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습니다. 칼뱅 같은 경우는 제네바 성경의 난외주(marginal note)를 강한 반가톨릭적인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내부적인 신학적 체계를 다지기 위한 목적도 있는 반면, 스위스 산악 지대의 가톨릭 칸톤(canton, 스위스의 지역을 나눈 주)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이기도 합니다. 잉글랜드 내에서도 종교개혁 이후 명쾌하게 개신교 노선을 걷지 않는 국왕들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강력하게 반교황주의의 색깔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같은 경우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해상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던 터라 가톨릭 스페인은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국민의식을 하나로 묶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승리를 잉글랜드 개신교의 프로파간다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교단 총회 때마다 여전히 가톨릭을 보고 이단이나 이교로 지정하니 마니 다툽니다. 가톨릭은 긍정적 의미이건 부정적 의미이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탈바꿈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면벌부 판매하던 시절의 가톨릭을 적으로 상정하고 적대감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타락의 상징이고, 구원이 없는 종교로 전락되어야 했습니다. 루터의 가톨릭에 대한 대응이 진리여야 했고, 칼뱅은 모두 옳아야 했습니다. 여전히 대다수 한국교회가 지속하고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종교개혁 구도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역사적 정당성이 미약한 진영 논리인가 알 수 있습니다. 루터를 통해 확대하고 강화해 가는 이러한 식의 관념은 개신교의 건전성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존재 의미는 적대적 공생관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친북좌파, 페미니즘, 이슬람, 동성애 등등 시기마다 새로운 적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근거가 종교개혁의 가치를 지켜낸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고민 없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가교회, 정치의 신성화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재정립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의 가르침이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는 교회국가를 꿈꾸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모범으로 제시했던 것이고, 잉글랜드의 청교도가 국왕을 죽이면서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입니다. 하지만 근대 세계는 국가가 종교를 결정하는 국가교회로 탈바꿈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지역 모두는 국민국가라는 절대 상수 앞에서, 국가에 부속하는 종속 변수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중세 천 년이 종교지배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종교개혁 이후 2세기는 그 시계추가 국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크게 회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종교지배를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들이 생겨났습니다. 파시즘을 연구한 이탈리아 역사학자 에밀리오 젠틸레는 전통적 종교의 권위가 붕괴한 근대에 세속 군주가 종교적 권위로 떠오르게 되는 정치의 신성화가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정치의 신성화는 결국 프랑스 혁명 이전에 유럽의 절대왕정을 낳았고, 그 후에는 근대 말의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왕의 안수’(royal touch)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주로 행해진 것으로 왕의 생일에 거리의 병자들에게 기름을 붓고 손을 대면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프랑스 왕도 국교회 영국 왕도 같은 것을 행했습니다. 근대 절대왕정의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심지어 이 관행은 프랑스 혁명 전후에도 발견됩니다. 이는 국왕의 지위가 성직자의 지위로 격상되었음을, 아니 성직자를 대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절대왕정 시대에 국왕은 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칠성사(七聖事, 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사)에도 성직자 서임식은 들어가 있지만 왕의 대관식은 없었습니다. 상징적인 변화입니다. 국가 권력의 극적인 장면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입니다. 제목과 달리 황제의 대관 장면은 나오지 않고 나폴레옹이 왕관을 들어 아내 조세핀에게 씌워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본래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들어 쓰고 그 뒤에 교황이 조신하게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스케치되어 있었습니다.

 

2.jpg3.jpg» ▲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일부, 본래 스케치에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그 뒤에 교황이 조신하게 손을 내리고 앉아 있다.


 

근대 세계에 적응하는 경험이 유럽 교회에는 있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근대는 낯선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17, 18세기 형성된 절대 왕정에서 교회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 때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무엇일까요? 아마 절대 왕정기의 국가가 교회를 탄압한 사례를 보며, 오늘날 종교인 과세 등도 국가가 교회를 말살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 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녔던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란처럼 대통령 뒤에 실세 종교 지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를 건강한 근대라고 보지 않습니다. 근대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점은 변화된 근대 국가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종교적 역할을 하고 살아냈다는 것입니다. 절대왕정은 붕괴되었지만, 교회는 붕괴되지 않고 근대 세계를 관통했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에 근거한 사회적 역할을 발굴해 냈고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노예무역 금지나, 인종차별 금지, 사회 구제 및 선교 등에 앞장선 교회의 모습은 근대의 체제 속에 안착한 종교의 모습입니다.

 

지적 게으름을 넘어서

우리가 종교지배의 중세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을 바에야 세속 사회 속에 살면서 종교라는 특수성으로 문제를 비껴가는 것은 본질을 벗어나는 태도입니다. 교회 세습에 대해서도 세상이 간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내부자의 논리는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근대 교회, 더 나아가 근대 사회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21세기에도 한국 사회에 게토가 아니라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함입니다. 한국 사회도 그렇지만 개신교 역시 근대라는 세계가 던져 준 물질적이고 구조적인 체제는 쉽게 적응했지만, 그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형성기에 겪었던 고민들은 크게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개신교는 초대교회로부터 하늘에서 떨어진 신령한 집단이라는 허황된 자기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물론, 특수하긴 합니다. 과세를 해야 하느냐, 세습을 어떻게 막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은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맞느냐 아니냐 역시 논쟁해야 합니다. 이것이 되었건, 저것이 되었건 교회 밖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논의들이 너무도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이 바닥입니다.

 

제가 고민하는 구도는 명료합니다. 21세기에 교회가 한국 사회 문법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 속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할 것인가 고민이 시작된 시점에 있습니다. 어쩌면 유럽의 교황 주도 가톨릭체제가 무너진 후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우리는 이제 시작한 셈입니다.

 

대형교회 세습이나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한 기득권 및 주류 목회자들의 인식 수준은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적어도 오늘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이들은 친북좌파도 아니요, 친이슬람도 아니요, 친동성애자들도 아닌 바로 기득권에 쌓여 있는 종교인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외를 요구합니다. 교회와 사회는 다르다고 요구합니다.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교회 탄압이라고 대응을 합니다. 마치 중세 가톨릭이 무너진 후 종교 우위가 사라진 시점에서 16세기 개신교나 가톨릭 모두 당황하며 겪어야 했던 중세 말의 현상을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를 인류사회에 존재했던 한 제도로서 담백하게 바라보고 공부한다면 훨씬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사회 속에서 교회가 부딪치는 사회적 갈등이 교회를 파괴하는 문제인지, 최소한 교회의 안전성을 담보할 문제인지는 한 걸음 떨어진 시각에서 바라보면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전태일 열사나 박종철 열사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과 죽음이 영웅적이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목숨과 바꾸어 이루어 내고자 했던 그 너머의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 현재 돌아보고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이제 루터를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루터에게만 천착할 때 당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의 회복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근대 사회를 살아냈던 교회의 수고를 간단하게 건너뛰어 무작정 오늘에 대입하게 됩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21세기에 소환해서 모범으로 삼는 것은 편리하고 그럴 듯해 보이나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면 게으른시각입니다. 부지런한 것 같으나 그 너머의 맥락에 무관심한 게으름입니다. 문제는 이런 시도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가 불편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이미 눈물 흘릴준비를 하고 노래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김어준은 그 코드를 읽었고, 단 두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1등을 맞추었답니다. 우리는 루터에 대해서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루터에게서 모든 선한 것이 나왔고, 충분히 은혜롭다고 선포하면 아멘으로 화답할 사람들은 끝없이 늘어 서 있습니다.

 

지적 게으름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거나 독서에 대한 실천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것을 비판적으로 여과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이제 그 너머의 의미를 캐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인문학적 접근이란 우리의 시각에서 시작하지 말고 외부의 시각에서, 큰 그림에서 다시 좁혀 들어와 보자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서 우리가 루터에게 집중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개혁의 정신에 집중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사상을 참조할 수는 있으나 21세기 문법에 맞게 만들어가는 것은 오롯이 오늘의 콘텍스트와 씨름하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21세기의 맥락을 찾아서

불편할 지점일 수 있으나 짚어보겠습니다.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인용한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위 인용문의 함의는 교회가 본질을 놓쳤다는 한탄입니다. 물론 본질은 철학, 제도, 문화, 기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가 각각의 콘텍스트에서 각각의 상황에 맞게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은 그 시대의 맥락에 부합했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된 한국교회, 간단히 말 몇 마디로 존재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 공이나 과가 어떠하든 한국의 20세기라는 시공간 속에 활발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맥락에서 대형교회가 수행한 시대의 역할을 간단하게 부인하고 조소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21세기의 한국교회가 그리스의 철학이 이루었던, 로마의 제도가 성취했던, 유럽의 문화가 꽃피웠던 독자적인 기독교를 20세기 구조의 틀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대형교회의 구조를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그렇지 않다면 21세기에 대기업으로 남은 한국교회에 어떠한 아름다운 세대 교체는 없습니다. 건강한 대형교회도 없습니다. 사라져야 할 부조리이자 퇴행일 따름입니다. 적어도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대다수는 주류 교회가 시대의 문법을 읽지 못하거나 읽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도피처로 스스로를 제한된 경전 텍스트에 가두고 붙잡고 씨름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콘텍스트에 대한 고민에 기반하지 않을 경우 루터도, 칼뱅도, 심지어 성경 텍스트도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꾸준히 적을 만들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 온 얕은 역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부끄럽다고 계속 아닌 척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좀 방식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를 위해 이제 긴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야 합니다. 바짝 정신을 다잡고 꼼꼼하게 교회와 사회를 읽어나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면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 교회와 사회의 새로운 관계 정립입니다. 모든 것을 신앙과 신학의 문제로 환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세속적인 주장도 영적, 신앙적 가치에만 쏠린 교회의 세태를 교정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굳이 변명으로 삼습니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의 최소한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실린 것입니다.

다 좋지만도 나쁘지만도 않다

$
0
0


용수-.jpg


좋은 일이 너무 많으면 사람이 오만해서 수행을 잘 못합니다. 인간은 안 좋은 상황과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지만 좋은 상황을 집착해서 인격이 안 좋아집니다. 권력과 재산과 명성은 사람을 타락하게 합니다. 


돈과 명성의 무상함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무상한 모든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한 것을 집착해서 미래의 고통을 만듭니다. 


이생에 잘 사는 사람들이 내생에 가난하고 못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잘 살든 못 살든 보시공덕을 쌓고 수행으로 해탈하는 것이 요점입니다. 


성공과 편안함은 수행의 좋은 조건이 아닙니다. 타락의 좋은 조건입니다. 역경과 (자발적인) 간난은 수행의 좋은 조건입니다. 
이생에 못살더라도 수행할 수 있다면 유익한 것이고 이생에 잘 살더라도 수행을 못하면 큰 손해이죠.



좁고 낡아도 살고픈 행복타운

$
0
0



수다로 이웃 마음  열어 정도 잔치도 ‘다닥다닥

 

 행복 1번지’ 성남 논골마을

 

1-.jpg» 논골마을 하룻밤캠프


 서울서 쫓겨난 철거민들 집단이주, 인근 6천가구 18천여명 보금자리

주민이기도  환경활동가 윤수진씨, 하나  모아 ‘행복 만들기’ 나서

 

 5년만에 문화공간 도서관 세워, 30여개 프로그램 운영하고

게스트하우스로사랑방으로

논골축제 성남 명물, 1만명 북적북적, 길거리 벼룩시장도 수천명 발길

 

 주민-학생 어울려 온동네 벽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 도와

이사 오고 싶은 대기자들 줄줄이


2-.JPG» 논골마을 빌라들을 배경으로 선 윤수진관장(왼쪽 두번째) 등 마을활동가들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 임춘애 유명

무슨 도서관이 이렇게 소란스러울까경기 성남시 수정구 논골로 23번길 2 논골작은도서관은 세상에서 가장 요란한 도서관이다남한산성   동네인 논골은 논들이 계단식으로 있는 골짜기라서 불린 이름이다. 1970년대  서울시내 무허가 판자촌들을 철거하면서 쫓겨난 집단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이다단대동 3구역 논골엔 1986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20평씩 불하된 땅에 들어선 5 빌라들이 빽빽한 곳이다 빌라에만 10~12 남짓씩 10가구가 입주해 있는세계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은 주거지   곳이다 인근에 6천가구 18천여명이 살아가고 있다서울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이던 임춘애 선수가 어려운 형편을 딛고 운동했던 동네이자 모교인 성보여상( 성보경영고) 있는 곳이다.


3-.jpg

 

 논골은 형편이 피면 하루빨리 떠야  곳으로만 여겼던 곳이다그런 마을이 2009년부터 변화의 싹이 돋았다 환경단체 활동가가 어느  너무 열악한 고향 마을 여건을 돌아보고는 ‘ 마을부터 변화시켜보자 나선 것이다그가 윤수진(48) 논골마을센터장  논골작은도서관장이다처음은 동네 언니 동생들의 수다 떨기로 시작됐다수다로 마음을  이웃들은 ‘어떻게 우리 동네를 행복하게 만들어볼까 생각을 모았다이에 따라 그해 28명이 ‘논골마을만들기 추진위원회 구성했다.

 

  목표는 ‘작은 도서관 건립 운동이었다아무런 문화시설이 없는 곳에서 최초의 문화공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추진위원들은 함께 수다를 떨다가 자기 골목으로 가서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 다시 수다를 이어갔다그렇게 2천여명이 작은도서관을 만들자는 서명을  성남시에 보냈다매월 ‘ 번째 목요일’(두목회)마다 모이던 주민들이 2011 단대동마을센터를 열었고, 2014 3월엔 자동차  대를 주차하던 곳에 마침내 도서관을 세웠다.


가족기행-.jpg경주-.jpg골목길-.jpg골목길생-.jpg골목길생태-.jpg그리기-.jpg글로벌-.JPG기타-.jpg길거리-.jpg길거리1-.jpg김장-.jpg까페-.jpg꽃신-.JPG논골1-.jpg논골축제-.jpg논골축제9-.jpg도서관-.JPG도서관앞-.JPG도서관캠프-.jpg디딜틈-.jpg마을카-.JPG마을텃밭-.jpg마을학교-.jpg

60 부스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이곳은 순수 도서관 기능은 일부 기능에 불과하다. 30여개 프로그램이 가동된다이뿐만 아니다논골의 집들은 서너 식구가 둘러앉아 식탁에서 밥을 먹기에도 비좁아 시댁이나 친정식구라도 오면 잠재울 공간조차 마땅찮다따라서 도서관 3개층 바닥은 모두 바닥난방이 되어 있고 화장실에도 샤워기가 있다주민들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밤엔 게스트하우스로 쓰기 위함이다주민의 부모가 고향에서 해물이나 음식을 싸오면 펼쳐놓아 금방 작은 마을잔치가 열리는 사랑방이 바로 이곳이다.

 

 잔치는 이곳에서만 열리는  아니다. 2012 가을 1 논골축제가 열린 이래 논골은 온갖 잔치가 끊이지 않는다이제 논골축제 때면 1만명 가까운 인파가 모여든다논골축제가 벌써 성남의 명물이   60 부스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있다모두 동네 언니 동생들이 모여 수다를  결과다가령 축제의 ‘ 잡고 꼬기오’ 코너엔  100마리를 풀어놓는다닭을 잡은 주인공 100명이 신세진  100명에게 닭을 잡아 보내주고그날 닭을 생포한 이에게는 계란  판씩을 선물로 준다이렇듯 이들의 축제는 그날 행사로만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여는 계기로 이어진다.

 

 매년 여름  동네 상원여중 운동장에 텐트를 쳐놓고 30가족을 초청하는 ‘우리 동네 하룻밤 캠프 그렇다선착순 참가자 모집 공고를 ‘밴드 띄우면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캠프에선 30가족이 각각  가족을 초청할  있게 한다그러면 초청가족과 초대된 가족이 밤을 새우면서 더욱 돈독해진다게임의 상품도 삼겹살 5소주  상자  그날  가족과 이웃 간 ‘케미 더하게 하기 위한 먹거리들이다.

 

 격월마다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벼룩시장도 매번 3~4천명이 참가할 정도로 뜨겁다이곳에서 닭꼬치를 파는 부스는 논골 아빠들이 맡았다아빠들은 닭꼬치를  돈을 모아 연말에 산타클로스가 되어 100집을 방문해 선물을 나눠 준다낡고 좁은 빌라여서 부끄럽다며 꽁꽁 닫아두었던 문도 산타클로스를 계기로 스스럼없이 열린다그렇게    집이  열려가는 것이다. ‘논골 아빠’ 김경성(53)씨는 “예전엔 나도 남을 도울  있다는  꿈도  꾸고 살았다 “먹고살기 힘드니 매주 하루 쉬는 날엔 약초를 캐러 산으로만 다녔는데 지금은 마을 일들을 함께하고 돕는  너무 기뻐서 약초 캐러    5년이 넘었다 웃었다.

 

 이웃의 문을 열다 보면 누가 도움이 필요한 줄도 알게 된다이날도 도서관 3 베란다에선 인근 문원중 아이들이 목공과 설비를 배우고 있었다논골엔 홀몸 노인과 저소득 노인이 유독 많은데이들이 전기가 나가도 전등값보다   비싼 출장비를 감당   아예 고장난 전등을 방치한  살아가거나 고장난 집도 수리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중학생들이 마을 어르신들 집을 자기들이 고쳐주겠다면서 배우고 있다마음의 빗장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열린다.


 목공설비-.JPG문화-.jpg문화가-.jpg바리스타-.jpg밤캠프-.jpg벽화-.jpg벽화그-.jpg산타-.jpg센터 (2)-.jpg송년회-.jpg씽킹유아-.jpg유아프로-.JPG육아들-.JPG윤수진등-.JPG주말농장3-.jpg청소년-.jpg청소년마-.jpg체조-.jpg카라반-.jpg캠프-.JPG하룻밤-.jpg학교-.jpg합창단-.jpg활동가들-.JPG

 

불편하지만 떠날래야 떠날  없어

 이런 아이들이 예뻐 아빠들은 돈을 모아 문원중에 당구대 하나를 사줬고당구모임에 250명이 모여 아빠들에게 당구를 배우며 세대를 초월한 소통의 장을 연다성보경영고의 헤어아트와 네일아트 수업을 마을 미용실 언니들이 도와주고 학생들이 실습을 현장에서 하도록 도와주는 상생은  마을에서 이젠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다이렇게 마음들이 열리니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이 어울려 자발적으로  동네에 멋진 벽화를 그리는 것은 덤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논골을 떠나려는 사람이 없어 들어오고 싶은 대기자가 줄서는 이변이 생겼다한때 낙후된 빌라의 지하들은 대부분 빈집으로 방치됐으니 지금은 논골빌라들이 지하방들까지 채워질 정도로 인기 지역이 되었다. ‘논골 엄마’ 서윤정(44)씨는 “  개짜리 빌라에 살아  남매를 한방 2 침대에 있게  불편하긴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  마을에서 너무 행복해 이제는 떠날래야 떠날  없는 곳이 되었다 말했다.

4-.jpg


가신님의 물건과의 이별

$
0
0


집-.jpg


여름이 벌써 온 것처럼 더운데 이제야 대청소를 하고 뒤늦게 겨울옷들을 정리 했다. 단순하게 산다고 하는 수도자인데도 왜 그렇게 짐은 점점 늘어가는지... 물건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는 이거 버려, 놓아 둬를 번갈아 고민하면서 다시 장롱이나 서랍으로 들어간다. 분명 지난 몇 년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들인데도 `이 물건은 누가 사주어서, 이 물건은 어디 여행할 때 산 것이라, 이 물건은...` 이러면서 말이다.


   사별가족들은 고인의 물건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고인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은 단순히 물건의 의미를 벗어나 바로 고인 그 자체일때가 있다. 그런데 사별을 하고 나면 대부분 주변 사람들은 `떠난 사람 물건은 빨리 정리해라, 보면 자꾸 생각나서 슬퍼진다` `도배도 하고 가구도 바꾸고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라` 이렇게 권유한다. 모임을 진행하다보면 10명 중에 많으면 7~8명까지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기도 하는 데 이런 문제들을 선생님과 상의하면 대부분의 선생님들도 역시 `물건을 빨리 정리해라` `이사를 가라`고 말씀하신단다.


   사별가족 모임중에 한 분이 남편이 죽고 나서 남편의 물건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모든 옷을 세탁소에서 세탁을 했는 데 남편 냄새는 하나도 안 남아 있고 세탁소 냄새만 난다며 생각이 짧아 세탁소에 맡겼었다며 펑펑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환한 얼굴로 나타났다. 이유를 물으니 남편 점퍼를 아들이 한번 빌려 입고 나갔었는 데 그 옷을 아들이 자기 옷장에 걸어 놓았다는 것, 그래서 남편 냄새가 나는 옷이 한 벌 남아 있다고 좋아라했다. 


   의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고인과 함께 수십년 살았던 집을 팔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어떤 부인은 아침에 눈만 뜨면 그 전에 살던 집으로 달려가 그 집 대문과 담벼락을 쓰다듬으며 울고는 한다. 그 집은 16번을 셋방살이를 하면서 다니다가 처음 `내 집`이라는 것을 마련한 바로 그런 집이었다. 그 집을 떠나면 빨리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것 같았고 선생님과 이웃의 권유도 있어서 이사를 갔는 데 아니더란다. 되돌리지도 못하고 그저 아침이면 전에 살던 동네를 배회하고 다닌단다.


   작년 추석이 지난 후 모임을 하는 데 한 참가자가 혼자 막 웃더니 `수녀님, 제가 지난 추석때 뭔짓을 한지 아세요?` 그러신다. `남편이 너무 보고 싶은 데 집에 남편 흔적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발장에서 남편이 신던 신발을 꺼내서 그걸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잖아요` 웃으며 얘기하는 그 자매의 눈에는 이미 눈물 방울이 그렁 그렁 맺혀 있었다.

   물건은 그 사람이다. 아직도 돌아가신 분의 핸드폰을 처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 핸드폰에 날마다 문자도 보내고 카톡도 치고 있는 그 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마다 한권의 경전

$
0
0


사람마다 한권의 경전이 있네


    -작자 미상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꽃이 웃다

$
0
0

꽃은 뜻이 있어 사람을 보고 웃는데

  -편양 선사

비 내린 뒤 뜰에는 가득 꽃이 피어
맑은 향기 스며들어 새벽 창이 신선하다
꽃은 뜻이 있어 사람을 보고 웃는데
선방의 스님들 헛되이 봄을 보낸다

참회하는 용기, 용서하는 용기

$
0
0


절수행-.jpg» 사찰에서 절을 하는 모습. 사진 곽윤섭 기자


서울에 있는 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전신주에 붙어있는 글을 무심코 읽었다. “깨진 화병을 2018년 2월 10일 오후 7시 59분에 몰래 버리셨다가 3월 3일 오전 6시 4분에 가져가신 할머니,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뭔가 모를 신선한 느낌이 들어 폰을 꺼내 찍어두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글에 담긴 전후사정을 헤아려 보았다. 아마도 근방에 사는 어느 할머니가 밤에 깨진 화병을 버렸던 모양이다. 그게 폐쇄회로 티브이에 찍혔을 것이고, 어느 누구가 원상복귀하라고 메모를 남겼을 것이다. 그걸 안 할머니는 이십여일이 지난 뒤에 다시 집으로 가져간 것이다. 이 사연을 대하니 할머니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과 아울러 글로 감사를 전한 분의 ‘마음’이 보여 흐뭇했다. 할머니는 창피를 당하는 불이익이 두렵거나 혹은 양심에 비추어 보아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고의 글을 올린 이는 무안해하고 있을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을 것이다. 이렇듯 이심전심의 깊은 이치는 석가모니와 가섭 존자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일상에도 흐르는 것이다. 참회와 용서, 그리고 화해는 진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새삼 실감했다.


법인스님-.jpg

  

 수행승들이 지켜야할 규칙에는 이런 조항이 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허물이다” 이 훈계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례 때문에 제정한 되었을 것으로 잠작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일이다. 어느 비구가 동료들에게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곧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상대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사과를 받는 쪽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지 그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계속 큰소리로 윽박지르고 나무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비구들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너무 한다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해주라’고 충고했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제3자는 참견하지 마라고 호통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싸움을 말리던 사람과 시비가 생겨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됐다. 그러나 보니 작은 시비가 큰 시비가 되고, 마침내 부처님조차 무슨 일인지 걱정할 정도가 된 것이다.

  

싸움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부처님은 싸우는 비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타일렀다.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잘못을 비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더 훌륭한 일이다. 이들은 모두 현명한 사람이다”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늘 다른 견해와 이해다툼으로 갈등한다. 부처와 예수의 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지혁명을 이룬 사피엔스의 위대함은 협동하고 상생의 길을 찾는 데 있다고 하지 않는가? 협동과 상생을 이루는 바탕은 아마도 진심으로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겠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할머니! 더 건강하십시오. 감사의 글을 쓰신 분!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열고 닫아야 괄호다

현대 역사의 조명탄 간디

$
0
0


간디-.jpg


‘간디는 현대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조명탄입니다. 캄캄한 밤에 적전상륙을 하려는 군대가 강한 빛의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공중에서 타는 그 빛의 비쳐 줌을 이용하여 공격 목표를 확인하여 대적을 부수고 방향을 가려 행진을 할 수 있듯이 20세기의 인류는 자기네 속에서 간디라는 하나의 위대한 혼을 쏘아 올렸고, 지금 그 타서 비치고 잇는 빛 속에서 새 시대의 길을 더듬고 있습니다.’


 함석헌의 간디 평이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도덕·정치 사상’을 담은 ‘간디선집’ 3권이 나남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간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한 90권짜리 <간디전집>을 발췌한 것이다. 간디는 평생 동안 자신이 편집 했던 <인디언 오피니언>, <영 인디아>, <하리잔>, <나바지반> 등의 주간지에 매주 기사를 썼다. 그는 남아프리카, 영국, 인도 및 세계 각지에서 편지를 보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답장을 해줘 하루 최고 70통의 편지를 쓸만큼 양심적이고 열성적이었다. 그렇게 40년을 쉬지않고 쓴 엄청난 양의 편지가 있기에 전집이 무려 90권에 이르렀다. 그가 보낸 편지들의 수신자에는 정치가, 종교인, 법률가, 학자, 교육자, 사업가, 예술가, 노동자, 대학생들이 포함돼 있었다. 여기엔 네루, 윈스턴 처칠, 타고르, 톨스토이, 로맹 롤랑도 들어있다. 간디가 히틀러에게도 편지를 썼지만 배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방대한 전집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인도 출신의 옥스퍼드대 교수로 <헤르메스> 편집장을 지낸 라가반 이예르가 엮은 것이 이 ‘선집’이다. 그러나 ‘선집’만으로도 각권당 900여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선집은 1권 <문명·정치·종교>, 2권 <진리와 비폭력>, 3권 <비폭력 저항과 사회변혁>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번역은 오랫동안 간디와 불교를 연구해온 경희대 비폭력연구소장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했다. 허 교수는 2000년 하반기부터 학교 수업과 관련된 공부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전적으로 간디 번역에 매달렸다고 한다. 허 교수는 1973년 서울대 철학과 3학년 때, 10월 유신 반대 데모로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붙들려 들어가 29일 간의 구류를 살고 나온 직후 박재순 선배의 소개로 간 서울 신촌 봉원동 퀘이커 보임에서 함석헌 선생님에게 <바가바드 기타>를 영어 번역으로 공부하면서 인도 및 간디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은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자 사회개혁가이자 영성가이자 종교인이자 실천가였던 인간 간디의 저작과 분석 등이 망라돼 간디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편지글이어서 전체를 간파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옮긴이 허 교수는 일단 1. 행동가 간디 2. 진리와 세속 3.간디와 붓다 4.종교와 정치 5. 간디와 함석헌 6.비폭력과 문명비판 7.선동가 간디 등 7가지 주제를 일단 간추려서 소개했다. 1번 행동가 간디편에 소개한 아래 내용만으로도 간디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간디책-.jpg


 ‘간디는 참을 실현하려고 손발을 포함하여 온몸으로 행동했다. 그는 참의 실현이 단순히 말이나 글에 의해서도 아니고 무행위로 빠질 수 있는 명상이나 선정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로지 민중에 나 봉사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봉사하면서 신 또는 아트만을 실현하기 위해서, 홀로 있거나 집단 속에 있을 때 침묵하고 명상하고 예배하고 기도했다. 간디의 삶은 정중동, 아니 동중정의 삶이다. 


 간디는 인생의 목적이 민중에 대한 봉사라고 선언하고, 행위에서 무행위를 보고 무행위에서 행위를 보는 사람, 그가 진실한 요기이고 참된 카르마(행동)의 사람임을 믿었다. 증오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갔던 그는 스스로 카르마 요기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도 닦는다 하고 고행하면서 세상을 버리려는 자에게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서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가 바로 진실한 구도자라 하고, 이 세상이 구도자를 위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은 정신적 나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옮긴이는 “간디가 진리와 비폭력이 책을 요구하지않으며 행동만이 가장 위대한 현시이고, 그것들이 실천에 의해서만 보급될 수 있다고 보았다”면서 “간디에게는 세속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명상이나 수행은 모두 정신적 방탕이고 순결(브라마차르야) 계율의 정면 위반이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자아실현이란 봉사를 전제로 한다는 간디의 종교관도 분명하게 말해준다.


 ‘자아실현이나 자기지식은 우리가 모든 생명과 일치되기 전-신과 하나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일치를 완수하는 일은 타인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나누는 것, 그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포함한다. 뭇 생명과 그들의 고통, 그리고 신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한다면 개인적 완성, 자아에 대한 지식, 진리추구도 모두 거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완성은 봉사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간디의 말을 수용하면, 자아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봉사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봉사 없는 자아 완성은 도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 풍토에서 태어난 불교와 힌두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허 교수는 간디의 글을 통해 이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정리해준다. 

 ‘붓다는 자신이 살았던 참담한 시대의 개혁자였는데, 당시 눈먼 바라문은 이기적이어서 붓다를 거부했지만, 실천적 대중은 붓다가 자신들의 신앙을 앞장서서 주장하는 분임을 확인하고 그를 따랐으므로, 불교는 대중의 이름으로 실천되는 힌두교였다. 간디는 붓다를 비폭력 행동가의 한 사람으로 내세워 징기스칸,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폭력행위자와 선명하게 대조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붓다야말로 진리와 비폭력을 앞세워 당시 부패와 나태에 빠져 있는 바라문 계급을 내치고, 민중에게 지고의 행복을 선물했던 인물이었다”면서 “불교도가 나태하여 이웃에게 부담이 되거나, 기아 상태에 있는 민중의 운명에 관심이 없는 것도 비판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정치라고 하면서도, 정치가의 기질이 자신을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다고 했던 간디의 정치관도 소개한다. 간디는 ‘정부의 정치 형태는 영적인 힘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2권 <진리와 비폭력>은 간디가 삶을 걸고 지키며 싸워온 ‘아힘사(비폭력)’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간디는 아침사, 즉 비폭력에 의해서 생성되는 도덕적 힘이 이기성에 토대를 둔 어떤 힘보다 무한히 위대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간디는 폭력은 공포에서 나온 것이며, 공포는 무지한 이기주의 그림자로 보았다. 간디의 ‘아힘사’론이다.

 ‘아힘사를 체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의 이기주의를 반드시 청소해야한다. 사람 안에 남을 죽이고 싶어하는 살의가 흔쾌히 죽으려는 태도와 반비례하여 존재한다. 모든 존재에서 어느 정도의 폭력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폭력이 치유될 수 없고 감소될 수도 없다는 점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아힘사는 가장 넓은 의미로는 모든 존재를 자기 자신처럼 취급하려는 자발적 의사다.’


 이 책 2권엔 간디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소식을 듣고 <인디언 오피니언>에 쓴 글이 있다. 간디는 같은해 인도 청년이 런던에서 영국 관리를 암살한 것을 비판한 것처럼 안중근의 저격도 비폭력을 저버린 행위로 비판한다. 그러나 서양 제국주의 문명과 일본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한다. 간디의 글은 “영국인들이 이집트나 인도에서 세력을 장악해 권리와 특권을 향유하고 있듯이,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을 돕기 위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고 시작한다. 간디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예속시킨 일은 용기를 나쁜 목적에 사용한 것”이라며 “서양문명의 마법에 걸린 사람들은 달리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간디는 “인민의 참된 복지를 심정에서 생각하는 자라면, 오직 사티아그라하(진리파지)의 길을 따라서 인민을 인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가스님의 마음충전

$
0
0


희망-.jpg


‘번아웃’은 일에 지친 직장인들만의 증상은 아니다. 이미 직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이들이 취업준비생들이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취업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취준생들이야말로 가장 마음충전이 필요한 이들이다.

 자비명상 설립자이자 불교계의 대표적인 힐러 중의 한명인 마가 스님(58)이 이런 청년들을 위해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 지난해 11월 ‘마음충전소’를 열었다. 그는 애초 서울 강남의 부촌인 청담동 선원을 열 계획이었찌만 한 60대 여성이 9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외아들이 낙방을 거듭하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소를 바꿔 공시생들이 몰려있는 노량진에 열고 이름을 ‘마음충전소’라고 붙였다. 그리고 매일 공시생들이 하소연하고 명상도 하면서 마음을 충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마가 스님은 바람을 피워 처자직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며 방화하다 젊은날 자살까지 시도한 경험이 있어서 취업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도 젊은시절 누구라도 손을 잡아줬다면 자살 시도까지 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마가 스님이 이번엔 <마음충전>(숨 펴냄)을 펴냈다. 이 책은 자존감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을 위한 메시지로 가득하다. 마가스님은 책에서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세요. 그래도 힘들면 울어버리세요”라며 청년들을 위로한다. 책값도 취준생들을 위해 6900원으로 저렴하게 책정했다.

  

 나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나를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나의 실수 하나 때문에 

 나의 존재 자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매일 아침 자신에게 속삭여 주십시오. 

 ‘나는 이대로 내가 참 좋습니다.

  나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합니다.’

 <고귀한 존재>에

 

마가스님-.jpg» 마가 스님


 자비 명상을 이끄는 명상가답게 저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놓고, 자기 긍정을 갖도록 하는 한다.

 

 깊게 숨을 들이쉽니다. 

 호흡하면 드러온 숲속의 맑은 공기가 

 내 몸 세포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처음에는 집중이 안돼 여러 가지 생각이 흘러들어올 겁니다. 

 그러나 바람이 나를 지나가듯 그 생각도 스쳐 지나갑니다.

 가만히 그 생각을 놓아두십시오.

 <생각 놓아두기>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자비명상의 첫 번째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단점을 보려 했고, 

 자신에 대해 많은 부정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자기 장점을 많이 보고 예쁜 점을 많이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도록 하세요.

 자신의 너무 큰 장점만을 보려 하면 힘이 듭니다.

 

 작고도 사소한 장점부터 보려고 애쓰다보면

 자신에 대해 일체 긍정하게 됩니다.

 <자기 사랑하기>에서

 


나로 사는걸 깜박했어요

$
0
0


행복-.jpg


“나로 사는 걸 깜박 했어요”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신부의 책 이름이 이렇다. 속풀이 심리상담가답다. 가톨릭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루카복음서에서 찾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힘’이 부제로 달렸다. 이 책은 성경을 근간으로 했음에도 엄숙함과 도덕성에 침잠해있지않다. 역시 그다운 생생함이 빛난다.

 그는 늘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편에서는 “젊은 시절, 백수처럼 하루하루 까먹던 시절, 도대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그냥 밥만 축내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며 “그러나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홍책-.jpg홍 신부는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것일까?’라고 ‘내 인생을 탓하고 싶을 때’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일단 멈추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탐구해 보는 시간을 갖길 권한다. 그리고 자신을 초월한 누군가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도 권한다. 즉 기도하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어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상처가 많은 시대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도 제시했다. 치유를 받으려면 먼저 자기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프지 않은 사람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매 장마다 말미에 ‘묵상 시간’이란 코너를 두고 있다. 그는 “내가 지닌 문제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고, 그것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참아 주셨는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묵상을 권했다.


 홍 신부의 상담에서 ‘관계’에 대한 조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열두 사도는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하며, 흩어진 열두 지파가 다 모였을 때 이스라엘 왕국이 완성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심리학적으로는 사람 마음 안의 여러 가지 요소가 통합을 이룰 때 그 사람은 성숙함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도 각가 개성이 강한, 즉 개별적인 콤플렉스가 강한 열두 사람을 뽑았다”면서 “이는 심리적인 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도 모난 돌이 다른 모난 돌과 부딪치고 또 부딪치면서 원만하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다른 사람이 가진 콤플렉스가 볼만하고 견딜 만 해질 때까지, 서로 짜증을 내다가도 안 보이면 보고픈 마음이 들 때까지 피하지 말고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남-.jpg» 홍성남 신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하는 이유도 상대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관점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3가지 ‘이유’는 이렇다.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내 삶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 분노를 품고 사는 동안 공부에도 놀거나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내 인생의 알토란 같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나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가 주는 유혹에 빠져서 정신적·육체적으로 피폐해져 결국 건강마저 해친다는 것이다. 세째, 내 이냉의 새로운 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다. 내가 용서하면 그 기운이 좋은 기운의 순환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그 순환의 마지막은 나 자신이기에 좋은 기운은 나에게 되돌아 온다고 한다.

 그런데도 주의할점을 제시한다. 용서할 마음이 되지 않았는데 감작스럽게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상대방을 억지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몸을 건강하게 하겠다고 갑작스럽게 무거운 기구를 들어올리는 것과 같기에 자기 마음의 그릇에 맞추어서 용서의 양을 천천히 늘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홍 신부는 자기 인생에 대한 회한을 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문제가 발생할 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거야’라며 한탄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통해 내가 얼마나 더 건강해지고 강해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권고한다.

 그는 또 “인간은 수도 없이 실수하고 실패하고, 같은 죄와 잘못도 여러 번 반복하여 짓고 사는 나약한 존재”라면서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너무도 잘 알기에 자신의 실패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거름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고, 그것이 회개하는 삶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이 꽃을 피운다

$
0
0


한윽숙3-.JPG» 한은숙 원불교 교정원장


 “우리가 우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심하고 자신없어하고 외부에 의존하면 꽃을 피울 수가 없어요.”

 원불교 행정수반인 한은숙(63) 교정원장은 24일 원불교 최대 경축일인 대각개교절 맞이 기자간담회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대각개교절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가 1916년 26세의 나이로 1916년 4월 28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일원상진리(一圓相眞理)를 대각하고 원불교를 창립한 기념일이다. 오는 28일이 대각개교절 103돌이다. 


 한 원장은 “대종사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먼저 한 일은 나라를 잃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며 방언공사를 소개했다. 1918년 3월 길룡리방언조합을 설립해 맨손으로 등짐을 지어 흙을 날라 바닷물을 막는 간척사업을 1년만에 해내 빈촌에 3만여평의 농토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 마을 사람들 중에도 방언 시도를 보고 ‘저 펄밭이 논이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며 하늘로 승천하겠다’고 비웃는 이들이 적잖았다고 한다.

 한 원장은 방언 1년 뒤에 있었던 ‘백지혈인’(白指血印)을 소개했다. 원불교에선 소태산이 9명의 제자와 10일간 기도후 창생을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확인하 뒤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고 쓰여 있는 증서에 각각 백지장을 찍어 상위에 올리고 결사의 뜻으로 엎드려 비니, 인주를 묻히지않고 맨 손으로 찍은 도장에 핏빛으로 이적이 나타났다며 이를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백지혈인’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그 이적의 증거물을 폐기해버렸다고 한다. 한 원장은 “대종사께서는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다’고 했다”며 “‘기적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기적도 우리의 자신감 있는 믿음과 실행으로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소태산-.jpg정산-.jpg대산-.jpg좌산-.jpg경산종법사-.jpg

종법사를 지낸 원불교의 스승들. 위 왼쪽부터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정산 송규 종사-대산 김대거 종사-좌산 이광정 상사-경산 장응철 현 종법사


 한 원장은 또 소태산이 한반도의 미래를 어변성룡(魚變成龍ㆍ물고기가 변해 용이 됨)이라고 예언한 것을 상기시켰다. 일제강점이 고착화되면서 1928년 육당 최남선이 친일로 돌아서는 등 대부분의 지식인마저 조국을 등지던 1930년 6월 소태산은 금강산을 돌아보고 ‘우리나라가 정신의 지도국이자 도덕의 부모국이 될 것’이란 희망을 심어줬다고 한다.

 한 원장은 대종사의 뒤를 이은 정산 송규-대산 김대거 등 원불교 스승들이 시종일관 주장한 민족화해와 통일의 남다른 가르침들도 소개했다. 정산은 해방이 되자마자 <건국론>을 펴내 ‘좌도 우도 아닌 중도만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고, 대산은  반공·승공·멸공이 대세던 30년 전 용공(容共·북한을 활용), 화공(和共·북한과 화해), 구공(救共·북한을 구함)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대산의 뒤를 이은 좌산 이광정 상사는 <통일론>이란 저서를 내고, 백두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산을 다니며 통일 기도를 올리며 통일방안을 제시해왔다. 현 경산 장응철 종법사도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들어 ‘새 그림을 그리려면 이전 것을 지워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과거에 집착하지않는 남북의 미래를 열어갈 것을 주창했다.

 한 원장은 대각개교절 행사로 21~24일 전북 익산 원불교중앙총부 원불교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되는 소태산영화제에서 소개된 <메콩강에 악어가 산다>란 영화를 들며 ‘남북민이 서로에 대해 눈 속의 티를 많이 갖고 있음’을 자각할 것을 호소했다. 탈북민들이 중국 곤명을 지나 넘는 메콩강엔 실제는 악어가 없는데도 탈북민들으로부터 리스크비용을 높게 받으려는 브로커 등이 부풀려 얘기하는대로 대부분이 이젠 메콩강에 악어가 있는 것으로 믿어버린 현실처럼 남과 북에 대해서도 오해가 짙다는 것이다.


백소아-.jpg» 서울광장에 조성되고 있는 한반도 꽃밭. 사진 백소아 기자


 한원장은 구소련이 붕괴돼 경제가 엉멍이던 1992년 모스크바에 건너가 원불교교당을 만들어 매학기 수백명이 모이는 한글학당을 열고, 러시아내 최고의 민속축제를 열며 교화의 새장을 연 개척자다. 대중가요를 즐겨듣는다는 그는 요즘 젊은이들을 우려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다른 눈으로 한번 봐볼 것을 권유했다. 그러면 거리낌 없이 자신을 다 표현해 한류를 띄우는 우리 젊은이들의 힘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처럼 북쪽에 대해서도 다른 눈으로 보면 민족정기를 지켜낸 강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원불교는 대객개교절을 맞아 불우한 이들을 돕는 나눔의 은혜잔치와 익산 총부에 난장을 설치하는 등 여러 봉축행사를 열고 있다. 28일 오전10시엔 익산 총부를 비롯한 국내외교당에서 일제히 기념식을 연다.

김경재 목사 신학자의 되새김

$
0
0


그리스도-.jpg


한 청년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놓고 틈만 나면 무등산 억새밭을 찾아 기도하고 사색했다. 그는 ‘일생을 바쳐도 후회하지않을 가치 있는 일을 알려달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그가 어느날 성경을 접했다. 성경은 목마른 그에게 생수처럼 시원하고 달았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복무할 것, 예수 복음을 위해 살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북한산 아래 흰눈과 송림에 덮은 수도원 같은 한국신학대학(한신대)를 찾았다. 그는 그 곳에서 큰 스승들을 만났다. 김재준, 함석헌, 김정준, 전경연, 박봉랑,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 머리나 입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기 위해 치열하게 산 선구자들을 만난 것이다. 그는 스승들을 따라 신학했고, 구도했다. 도그마를 쌓는 신학을 넘어서는 신학이었다. 서양을 유학했지만, 그는 동양의 유교, 노장, 불교까지 폭넓게 섭렵해 신학의 지평을 넓혔다. 

 그가 바로 김경재(78) 한신대 명예교수 겸 목사다. 대표적인 신학자인 양심적 종교인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그가 신학 여정 60년을 뒤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신학 순례의 종합보고서를 내놨다. <틸리히신학 되새김>(여해와함께 펴냄)이다. 라인홀드 니버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주목받는 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의 신학을 소나 염소나 낙타가 여물을 씹고 삼키고 내놓아 다시 씹으며 되새김하듯한 것이다. 틸리히의 대표 저서인 <조직신학>을 텍스트로 삼아 틸리히 신학론 중 50개 핵심 소주제를 간추려 동서양을 넘나드는 깊은 사유로 되새김한 것이다. 건강이 좋지않은 몸으로 최후의 저작이란 생각으로 내놓은 역작이다. 가령 50개중 ‘노트1’의 주제는 ‘궁극적 관심’이다. 일단 틸리히의 텍스트를 이렇게 제시한다.

 

 궁극적 관심은 무조건적인 관심이다. 그 관심은 개인의 성격, 욕망, 환경 등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거나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궁극적 관심은 총체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과 세계의 어떤 부분일지라도 궁극적 관심에서 벗어난 자리가 없는 것이다. 총체적 성격을 지닌 관심은 무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종교적 관심은 마음이 이완되거나 해이해지는 순간이 불가능하다. 종교적 관심이란 궁극적, 무제약적, 총체적, 그리고 무한적 성격을 지닌 관심을 일컫는다.-<조직신학> 제1권, 12쪽.

 

 되새김-.jpg 이어 필자는 이를 두고 ‘되새김’한다. 필자는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을 들어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관심하는 것’이 종교의 특징이라고 한다. 틸리히는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여호와, 알라, 상제, 하나님 등 신의 호칭이 다른 특정 종교의 신을 참 신이라고 믿는 태도나 특정 종교가 역사 속에서 성취해놓은 위대한 상징, 교리, 교학,경전, 성직 체계나 이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란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라고 했다는 것이다. 종교는 성숙한 인간의 인격적 결단과 선택과 참여의 행동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 실존적 주체성 그 이상의 어떤 힘, 의미, 뜻에 감동하고 사로잡히면서 참여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추구하도록 추동하고 매력을 주는 실재는 결코 평범할 수가 없다고 한다. 기독교 내에선 ‘성령 바람’을 중시하는 국내 보수 신학계와 달리 이성적 합리적 신학을 추구해온 노학자가 종교의 본령을 ‘사로잡힘’으로 본 것이 주목할만 하다. 냉철한 신학 여정을 거쳐 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자신이 사로잡힌 예수 그리스도를 왜 메시아라고 하는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계시’편에서 되새김했다. 우선 틸리히가 변증신학에서 ‘왜 역사적 예수, 33년밖에 살지 않은 유대인 랍비, 그의 삶의 과정과 종국이 메시아의 모습과 거리가 먼 사람, 그 사람을 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가?’라고 묻는 현대인들에게 판에 박은 교리적 대답 대신 기독교란 예수 숭배론이 아니라고 답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인간 예수가 갖춘 위대한 종교적 지혜, 윤리적 교훈, 그의 예언자적 모습 등을 우러러보고 그를 신적 존재라고 숭배하는 예수론을 넘어서는 것, 곧 ‘그리스도론’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인간 예수가 왜 그리스도일까. 김 목사는 “인간 예수가 지난 모든 위대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비우고 낮추면서 예수가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하나님, 궁극적 실재’의 본성과 사랑을 인류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고, 끝까지 땅 위의 사람들을 믿고 사랑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험한 세상을 살수록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참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땅 위의 현자들, 과학자들, 지성인들, 민초들이 오늘도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많이 회자되지만 직접 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존재에서 비존재, 즉 있다든가 없다든가 360도 스펙트럼의 관점이 존재한다. 다석 유영모는 ‘없이 계신 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틸리히가 하나님을 ‘존재 자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진정한 이유는, 인간이 만든 종교적 우상 신들을 폭로하고 허무주의가 삶을 밑동에서부터 허물어뜨리려는 시대 사조를 극복하면서, ‘아우슈비츠 이후 시대’의 ‘존재에로의 용기’를 현대인들에게 불어넣어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려면 돌부리가 박힌 대지를 짚고서만 일어설 수 있는데, ‘돌부리가 박힌 대지’ 그것이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수를 누구로 볼 것인가는 초기 기독교 교리를 세울 때부터 큰 논쟁이었다. 필자는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서 직간접적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들어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신성모독죄를 절대로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의 율법 해석과 기적 행위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한 추종자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으니라”하시면서 선한 선생님 칭호도 사양했으며,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고 강조하면서 하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함으로써 자기를 투명하게 비우고 하나님만을 드러나게 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또 예수가 “바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대담하게 선언한 것도 그 하나 됨이 형이상학적 본질의 동질성 때문이 아니라 뜻의 일치, 사역의 일치, 상호내주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기독교의 원죄론에 대해서 좀 더 폭넓은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는 기독교 교리가 확정한 원죄론으로 단죄하지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유혹과 약함에 휩싸이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적 존재라고 보았고, 예수가 하는 일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고 더 큰 일도 가능하다고 인간성 자체를 믿고 긍정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특히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론’을 좀 더 명확하게 해석해준다. 틸리히가 조직신학자답게 잘 정리한 대로,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에 참여하고 그것을 수용하며, 그 의미와 능력에 의해 변화받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원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참여하는 구원의 모습을 ‘중생, 거듭남’이라 부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모습을 칭의라고 하며, 그 새로운 존재의 능력 의미에 의해 인간 실존의 옛 존재가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김 교수는 틸리히가 빠뜨린게 있다고 지적한다. 중생, 칭의, 성화를 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영화(glorification)이 화룡정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울이 말한바 ‘영원한 생명의 기업’에 초청받아 참여하는 영생에 대한 소망의 구원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당순히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사항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청동거울 속에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나마 현재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사후생이라는 것이다. 틸리히의 신학관점을 따르면서, 일부 그를 뛰어넘는 영성가적이고 수도자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밖에도 성령과 신비주의, 부활 등에 대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통찰을 담아 틸리히와 자신의 해석을 되새김질해서 후학들에게 새로운 신학의 지평을 열어보여주었다. 그것은 편협의 벽을 넘어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동양의 지혜로 신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던 신학 여정에 이미 담겨있었다. 제자인 김희헌 향린교회 담임목사가 이를 증언한다. ‘한번은 김 교수님이 중간고사 시험문제로 <반야심경>을 외워서 쓰게 했는데,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독교와 불교의 낯선 경계를 오가며 끙끙댔지만, 그것이 사상의 편협과 나태를 깨뜨리기 위해 내리친 스승의 죽비였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경재-.JPG» 김경재 목사 교수가 평생 봉직해온 한신대 교정에서 스승 장공 김재준의 글씨 앞에 서있다


 필자의 후배와 제자들은 추천사에서 주로 그가 ‘앉은 자리’인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떠나지않고, 그 사상의 기반 위에서 자신이 사로잡힌 기독교를 되새김했다는 점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정구 성공회대 총장은 추천사에서 “한국 전통 사상과 문화적 감성으로 재차 되새김을 해주는 한국 신학사상사에서 새롭게 융기한 큰 산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도 “자기 삶의 자리가 한국, 아니 동아시아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도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겸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은 “서구적 이성이 아닌 동북아의 종교문화적 상황에서 틸리히 신학을 재구성한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고,  김주한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은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범주의 현대 문화가 틸리히 신학을 통해 어떻게 통전되고 융합될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차옥숭 전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연구교수도 “한국 기독교 신학에서는 추상적 교리와 목회적 실용만 남고 ‘사상’이 사라져 간다는 한탄이 들리는데 이 책은 이런 시대에 신학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은 “‘서양의 지혜자 틸리히’와 동양의 지혜자 김경재‘가 나누는 당대적, 주체적 대화에 귀 기울여 되새김하면 21세기에도 여전히 불안에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흔들림조차 ‘존재의 근거’위에 있음을 신뢰하며 ‘새로운 존재’가 될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김경재 목사= 한신대, 연세대 연합신대,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미국 더뷰크대, 클레어몬트 대학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를 거쳐 한신대 교수, 한신대 학장,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 씨알사상연구원장, 장공기념사업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로 있다. 저서로 <이름 없는 하느님>, <아레오바고법정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가 있다.



분배의 정의

Viewing all 307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