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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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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특별한 순간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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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로 초대하는 건 더 깊고 따뜻해지라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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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를 맞으며 차분히 앉아 지난 한 해를 돌아보았다. 한 해 동안 개인적,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고요함 가운데 물음 하나가 일어났다. ‘그 많은 사건들 중에 무엇이 내게 특별했던 것일까?’ 그런데, 그 물음의 무게 중심이 ‘무엇’보다 ‘내게’에 더 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한 사건의 특별함은 그 사건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일상의 작은 일도 마음챙겨 깊이 경험하면 내게 특별한 일이 되고, 세상의 큰일도 무심코 지나치면 내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모든 일, 모든 사건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특별할 수도 있고 무의미할 수도 있다.
 마하 고사난다는 ‘킬링필드’의 비극을 안고 있는 캄보디아에서 ‘살아있는 붓다’로 불리며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스님이다. 고사난다 자신도 크메르 루즈의 폭력에 모든 가족을 잃었지만, 전쟁 중에는 태국-캄보디아 국경 난민촌에서 피난민들을 돌보았고, 내전 후에는 증오와 학살의 상처가 남아있는 지역을 걸어서 찾아다니며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파란만장한 삶의 그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스님,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특별한 순간들이 많이 있었지요?”
   고사난다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럼, 그 중 생각나는 몇 가지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고사난다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든 순간이요.”
 자신과 세계에 늘 깨어 참여하는 수행자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순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실제로 고사난다는 그의 모든 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체험하며 살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음 걸음이 그대로 명상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여기에서의 걸음 하나, 호흡 하나, 미소 하나가 곧 명상이요 기도였다. 그가 매년 ‘진리의 순례’라는 이름의 평화행진을 하며 전쟁으로 찢긴 캄보디아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순간을 특별히 여기며 마음챙겨 살았던 수행의 결과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모든 사건은 우리의 지혜와 자비를 자라게 하는 수행의 토양이며 기회이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만큼이나 ‘내게’ 특별하고 중요한 순간은 곤경에 빠진 친구를 찾아가 무력감을 함께 견디는 것이었다. 사회가 배제하고 종교가 거부한 소수자와 공감하며 차별 없는 세상을 더불어 꿈꾸는 것이었다. 길섶에 핀 가을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는 시구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진실과 정의를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내게 하나하나 모두 특별하고 중요한 사건이며 순간이었다.
 초대장처럼 새해가 왔다. 또 한 해, 우리를 더 깊고 더 따뜻한 존재가 되도록 초대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특별한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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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란 보다 현명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이다.

 

                        -헨리 포드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를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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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떠오를 때는 책을 읽어라.

잡념이란 비교적 한가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지

분주한 사람이 느끼지않는다.

한가한 시간이 생길 때마다 유익한 책을 읽어

마음의 양식을 땋아 두어야 한다.

 

         -윈스턴 처칠

대학에 진정한 배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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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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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대화가 막히거나 어색한 이유는 서로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어는 곧 관심이다. 우리의 관심은 어떤 언어를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하여 사용하는 언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형성하고 문화가 된다. 그 언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조정한다. 가령 돈에 관계되는 언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곧 돈일 것이다. 때문에 돈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석하고 행동할 것이다. 관심과 언어의 악순환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돈’의 언어가 넘쳐나고 있다. 돈에서 파생된 신종 언어를 보면 얼마나 돈이 득세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돈’ 그 자체가 선과 악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돈에 대한 시선과 해석이 돈을 천사로 만들고 악마로 만든다. 문제는 그 ‘돈’의 언어가 다른 언어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돈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고 소중한 언어들을 낯설게 하고 있다.

 

돈의 득세와 위력으로 밀려나고, 희미해지고, 낯설어진 언어들을 생각해 본다. 하나하나 끄집어내 보니 참 많다. 그중에 ‘훌륭하다’는 말이 이에 해당하겠다. ‘훌륭하다’는 국어사전에 보면 ‘썩 좋아서 나무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가짐과 마음 씀씀이, 이를 바탕으로 능력도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훌륭한 선생님, 훌륭한 인격자, 훌륭한 학생…. 참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훌륭’이란 언어가 ‘성공’이란 언어에 밀려나갔다. 무한히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오래도록 독점하는 함의를 가진 성공이 사회 전면에 출현했다. 그 ‘성공’이 위력을 떨쳐 나갔다. 그 위세 앞에 맑고 향기로운 언행을 가진 사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지식과 신념을 돈과 권력에 팔지 않는 사람, 늘 나와 이웃을 한 몸으로 살아가는, 그런 ‘훌륭한’이라는 언어가, 세력을 잃어가는 시절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과 어울렸던 언어들이 하나하나 함께 잊히고 낯설게 되었다. 이제는 인성, 인품, 인격이라는 말이 돈과 성공이라는 말에 밀려 사회 전면에서 퇴장한 지경이 되었다.

 

조용히 생각한다. 우리 시대를 가꾸는 언어를 복원하고 생성해야 하는 텃밭이 어디인가를. 겸허하게 답한다. 그곳은 바로 진리와 지성의 전당인 대학이라고. 다시 엄중하게 묻는다. 오늘의 대학은 언어의 오염을 막아내고 생명 본원의 언어를 생성하는 진리 탐구와 지성을 연마하고 있는 배움터인가를. 겸허하게 답해야 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무엇보다도 언어의 오염과 실종, 굴절이라는 비상경보가 울리고 있는 곳은 대학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경보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소중한 언어가 대학에서부터 실종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대학에서 실종된 언어는 무엇인가. 자유, 정의, 진리, 우정, 사랑, 헌신, 지성은 대학의 주요 교훈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렇게 ‘훌륭함’으로 집약되는, 대학의 건학 이념은 한낱 치장이 되었다. 대신 수상하고 불순한 언어들이 대학을 점령하고 있다. 실적, 순위, 취업, 예산, 기부, 조작, 줄 세우기, 성폭력, 정치 등의 언어들이 음과 양으로 포진해 있다. 이들 언어는 대학 당사자가 ‘돈’을 위한, 또는 돈을 버는 능력과 연줄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과 목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하겠다. 

 

“대학의 교훈들, 예를 들면 ‘진리는 나의 빛’(서울대), ‘자유·정의·진리’(고려대), ‘지덕겸수 도의실천’(원광대)은 얼마나 뜻깊은 언어들인가. 삶과 공동체에 필수적인 이러한 가치를 내건 한국 대학들은 사회를 분열로 몰아넣는 자본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대학마다 주차장은 유료며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즐비하다. 또한 정부 연구비에 목을 매며 피눈물 나는 경쟁에 뛰어든다.”❶ 오늘의 대학의 위기를 짚어내고 있는 글이다.

 

대학은 글자 그대로 큰 배움터이다. 배움은 언어와 삶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순한 관심사는 대학의 언어를 교체했다. 고전 《대학》은 삼강령 팔조목(三綱領 八條目)❷을 교육의 골간으로 삼고 있다. 이 강령과 조목의 언어들의 지향을 살펴보자. 언어의 실종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대학, 진정 대학 교육의 위기가 아니겠는가?

 

월간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통권 262호)

 

❶원익선 교무 <경향신문> 2018년 12월 21일자 칼럼

❷삼강령은 《대학》의 세가지 강령으로 명명덕(明明德), 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을 말하며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함.

 

* 이 글은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들 용균이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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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할 일입니다.                                            

 

어머니-.jpg» 추모제에서 오열하는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제공

자정을 넘어 오전 1시 반. 책상 위 핸드폰이 징징거립니다. 잠이 오지 않아 그저 눈을 감고 누워있던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또 어느 주정뱅이 친구가 제 술에 겨워 이 오밤중에 나오라고 전화를 하는 게지.

전화는 간격을 두고 한 시간여를 계속 징징댔습니다. 아이고, 저런 미친 녀석.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새벽 3시 무렵 같은 동네 사는 여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빠, 왜 전화를 안 받아? 병원 응급실에서 나한테 전화가 왔어.” 아들 녀석이 응급실에 있는데 현재 상태는 말해줄 수가 없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거였습니다.

한 순간에 지옥이 몰려왔습니다. 이른 새벽의 간선도로는 휑하니 뚫려 있었지만 여동생이 모는 차는 하염없이 느리게 느껴졌고, 내 머리 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습니다. 마음을 겨우 다잡아 평정을 찾아가는 참이었는데, 몸은 마음과 달라서 자꾸 구역질이 났습니다.

 

높은 데서 추락했다는데, 이마와 얼굴 머리뼈에 둥그렇게 금이 갔지만 내출혈이 없고 의식이 있으니 정말 천운입니다. 허리며 다리 부러진 데도 없구요.” 의사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는 나를 지옥에서 천당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아, 세상에,‘아들이란 말이 이리 무서운 말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네 삶은 정말이지 간발의 차이로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있지도 않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한 피조물의 실상.

 

용균이 어머니도 나처럼 새벽길을 허위허위 달려갔습니다.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고 구미에서 태안 병원까지, 머나먼 지옥의 길이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아들 이름을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아들은 영안실에 누워 있었고, 의사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아들 마지막 모습을 차마 보여 줄 수가 없었습니다. 스물 네 살 꽃 다운 나이의 아들이 머리와 몸 따로였고, 등은 온통 컨베이어 벨트에 갈려서 타버렸다니.

오오,‘어머니란 말이며 아들이란 말이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을까?

아들 용균이는 카톡 아이디가 가정행복이었고, 그렇게 효자였답니다.

 

고착단-.jpg» 사고현장에서 고착탄을 제거하는 모습을 재연하는 고 김융균씨의 동료.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제공

 

 

아들은 석탄을 때서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매일 밤, 석탄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2킬로 미터가량을 오가며 아래로 떨어진 석탄 부스러기들을 퍼올리는 일을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손전등도 지급하지 않아서 휴대폰 불빛을 비추어 가며 작업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들어가 본 석탄가루 날리는 아들 작업현장은 도처에 사고위험이 널려 있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마련된 손잡이 난간은 작업 중에는 오히려 추락위험이 있어 잡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에 끼일 위험이 있는 범위 안에 사람이 들어가면 기계가 자동으로 멈추거나 최소한 멈출 수 있는 안전줄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장치를 하면 기계가 수시로 멈추게 돼서 작업이 지연된다는 이유로 운영을 하지 않았다는군요.

 

김용군-.jpg» 생전에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고 김용균씨의 모습

 

아무리 시정을 요구해도 발전회사는 들은 체도 않았다네요. 자기 아들들도 저런 작업장에서 일 시킬 수 있었겠나요. 용균이처럼 발전소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이 5년간 무려 40명이나 된다는군요.

안전장치 안하고 기계를 빨리빨리 돌리는 게, 그 때문에 죽고 다친 노동자들 손해배상해 주는 것보다 더 이익이랍니다. 돈이 사람의 주인 된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높은 데서 떨어진 내 아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기에 앞서, 스물 네 살 꽃 같은 용균이를 죽게 만드는 이 세상을 고치는 데 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기도할 일입니다.

용균이는 비정규직을 없애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아들처럼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용균이 어머니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너 많이 보고 싶어. 너는 갔지만 엄마는 네가 원했던 그 뜻을 찾아 살 거야. 아들 사랑한다."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변호사)   

                    

<공동선 2019. 1, 2월호>

다운증후군 동생과 산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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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다운 증후군,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인간의 기쁨

저자 에르나 알버츠

 

20148, 진화생물학자이자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에게 한 여성이 가상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제가 정말로 다운증후군 아이를 임신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정말 윤리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군요."

도킨스는 몇 초 후에 트위터로 답했다. “이번에는 그냥 낙태하고, 다시 시도하세요.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세상에 내놓는 건 부도덕한 일입니다.”

그 뒤를 이은 댓글은 폭풍우 같았다. 도킨스를 따르는 많은 실용주의자들조차도 그의 짧은 메시지에 반발했다. 다음 날 도킨스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반쯤은 사과했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다운증후군 자녀를 돌보는 부모들은 대개 다른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돈독한 애정관계를 형성합니다. 나는 감성적 차원에서 공감은 하지만, 감정이 그렇다는 거지 논리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도덕성이, 저처럼 행복의 양을 증가시키고 고통을 감소하려는 욕구에 근거한다면 임신 초기에 다운 아기의 낙태를 선택할 것입니다.  아이 행복의 차원에서 본다 해도 일부러 다운 아동을 낳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실 부도덕한 일입니다."0

장애인들을 옹호하는 이들이 재빠르게 지적했듯이 다운증후군에 대한 도킨스의 추정은 실제 연구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 스코토 등이 2011년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의 99%가 그들의 삶에 만족했고, 그들 부모 중 97%와 그들 형제자매의 94%가 자부심을 표시했다. 0

형제자매 중 5%만이 자신의 다운증후군 형제나 자매를 그렇지 않은 이들과 바꾸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삶의 질에 관한 연구를 인용한다 해도 장애 아이를 낙태하라는 도킨스 주장의 뿌리,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닿지는 못한다. 나는 그 두려움을 경험으로 이해한다. 도킨스가 이 글을 읽는다면  "행복의 양을 증가하고 고통을 감소하려는 욕구"에 관한 그의 진의를 감사해 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뉴스의 헤드라인이 온통 무시무시한 것들로 도배되는 때에 이런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고통도 행복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말대로 둘 다 감정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누가 어떻게 더 고통을 받는지 결정할 수 있을까? 장애를 가졌지만 인생이 그저 기쁘기만 한 아이와 지능은 우수하지만 관계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아이 중 누가 더 고통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을 나누는 경계선은 모든 인간의 심장을 가로지른다."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말처럼 각 사람의 마음은 행복과 고통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갈라져 있다. 그것은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의 마음뿐 아니라 내 여동생 아이리스 같은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1.jpg» 제니아 하우스너, 소개팅, 2009

 

 1951년에 태어난 화가 제니아 하우스너는 예측 불가능하고, 단편적이며 위험스러운 인간 관계라는 신비로운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하우스너는 유럽과 아랍세계 여성간의 의사소통을 촉진시키기 위한 단체인 국경 없는 여성들의 회원이다.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살고 일한다. www.xeniahausner.com
  작가의 허락을 받아 작품을 사용했다.


내가 세 살 반이었던 1982년에 아이리스는 세상에 태어났다. 산부인과 의사는 동생을 다운증후군으로 진단했고, 절대로 걷거나 말하거나 우리 가족과 사회에 어떤 의미 있는 기여도 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자신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에는 너무나 노련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부모님이 아이리스를 평생 돌볼 수 있는 기관에 얼른 맡겨야 우리 가족의 삶이 의미 없는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의 제안을 거절한 부모님은 아이리스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아이리스로 인해 우리 가족의 부담이 늘었음에도 우리 가족은 곧바로 도킨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돈독한 애정 관계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두 가지 심각한 심장 질환을 지닌 채 태어난 아이리스는 두 돌 전에 심장 개방 수술을 두 번 받았다. 수술 전후로 동생은 만성 폐렴을 얻어 산소 텐트에서 지냈다. 치료사들은 끊임없이 아이리스가 삼키고, 기침하고, 움직이고, 앉고, 말하는 것을 배우도록 도왔다.

지적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리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실체를 알아채는 듯 했다.

나중에 아이리스는 건강해졌지만, 그녀의 일상을 돌보는 일은 여전히 큰 힘이 들었다. 옷을 입히고, 음식물을 먹기 좋게 자르고, 이를 닦고, 하루 일과를 대비하고, 각종 치료와 숙제를 돕고, 소지품을 챙기고, 하루를 행복하게 마치고, 밤에 편안하게 잠들도록 돕는 일은 시간과 인내심이 들었다. (, 현재도 그러하다.) 아이리스를 검사한 심리학자들은 동생의 지능지수가 매우 낮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논리적인 사고를 하라는 것은 어림도 없고, 고집은 황소 뿔 같기에 창의성과 유머를 발휘하지 않으면 위기 상황을 뚫고 나가기 어렵다.

우리 가정생활도 은연중에 바뀌었다. 우리는 즉흥적인 외출은 물론이고 일반적인가정들이 벌이는 모험을 해 본 적이 없다. 아이리스의 선생님들, 돌보미들과 머리를 맞대고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야 했고, 많은 경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짜내야 했다. 아이리스가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 이미 50 대로 중년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부모님은 특별히 손이 더 가는 아이를 돌보는 일로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항상 아름다운 순간만 있었던 게 아니다.

어렸던 우리는 부모님에게 더해진 부담을 알지 못했다. 여느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들처럼 우리 부모님도 그들이 늙고 죽었을 때 아이리스를 누가 돌볼 것인가를 놓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다운증후군 환자의 평균 수명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지만 의료 혁신 덕분에 현재 50에서 60대 늘어났는데 이 역시 나름의 도전 거리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는 장애인이 21세 이상이 되면 연방 및 주정부 서비스를 거의 못 받는데, 사실 이때는 그들의 필요가 더 복잡해지는 시기이다. 우리 가족은 재정적인 염려가 없었기에 매우 행운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다른 가족들은 약, 각종 치료, 장비, 그리고 주거하는 간병인들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꾸며서 말하지 않으련다. 장애는 고달프다. 하지만 이것이 아이리스의 삶이 온통 고통투성이라는 뜻일까? 우리 가족은 동생이 없었다면 더 행복했을까?

2.jpg» 글쓴이와 아이리스 알버츠 자매 

 

 

스스로 판단하시라. 아이리스는 방울이 터지듯이 톡톡 튄다. 그녀는 꿀에 꿀벌이 모이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끌려서 대인관계의 장벽을 쉽게 허문다. 우리는 아이리스를 우리 가족의 대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동생은 언제나 일등으로 우리를 새로운 사람들과 엮기 때문이다. 일단 동생이 친분을 맺고 나면 그저 "우리는 아이리스의 가족입니다"하면 누구와도 척척 친구가 된다. 동생은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에게 깊이 공감하며,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들었을 때 마치 자신이 희생자의 가족이나 된 것처럼 충격을 받곤 한다.

아이리스의 전염성 강한 큰 웃음으로 공연장 전체가 들썩거린다. (웃음을 시작하는 일로 큰 수입을 벌 수 있겠다고 가족끼리 농담을 했다.) 동생은 사람들의 농담이 이해가 되든지 말든지 주저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초등학교 연극에서 친구들이 연기한 배역을 용케도 기억하면서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의 무대 이름으로 계속해서 부른다. 우리 공동체 교회의 식구들은 성 만찬을 기념한 후 "평화와 일치"라는 말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런 순간에 사랑하는 초등 동창을 발견한 아이리스가 예의 꺼끌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글로리아나 공주님! 평화와 일치!"

지적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리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실체를 인식할 수 있었나 보다. 한때 친했으나 해외로 이사 간 친구가(산드라라고 부르자) 아이리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인지 몇 주 동안 산드라가 어떻게 지내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계속 묻는 데 짜증이 난 나는 "걔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자!"라고 말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를 들은 산드라는 믿기지 못해 했다. "아이리스, 오늘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동안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거든. 전화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이리스가 끊임없이 언급했던 또 다른 친구 (엘레노어라고 부르자)가 있다. 정말 우리 모두는 엘레노어가 얼마나 놀라운지 듣고 또 듣는 것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놀랍게도 우리는 엘레노어가 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토록 아이리스가 끈질기게 엘레노어를 소중히 여기며 기도하자고 했는데, 우리는 그 긴급한 메시지에 귀를 막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리처드 도킨스 같은 분이 우리 같은 가족을 들여다보면, 엎치락뒤치락 끙끙거리는 처지를 암울하게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가려진 시야를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 또한 내 여동생을 매우 사랑하지만, 그 아이가 내게 늘 좋고 완벽한 선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자라면서 나는 가끔 동생을 돌보라는 요구에 짜증을 부렸고, 어떤 경우에는 정상인의 삶을 갈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종종 이런 자기 연민으로 투덜대는 것이 무해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내  마음가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내 태도가 믿었던 것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을 떠난 지 4년이 되었던 스물두 살 때, 나는 독일에서의 내 앞날을 설계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의 거의 모든 젊은 여성들처럼, 나는 개인의 독립과 성공적인 직업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여겼다. 비록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여전히 신을 사랑했지만, 자율성과 성공은 내 신념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여성에게 자신의 아이를 죽일 만큼 강인하라고 하면서 아이를 키울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인가?

나는 산부인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고, 준비 차원에서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다. 출근 첫날, 나는 호출 신호를 받고 30대 중반의 여성이 머무는 개인 병실에 들어갔다. 그 당시 나는 의사가 심각한 선천성 기형을 진단하고 그 낙태 절차에 서명한다면 최대 23주까지 낙태가 합법임을 알고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어떤 극적인 상황에서는 낙태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진하게도 다운증후군을 가진 태아들이 이 범주에 속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이들이 심각한 장애인라고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임신 후기의 낙태가 진행 중인지 몰랐다. 환자는 화장실에 가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뭘 해야 되는지 잘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환자용 변기통을 집으러 달려갔다. 몇 분 후, 나는 아주 푸르스름한 형태의 것을 변기통 안에 받아냈다. 그녀의 아들은 분명한 인간 존재였고 팔, 다리, , 눈썹,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기는 독극물 주사 후 자궁에서 사망한 상태였고 간호사들이 낙수로 분만을 유도했던 것이다. 내가 변기통을 꼭 붙잡고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본 환자는 오히려 말을 건넸다. "의사가 아기가 다운증후군이 있다고 했어요. 혼자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녀가 내 고통을 느꼈던지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걱정 마요.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잘 감당할 수 있어요."

나는 간호사를 불렀다. 그녀는 탯줄을 움켜 쥐고 가위로 아기에게서 어머니를 분리시켰는데,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기쁨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간호사는 내게 쓰레기를 수거하는 방에 변기통을 갖다 놓으라고 지시했다. 주저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어떻게 될지 물었다. ", 그건 실험실에서 조직 연구를 위해 갖다 쓸 거예요."그녀는 담담히 아기의 유해를 종이 타월로 덮으면서 대답했다.

이 병원의 조산아 중환자실은 산부인과 아래에 있었다. 거기에는 임신24주에 태어난 아기들의 삶을 구하려는 발버둥치는 노력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렇다면 23주의 태아가 법적으로 일회용 처분을 당하면서 24주의 아기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고 누가 어떻게 정의를 내린 걸까?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3.jpg» 범죄 지도, 2010, 제니아 하우스너 그림

 

근무 시간이 아직도 몇 시간 남았기에 나는 내 자신을 추슬러 전문 직업인답게 행동하려 했다. 그럴 듯해 보였던지 다른 직원들은 나의 상황 대처 능력을 칭찬했다. 그러나 내 안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만약 내가 세운 목표를 위해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 됐다면 그대로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이 선택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 책임을 누가 지도록 강요당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목격한 일의 냉엄한 현실이 내 안에 천천히 접수되면서 나는 분노의 질문을 터뜨렸다. 만약 그 환자의 말대로 혼자라면, 그녀를 홀로 버려둔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거지? 그녀는 친척들이나 친구, 의사에게 압박을 받았던 걸까? 나는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채 당해버린 아이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그 아기의 엄마를 며칠 전에 만났더라면 아이리스에 대해 말해줬을 텐데,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정작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내 세계관을 처음부터 되짚기 시작했다. 한 여성에게 당신은 당신의 아이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그렇지만 아이를 기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다!’ 라고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이 여성에게 가장 최선이라고 한다. 정말 그러한가?  그녀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등한시 하며 , 시키는 대로 행동한 여성에게 아기 죽인 책임을 모두 뒤집어 씌운다고? 여성들에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숱한 잘못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그 환자가 한 말이었다."혼자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이 말을 들으며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아이리스를 키우셨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약해질 때마다 항상 의지가 되어 주셨다. 이 환자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우리 부모님이 맺었던 관계 같은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서로를 의지할 수 있을 뿐더러 헌신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도움을 받았다. 브루더호프에 대한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 부모님은 둘 다 자신의 직업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미 해군의 민간인 종사자였고, 엄마는 유치원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부모님은 브루터호프에서 만나 결혼을 했기 때문에 아이리스가 태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실제적이고 감성적인 지원과 조언과 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서도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아이리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도록 해주었다.

 

4.gif» “짜증내는 사람 입장 금지!” 아이리스가 최근에 플라우 출판의 사무실 문에 붙인 표지.

 

우리가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뉴욕 북부의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약 300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 같은 곳이다. 여기서 아이리스는 항상 자기 또래 친구들을 사귀어 왔는데 소외감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동생은 자신에게 맞는 공동체 일과에 참여해왔다. 공동 식당에서 상 차리는 일을 돕거나 자신 같은 장애인들의 보조 장비를 만드는 공동체 작업장에서 일을 한다.  공동체의 삶은 다양한 직종을 제공하므로 그녀가 공헌할 만한, 의미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깥 세상에서라면야 월급을 제대로 받는 일을 아이리스가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월급을 벌거나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원, 수입, 기술, 업무를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필요를 돌본다. 아무도 아이리스와 같은 사람이 기여하는 것보다 더 받아만 간다고 찡그리지 않는다. 각 멤버들은 각 사람들을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고 감사해 할 뿐이다. 만약 아이리스가 아프면, 의사와 간호사로 훈련 받은 공동체 식구들이 그녀를 살피고, 다른 이들도 우리 가족이 쉴 틈이 필요하다 싶으면 차례로 돌보려 한다. 우리 부모님은 자신들이 죽은 후 아이리스가 어떻게 될지 걱정을 하다가도, 혈연관계만큼 헌신적인 공동체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라이프치히 병원에서 만난 엄마와 아들을 애도하면서, 문득 나는 자라면서 우리 가족이 겪은 현실을 미처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아이리스와 같은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우리 공동체의 삶 곳곳에 통합되기 때문에, 나는 이런 환경 밖에서 아이리스가 살았다면 어땠을지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나는 분명히 그녀가 겪어야 했을 도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이리스를 돌볼 사람을 고용하려고, 혹은 요양원 같은 곳을 찾으려 발을 동동거렸을  것이다. 나는 공동체에서 아이리스가 지닌 선물이 받아 들여지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에 그게 기적인 줄 몰랐을까? 그녀는 보살핌을 받기도 했지만 보답도 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이기에 그녀는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리라. 평생 하나님의 일하심이 내 눈 앞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그걸 보진 못한 나는 장님이었다.

 

"지적 장애인들은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쟝 바니에

 

그 후 몇 주 동안, 나는 그 끔찍한 낙태에 내가 연루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성과와 이익에 집착하는 사회의 이상에 따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늘 누군가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아이리스 같은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한 그 여성의 말이 놀라울 것도 없지 않은가? 내가 그 엄마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아이리스가 경험한 것처럼 그녀 아이가 지닌 선물을 받아 주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실히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많은 헌신적인 가족들과 치료사들과 그리고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특수 교사들을 알고 지냈다. 하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약자에게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환자의 아들이 인생을 꽃피울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내가 그녀에게 장애가 있는 아이를 환영하라고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 진실임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은 관대해서 돌 같은 마음을 부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주 그리스도께서 부서진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겠는가?” 나의 돌 같은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고, 예수께서는 23주된 태아의 모습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셨다.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 신념으로 받들었던 자율성과 성공이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나는 그 길로부터 돌이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브루더호프로 돌아와 멤버가 되었다.

오늘 아이리스와 나는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나처럼 잘못된 기준으로 자신이나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치유의 묘약이 되는지 보아왔다.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쟝 바니에는 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지적 장애인들이 능력과 효율성을 요하는 역할을 맡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힘이나 성공을 취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없습니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그들 속에서 부르짖는 외침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을 갈망함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그들은 마치 깨워나기로 한 듯이 생명을 한 아름 지닌 채,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자유로운 사랑의 손길을 누구에게나 내밀 것입니다.

승리와 개인적 성공의 문화에 뿌리 박힌 사람들이 이들과 진정으로  친구가 되면 정말 놀랍고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랑하는 일이,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깊이 변화되어 더욱 사람다운 인간이 됩니다.

 

글쓴이:에르나 알버츠

에르나 알버츠는 플라우출판 디지털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뉴욕 리프톤의 우드크레스트 브루더호프에 살고 있다.

행복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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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바로 해결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영원한 소풍을 꿈꿉니다.

자기 생각으로 이상적인 삶을 상상합니다.

언젠가는 이룰 거라는 허망한 꿈을 갖고 삽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을 가져도 행복은 찾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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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조건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워 져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언젠간 먼 미래에 갖는 것보다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인생은 답이 없습니다. 이게 답입니다. 
내려놓음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행복을 찾지 않으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받아들임속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버림속에 충만함이 있습니다. 
지족한 사람이 부자입니다. 
더 이상 찾지 마세요. 
나도 남들도 삶도 있는 그대로 좋아요.

행복하세요.

이순간에 기쁨으로 사세요.

살아있는 것을 축하하세요. 
그리고 명상하십시오.

고요함속에 답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전략적으로, 행복을 찾지 않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기쁘게 충만하게 남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아볼려고 새해 결심을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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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불행이 소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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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는 빈민가에서 10대 흑인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해 14살에 임신해 조산아를 출산하게 되었다. 그런데 낳은 아이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죽었다.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마약 중독자로 10대를 보내며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곁길로 가기 쉬운 암울하고도 불운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재는 타임지가 뽑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 중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는 가난과 아픔 속에서 자랐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을 인생의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지우고 싶은 과거도, 지금의 부유함도 인생의 사명으로 여긴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이었다. 그가 섬기며 그녀가 속하여 있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모델이 구약 성경의 "모세"라고 말했다. 그녀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면서 가난함도, 부유함도, 꿈도, 근심도, 자신에게 부닥치는 모든 것을 사명으로 받아 들였고 이 사명감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자신을 사명자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은 결코 하찮아질 수 없다. 오프라 윈프리가 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에서 그녀는 네 가지 사명을 말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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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이라는 말은 영어로는‘Calling’이라고 하는 데 ‘왕이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에로의 부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소명을 받는 자는 부르는 자의 권위가 크기 때문에, 그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소명에는 그저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사명이라는 말은 영어로는‘Mission'으로 어떤 책무를 맡은자(혹은 소명을 받은 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의무나 책임 등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해야만 할 어떤 과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소명은 부름이고, 사명은 소명 받은 자의 과업입니다. 소명이 없으면 사명도 없습니다. 사명감이 없는 자는 당연히 소명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소명이 없는 데도 목사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5천원으로 많이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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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설렁탕 하나를 시켰는데 뼈에 붙은 고기를 수도원 강아지에게 주고파서 봉지를 청했습니다. 손님들이 많아서 바빠 보이는 직원은 알겠다고 하곤 했지만, 일이 바쁜지 그 뒤로 아무런 행동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설렁탕하나 시킨 제게 천렵을 드실줄 아시냐고 묻더니 서비스로 작은 접시 하나를 내주는게 아니겠습니까. 식사 후 계산을 하려하자 봉지 하나로는 국물이 샌다며 이중으로 뼈에 붙은 고기를 싸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만원짜리 설렁탕을 먹고 오천원을 팁으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피곤한 얼굴이 활짝 피더니 지금껏 일하면서 처음 받는 팁이라고 했습니다. 존중받은 것에 대해 존중해 드린 것인데, 서로가 행복감을 맛본 시간이었습니다. 강아지는 당연히 저녁 보너스로 행복했고요.


하청업체 청년들의 죽음은, 그들에 대한 작은 존중심이라도 있었다면 막았을 것입니다. 수익을 올리는것이 기업의 생리임은 감안하더라도 그래도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어야 된다는 것은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이지요.


학자들의 복잡한 이론 토론은 정말 중요한 것을 간과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감 말입니다. 돈을 남기기 위해 싸구려 부속품 쓰듯이 사람을 쓰는 것이 아닌 함께 살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는 존중감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념도 제도도 시스템도 아닌 사람에 대한 존중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동체로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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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jpg 몇년 전 브루더호프공동체인 미국 우드크레스트에 딸과 함께 머물며 그들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가슴으로 공감했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와 디지탈 가공 세계의 쓰나미가 세상을 삼키고 있는 와중에서 브루더호프는 노아의 방주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선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다른 문제일 뿐이라고 여겨 신앙을 그저 삶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않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순응, 또 신앙과 삶의 이분화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지배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드크레스트에서 지내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신앙의 일치였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로 브루더호프의 장로였던 크리스토프 할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과 지내는 동안 공동체라는 것이 어떤 교리나 명제가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따사로움과 눈빛, 연민, 자애, 하나됨이나 노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쓰나미에서 자신들만이 안전한 방주에 피신했다는데 자족하지 않고, 시리아와 네팔 등 재난으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형제들을 파견해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들끼리만의 행복한 공동체에 그치지않고, 지상 공동체를 위해 소명을 다하려는 고군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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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더호프 공동체 창시자로 이번에 발간된 <공동체로 사는 이유>(비아토르 펴냄·김순현 옮김)의 저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공동체~>는 아놀드가 1925년 <치커리>라는 잡지에 ‘고백’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책으로 엮기엔 아주 짧은 글인데, 이 글에 대해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도회 소속 신부이자 20세기 가톨릭의 대표적 영성가의 한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1915~1698)이 해설을 썼다.
 아놀드는 1920년 작가로서 장래가 보장된 직업과 베를린의 중 상류층의 특권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인 자네르츠로 옮겨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세워 장애인과 고아 등을 돌봤다. 히틀러의 전쟁과 살육, 폭력에 반대하다 박해를 피해 피신중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다가 사망한다. 그 이후 브루도호프 공동체원들은 영국으로 피신해 영국에 브르더호프를 설립했고,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전세계 20여곳의 공동체에서 무소유와 비폭력,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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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는 ‘왜 공동생활인가’란 제목의 글에서 “모든 생명은 공동체로 존재하며 공동체를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아놀드는 공동체 건설의 핵심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맹자의 성선설과도 통한다. 즉 욕망과 감정에 부초처럼 표류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인간을 사회적 관습이나 결점에 의거하여 평가하지 않고, 배금주의와 비열함과 흉악함으로 얼룩진 인간 사회의 이 모든 가면이 거짓임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 개성의 현저한 사악함과 변덕스러움이 인간 본래의 결정적 속성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다른 견해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현재 본성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감정의 기복과 동요, 육체적·심리적 만족을 탐욕스레 추구하는 성향, 신경과민과 야망의 심리적 동인, 타인에 대한 영향력 추구, 인간의 모든 특권은 진정한 공동체 건설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인간은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은 이런 탐욕적 성향과 성격적 결함이라는 사실적 여건이 결정적인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하는 허구에 굴하지않는다. 그것들은 하님의 능력과 모든 것을 극복하는 그 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보다 강하시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힘인 그분의 영이 모든 것을 이겨 낸다. 여기서 분명해지듯이, 궁극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생활의 실질적 구축은 배제되고, 아무리 성가셔도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이나 법의 강제력을 신뢰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악의 실재에 부딪혀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아놀드는 “선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동체 생활의 시도를 통해서만,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삶을 영위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 즉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이되시는지를 분명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야 말로 사회·정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면서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해 정반대의 집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투쟁은 함께하지않고, 오직 행동과 말을 일치시키는 단 하나의 무기인 사랑만으로 오늘의 타락한 상황에 맞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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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해설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는 ‘공동체에는 개인의 성취와 친목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밝혔다. 토머스 머튼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이 사막의 교부 두 사람이 ‘우리도 한 번 다투어 보자’고 ‘다투기 위해서는 소유욕 곧 무언가를 독점해 다른 이가 가지지 못하게 하는데서 비롯되니 주위에 있던 벽돌 두 개를 놓고 다투기로 해보자’고 한 일화를 소개했다. 일화에서 한 교부가 ‘이건 내 벽돌이요’하자 다른 교부는 ‘그래요, 형제님, 그게 형제님 벽돌이면, 형제님이 가지세요’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토머스 머튼은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보다 재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재물을 초탈한 상태, 곧 청빈이 중요한 이유는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해야할 사람이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곧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만을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곤 하는데, 이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있음을 알지 못해서”라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공동체는 우리 자신의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공동체의 기초는 민족성도 계급도 아니다”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차별이 만들어낸 적대 행위를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무효화하셨기에 우리는 차별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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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도 브루더호프처럼 고군분투하는 밝은누리공동체와 은혜공동체, 오두막공동체, 민들레공동체, 사랑마을공동체 등 기독교공동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공동체적 고군분투는커녕 인간 자체를 귀찮아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문화가 대세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 A4용지 한장 크기의 케이지에 갇힌 양계용 닭들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철망을 치고 스스로 케이지에 갇혀 스마트폰으로만 소통하는 모습은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던 한국사회에서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상황이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에서도 디지털 의존도가 가장 높아 어느 곳에서나 스마트폰에만 코를 박고, 가까이에 가족과 동료들이 있어도 하나같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느라, 인간과 인간의 접촉이 줄어드는 매트릭스 세계로 빠르게 전환되어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혼인율과 출산율은 떨어지고, 1인가구 비율은 가장 빨리 상승하며, 초고령화는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다. 거대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매트릭스에 의해 공동체는 뿌리부터 뽑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이 멀어질수록, 창조질서가 맘몬의 지배 질서로 바뀔수록 원래의 에덴동산을 회복하려는 갈망도 커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에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모아 현실적 방주들을 수백개, 수천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과 신앙의 열정이 있다. 한국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의 어둠 속에서 한민족 공동체를 위해 인도주의적 봉사와 교육과 시민사회에서 횃불을 들었던 역사가 있다. 그런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제 맘몬에 순종하는 기로에 서있지만 말이다. 그 한국 기독교가 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통해 다시 깨어나 위기의 민족공동체를 위해 다시 한번 횃불을 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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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음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세계 어느 곳보다 공동체성의 붕괴로 자살율과 존속살해율,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을만큼 어둠이 깊기에 역설적으로 공동체운동의 찬란한 횃불이 타오를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이기도 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횃불 코리아>에서 노래했듯, ‘마음에는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 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인 그런 코리아는 정부나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씨알들이 만들어낼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응원하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우리 함께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사진들은 부르더호프 공동체의 모습

다 큰 딸을 억압하려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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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 딸과 이별을 준비할 때입니다
늦게 귀가하는 26살 딸 둔 어머니 “한 달에 서너 번은 딸과 싸워요”

 

사진26-.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저는 26살 딸아이와 집에 들어오는 시간 때문에 의견 차이가 심합니다. 딸과 한 달에 서너 번씩 다툼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딸은 배려심도 있고 다정합니다. 그런데 친구들만 만나러 나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놉니다. 12시 전까지 들어오는 것으로 정했는데도 이야기하다가 늦게 들어올 때는 다음 날 아침 4∼5시에도 들어오곤 합니다. 저는 11시가 넘으면 전화를 하고, 카톡도 보내고 합니다. 지킬 때도 물론 있지만 들어오겠다고 하면서도 아직 안 끝났다며 친구들과 있습니다. 또 술 취한 친구들은 친구 집에 꼭 데려다 주고 오니 딸은 항상 늦습니다. 저는, 너도 위험한데 왜 그렇게까지 하고 늦게 들어오느냐고 화를 냅니다. 제가 더 화가 나는 것은 딸아이가 시간 맞춰 들어오라는 부모가 이상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딸은 친구들하고 이야기만 하는 것이고 나쁜 짓 안 하는데 자기를 못 믿는다고, 우리 또래는 다들 늦게 들어간다고 하며 늘 당당합니다. 첫 번째 약속한 친구와 만나서 있다가 또 다른 친구들이 연락하면 또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번번이 늦습니다. 잔소리처럼 저는 처음 약속한 친구만 만나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것이 안 되어서 화가 납니다. 원사랑    

 

A: 원사랑 님의 모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제 나이 25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이번에는 제 어머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홀로 자식들을 키우신 어머니는, 저희 남매가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자식 교육에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특히 딸이었던 제게 유난히 그러셨는데, 그래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친구 집에서 잔다든지 친구들과 여행 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고, 엄격한 귀가 통금 시간도 지켜야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말씀에 상당히 순종적이었던 딸이었지만 그래도 꿈 많은 나이였던지라 거역하는 일이 자꾸 생겨났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어머니 몰래 연극반에 가입해 활동했고, 대학생 때는 학생회 활동을 하느라 통금 시간을 어기는 일이 종종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소리치고, 눈물로 호소하며 저를 통제하려고 하셨지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저에게 천근만근의 족쇄였습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살면서 자식들만을 바라보신 가여운 어머니를 거역하는 일도 그랬지만, 어머니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일도 저에게는 고문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암을 얻어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나날이 죽음을 향해 가던 어느 날이었어요. 오래 병원 신세를 지고 있던 어머니가 침대에 누워 파란 가을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라야, 이제 너도 자유롭게 살아라.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해 보고,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말이야.” 오직 자식들을 위해 살면서 자신의 삶을 속박했던 과거가 다 부질없게 느껴지고 후회되셨던가 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저의 해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질디모진 잔소리, 발작과 같은 분노, 혹독한 매질 등 어머니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기억이 있지만 제가 어머니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위와 같은 몇 가지 일화 덕분입니다. 저의 자유를 허락해 준 일, 궁지에 몰린 딸에게 뜻밖의 지지와 격려를 해 준 일 같은 것 말이지요.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힘이 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원하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큰 사고는 없었습니다. 흔들리고 아파도 25살이면 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때이니까요.  원사랑 님, 왜 딸의 통금시간에 그토록 매달리시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만 그 어떤 이유로도 26살의 성인을 붙잡아둘 수는 없답니다. 원사랑 님이 틀렸고, 따님이 옳다고 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따님이 옳지 않더라도, 어머니의 이름으로도, 더 이상 따님을 강제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음껏 삐뚤어지는 것, 한껏 틀려 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젊음의 의무일 수 있습니다. 흔들리면서 틀리면서 삶의 지혜를 스스로 터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흉흉한 세상에 어쩜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따지실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달자 시인이 <엄마와 딸>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딸의 인생에서도 엄마가 되고자 한다. 딸은 철부지라 모르니까, 어리석어서 속으니까, 착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용만 당할 것 같으니까, 딸의 마음 한구석에서조차 엄마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딸이 어릴 때는 그런 어머니 노릇이 필요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딸이 성장하는 만큼 어머니 노릇을 접어야 합니다.  

인간이 평생 수행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심리적 과업이 있는데, 그게 바로 부모로부터의 독립입니다. 그 독립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남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했어도 말이지요.  

 

특히 딸이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 건 죽음만큼 힘든 일이라고 하지요. 같은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어느 시기에 모녀는 격렬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싸움이 지독해야 분리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야수처럼 으르렁대며 죽도록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이때가 바로 딸이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야 할 시점입니다.  

 

원사랑 님, 딸의 귀가 시간을 강제하는 마음 아래에 있는 더 깊은 의도를 찾아보세요. 귀가 시간이 왜 중요한가요? 딸이 약속 시간을 어길 때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 평소 딸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당신에게 딸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 모든 것들을 짚어 보셔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 딸과 이별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이별이지요. 딸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제 그만 나오셔야 할 때입니다. 딸에게 충고나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으나 강요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사실 조언이나 충고조차 이제 접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원사랑 님은 당신 자신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이 당신을 기다렸을 겁니다. 너무 오래 돌봐 주지 않아서 쓸쓸하고 외롭고 적적해진 당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불을 켜고, 먼지를 털어내고, 행복이라는 온기를 그곳에 채우셔야 할 때입니다.

중 선생,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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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선생, 안녕하십니까

 

조불련-.jpg» 지난 2014년 6월29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와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이 함께 연 '만해스님 열반 70주기 남북합동다례재'

2003년도 개천절 행사를 치르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45일의 여정을 위하여 서울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그중에 호칭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받았다. 예를 들어 북쪽 국가의 호칭은 북한/북조선, 최고지도자는 위원장/장군님, 식당에 근무하는 직원은 접대원 선생으로 불러야 한다고 강사는 약간의 겁을 주면서 당부했다. 방문하는 일행은 실수하지 않기 위하여, 혹은 재미 삼아 비행기와 차 안에서 호칭을 연습했다.

 

드디어 평양 순안 공항에 발을 딛고 일정을 시작했다. 오십여 명에 이르는 우리 불교계 방문자는 그쪽 공식 호칭으로 말하자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 관계자들이 맞아주었다. 우리 쪽에 견주자면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인 셈이다. 예상은 했지만 북쪽 불교 관계자들의 복장은 양복에 유발이었다. 우리 쪽은 승복에 삭발 한 행색이다. “안녕하십네까? 조불련 국제부장 00입니다”. “반갑습니다. 민추본(민족공동체 운동본부의 약칭으로 조계종의 대북 기구) 상임본부장 00입니다양쪽은 서로 합장하고 손을 잡으며 반갑게 통성명했다. 우리 쪽 스님들은 조불련 관계자들의 직책을 부르고 그쪽에서는 00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동행한 재가불자들이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물었다. “스님, 저 처사님(남성 불자를 부르는 사찰의 관행적인 호칭)들도 스님이에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처하네요.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고 있으니 스님이라고는 못 부르겠고.” “하하하... 그냥 저희처럼 이름과 직책을 부르세요

 

개천절 행사에 북쪽을 방문한 단체는 불교, 그리스도교, 천주교, 천도교 등의 종교단체를 비롯 경제와 사회문화단체 등이었다. 그래서 조불련을 비롯하여 다양한 북쪽 관계자들과 식사와 관광과 행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자리에서 실수하지 않는 무난한 호칭은 선생이었다. 행사 내내 조불련 관계자 외에 다른 북쪽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함께 한 일행 중에 남북교류 초기부터 북한을 방문한 스님들의 말을 빌자면, 처음에는 조불련 관계자들 중에도 몇몇은 호칭이 각양각색이었다고 한다. 스님, 선생님, 스님 선생님, 스님 동무, 그리고 중 선생... 다행으로 중 동무는 없었다고 한다. (부언하자면, 불교 성직자에 대한 호칭도 종종 시비가 되고 있다. 존칭어로 생각되는 스님에 대한 호칭에 대한 반응이 각자가 다르다. 정의와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호칭은 시대에 따라 어감이 변하고 있다. 우리도 예전에는 정다운 친구 사이를 동무라고 했다. 유난히 빨간색에 민감한 박정희 시대에 그 부인이 운영하는 재단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 이름이 어깨동무였다. 북쪽 호텔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들을 부르는 접대원은 지금 남한 사회에서는 아마도 술집 종업원을 뜻하는 접대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언어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언어에 옷과 색깔을 입히고 있는 셈이다.

 

우리 일상에서 호칭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일이 종종 생겨나고 있다. 호칭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 심하면 인권 침해로 비약된다. 그래서 곳곳에서 호칭 문제가 점검되고 있다. 다음에는 대한민국에서 호칭 때문에 내가 겪은 사례를 이야기하겠다.

탕아를 성자로 만든 포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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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주-.JPG» 서빙더네이션스 양국주 대표

 

책.jpg 예전엔 영웅전 못지않게 성인전이 필독서로 꼽혔다. 그만큼 난사람 이상으로 된사람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의 실현이 영웅시되는 세상에 욕망을 버리고 헌신하는 이들의 삶을 산 성인전은 갈수록 빛을 잃어가 이젠 전설이 되어간다. 현실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직도 성인의 족적만을 쫓는 이가 있다. 국내엔 서서평재단으로 알려진 미국 워싱턴의 ‘서빙더네이션스’란 엔지오의 양국주 대표(69)다. 6년 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란 이름의 ‘서서평’ 전기를 통해 ‘한국에도 인도의 테레사 수녀 같은 인물이 있었음’을 일깨운 그가 이번엔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서빙더피플 펴냄)를 들고 고국을 찾았다.

 

 

 의사인 포사이드(1873~1918)는 1905년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병을 얻어 1911년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불과 5년 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지울 수 없는 빛을 남겼다. <살아있는~>엔 두 탕자를 구원한 사례가 등장한다. 여기서 구원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떠들면서 행실은 뒷받침되지못하는 그런 류의 구원이 아니다. 먼저 ‘걸인의 아버지’ 이보한(1872~1931). 포사이드가 전주진료소에 부임한지 얼마되지않은 1905년 3월 김제의 부자 이경호 진사가 괴한들에게 맞아 다 죽게생겼다며 진료를 요청했다. 조랑말에 의료장비를 싣고 급히 당도해 환자를 밤새 돌보던 다음날 새벽 괴한들이 다시 들이닥쳤다. 포사이드와 괴한들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으나 수적 열세인 포사이드는 넘어져 쓰러졌고, 괴한들은 포사이드를 두들겨팬 뒤 한쪽 귀를 잘랐다. 군산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한 뒤 범인이 잡혔고, 관찰사가 피해자인 포사이드에게 범인의 신병 처리 의견을 묻자 포사이드는 “내가 죽지않았으니 죄를 묻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의견을 보냈다. 이보한은 이진사 부부가 아들을 얻지못하자 씨받이를 통해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모로부터 구박덩이로 자라고, 병치레를 잘못해 한쪽 눈마저 잃어 울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폭행사건과 그 이후 포사이드의 모습을 지켜본 이진사의 서자 이보한은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후 이보한은 광인 흉내를 낸채 독립운동을 하면서 부자들에게 돈과 음식을 탁발해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늘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이거두리’로 불렸다. ‘거두리’는 나라 잃은 망국민들과 자신처럼 상처입은 영혼을 거둔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포사이와-.JPG» 조선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포사이드(맨오른쪽)

 

1910년-.JPG» 1910년 선교사 및 선교사가족들과 단체기념사진. 뒷줄 맨왼쪽이 포사이드

 

 또 한명은 동네 깡패였다가 개과천선한 최흥종(1880~1966). 포사이드는 1908년 목포에서 활동하다가 광주진료소의 선교의사 오웬이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오다가 거적대기 위에 누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한 한센씨병 환자를 만난다. 당시 천형인 문둥병 혹은 나병으로 불린 한센씨병 환자들은 전염을 두려워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커녕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이 여인을 부둥켜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병원에 들어섰다. 그것이 나환우들을 돌본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돌봄의 기원이 되었다. 이 때 오엔의 조수로서 병원에서 포사이드를 본 최흥종이 큰 변화를 일으켜 ‘나환우들의 아버지’가 된다. 저자는 “포사이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로 가르친게 아니었다”며 “그의 내면에서 우러난, 소리 없는 행동이 보는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에 2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왔지만, 다 서서평이나 포사이드 같은 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미국에서 포사이드의 말을 듣고 조선에 건너와 헌신한 서서평도 선교사들의 시기 질투로 고초를 겪었고, 포사이드가 폭행을 당했을 때도 ‘험지에 총도 들고 가지않았다’고 비난하거나,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임지 변경 등 이익만을 모색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30서서평-.JPG» 대한간호사협회를 설립한 간호선교사 서서평의 1930년 모습
 

 “저는 어렸을 때 고향 정읍에서 본 선교사들이 사냥꾼인 줄 았았어요. 선교사들이 내장산에서 말을 타고 쫓은 사슴과 멧돼지들이 논으로 도망치다가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 모습을 보았지요. 그러면 선교사들은 저희 집에서 사냥한 동물들로 바비큐 파티를 하곤 했으니까요.”
 양 대표의 어머니 김행이 권사는 서서평이 세운 성경학교 이일학교에 다니다 교사인 유하례 선교사(1893~1995)의 수양딸이 되었다. 유하례 선교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피난명령에 의해 모든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빠져나갔으나 조선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남았다가 목숨을 잃을뻔했다. 양 대표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같은 선교사들은 덕수궁 옆 정승 집, 즉 가난한 백성들은 들어가 볼수도 없는 곳에서 살며 별장을 가지고 즐겼고, 당시 전라도의 선교관리자였던 윌슨이나 유진벨 같은 이들도 당시 조선 사정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승마를 하거나 사냥을 하며 지냈다”며 “반면 서서평, 포사이드, 유하례 등은 가난한 조선인들처럼 살면서 그들을 도왔다”고 했다.

 

6인가족-.jpg» 양국주 대표의 부모 형제들이 유하례선교사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양 대표가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아이다.

 양대표가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유하례선교사는 그의 아버지에게 준 3천환을 주었고, 아버지는 이를 밑천으로 쌀장사와 인쇄업으로 성공해 정읍의 대표적인 교회인 성광교회를 세웠다. 연세대 재학시절 전국학생연합 회장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을 하며 운동권이었던 양대표는 졸업 뒤 아버지의 인쇄업을 물러받아 성공가도를 달리던 1987년 돌연 회사를 팔고 돌연 미국행을 결행했다. 그곳에서 외할머니인 유하례선교사를 모시면서 서서평과 포사이드와 같은 봉사 활동을 하는 재단을 설립해 인생2막을 시작했다.
 그는 3년 전부터 만성신부전이 와 하루 4번씩 투석을 한다. 포사이드 탄생 100돌을 맞아 <살아있는~>을 탈고하던 지난해엔 안신경마비까지 와 한쪽 눈만을 뜨고 원고를 손봐야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을 그릴 때는 몸의 고통을 잊어버릴만큼 기쁨이 넘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의 목사와 선교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나름대로 잘 살아온 분들도 말년에 자기 것을 움켜 쥐고 욕심을 부려 삶을 망가트리고는 해요. 서서평이나 포사이드가 감동스러운 것은 마지막까지 주님에게 자신을 던져버리고 다 비워버리고 헌신했기 때문이지요.”

못났다는 속삭임에 현혹되지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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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한다. 모자란다. 할 수 없다.’

누그러지지 않은 목소리가 평생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1978년까지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살았어요. 그때까지는 별 개념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나의 나라가 아닌 외국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열등감이 생겼어요.

 

 텔레비전에는 나처럼 생긴 사람이 없고, 옷도 안 맞고, 머리 잘 깎아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떠나지 않는 불안이 생겼고 자의식도 강해졌어요. 감정이 쌓이고 머리도 복잡해졌어요. 인생의 낙오자로 가는 도중에 불교를 만나서 희망이 생겼어요. 혼을 되찾은 느낌이었어요. 내가 생각한 나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어요. 무엇을 해서, 무엇을 이루어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왜 못 한다고, 모자란다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까요?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을 믿고 따라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분노, 스트레스, 슬픔, 우울, 불안, 두려움 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이 엉키면서 이런 것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생각이 고통을 만듭니다.

 

 행복은 무엇입니까?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입니다. 바로 청정한 본마음입니다. 청정한 마음이 조건 없는 참된 행복이며 우리의 본성입니다.

 청정한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명상입니다. 명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기술입니다. 생각을 내버려 두면 분노, 원한, 슬픔, 억울함, 불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각에 끌려가는 만큼 고통이 있는 것이고 생각을 내려놓는 만큼 행복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생각은 우리가 아닙니다. 구름은 하늘이 아니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생각과 감정도 우리가 아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늘 우리를 속이는 환영이며 고통을 만드는 망념입니다. 생각을 놓으면 청정한 마음, 참된 행복, 우리의 본성을 만납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살면 세상이 아름답고 인연들이 소중하고 불안, 슬픔, 원한,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습니다.

 

 ‘못 한다. 모자란다.’ 아직까지 목소리가 들려요. 하지만 더 이상 믿지 않아요. 나는 행복할 수 있어요. 나는 가치가 있어요. 더 나아지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내 자신이 좋아요.

 행복은 먼 미래에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일 수 있어요. 우리는 이미 행복해요. 이미 깨달았어요. 알아보지 못할 뿐이에요. 행복을 찾지 않고 행복을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행복을 품고 자비를 베풀며 현명하게 살고 싶어요. 할 수 있어요!

 

 잡념만 없으면 언제나 괜찮아요.

 머릿속의 목소리를 믿지 마세요.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 보세요.

 할 수 있어요! 모자라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좋아요.

 자신감이 전부예요. 세뇌가 필요해요.

 가치가 있어요. 행복할 수 있어요. 이미 행복해요. 지금 있는 그대로 당신도. 

미워할수록 커지는 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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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설교자들이 즐겨 쓰던 우화입니다. 수도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먼 길을 걷자니 점점 피곤해졌습니다. 정오가 되자 햇볕이 뜨거워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기가 돌았습니다. 도시락을 싸 놓고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났고 먼 길을 떠나온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홧김에 발로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습니다. 발가락이 몹시도 아팠습니다. 그는 길에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돌멩이가 하필 왜 여기에 있어서 나를 괴롭힐까?” 그러자 돌멩이가 갑자기 배로 커졌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려고 누가 갖다 놓았을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돌멩이는 다시 배로 커져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흐음, 이런 바위를 갖다 놓고 나를 괴롭힐 만한 녀석은 바로 그 놈밖에 없어.”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변에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바위는 몇 배로 더 커져 아예 길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 길을 지나가던 한 소년이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수도사님, 어디가 편찮으세요? 길바닥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혼자 하고 계셔요?” 수도사는 지금까지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더니 말했습니다. “그런 산더미만한 바위는 보이지 않는데요. 여기에 단지 주먹만한 돌멩이가 하나 있을 뿐인 걸요.” 그리고 소년은 돌멩이를 가볍게 집어 길옆으로 옮겨 놓고 인사를 한 뒤 제 길을 가버렸습니다.


절친한 친구, 다정한 부부 간에도 살다보면 다툴 때가 있습니다. 관계의 충돌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를 향한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다르니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반응도 다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도 계속적으로 충돌하다보면 어느 듯 마음에 미움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 미움은 분노가 되고 분노가 변하여 증오를 낳게 합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관계인데도 가슴속에는 증오를 품고 있는 사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증오의 씨앗인 미움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마음은 쉽게 미움에 감염되고 맙니다.

 

미움과 분노가 마음속에 생겼을 때 그 미움과 분노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마음을 살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살핀다는 것은 마음 속에 품은 알을 바라본다는 것이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알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알 속에 독사가 들었는지 병아리가 들었는지는 알을 깨봐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알이 그 사람의 기대치입니다. 기대치는 그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만든 가공의 것입니다.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가공의 기대치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가치인 우정, 사랑, 신뢰, 배려, 인정 등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창조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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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 얘기다. 연말 가는 곳마다, 송년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화의 소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다. 이런 동질감도 드물다. 모인 사람마다 경쟁적으로 한마디씩 한다.

“자네는 안 울었나? 나는 주책바가지처럼 눈물이 줄줄 나와서 애먹었어. 옆에 와이프가 있는데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야.”

“나는 사람들이 왜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함께 떼창하는지 모르겠던데. 평소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영어로 된 팝송 가사를 외치는 건 정말 이해 못하겠어!”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한국만의 방식으로 콘텐츠를 수용하는 것은 잘하면 또 다른 형식의 콘텐츠 소비 형태로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얘기를 해도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전보헤미안’이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보았다는 사람, 혼자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보기를 잘했다는 말도 나왔다. 한국에서만 관객 8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것을 보면 전설적인 밴드 퀸의 고향 영국과 영화가 만들어진 미국보다 훨씬 더 심한 광풍이다.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다른 이질적인 한국에서 더욱 열광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람마다 해석이 다양하다.

 

“부적응자를 위한 부적응자들의 노래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적응이 안 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프레디 머큐리처럼 스스로 아웃사이더라 느끼는 마음이 강한 것 아닐까요?”

“우리는 냄비 의식이 너무 강해요. 영어권도 아니면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하나의 ‘빠’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대 통합적 콘텐츠라고 봅니다. 사실 그동안 세대 간의 단절이 심했잖아요. 아빠와 아들, 할머니와 손녀 간에 서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장치가 없었던 듯싶어요. 외롭다고 느끼던 차에 그 단절된 마음이 퀸의 음악과 영화로 연결된 게 아닐까요?”

“물론 소수자의 아픔이나 이에 대한 배려도 중요했겠지만, 용서와 화해, 가족과 팀, 그리고 사랑 같은 전통적인 가치들이 영화 곳곳에 스토리텔링의 코드로 숨어 있는 게 더 큰 감동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이야 어떻든 퀸의 음악이 할퀸 세상은 심리적 치유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새삼 음악이란 장르가 갖는 위대함과 치유 효과에 놀란다. 많은 이들이 감정이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허전한 마음을 회복한다. 과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 세시봉 세대 가수들이 등장했을 때도 그런 경험을 했다. 하나의 시대를 매듭 짓고, 하나의 벽을 통과하는 셈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은 경계인의 삶을 산다. 주류는 비주류의 자유를 그리워하고, 비주류는 주류의 안정을 원한다. 주류와 비주류,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중심과 변방 사이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어쩌면 인생이란 불만과 불안 사이의 아슬아슬한 이중주일지도 모른다. 직장인들은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는 불만 속에서 살고, 취업을 앞둔 이들과 자영업자들, 프리랜서들은 알 수 없는 내일과 팍팍한 미래 앞에서 불안에 떤다. 아웃사이더는 인사이더의 안정을 갈구한다면, 조직 안 인사이더들은 그 안정이 오히려 불만이다. 많은 직장인은 겉돌고 있으며 만성 피로를 하소연한다. 조직 안에 있으니 분명 인사이더이지만 스스로 아웃사이더라 생각한다. 모두가 변방 의식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헤미안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던 괴테와 연암 박지원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보헤미안의 어원이 되는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을 가장 많이 찾은 저명 인사가 괴테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모두 16번이나 그곳을 방문했다. 과거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벽 3시 알프스를 넘었던 유명한 이탈리아 기행의 출발지는 카를스바트, 이곳 역시 보헤미아 산맥 자락에 깊숙이 둘러싸인 곳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연암 박지원 역시 과거시험을 막판에 포기하고 야인의 길을 선택했다. 사대부 아니면 행세할 수 없었던 시대에 안정된 삶을 거부하는 것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북위 40도에서 함께 길을 걷고 또 함께 글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없는 18세기 후반의 역사는 너무도 지루하다.

 

어떤 점에서 불확실성은 자유의 본질이다. 편안한 자유란 없다. 하나를 선택했으면 또 다른 하나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창조는 그 불확실한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임을 괴테와 연암의 인생이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주류의 삶만 고집했다면 사람들은 그토록 열광하지 않았으리라.

 

지금은 아웃사이더의 시대다. 과거에는 공부 잘하고 성공한 사람들에게 열광했다. 이 시대는 방황의 농도와 실패의 경험치가 더 중요한 시대다. 실패한 적 없고 아픈 적 없던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진정한 치유란 함께 아픔을 느끼는 공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

 

2018년 연말 또 한 명의 보헤미안이 있으니 그는 축구인 박항서다. 중심에서 밀려나 일자리를 찾아 동남아로 떠났던 나이 든 남자가 베트남의 영웅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감동받았다.

 

삶이 어려울수록 길을 떠나야 한다. ‘쉽게 왔다가 쉽게 떠나는’(Easy come Easy go)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 가사와 만날 필요가 있다. 힘든 것을 훌훌 털고 내가 세상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변방이 곧 중심이 된다. 그것이 진정한 보헤미안 정신 아닐까.

류영모, 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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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한국이 낳은 특출한 종교 사상가 류영모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격의 나인 얼나를 참나로 깨달아야 합니다. 삼독(탐·진·치)의 제나를 쫓아버리고 얼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의 삶
함석헌의 스승으로 알려진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1890~1981)는 한국이 낳은 특출한 종교사상가이다.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에 의하면 인도가 석가를, 중국이 공자를, 그리스가 소크라테스를, 이탈리아가 단테를,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독일이 괴테를, 각각 그 나라의 걸출한 인물로 내세울 수 있다면, 한겨레가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분은 다석 류영모라고 했다.

서울대 농대 학장을 역임하고 성천재단을 설립하여 한국에서 인문학 진작에 크게 공헌한 류달영도 지금까지 사상의 수입국이던 한국이 20세기 다석의 출현으로 사상의 수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다. 다석의 제자로 다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써낸 박영호는 “류영모는 온고지신溫故知新한 인류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다”고 했다. 다석이 우리말이나 한문 글자를 가지고 그 속에 숨어있는 깊은 종교적·정신적 뜻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가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창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과 가르침을 깊이 들여다보면 구조적으로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인류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면에서 통합 내지 통섭한 면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수각다리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세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었으나 천수를 누린 사람은 류영모 뿐이었다. 류영모는 5살 때 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천자문 한 권을 다 외웠다. 6살 때부터 서당에서

진정한 가난의 영성은 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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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은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제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해도 될듯 합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관용의 덕을 갖추어야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 이상 베푸는 것 그것이 관용입니다. 베푸는 것에서 기쁨을 맛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이 줄어듬을 느낍니다. 내손에 쥐고 있는 기쁨보다 다른 사람들이 선물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큰 기쁨을 느낄때 그는 마음 안에 관용의 덕이 생긴 것입니다.

 

단순한 외적 가난이나 단순한 외적 기도는 자칫 자신의 내적 문제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가난하게 산다고 하면서 가진 사람들을 모두 도둑들이라고 일반화시키는 경우가 거기 해당됩니다.

 

진정한 가난의 영성은 관용입니다. 기도를 수 없이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산다 할지라도 관용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은 가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행복감을 느끼는지,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살피는 것이 진정한 자기 성찰입니다. 밖에서는 호인이고 정의로운 사람인데,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작위적이고 기만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했던 어머니를 닮고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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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이가 귀찮게 느껴지는 이유를 적어 보세요
아이에게 냉정했던 어머니 원망했던 주부 “엄마 닮아가는 내가 싫어요”

 

사진27--.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어린 시절 제 어머니는 회사일과 승진을 매우 중시하는 분이어서, 퇴근하셔서도 회사일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 등에 시간을 쓰느라 자식들의 질문이나 부탁도 굉장히 성가셔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저는 자식을 낳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저도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됐는데, 아이에게 늘 옆에 있어 주고 사랑을 많이 주는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도 어머니가 했던 걸 아이에게 똑같이 반복하고 있고, 이 문제 때문에 매우 괴롭습니다. 아이가 질문이나 부탁을 하거나 작은 실수를 하게 되면, 제가 아이에게 제 시간과 노동을 쓰는 게 너무 아깝고 귀찮고 성가십니다. 그래서 짜증과 화를 지나치게 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는 원망도 전혀 없고, 아이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쁜데도, 이상하게 일상에서 제가 하는 행동은 어머니의 차갑고 냉정하고 귀찮아하던 행동과 너무나 똑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가진 분노가 너무 커서 그런 거 같아서, 최근에는 어머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어머니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이해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많이 없어졌는데도, 왜 저는 어머니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지, 도저히 저의 알 수 없는 이 마음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A.‘나는 엄마처럼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어느덧 엄마처럼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는 사실 여성들에게는 거의 괴담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닮다니, 참 인정하기 어려운 현실일 겁니다.

좀 뜬금없는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인도의 영적 구루(힌두교, 불교, 시크교 같은 종교에서 스승을 일컫는 이름. 종교 지도자)인 오쇼 라즈니쉬가 ‘역효과의 법칙’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넓은 길에서 자전거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 길가에 붉은색의 작은 이정표 하나가 서 있었는데, 자전거를 배우려는 사람은 문득 그 이정표에 부딪칠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넓어서 눈을 감고도 이정표에 부딪치기가 쉽지 않은데, 두려움이 너무 커져서 그의 눈에는 이정표만 보입니다. 자전거에 올라탄 그는 자꾸 이정표를 향해 갑니다. 이정표에 부딪치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할수록 넓은 길은 보이지 않고 이정표만 크게 느껴져서 결국 그는 이정표와 부딪치고 맙니다.


모성심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완벽주의나 흑백논리적 사고가 어머니들을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아이와 함께 찾아온 눈물>의 저자 아리엘 달펜은 그 같은 사고의 예로 ‘항상 ~해야 해’ ‘절대 ~해선 안 돼’ 하는 생각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딸들이 어머니가 되어 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엄마 같은 실수를 범해서는 안 돼’ 하는 것들이지요.

 

이런 부정적이고 완고한 생각은 그 자체로 긴장과 불안을 불러옵니다. 절대 ~하면 안 돼라고 생각할수록 실패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도 강해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세상에 절대 안 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고, 실패는 자명한 사실이 됩니다. 그러면 자책감과 우울감만 깊어질 것이고,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앞으로는 더욱더 절대 안 된다고 다짐할 겁니다. 일종의 부정적 사고의 악순환입니다.

 

김민지님, 어머니로서 전전긍긍하며 고민하시는 모습에 위로의 마음 보냅니다. 이제, ‘나는 엄마처럼 하지 않을 거야’ 하는 다짐도, ‘내가 왜 엄마처럼 하고 있지?’ 하는 자책도 내려놓으세요. 아이에게 잘해 주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속상한테, 거기에 ‘엄마처럼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덧붙여지면 마음이 더 무거워지고 고통스러워질 겁니다. 어머니의 냉정함은, 당신에게 너무 큰 불행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판단이나 편견도 없이, 아이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곰곰 생각해 보세요. 모든 생각과 행동과 감정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귀찮고 성가시다는 생각도 애초에는 아이에 대한 염려에서 시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양상은 비슷해도 당신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아이에게 화를 냈을 수도 있구요. 또는 어머니처럼 하지 않으려고 너무 애를 쓰다 지쳐 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정말 아이를 향해 웃는 시늉을 내기도 어렵지요.

 

어머니의 딸로 오래 영향 받았는데 당연히 그 마음의 그늘도 존재할 겁니다. 그 또한 천천히 치유해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니 ‘절대 ~하면 안 돼’라는 생각 대신, ‘그럴 수도 있어. 나라고 완벽한가. 조금씩 달라질 거야’ 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훨씬 마음이 가벼워질 거예요.

 

김민지님에게 두 가지 글쓰기를 권합니다. 하나는, ‘아이가 내게 뭔가를 요구하면 나는 귀찮고 성가시다고 느낀다. 왜냐 하면…’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 보세요. 귀찮고 성가신 마음을 충분히 토로하시고, 왜 그런 감정과 생각을 갖게 됐는지 원인도 찾아보세요.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은 김민지님 자신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러면 안 돼’ 하고 자신을 질책하시면 안 됩니다. 실컷 분통을 터뜨리세요. 그렇게 감정을 해소할 수 있다면 아이에게 좀 더 친절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또 한 가지, 당신이 어머니로서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날마다 5분씩 목록으로 적어 보세요. 최대한 많이,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적어 보는 겁니다. 아이에게 반찬을 만들어 줬다. 아이 방을 청소해 줬다. 아이가 사랑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 웃어 줬다. 아이에게 예쁜 옷을 사 줬다 하는 식으로요. 심지어 오늘은 마음이 편안했다, 이런 것도 좋습니다.

 

추측건대 하루 종일 아이에게 화와 짜증을 내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긍정적인 태도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시고, 그 부분을 칭찬해 주세요.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때 세상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으니까요.

허전하고 아픈마음 인정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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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자기 자랑 할 때 
너무 좋아하지도 싫어 하지도 말고 상대방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누가 우리를 칭찬 할 때 
오만하게 나오지 말고 
겸손한 척 하지 말고
덕을 알아 볼 수 있는 상대방을 인정하세요. 이쁘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세요. 

다른 사람이 누구를 칭찬 할 때
아니라고 오만하게 나오지 말고 찬성하세요.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지지하고 함께 하세요. 
칭찬은 주로 뒤에서 하는 것이 좋아요. 앞에서 하면 아부 같이 느껴지고 사람을 오만하게 할 수도 있어요.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직접 칭찬을 해도 좋고요. 

자기 자랑 그만하세요. 인정 받고 싶어서 자랑을 하지만 자랑하는 사람은 결국 인정을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해요. 자신의 좋은 점을 숨기고 겸손한 사람은 인정을 받아요. 복 짓고 나서 자랑을 하면 복이 날라가요. 

누가 남을 흉을 볼 때는 
맞장구 치지 말고 오만하게 흉보는 사람을 비판하지도 마세요. 험담에 끼지 않는 사람은 결국 존경을 받아요. 

상대방도 남들도 그 누구도 판단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행복하지 못해서, 습관적으로 말실수를 해요. 좀 봐주시고 사람들의 허전하고 아픈 마음을 인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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