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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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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제외시킨 변화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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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늪지에는 ‘리노데르마르’라는 특이한 작은 개구리가 산다. 이 개구리는 몸집은 작지만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이 개구리의 암컷은 산란기가 되면 젤리 같은 물질에 싸인 알을 낳는다. 그런데 암컷이 알을 낳으면 옆에 있던 수컷이 알을 모두 삼켜버린다. 수컷의 입에 들어간 알은 먹이처럼 완전히 소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식도 부근에 있는 소리 주머니에 간직한다. 수컷은 알을 삼킨 후 알이 부화할 때까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다. 수컷은 알들이 완전히 부화하기 전까지는 결코 입을 벌리지 않는다. 소리 주머니에 있는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본능적 즐거움인 우는 것을 포기한다. 먹는 것까지도 포기한다. 그러다가 알들이 완전히 부화했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수컷 개구리는 자신의 입을 벌려 마치 긴 하품을 하듯 새끼 올챙이를 입에서 내보낸다. 새끼 올챙이를 자신의 몸에서 다 내보낸 수컷 개구리의 대부분은 탈진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이러한 수컷의 희생...덕분에 리노데르마르가 한두 마리 늪에 들어오면 그곳은 머잖아 그들의 세상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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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변화는 더딘 것입니까? 영국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공원 묘지에 놓인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다. 나라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내가 죽을 때 이르러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바랐고 나는 변하지 않고 사회가 변하기를 바랐다. 이 세상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야 내 삶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고 어리석음이다.”


한 사람의 헌신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고 말합니다.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나라가 변해야 한다고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바로 내가 희생하지 않고는 나라도, 사회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여 더 이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려 하거나 부당한 현실에 대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자들을 헐뜯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부당한 환경에 적응하려고 들 때 홀로 고독하게 합당한 사회를 꿈꾸는 것은 질식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희생이 따르지 않는 변화는 없습니다.


희생은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기분, 자신의 취향, 자신의 혈기, 자신의 꿈을 따라 살던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부정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불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들어 자신의 몸을 불에 때워 불꽃으로 화하듯이 변화 속에 자신을 일체화시켜야 합니다. 타오르고 있는 변화 불꽃은 세상을 밝히는 나의 몸입니다. 오늘은 변화의 불꽃에 뛰어들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은 남말말고 니말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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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암자의 숨은 스님들] 연암난야 도현 스님

"선禪이란 남 말하지 말고 니 말하라는 것"

 

최배문.jpg» 지리산 도현 스님. 사진 최배문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솟구쳐 오른 겨울하늘은 높고 춥고,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흐리다. 덩어리진 구름들이 세찬 바람결에 흩어지고 있다. 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문득 발아래 사람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거대한 소 한 마리가 주저앉아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표피는 잿빛초록이었고, 머리는 해 뜨는 곳에, 꼬리는 해 지는 쪽에, 동서로 길게 누웠다. 육신은 사방팔방으로 비탈을 이루며 헤아릴 수 없는 겹겹의 주름 폭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등뼈를 따라 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지며 길고 좁은 길이 나 있다. 지리산! 그 등뼈의 능선길이 우리가 늘 지칠 때 다가가 끝없이 걸었던 지리산 종주 백 리 길이다. 그리고 소의 육신, 산과 골과 곡을 감싸 안은 저 너른 품이 7백 리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이다. 나의 비행이 사실은 위성의 눈으로 보았던 것의 데자뷰인 셈이지만 그 덕분에, 꿈처럼 한 마리 새가 되어 영겁의 세월을 누워 있는 산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지리산은 남쪽을 ‘겉지리’, 북쪽을 ‘속지리’라고 부른다. 양지바른 겉지리에 절이 많았고, 해가 짧은 속지리엔 당(巫堂)이 많았다고 한다. 지리산 산사는 크게 4개의 본사 권역으로 나뉜다. 겉지리 서쪽 전남 구례가 천은사 연곡사를 거느린 화엄사 권역이고, 동쪽 경남 하동이 칠불사가 있는 쌍계사 권역이다. 그리고 속지리 서쪽이 전북 남원으로 백장암 실상사가 있는 금산사 권역이고, 속지리 동쪽이 경남 산청 함양으로 벽송사 법계사 내원사가 말사인 해인사 권역이다. 지리산은 2개의 본사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암이 자리하고 있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작은 스님이 있는 작은 절이다. 찻길이 끊겨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묘향대 우번대 상선암 문수대 상무주암 같은 토굴들, 스님 홀로 가난하고 높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름도 없는 암자들, 그런 곳을 기웃거려 보고 싶다. 그것이 스님이 맑혀놓은 우물을 흐리게 하는 일이 될는지, 연락도 안 되는 곳에 찾아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그래서 몇 번을 다시 가야 할 길이 될는지, 혹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나무람을 듣고 퇴짜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스님이 홀로 산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는 오직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고 또 가야 할 수고로움에 비할 바 아니며, 혹은 회향의 측면에서 짧은 소식 하나 얻어들을 수 있다면 그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으며, 그저 물처럼 청한 기운 하나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할 것이 없으리라 싶다. 나는 오랜 세월 불교를 지탱하는 힘이 깊은 산사에서 무욕의 삶을 살고 있는 가난한 스님들 덕분이라고 믿는다.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 가운데쯤 있다.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이 아름다워 ‘벽소명월’이 지리 10경에 들어간다. 거기서 남으로 2시간쯤 내려가면 의신마을이다. 쌍계사 쪽에서는 칠불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10여 분 올라간다. 마을 가게 집에 물어물어 ‘도현스님 토굴’을 찾아가는 길이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안내 간판하나 없는 산길을 찾아 오른다. 오그라든 마른 낙엽들이 쓸려 다니고 있는 비탈을 한참을 올라갔는데도 아무것도 없다. 때는 늦은 오후, 산마루 해가 짧은데 마음이 급하다. 아래쪽을 더듬더듬 찾아보니 입산하는 작은 틈이 있다. 그 길에 들어 20여 분 올라가자 돌계단이 나온다. 계단 사이사이 난이 심어져 있다. 사람 사는 흔적이다. 땀을 훔치며 한 모퉁이를 돌자 드디어 작은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들어와서 차한잔 하고 가라”는 스님 말씀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다섯 평짜리 작은 집, 좁은 마루와 부엌, 사람 둘 눕기도 비좁은 방 하나. 그리고 벽장 속에 작은 부처님 앉아 계시다. 박하사탕, 감자 칩, 능이버섯 차를 내어준다. 도현 스님, 1963년 범어사로 출가한 일흔 노장이다. 쌍계사 동안거 결재 기념사진 찍을 때, 한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 산중 토굴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다섯 평이면 대궐이지. 전에 살던 집이 네 평이었는데, 군불 넣어놓고 마을에 잠깐 내려갔다 온 사이에 홀라당 타버린 거야. 내가 지리산을 다 태워 먹을 뻔했어. 집만 타서 다행이었지.  전기도 없이 18년을 살았는데, 지금은 호텔이야. 불보살이 다녀 가신게지.” 그 말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창을 열자,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들이 석양에 물들고 있다. 마당에 파초 한그루, 우산 같은 나뭇잎 여전히 푸르다. “법정 스님이랑 불일암 살 때도 마당에 파초가 있었지. 범어사 선원에도 있었고, 속이 비었어. 양파처럼 아무것도 없어. 혜가가 달마에게 팔 하나를 바치고 그 팔을 얹어 놓은 것이 파초였지. 무아無我가 저런 거라.”  

 

2-.jpg» 도현 스님의 지리산 토굴. 사진 최배문

 

3-.jpg» 지리산 수행자 도현 스님. 사진 최배문


어둑어둑하여 산을 내려와 구례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올라갔다. 스님은 마당 한쪽에서 향을 피우고 있다. 18년을 같이 살다 죽은 개를 묻은 곳, 매일 향을 피워준다고 한다. “죽은 지 2년 됐는데 그리워. 자식도 안 키워본 내가 자식 키우는 부모 마음이 이렇겠구나 하고 개한테서 많이 배웠지. 49재, 100일재 다 지내줬어.”


토굴 이름이 ‘연암난야’다. 소박한 현판이 처마에 걸려 있다. 이 터가 서산 대사가 출가하기 전에 행자 수행하던 ‘연암蓮庵’이라 해서 따온 것이고, 난야는 ‘한적한 수행처’라는 뜻의 범어 아란야阿蘭若에서 가져왔다. 산죽으로 울타리를 친 열 평 남짓 작은 마당에는 파초와 보리수, 청매 한그루 심어 놓았다. 빈 의자, 작은 연못, 둥근 나무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밤과 모과 몇 개 놓여 있다. 댓돌에 검정 고무신 한 켤레, 그 옆으로 대나무 지팡이가 서 있다. 모든 것이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저 앞에 산봉우리, 어머니 유두처럼 생긴, 관음봉이야. 그 뒤가 청학동이고, 뒤쪽으로는 벽소령, 실상사이고. 김동리 소설 ‘역마’에 나오는 삼남대로가 바로 의신 넘어가는 이 길이지.” 조영남 노래에도 나오는 화개 장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남원은 산골이라 소금이 없다. 지리산을 넘어 화개 장에 가야 살 수 있다. 그래서 벽소령을 넘어 의신에서 자고, 가져온 담배를 팔고 건어물 소금 따위를 사서 다시 넘어가는데 사흘 걸렸다고 한다. 스님과 마루에 앉아 차를 한잔 나누는 여유로운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그랬더니, “불교의 5계가 뭐냐?”고 반문한다. 손가락을 펴서 하나씩 접는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다 세니 손이 주먹이 된다.

“이 주먹을 꽉 쥐고 있으면 뭐가 될까? 조막손이지. 저 창을 열지도 못하고 닫아만 놓기만 하면 뭐가 될까?”

“벽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벽창호가 안 되려면 닫을 줄도 알아야 되고, 열 줄도 알아야 되는 거라. 선禪이란 남 말하지 말고 니 말하라는 거거든. 뗏목이 강을 내려가는데 한쪽 강가에 걸리면 못 가는 거라, 가운데로 난 길(中道)로 가야 바다에 닿는 거지”

“스님,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는데 새해는 무엇일까요?”하고 하나 더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마치 답을 준비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어제는 섣달그믐, 오늘은 정초 설날,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날, 그것이 새해고 설날이지”하고 말했다. 

나오는 길에 합장하면서 다시 와도 되냐고 물었더니, 스님은 나는 관리인이고 당신이 주인이라면서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                                 

 

이광이 bulkwang_c@hanmail.net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이 글은 <월간 불광>(http://www.bulkwang.co.kr)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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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에 내가 주님 곁에 갈지 어떻게 알수 있나요?



수능을 볼수도 없고요.
가장 간단하게 아는 방법이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사람이 좋으세요
골라보세요.


1. 자기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2. 자기는 불행한데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나대는 사람.
3. 자기 행복하려고 다른 사람 행복을 뺏는 사람.
4. 혼자 죽기 억울하다고 남들도 죽이는 사람.


사람들 마음이나 주님의 마음이나 같지 않을까요.


이중에 헷갈리는게 두번째 사례입니다.

예를 들지요
보기에 나보다 더 행색이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나를 도우려고 한다면 마음이 편할까요.
착한건 알겠는데, 부담스럽지요.

알아서 해주려거니 생각치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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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아빠로서 만들어질 상당한 시간 필요해요
육아 관심 없는 남편 때문에 힘든 30대 초보 엄마 “내 삶은 다 바뀌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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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저는 4개월 된 아기가 있는 30대 초반의 엄마입니다. 대학 졸업 후 회사 동기로 남편을 만났고 친구처럼 지내다가 연애 4년 만에 자연스럽게 결혼했습니다. 지금은 육아휴직으로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고 있습니다. 모든 게 처음인 실전 육아로 몸과 마음이 모두 정말 힘들더라구요.


문제는 출산 이후 더 힘들어진 남편과의 관계입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내 몸이 힘들고 또 그 힘든 몸으로 24시간 아기를 봐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하루하루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 커지고 저의 짜증과 비난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출산 전에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고 가볍게 넘어간 것들이 출산 후에는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구요. 몇 번의 고비 때마다 남편에게 심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기를 밤낮없이 보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차라리 회사에 출근하는 게 백번 낫겠다고, 또 모유 수유로 인해 온몸이 얼마나 아픈지를요.

 

그리고 아기를 재우기 전에는 그가 좋아하는 야구나 휴대폰 게임을 삼가 달라고, 또 나에게 가끔은 자유시간을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어떨 때는 차분하게 어떨 때는 울면서도 얘기했습니다. 제가 심각하게 얘기할 때 남편은 대개 잘 받아들이고 잘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루이틀 나아진 것 같아도 또 틈이 나면 야구를 보고 게임을 하고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내 삶은 출산과 함께 다 바뀌어 버렸는데 남편은 똑같이 지내는구나 싶습니다. 내 몸은 이렇게 변하고 또 아프고 힘든데 남편은 겉으로만 걱정하고 정말로 저를 위한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서로 너무 안 맞는 우리 어떻게 계속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제이

 

A.생후 4개월 된 아이가 있다면 제이님 부부는 그야말로 초보 부모군요! 초보 부모란 부모 노릇이 아직 익숙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그때는 엄마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떨떨한 때이고, 잔뜩 긴장하셨을 거고, 아이 중심의 생활을 상당히 불편하게 느끼실 때입니다.

정체성을 바꾸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다양한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기에서, 어린이로, 또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그리고 부부와 부모로 말이지요. 그런데 정체성이 바뀌는 과도기에는 매우 어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게 됩니다. 사춘기와 갱년기 증후군, 산후우울증 등이 바로 좋은 예이지요.

 

그래도 여성은 엄마라는 정체성에 좀더 익숙할 겁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아이를 잉태하고 배가 불러 오는 과정에서 엄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니까요. 문제는 아빠인데, 아빠가 되기를 아주 간절히 기다렸던 경우가 아니라면 남성에게 아이의 탄생은 비교적 급작스럽고 낯선 사건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아이의 탄생에서 조금은 주변인 같은 존재, 소외된 존재입니다. 아내와 아이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지켜보는 목격자라고 할 수도 있고요. 사실 소외된 사람이 자처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일을 맡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아빠는 아이가 태어나도 이처럼 아빠 준비가 덜 되어 있는 상태일 수 있답니다.

 

심리학자와 소아정신과 의사인 스턴 부부는 그들의 책 <좋은 엄마는 만들어진다>에서 출산 후 아내가 남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남편은 아내가 아기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조언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변화를 보면서 혼란과 질투 등을 느끼며, 심지어 충만하고 신비한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엄마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로서의 역할과 정체성은 본능처럼 발휘되는 게 아니며, 애쓰고 수고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 이유들 때문에 아빠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빠는 그야말로 아빠로서 만들어질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빠들이야말로 부모 교육, 부모가 될 준비가 필요한 것이지요.

 

짧은 글로는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두 분은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의 탄생과 육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제이님도 역시 육아에서 남편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신 것 같고요. 그렇다면 이제라도 고민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저는 제이님에게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제이님이 남편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짜증과 화,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는 남편의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육아노동을 분담해 주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힘든 제이님의 마음을 미리 알아 다독여 주길 원하시나요? 그것도 아니면 제이님의 하소연을 들어 주기를 원하시는 건가요? 글에서 보면 제이님이 남편에게 힘들다거나 게임을 삼가라는 말씀은 하셨는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힘든 걸 알아달라라든지 보기 싫은 걸 하지 말라고 요구하시기보다는 남편에게 어떤 구체적인 일을 주세요. 일주일에 몇 번은 집에 들어와 나와 수다를 떨어 줘, 또는 일주일에 몇 번은 저녁에 들어와 내가 일찍 잠들 수 있도록 아이를 봐 줘, 아이 빨래를 맡아 줘, 당분간 집안일을 맡아 줘, 우유병을 삶아 줘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혹시 알아서 다해 주기를 기대하시나요? 그러지 않는 남편이 이기적이고, 제이님 자신은 피해자, 소외된 자, 그리고 위로 받아야 할 사람처럼 여겨지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아서 다해 주는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밖에는 없습니다. 서로 성인인 관계에서는 그것이 부부일지라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요구해서 문제를 풀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님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의 드라마에서 정말 멋진 일을 해낸 엄마라는 이름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몸이 많이 지치셨겠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지혜롭게 남편을 육아 과정에 끌어들이세요. 또 부담되는 육아 노동을 해결할 대책도 남편과 함께 모색해 보시고요. 아기가 4개월이라면 남편의 협조를 요구하기에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지식을 쌓는게 아니라 버리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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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행자들은 지식만 채우고 명상하지 않습니다.
법회를 좋아하고 여기저기서 지식을 모으고, 모르는 게 없어요. 가장 높은 법까지 다 알지만 명상 체험이 없어요. 여전히 마음이 산만하고 진정한 행복을 맛보지 못해요.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만 좋아해요.
이치로 따져서 뭐하게요? 많이 알아서 몸이나 마음이 편안합니까?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지 메뉴만 계속 보고 있으면 도움이 안됩니다. ...
처음에는 명상 지식을 배워야하고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지식을 버리는 것이예요.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 명상시간과 체험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약입니다.
고요함속에 항상 답이 있어요.
내려놓음속에 모든 것이 해결이 되요.
버림속에 평화가 있어요.

가장 높은 가르침은
좌선 좌선 좌선
명상 명상 명상
수행 수행 수행
입니다.
Just do it! Just practice!
~자신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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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통의 공동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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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명을 선도하는 미국에 살면서도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며 단순 소박한 삶을 지켜가고 있는 그리스도인 마을 아미시들을 대상으로 박사학위 연구를 진행한 거투르드 앤더스 헌팅턴을 비롯한 인류학자들은 20세 중반까지도 그들의 문화가 인류역사에서 머지않아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는 커녕 매 20년마다 두 배로 인구가 증가하는 뜻 밖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에서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선교부 김복기 목사가 발표한 내용이다. 이날 컨퍼런스는 ‘아나뱁티스트들이 살아온 오랜 방식’ <공동체를 말하다!>란 주제로  열렸다. 최근 국내에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급중하면서 마을공동체운동의 원조격인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가 열리자 150여명의 청중들이 참가해 5명의 목사와 교수들의 발표를 경청하고 열띤 질의응답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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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 부르심에 응답한 삶 선택
   김복기-.JPG» 김복기 목사 아나뱁티스트는 ‘재세례파’는 뜻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례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성인이 되어 자발적 의지로 세례를 받아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500년 전 루터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이 관주도개혁에 머무르자 초기교회의 공동체적 모습 그대로 따르려는 이들이 모여 살았다. 이에 대해 발표자인 김난예(침례신학대)교수는 “산상수훈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로 정의했다.
 아타뱁티스트들은 전쟁과 폭력을 철저히 반대하고 어떤 명분으로도 살상과 총기와 유아세례를 거부해 군부와 가톨릭, 주류 기독교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쫓겨다니면서도 예수의 본질적인 사랑과 비폭력의 삶을 이어오며 인류사회에 큰 영감을 주었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1735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던중 배가 뒤집어질질뻔한 풍랑을 만나 자신을 비롯한 승객들이 두려움에 떨고있을 때 모라비언들만이 태연하게 찬송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회심했다고 한다. 그 모라비안들이 바로 아나뱁티스트의 선조들이다. 2006년엔 미국 필리델피아 아미시의 한 학교에 침입한 범인이 10명에게 총기를 난사에 5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아나뱁티스트의 일종인 아미쉬인들이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범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답지하는 성금을 범인의 아내와 세자녀에게 먼저 할애해줄 것을 요청하고, 범인의 가족들을 식사에 초대해 위로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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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삶 시대에도 왜 공동체로 사는 사람이 늘까
 김난예-.JPG» 김난예교수  아나뱁티스트로는 국내엔 부르더호프공동체가 널리 알려져있다. 그러나 더 많은 아나뱁스트들 그룹인 후터라이트와 아미시,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모라비안의 후예로 미국과 캐나다에 정착해 14가정씩 개인소유 없이 공동으로 살아가는 후터라이트인구는 1980년 2만4천여명이었으나 현재 4만5천여명으로 늘었다. 아미시는 농촌지역에만 거주하며 자동차 등을 거부한채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고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건강성과 안녕을 우선시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 아미시는 1900년엔 6천명에 불과했으나 현재 33만여명으로 집계된다. 메노나이트는 교회 그룹으로 확산돼 현재 9624개 교회에 146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설목사-.JPG» 설은주 목사
 산업화, 도시화와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면서 핵가족화와 혼삶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렇게 공동체적 삶에 동참하는 이들이 줄기는 커녕 늘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설은주 ‘하늘숲-좋은나무공동체’ 목사는 “관계가 깨져가고 있는데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내보고 싶은 욕구의 분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난예 교수는 “현대사회가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며 생긴 불평등으로 인한 온갖 문제의 해결책이 공동체에 있고, 특별히 장애인과 노인 등 어떤 사람도 소외되지않은 사회의 필요성으로 공동체가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복기 목사는 “통상적인 조직들은 실패하면 서로 욕하고 흩어지기 마련인데, 아나뱁티스트들은 성공과 실패까지 공유해왔다”고 지속성의 비결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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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과 두려움을 넘어 어떻게 함께살까
 최철호-.JPG» 최철호 목사컨퍼런스에선 서울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 등에서 300여명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밝은누리 대표 최철호 목사도 발표했다. 최 목사는 “‘나도 다 해봤는데, 다 부질없는 이야기야!’, ‘생각은 좋은데 현실에 맞지 않아!’라는 생각들은 그 자체가 불신앙, 체념적 삶의 표현”이라며 “일상에서 늘 욕망을 조작하고 불안을 조장해 생명을 고갈시키는 시대 우상이 강요하는 삶에서 탈주해 먹고 입고 자고 즐기는 생활양식과  결혼·임신·출산·육아와 수련, 치유, 교육, 노동, 놀이 등 구체적 삶에서 하나님 나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는 건 개인이나 가정 단위가 아니라 마을이라는 관계망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라이스-.JPG» 크리스 라이스 .
  크리스 라이스 메노나이트 동북아책임자는 인종차별의 본거지라는 미국 미시시피주 수도 잭슨에서 백인과 흑인들이 섞여살던 ‘갈보리의 소리’라는 공동체에서 겪은 갈등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는 “우리는 미국에서 인종적으로 가장 잘 통합된 공동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흑인들이 ‘화해모임’을 조직해 ‘인종차별은 사회에 있기에 앞서 우리 공동체 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며 내가 백인으로써 인종문제를 다루는 것은 선택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즉 언제든 부유한 백인은 다른 부유한 백인 교회로 옮겨갈 수 있었으나 흑인 형제 자매들은 그런 선택이 없었으며, 백인들이 그런 특권을 이용한 해결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얕은 해결책에 머물지않는 진정한 화해를 위한 3단계 과정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사회적 긴장과 트라우마의 진실,억압, 특권을 극복하려면 정면으로 부딪히고, 애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두번째 진실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를 갈라놓고 망가지게 하는 것을 대면하지않는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괴로움과 분노의 과정까지 거치면서 진실과 사랑을 함께 결합해야한다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공동체 화해의 핵심에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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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의 시대, 공동체는 어떻게 세상을 돕는가
 이날 컨퍼런스에선 아나뱁티스트들이 공동체적 삶의 전통과 지혜를 살려 현대사회인들을 구제하는 사역들이 소개됐다. 6곳에서 운영되는 ‘그린크로프트’라는 ‘돌봄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다. 이 공동체 중 한곳은 1922년 인대애나주 뉴 칼리슬의 30만평 숲에 만들어져 150명의 메노나이트 도우미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배우자를 잃고 홀로 남은 65세 이상 노인들과 함께 총 270명이 살아간다. 또 고센 공동체엔 550명의 전문의료인 및 간호인을 포함해 노인등 1200명이 살아간다. 공동체 내엔 예배당과 소규모 예배실, 상담실, 도서관, 컨퓨터실, 영화관람실, 오락실, 각종 모임방 등이 있고, 건강한 이들은 은퇴 후에도 이곳에서 직업을 갖고 파트타임 일을 하거나 자원봉사에 나선다. 김복기 목사는 “돌봄의 공동체는 양노원이 아니라 메노나이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청지기의 삶으로 함께하는 것”이라면서 “이 공동체들은 외진 곳에 있지않고 도시 끝자라에 위치해 도시 내 자녀들 및 친척들과 공동체성을 잃지안하고 연결되게 한다”고 설명했다. 노령화와 혼삶으로 소외와 고독사가 사회문제가 되고있는 한국사회에도 필요한 돌봄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가난이 한이면 우선 채워도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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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백수청년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가진 것 없는 백수입니다. 제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갸륵한 모습을 보신주님께서 “그래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갑작스런 대답에 놀란 청년이 “그래 취업시험에 합격하려면 머리를 달라고 해야지” 하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머리만 좋으면 뭐해 돈이 잇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맞아 돈을 달래야지’ 그런데 또 한구석에서 ‘머리좋고 돈만 있으면 뭐해 이쁜 여자가 있어야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년이 갈팡질팡하는데 주님이 버럭소리를 질렀습니다. “빨리 말해 짜샤, 기다리는사람들이 줄서 있는거 안보여” 청년은 급한 중에도 한가지도 포기하기 싫어서 급하게 청했습니다. “ 머리 돈 여자 요” 그러자 주님께서 실성한 처녀 아이 하나를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욕구란 것이 있습니다.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인데 간혹 종교인들 중에 사람의 욕구를 불편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죄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는 세속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욕심을 내려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등등의 주문을 합니다.


문제는 욕구와 욕심을 동일시해서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심리적 결핍이 심한 사람들에게는 자칫 신경증적 증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불우이웃돕기 차원의 기금을 모금한 적이 있습니다. 교우분들에게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증하시라고 공지를 했더니, 그후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우이웃돕기의 취지가 좋아서 집에서 안쓰는 물건들을 모았는데 막상 내놓으려고 하니 아까운 마음이 들더라’면서 그런 자신이 역겹다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신 분들은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가진 것을 내놓기기 어렵습니다. 즉 궁핍한 기억을 가진 분들은 가난의 영성을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수도자들은 너무 가난한 집안 사람들은 뽑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 이런 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그런 자신을 비난한 필요가 없고 배고픈 자신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애써야합니다. 채워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크게 세가지의 욕구 영역이 있습니다. 가장 밑바닥의 것은 생리적욕구 영역입니다. 먹고 입고 갖고 싶은 욕구의 영역이지요. 그런 욕구들이 채워지면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나타납니다. 정서적 욕구인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영역입니다. 돈벌고 먹고 살만하면 정치인이 되고싶어하거나 명함에 자기 스팩을 가득 채우고 싶은 것은 정서적 욕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다 채워지고 나면 그래서 시들하고 지루해지면 그 다음 추구하는 것이 영적인 욕구란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 발달론의 관점에서 영적인 영역에 진입한 분들을 들라고 하면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불가의 부처님을 들 수가 있습니다. 두분의 공통점은 유복한 집안의 자제로서 모자람 없이 살다가 그런 삶에 식상해서 영적인 단계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본 바탕없이 그저 그분들의 삶이 좋다고 무작정 따라하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궁핍하고 춥고 배고픈 분들은 채우며 사셔야 합니다. ‘왜 나는 비우질 못하지’ 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쓸데없는 자학일 뿐입니다. 채우시고 그러다가 마음이 내키시면 그때 나누십시요. 그래도 늦지않습니다.

30년만에 말하는 스승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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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JPG»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를 지키고있는 주간 박서균 목사

 

함석헌(1901~89)은 힌수염 휘날리는 도풍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있었다. 박정희 독재시대 <씨알의 소리>로 사자후를 토해낸 언론인이자 민주화운동진영의 선봉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비폭력을 주창한 평화운동가였다. 퀘이커의 크리스찬이자 동서양 종교사상을 회통한 종교영성가였다. 그 함석헌이 오는 2월4일로 서거 30주기를 맞는다. 함석헌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래도록 모신 애제자인 <씨알의소리> 편집주간 박선균 목사(81)를 만났다. 한번도 신문 인터뷰를 하지않을만큼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몇걸음 물러서서 뒷치다꺼리를 해온 그는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에 “다른 분을 하는게 어떠냐”고 거절하다 수줍은 표정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가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양보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 지인들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란 함석헌 시의 ‘그 사람’에 가까운 이로 박 목사를 꼽기도한다. 1971년부터 서울 원효로 함석헌 집의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낸 <씨알의소리>에서 박목사는 편집을, 함석헌기념사업회이사장인 문대골 목사는 업무를 맡았다. 문 목사는 “선생님이 어디에 끌려가거나 죽을 위기 때도 ‘선균이가 있으니까, 선균는 내 맘과 같으니까’라고 말해 샘이 났다”며 농담을 한다.

 

식사-.JPG» 말년의 스승 함석헌과 식사중인 박선균 목사

 

함과1-.JPG» <씨알의소리>초기 시절 스승 함석헌과 함께 한 박선균 목사(오른쪽)

 

함과2-.JPG» 스승 함석헌의 쌍문동 시절 함께 찍은 사진. 박선균 목사가 오른쪽

 박목사가 함석헌을 만난 것은 고교 때였다. 박목사는 함석헌이 말한 ‘가장 작고 보잘 것없지만 고귀한’ 씨알이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 산골에서 태어나 세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의집에 양자로 갔으나 제대로 말도 하지못해 파양 당해 돌아올만큼 그의 삶은 고난으로 시작됐다. 중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줄 집안형편이 아니어서 담임선생님이 자기 동생에게 써주는 소개장 하나만 들고  서울로 올라올때만 해도 그는 혈혈단신 무일푼이었지만 기어코 부자가 되거나 고관대작이 되어 금의환향하고야 말겠다는 야망만은 컸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집 책장에 꼿힌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글을 본 순간 그 야망이 산산조각이 났다.

 “선생님은 글에서 ‘내가 누군지를 말하라라. 신부 목사 교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풀이다.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 나한테 주지도 않겠지만 준데도 안한다’고 썼다. 그 때는 아이들에게 물으면 하나같이 ‘대통령 될거’라고 했는데, 대통령를 준데도 안한다니, 이 분을 보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자리에 오른다든지하 생각을 버렸다.”

 그 뒤 함석헌의 글을 찾아 읽으며 불의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솟아오른 그는 함석헌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기대치않았던 답장이 왔다. ‘새싹이 열정만 갖고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봐야하다’는 내용이었다. 고학생인 그는 장학혜택을 활용해 강남대 전신인 중앙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뜻하지않게 그곳에 함석헌이 강의를 왔고, 곧이어 함석헌의 지음자인 안병무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교장으로 왔다. 그는 신이 났고, 졸업후에도 교직원으로 일했다. 그라나 학내파동으로 함석헌 안병무가 그만두자 그도 사직하고 <씨알의소리>에 가담했다. 그대로있었으면 대학교수로 편케살았을텐데 스스로 고난을 자처한 것이다. 그런 제자의 성품을 애틋하게 여긴 때문일까. 함석헌은 생전에 ‘누군든지 형사와 신부 목사되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겠다’고 했지만, 박목사가 ‘선배가 미아리산동네 교회를 맡으라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하게 되면 해야지’라며 의외의 허락을 했다. 그런 사제지간이었기에 박목사는 산동네 목회 시절과 전두환 정권때 7년간의 폐간 때와 몇번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내년이면 창간 50돌을 맞은 <씨알의소리>를 가장 오래도록 지켜왔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박목사는 37세 늦깍이로 결혼했으나 자녀가 없이 부인은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나 홀로됐다. 동반자도 피붙이도 재산도 없이 자처한 고난이 그를 강고하게 했다.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함과3-.JPG» 스승 함석헌과 포은 정몽주의 묘소에서 함께 찍은 사진

 

함과4-.JPG» 스승 함석헌과 함께. 사진 맨왼쪽이 박선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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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은 일제시대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를 해서 월급 몇푼 받은 외엔 월남한 이후엔 2남5녀를 키웠지만 한번도 돈벌이를 한 적도 없이 어렵게 살았다.  일제-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 모두 2년4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곳에서 노자, 장자와 불경과 사서삼경을 탐독해 높은 정신세계를 일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를 바보새인 신천이라고 했다. 신천이라는 새는 태풍을 타고 창공을 비상해 널리 날면서도 정작 땅에 내려오면 물고기 하나 잡지못하고 죽은 고기나 주어 먹는 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박목사는 함석헌의 진짜 호는 씨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민(백성)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는 씨알정신은 함석헌의 사상만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고 그는 증언한다.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도 모셨던 유명한 분들도 모두 명령과 지시과 훈육을 좋아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달랐다. 그렇게 오래도록 곁에 있었지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씨알의소리>를 처음 맡았을 때 도무지 지시를 안해주니 답답했다. 그러나 누구든지 씨알을 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일어나 하기를 바랐다. 그는 제자를 기른다든지 자기를 내세운다든지 그런게 없었는데 그 점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점이다.”

 

 말년에 여성 스캔들이 있던 함석헌에 대해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가 공개석상에서 함석헌을 호되게 비판한 것에 대해서 박목사는 안타까워했다.

"선생님은 공개 강의에서도 '내가 스캔들이 많은 사람이다'고 얘기할만큼 솔직했다. 그러나 그가 남의 가정을 파괴하거나 강제 폭력을 하거나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요즘 미투와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 남의 말만 듣고 류영모 선생님이 함선생님에 대해 공개 망신을 준 것은 말년에 스승 노릇을 제대로 한 것이라고 보지않는다. 함선생님은 오산학교 스승이면서 평생 스승으로 모신 류영모선생님을 깍듯이 대했다. 늘 무릅을 꿇고 모셨다. "

 세간에선 고난 받는 이들을 동정하지만 그는 고난의 역설로 말을 맺었다.
 “선생님은 고난이 많은 우리나라를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비유했다. 그랬기에 잘만하면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남북한이 선생님의 씨알, 비폭력, 평화정신으로 힘을 합친다면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는 2월4일 오후4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 강당에서 ‘함석헌 선생 서거 30주기 추모회’가 열린다.


결점보다 더 나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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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점이 많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주 나쁜 것이다.

                    -파스칼

사색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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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는 단순히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존로크

 

해결법같은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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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는

해결법 같은 것은 없다.

인생에 있는 것은

진행중의 힘 뿐이다.

그 힘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해결법 따위는 저절로 알게 된다.

             -생떽쥐베리

역사인물들 누구 글이 최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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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1-.jpg» KBS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편에서 갈무리

 

1.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아이가 읽기 싫어하는 것을 나무랐더니, 하는 말이 “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천’자는 전혀 파랗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은 창힐(蒼頡)이라도 기가 죽게 만들거요.
 
2.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
 
3.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르겠네.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 꽃들에게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簾)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 誨汝知之 知之爲知之’(내가 너에게 앓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고 하는 것이다)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않느냐?’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라고 했네.
 
문집탐독-.jpg 세 글은 모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글이다. 1번 글은 당대의 라이벌 문인 유한준에게 보낸 편지고, 2번 글은 56세에 지리산과 덕유산을 낀 안의현감으로 제수되어 4년간 지내면서 쓴 글이다. 3번 글은 제비와 장난하며 소일하는 일상을 박남수에게 보낸 글이다. 글쟁이라지만 글감옥에 갇히지않고 때로는 글을 희롱하고, 때로는 글과 사물이 몰아일체의 경지로 노닐게 하는 것이 과연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할만하다.


수많은 문집에서 옥석들을 골라 실은 책이 나왔다. <문집탐독>(역사공간 펴냄)이다. 신문 기자이자 고전번역가이기도 한 조운찬 작가의 신간이다. 이 책에는 연암의 글만이 아니라 대표적인 문장가들의 29명의 문집을 담아냈다. 흔히 옛 문집을 읽는다는 것은 박석에서 옥돌을 골라내는 작업에 비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으로부터 한문학의 대미를 장식한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1200여년 문집으로 옥돌들을 가려서 선보인 것이다. 이를 보고 우응순 고전번역가이지 인문학자는 “기자들이 이런 깊이 있는 책들을 내니 전문가 연 하는 이들이 자극을 받지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그런데 조운찬 작가는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과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기자지만 단지 기자로만 볼 수가 없다. 그는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고, 20년 전 외환위기 때는 신문사를 떠나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에서 국역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문고전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문집 번역 원고를 교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처음엔 문집의 방대함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문집 속의 다양한 콘텐츠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많은 독자들이 문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품었던 생각을 출간작업으로 옮겼다. 


29명의 대표 문집가들을 한구슬로 꿰면서 이를 분야별로 정리한 것은 기자적 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가령 1부에선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제현의 <익재집> △장유의 <계곡집> △박지원의 <연암집> △정인보의 <담원문록>을 ‘고품격 문장을 쓴 우리 문학사의 별들’로 묶어냈다. 이어 2부 ‘끝내 세상을 바꾸어낸 치열한 연구자들’에선 △의천의 <대각국사집> △이이의 <율곡집> △신흠의 <상촌집> △이항복의 <백사집> △김육의 <잠곡유고> △이의현의 <도곡집>을, 3부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준 안내자들’에선 △허균의 <성소부부고> △김원행의 <미호집> △홍대용의 <담헌서> △박제가의 <정유각집> △김정희의 <완당전집> △심대윤의 <심대윤전집>을 정리했다. ‘부조리한 세상에 당당히 저항한 문장가들’은 4부에 묶었다. △백평년 외 <육선생유고> △김시습의 <매월당집> △최립의 <간이집> △양득중의 <덕촌집> △윤기의 <무명자집>이다. 대미는 △정도전의 <삼봉집> △권근의 <양촌집> △김성헌의 <청음집>과 최명길의 <지천집> △김윤식의 <운양집> △황현의 <매천집> △김택영의 <소호당집>을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 인재들’로 묶었다.

 
 삼월 심일일에
 아침거리 없어
 아내가 갖옷 잡히려 하기에
 처음엔 내 나무라며 말렸네
 추위가 아주 갔다면
 누가 이것 잡겠으며
 추위가 다시 온다면
 올겨울 난 어쩌란 말이오
 아내 대뜸 볼멘소리로
 당신은 왜 그리 미련하오
 그리 좋은 갖옷 아니지만
 제 손수 지은 것으로
 당신보다 더 이낀다오
 허나 입에 풀칠이 더 급한 걸요
 (…)
 -<옷을 전당 잡히고 느낌이 있어 최종번 군에게 보이다(與衣有感 示崔君宗藩)>
 
글은조운찬.jpg» 조운찬 기자 겸 작가그냥 글이 아니다. 그의 삶의 내공을 담아낸 글들이 뭇 사람들의 눈물을 훔치게도, 두 주먹을 불끈 쥐게도 한다. 그것이 글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위 글은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이규보(1168~1241)의 시다. 조작가는 그에 대해 “이규보는 가난을 숨기지 않았다. 가죽 옷을 전당 잡혀 쌀을 구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하려 했다”고 평했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가 8천 여수에 달한다고 밝혔고, <동국이상국집>에만 2088수가 실려 있다. 그렇게 다작이면서도 하나 같이 수준급이라고 한다. 이규보는 ‘3첩(捷)’으로 불렸다고 한다. 걸음이 재고, 말이 빠르고, 시를 빨리 지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에선 문집만 탐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그 인물의 이면까지 엿보는 맛이 쏠쏠하다.
<익재집>은 700년간 21쇄를 찍은 베스트셀러 문집이라고 한다. 지은이 이제현(1287~1367)은 고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사신을 가서 27세부터 36세까지 긴 세월을 대륙에서 보내며 수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명망이 천하에 넘쳐흘렀다. 몸은 고려에 살았는데, 도덕과 문장이 유학의 종장이었다. 모두 한유처럼 우러러 존경하였고, 주돈이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기상이 있었다. 


고려 말 문익 목은 이색이 이제현의 묘비명에 쓴 글이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세상과 불화하며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반면 이제현은 문학·학문·정치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비루하고 졸렬하여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이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짓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왔다. 그러니 평소에 이런 일을 빼놓으면 마음을 쓸 곳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장유(1587~1638)가 <계곡집>을 간행할 때 <계곡만필>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달랐다. 장유가 세상을 뜬 직후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그 문장의 기운이 완전하고 이치가 분명하니 세상에 그에게 미칠 이가 없다. 문형을 두 차례나 맡아 공사의 문서 제작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고, 천관(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 오래 있었으나 항상 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었으며, 조금도 그를 헐뜯는 이가 없었다.
장유는 올바른 학문은 잡학이 성행한 가운데 찾아진다고 했다. 오곡이 돋보이는 것은 돌피와 함께 있을 때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학문이 융성할 때 정학은 더욱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의 융통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말보다 글을 강조했다. 문인의 면모다. 그가 당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선공 육지를 예로 들어 ‘문인의 붙끝에 혀가 달려있다’는 표현도 아래 그의 글에서 나왔다.


<주역>에 이르기를 “글로는 말하고 싶은 생각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말로는 가슴속의 뜻을 다 표현해내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고 하였다. 마음속의 정미한 뜻은 입으로도 제대로 표현해 낼 수가 없는 것인데, 붓으로 표현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육(陸)선공(宣公)은 입으로 잘 표현해내지 못할 것을 붓으로 휘갈겨 쓴다”라는게 있다. 이는 육 선공은 입으로도 불가능한 것을 글로 곡진하게 표현했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붓끝에 혀가 있다’(筆端有舌)는 것이 아닐까.

 

박2-.jpg» KBS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편에서 갈무리

 

박3-.jpg» KBS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편에서 갈무리
 

문집을 통해 고금을 횡단한 작가는 객관적 비교를 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기도 한다. 가령 조선 후기 200여년 동안 불과 12차례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의 행적과 기록에 환호해 2002년부터 매년 조선 통신사 재현행사를 개최하고, 2017년에는 통신사 기록물 333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는데, 통신사 기록물의 수백 배에 달하는 ‘콘텐츠의 보고’인 연행록은 홀대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만도 1천회 이상의 연행사가 중국으로 갔으며, 그들이 남긴 연행록만 400여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 작가는 “이제부터라도 한·중 양국이 협력해 연행로를 부활하고, 관광 상품으로 연행사절단을 재현해 동아시아 우호의 길을 열어라”고 한다. 또한 “연암이 6일 동안 머무르며 <열하일기>를 구상한 중국 하북성 승덕시와 4년여간 현감으로 재직하며 이용후생의 실학에 눈을 뜨게 한 경남 함양군이 자매결연을 맺으면 어떨까”고 제안한다.

이 우주에서 한평으로 다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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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저녁,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피곤했는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날카롭게 다투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두 젊은 남자였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한 사람이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앉은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불평을 터트렸고, 이에 처음 사람이 짜증스레 반응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험한 소리는 나오진 않았지만, ‘여기까지가 내 자리다. 아니다’ 하며 작은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렇게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는 그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다석 유영모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누가 어디서 사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주에 삽니다.”


   언뜻 생각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엉뚱한 말 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다. 우주라는 것이 지구 바깥 어딘가에 멀리 따로 있는 시공간이 아니고, 지구가 우주의 부분이고 그 안의 우리도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거기가 바로 우주요 우리가 사는 곳이다. 그 버스 뒷좌석도 우주의 한 조각이다. 그런데, 그토록 무한하고 광대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 두 ‘우주적 존재’가 좁은 버스 안에서 각자의 반경을 주장하며 티격태격 다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심하거나 안쓰럽게 느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내가 아프게 느낀 것은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구처럼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두 사람 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학교 또는 일터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고, 일상의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고, 그래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마음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다를 바 없다. 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겉으로 표현은 안했겠지만 속으로는 욱하며 짜증을 냈을 것이다. 아니면 은근히 무릎에 불만을 나타내는 힘을 실어 남을 밀어내거나 버텼을 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해 타인만이 아닌 자기 자신과도 경쟁하며 살아가다보니 우주를 자각할 여유도 우주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볼 여력도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외로워지고 더 괴로워질 뿐이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우주가 일그러져 있기에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고 한다. 삶이 고달플수록 인간은 서로를 더 원하고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버스 안의 상처 입은 우주를 보며 가슴이 무거웠는데, 위로하듯 격려하듯 어린 시절 노래처럼 외웠던 천자문 구절이 생각났다.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宇宙洪荒).” 우주는 넓고 거칠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우주적 사유를 하며 글을 배우고 익혔다. 아무튼, 드넓은 우주 공간을 함께 여행하는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삶의 반경을 한 뼘만 더 넓혀 보면 어떨까? 거친 우주의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이들끼리 서로에게 약간만 더 친절하면 어떨까? 그러면 일그러진 우주가 바로잡히고 우리의 우주여행도 조금은 더 평화로워지고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덕을 쌓으면 경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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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jpg» 연극 퇴계연가

 

차가운 겨울 이른 아침의 청냉함을 코끝으로 맞으며 안동댐 호반길을 따라 도산서원(도산서당 포함)으로 향했다.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단체가 주관하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답사팀과 종가(宗家)순례 일정을 함께 한 덕분이다. 이 지역에 처가가 있는 어떤 회원의 오랜 활동으로 친분은 물론 문중의 기여도 덕분에 답사객이 아니라 손님으로써 환대와 아울러 비공개구역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후한 접대문화인 접빈객(接賓客)’은 말할 것도 없고 사당까지 참배하는 봉제사(奉祭祀)’라는 종가의 양대문화를 두루 누렸다.

 

도산서당을 지을 때 승려들의 기여도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10여년 전 인근에 있는 용수사(龍壽寺)를 찾았을 때 이미 들은 바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은 20세 때 용수사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한 인연으로 절집과 친분이 두터웠다. 제자와 후손들을 수시로 용수사로 보내 책 읽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번에 그런 흔적까지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인연을 만난 것이다.

 

도산-.jpg» 퇴계 이황의 유적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안의 완락재(玩樂齋)라는 공간 옆에 부엌을 끼고있는 아주 작은 방에는 정일(淨一)스님이 머물렀다고 한다. 스님은 이 집의 실질적 준공자다. 먼저 목수인 동시에 기와장인(匠人)인 스승 법연(法蓮)스님이 도편수 직책을 맡아 공사를 시작했다. 일의 순서상 기와굽는 일이 우선이었다. 재정이 부족하면 경주까지 가서 기금을 모아올 만큼 적극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본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병으로 입적했다. 제자인 정일(淨一)스님이 그 뒤를 이어받아 5년만에 완공(1561)할 수 있었다.

 

그 때 건축주인 퇴계선생의 설계도를 존중해달라는 당부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이후의 용도까지 고려하여 임의로 마루방을 넓히는 일부 설계변경을 했다. 건축가와 건축주의 이심전심 합의였다. 뒷날 그 마루도 좁았던지 한강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선생이 마루 한 칸을 더 달아냈다고 한다. 하기야 서당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이다. 가정집이 아니라 학교다. 공공건축의 노하우는 당시에 절집목수가 최고임을 알았기 때문에 전문가를 존중하는 묵인이었던 셈이다. 원칙과 실용성을 겸비한 마음씀씀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낙성 후에도 정일스님은 안살림까지 일정부분 맡았다. 서당이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절집인 까닭에 공양주(주방 책임자)로써 지역사회의 학동들을 뒷바라지 했다. 혹여 스님이 출타할 경우에는 학생을 받지도 못하고 때로는 집으로 보내야 할 만큼 기여도가 높았다. 유생과 승려가 함께 한 공간이라는 또다른 의미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신은 삶 자체가 소박하고 검소했다. 사당의 위패도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 다섯 글자였다. 이름을 제외한다면 두 글자 뿐이다. 묘소의 비석도 마찬가지다. 앞에 붙은 수식어는 퇴도만은(退陶晩隱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에 영원히 숨은 곳)’이라는 4글자였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했던가. 지나친 예우가 오히려 실례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장황한 수식어 때문에 오히려 주인공의 본래이름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법정(1832~2010)스님 위패는 절집에서 관례적으로 이름 앞에 붙이는 10자 이상되는 모든 수식어를 생략하고 비구 법정이라는 단 4글자만 썼다. 그 자체가 무소유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어 모두에게 적잖은 울림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에도 (退)’에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머물던 자리가 현재의 지명대로 한다면 도산면(陶山面)이며 동네이름은 토계리(兎溪里). 계곡을 따라 토끼가 다닐만큼 작은 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토계는 자연스럽게 퇴계가 되었다.

 

묘소참배를 마친 후 선생의 태실이 있는 노송정(老松亭)을 찾았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은 단종임금께서 타의로 퇴위한 이후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를 선택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를 안다는 의미를 빌어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하였다. 소나무를 대신한 향나무가 엄청난 넓이의 그늘을 자랑하며 집 입구마당 한 켠을 뒤덮고 있다.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이 아니라 반향(盤香)이 당신의 뜻을 오늘까지 말없이 전한다. 노송정 종가 뒤편에는 조상들의 묘소관리를 위한 재실인 수곡암(樹谷庵)을 건립했다. 기문(記文)에 의하면 용수사 설희(雪熙)스님이 수곡암을 지었다고 한다. 동당에는 유생이 거주했고 서당에는 설희스님이 거처했다. 종가에서 선물받은퇴계선생 일대기(권오봉 저)에는 고맙게도 이런 부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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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이창건 어른께서 종가해설사 역할을 했다. 햇살이 가득한 넓은 마루에 일행들이 길게 걸터앉아 명문가의 내력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설명을 하다말고 필자와 눈을 맞추면서 자애로운 미소와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는 처음 노송정 집자리를 잡아준 사람이 승려였기 때문이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선배스님의 공덕을 함께 칭송했다.

 

이계양은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있는 은거명당인 경북 봉화에서 훈도(訓導 향교 교육을 담당한 교관)를 지내며 소일했다. 어느 날 안동으로 오다가 고개길인 신라재에서 쓰러져 있는 노승을 발견하고는 정성을 다해 구호했다. 노승이 은혜를 갚고자 좋은 집터를 잡아준 것이 현재의 자리라고 한다. 이후 가문은 날로 번성하였다. 손자인 퇴계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퇴계선생의 탄생에서 별세이후 흔적을 답사하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덕을 쌓는 집안에는 좋은 일이 많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름없는 평범한 노승을 구해준 적선의 씨앗이 명문가를 이루었고 이후 유가(儒家)와 불가(佛家)가 서로 교류하면서 한 차원 더 높은 지역문화를 꽃피웠다. 이후 지역의 절집(봉정사)201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서원(도산서원 병산서원) 역시 2019년 등록예정이라는 큰 경사의 밀알이 된 것이다.

 

공동체 덮친 스컹크의 방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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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JPG» 부르더호프공동체 마을 중 하나인 미국 메이폴리치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올 해 뉴욕의 겨울은 아주 천천히 옵니다. 하늘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구름만 잔뜩끼는 날이 빈번해 끊임없이 비만 내리고 아직껏 큰 눈 한번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전까지 봄날처럼 따뜻하다가 마침내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막내 유빈이는 주말이면 투정을 부립니다. 포근한 날씨 때문에 얼음이 얼지않아 아직 스케이트장을 오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에 유빈이는 얼음이 꽁꽁 얼은 빙판에서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를 즐깁니다. 아이스하키를 너무 좋아하는 유빈이는 매 해 가을이 시작되면 튼튼한 참나무를 골라  자기가 쓸 하키스틱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쓸만한 하키 스틱 하나 만들려면 이만 저만 시간과 노력이 드는게 아닙니다.  작년엔 이곳에서 그래도 목공의 장인이라 불리는 한스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멋진 하키스틱이 완성되었습니다. 하키스틱이 완성되면 튼튼한 테이프로 블레이드 부분을 칭칭 감아줍니다. 그러면 내구성이 증가되고, 그립감이 높아져 패스나 슛을 할때 고무로 만든 원판인 퍽이 안미끄러져 정확도가 높아집니다.

 

 얼마전 하빈이가 속한 고등학교 그룹이 공동체 마을에서 한시간 떨어진 캣츠킬 산 정상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노스 앤 사우스 호수(North & South Lake)로 스케이트를 타려 갔습니다. 그곳은 한국의 북한산 만큼 높아 얼음이 꽁꽁얼고 호수가 워낙 넓어 스케이트를 타면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돌아올 때는 바람을 이용해 자동적으로 미끄러져 스케이트를 타는 재미가 그만입니다.  대부분 남학생들은 이 때를 아이스하키할 수 있는 기회로 삼습니다. 하빈이도 예외는 아닌지라 동생이 정성스레 만들어 놓은 하키스틱을 빌려갔습니다.

 

1스케장-.JPG

 

 그런데 왠일입니까,  그만 그것을 뚝 부러트리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유빈이의 가슴도 철커덩 무너져 버리고 말았지요. 이번 것은 다른 것보다 정성을 몇 배로 들여 만들었는데… 유빈이는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 사이에 몇 번의 신경전이 오간 후, 다행히도 유빈이가 그 전에 만든 하키 스틱을 제가 창고에서 찾아내 다시 둘 사이에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유빈이는 그래도 창고에서 찾은 것이 하빈이가 부러뜨린 하키스틱만 못하다고  중얼중얼 거립니다. 그러면 우리 아내는 말하지요. 내가 자랄때는 언니랑 저렇게 싸우지 않는데 도대체 누굴 닮아 매일 저렇게 다투냐고... 누굴 닮기는…  절  닮았지요. 제가 자랄때는 형들이랑 매일 치고 박고 싸우며 자랐지요. 싸우지 않으면 재미가 있나요.  하빈이가 심심해 슬슬 동생을 푹푹 찔러 싸움을 거는 것을 보면 내 어릴때 모습이 떠올라 싱긋이 웃게 됩니다.

 

 드디어 메이플릿지도 얼음이 얼어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스케이트장이  오픈하는 토요일이 왔습니다. 유빈이는 오전에 학교에 가 장작패기, 동물농장 짓기등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하고 돌아와  친구들과 잽싸게 아이스하키를 하러 갔습니다. 난 그 사이에 집 주변에 있는 나무 보일러 실과 장작을 보관하는 헛간을 청소하고 그 장소에다 단풍나무 수액을 받아 솥에 끊여서 메이플시럽을 만드는 장소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두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유빈이가 “아빠! 빨리, 빨리 좀 와 보세요!”하고 다급하게 나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난 뭔가 예사롭지 않는 상황인 것 같아 그에게 곧바로 달려 갔습니다.

 

 유빈이는 작 년 가을부터 집 주위에 두 개의 청솔모 덫을 놓았습니다. 청솔모를 잡으면 형이 취미로 삼아 훈련시키는 매의 먹이로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운이 좋게 서너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청솔모 덫에 그만 스컹크가 걸렸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시골이라 자주 스컹크가 나타나곤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덫에 스컹크가 잡힌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난 허겁지겁 달려가 덫에 걸린 스컹크를 보고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유빈이에게 반응했습니다. 저도 이런 일을 본적이 없어 그저  속으로 ‘유빈이가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 하고는 헛간으로 돌아와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나의 큰 실수였습니다. 헛간으로 돌아와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란 집사람이 나에게 달려왔습니다. 난 급하게 달려 온 집사람을 얼굴보고는 그제야 ‘뭔가 큰 일이 일어났구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빈이가 스컹크가 담긴 덫을 막대기로 질질 끌고 나오다가 그만 스컹크가  액체 방귀를 유빈이 손에 분사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멀찍이 떨어져 친구의 겁없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않았습니다.  아마도 유빈이는 스컹크가 덫에 걸리면 액체 방귀를 분사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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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컹크는 안전의 위협을 느끼면 방귀 하나로 적을 무찌르고 자신을 안전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치 큰 곰들도 모두 스컹크를 피해가  동물들에게 방귀 냄새를 뿌릴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그 냄새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지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평온한 오후의 온 마을을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공동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 들어 누구의 짓인지 모두가 궁금해 했습니다. 결국에는 냄새의 정체를 파악하고 벌어진 일을 처리하기 위해 스컹크 특별전담반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방귀 냄새 소동이 아직 이것으로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꼼짝없이 당한 유빈이는 사람을 혼미하게 만드는 냄새를 온 몸에 품고는그만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유빈이는 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들고 욕실로 갔습니다. 옷을 갈아입고는 냄새나는 옷을 바깥으로 가져 나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에 지옥의 냄새가 저희가 사는 집 전체를 덮쳤습니다.

 

 토요일 오후 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파워풀한 냄새 기습을 받고는 몹시 놀라 기겁을 하거나 어쩔 줄 몰라 당황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안정을 찾은 사람들은 바깥날씨가 영하 12도나 되는 강 추위에도 불구하고 집의 모든 창문을 열어제치고 스컹크 냄새 제거 작전에 곧 돌입했습니다. 그마나 집 밖에 냄새는 바람이 불어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지만 집안의 역겨운 냄새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여름이 지나 다락에 집어 넣었던 선풍기를 다시 꺼내 틀어 놓아도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스컹크를 건드렸니?” 
 “스컹크 덫이 집 옆에 있어서 냄새 풍길까봐 숲속으로 옮기려 했어요.” 
 “스컹크를 건드리면 냄새풍기는 것 몰랐니?”   
 “스컹크가 덫에 걸리면 꼬리를 올려 냄새를 안풍긴다고 들었어요.”
 
 딴에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이웃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인데 여기 저기  유빈이를 향해 질책의 질문이 쏟아지자,  유빈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습니다.  아내는 사람들을 도우려 한 것이니 괜찮다며 유빈이를 달랬습니다.

 

 토마토소스에 목욕을 하면 냄새가 사라진다는 말에 형 하빈이는 잽싸게 식품 담당하는 형제에게 달려가 커다란 토마토 소스 2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 공동체 의사인 크리스는 스컹크가 쏜 방귀에  당한 유빈이를 돕기 위해 집에 왔습니다. 그가 처방한 내용은 토마토케첩으로 샤워하는 것은 효과가 별로 없고, 베이킹 소다로 여러번 샤워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 때부터 유빈이는 몸에 달라 붙은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무슨 전쟁을 치르듯이 베이킹소다와 비누로 다섯번이나 샤워를 했습니다. 그나마 효과가 있어 어느 정도 냄새가 제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스컹크 방귀가 닿은 옷은 냄새가 너무 지독해 입을 수 없어 버리고 그나마 유빈이가 아끼는 나이키코리아 후드티는 (유일하게 Korea라고 티에 적혀 있어 유빈이가 자랑스럽게 매일 입고 다녔던 티입니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엄마가 베이킹 소다와 식초등을 섞은 물에 여러번 불려 세탁을 하고 그래도 냄새가 전부 제거 되지 않아 아직도 집밖에 걸어두고 다시 입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한바탕 냄새 제거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스컹크 제거 특별전담반은 스컹크가 잡힌 덫을 처리할 방법을 모색중입니다. 누군가 담요를 덮으면 스컹크가 저녁인줄 알고 안심이 되어 괜찮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일을 실행하면서 덫에 걸린 스컹크를 절대 자극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다시 한번 스컹크의 신경을 건드리면 그때는 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담요를 덮는 사람은 다시 스컹크방귀를 맞을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긴 장대 끝에 담요를 달아 덫에 떨어뜨려 덮고 나르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 방법이 그나마 위험지수가 가장 낮아 실행하기로 하고 10미터 정도 되는 긴 장대와 담요를 가져왔습니다.  이번 특별전담반 구성원은 이미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이들이라 스컹크 제거 작전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긴 장대에 담요를  달아 내려 조심스럽게 덫을 덮고는 한 형제가 조심스럽게 트럭에 실었습니다.  스컹크를 태운 트럭은  스컹크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깊은 숲을 향해 우리 시야에서 아주 멀리 사라져 갔습니다.

 

 숨을 죽이고 이 일을 지켜보던 모두가 손에 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사라져가는 트럭을 보면서 우리 모두  한순간 ‘와’하고 다함께 함성을 질렸습니다. 이번 특별전담반의 스컹크 제거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스컹크 작전을 현장 가까이 와서 이일을 지켜보던 이들도 많았지만 추위 때문에 집 창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한편의 드라마를 보듯이 이것을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한 자매님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이것을 지켜보던 자기네 아이들에게 아주 놀랍고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오후 내내 스컹크 냄새와 치열한 싸움으로 지친 유빈이는 벌써 공동체 모두가 스컹크 사건을 알고 있어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놀릴거라며 저녁 식사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날 유빈이는 토요일 공동 저녁식사에 가지 않고 엄마와 함께 집에 머물렀습니다.

 

하키유빈-.JPG» 아이스하키를 하고있는 유빈이

 

 나는 큰 아이와 함께 저녁식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저녁식사 시간에 공동의 화제꺼리는 당연히 스컹크 냄새소동이었습니다. 유빈이 스컹크 스토리와 더불어 자기들이 경험한 스컹크 일화로 이야기의 꽃을 피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자기 아버지가 경험한 스컹크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그것을 프린트까지 해 주면서 유빈이에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특히 이 일을 가까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던 유빈이 친구 댄절은 친구를 격려하기위해 초코렛과 말린육포 그리고 ‘용기를 내라’는 내용이 담긴 카드를 써 가지고 집에 오기도 했습니다.

 

 저녁 만찬이 끝나자 한 자매님이 다가와 “그 놈의 냄새나는 스컹크를 잡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라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지난 6개월간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스컹크 냄새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유빈이가 처리했기 때문에 이 집에 사는 모두가 유빈이를 칭찬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유빈이를 칭찬하는 것을 보면서 오후 내내 몸도 마음도 고생이 심했던 아들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처음 유빈이가 나를 다급하게 부를 때에 유빈이가 스컹크를 잘 처리하겠지하고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주변 이웃에게 조언을 구해  유빈이에게 스컹크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신속하게  덫을 처리하도록 돕지 못한 제가 부끄러워 유빈이에게 용서를 구하고는 유빈이가 자랑스럽다고 말하자 유빈이는 수줍은 얼굴로 씩 웃어주었습니다.
 스컹크 소동은 유빈이가 Super Hero(슈퍼 영웅)이 아닌 Smelly Hero(냄새나는 영웅)이  된걸로 결말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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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jpg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던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 벽에 새겨있는 글이다.


1.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2.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3. 당신이 성공하게 되면 가짜 친구와 진짜 적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4. 오늘 당신이 착한 일을 해도 내일이면 사람들은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5. 정직하고 솔직하면 공격당하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살아라.


6. 사리사욕에 눈 먼 소인배들이 큰 뜻을 품은 훌륭한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


7. 몇 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탑을 쌓아라.


8.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덤빌 수도 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라.


9.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헌신해도 칭찬을 듣기는커녕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헌신하라.


10. 사람들은 약자에게 호의를 베푼다. 하지만 결국에는 힘 있는 사람 편에 선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분투하라.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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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당신이 선택할 것이 못 된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선택하는 일만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다.


           -요한 바에르

남의 흥미를 끌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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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흥미를 끌려고 생각한다면

 우선 자기가 진정으로 흥미를 느끼는 일이 필요하다.


              -존 몰리

최후의 치유,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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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지 변함없는 법칙이 있다.

 우리가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용서하지 않는 한, 어떤 치유도 없다는 것이다.


          -알란 패턴

큰스님이라고 부르지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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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는 세속의 이름 대신 법명을 부른다. 속명을 쓰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그러나 수행자도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법률을 따라야 한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에는 어김없이 ‘법인 스님’ 대신 ‘오형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 등지에서 ‘오형만 씨’라고 부르면 좀 낯설고 어색하다. 간혹 수행자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한 스님들은 그런 경우에 속명을 부르면 화를 내기도 한다(쯧쯧!).

 

속명과 법명을 달리 쓰는 일이 신경이 쓰이는 스님들은 간혹 속명을 법명으로 개명하기도 한다.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불교학자이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던 지관 스님이 그랬다. 내 도반 동출 스님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속명이 ‘이동출’인데 그 분의 스승께서 법명도 ‘동출’로 지었다. 동출 스님은 개명 신청 없이 저절로 주민등록증과 승려증의 이름이 같다. 감각이 돋보이는 법명도 있다. 무불 스님은 속성이 나 씨이다. 그래서 속성과 법명을 이어서 부르면 ‘나무불’이 된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 보살은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인데, ‘나무’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고 존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무불 스님의 경우는 수행하여 깨닫지 않아도 그 스님의 법명을 부르는 사람에게 부처의 반열로 귀의를 받는 셈이다. 그럼, 나는 속성이 오 씨이니 법명을 ‘법인’에서 ‘마이’로 개명할까? 그러면 ‘오마이 스님’이 된다. 오마이뉴스에서 좋아할지 모르겠다.


일이 있어 저자거리에 나가면 다소 황당한 경우를 경험한다. 병원과 백화점 같은 대형 매장이다. 십 여년 전,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인천에 있는 그 계통의 병원에서 이틀 간 검진을 받았다. 병원에서 주는 복장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각각의 장소에서 검진을 받는데 간호사들의 한결 같은 호칭은 ‘아버님’이었다. “아버님, 엑스레이 촬영하겠습니다. 아버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멈추세요. 네네, 아버님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요새 스마트폰 문자로 표현하자면 ㅋㅋㅋ... 이다. 옆에 있는 내 세속의 누이는 애써 웃음을 참는다. 검진실의 사람들은 승복을 입지 않고 환자복을 입은 내 형색을 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승복 복장을 확인한 접수실의 사람들도 한결 같이 내게 아버님으로 불렀다. 그 때 크게? 깨달았다. 아! 내 나이가 이제 아버님 반열에 들었구나. 얼마 전에 휴대전화를 새로이 구입하고자 해남읍에 있는 비교적 큰 매장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도 내게 “아버님, 필요한 게 있으세요?”라고 호칭한다. 자꾸 아버님, 아버님, 부르기에 웃으면서 아버님 호칭이 좀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다. 매장의 직원이 하는 말, “아버님, 뭐가 이상한가요?” ㅎㅎㅎ ... 그냥 고객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니,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이런 경우는 어떤 이모티콘을 써야 하나? 여튼 꽈당!이다. 그 때 씁쓸하게 웃고 말았지만 느낌도 씁쓸했다.

 

위에서 내로 온 지시에 따라 정해진 매뉴얼로 움직이는 세상이구나. 자본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는 본인들이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구나. 그리고 공적인 공간에서 그런 호칭을 사용하여 가족이라는 틀로 묶으려는 속내가 보여 씁쓸했다. 나는 아무 곳에서나 인정과 다정으로 묶으려는 그런 의도가 불편하다. 내 딸 같아서, 내 가족처럼, 이라는 호칭을 분위기와 맥락에 맞지 않게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버님, 어머님, 이모, 언니, 동생의 호칭이 정다운 곳도 있다. 내가 사는, 농협이 있는 삼산면에서는 직원과 고객이 서로 알고지내는 마을 분위기인지라 그런 호칭이 자연스럽다. 공사를 구분하면서도 다정스럽다. 맥락과 분위기가 이해되고 동의되면 그런 호칭은 친밀감을 준다).


절집에서 간혹 존칭이 주는 웃음꺼리도 생긴다. 오래 전 계룡산 신원사라는 절에 살고 있을 때다. 아침에 유선 전화 벨이 울렸다. 나이 든 목소리의 남자분이 거두절미하고 대뜸 사장님 좀 바꿔 달라고 한다. 그래서 “전화 잘못 하셨습니다. 여기 사장님은 안 계십니다.” 했더니, “ 아, 거기 신원사 절 아닌가유?” 한다. “네, 신원사 맞습니다” “신원사 맞구만유, 그러니께 신원사 사장님 좀 바꿔주시유” 그 절의 책임자인 ‘주지’라는 직책과 호칭을 모르니 나름대로 예우하여 사장님을 찾은 것이다.


내게 부여하는 호칭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일도 있다. 어느 도심 절에서 창사 10주년을 기념하여 법문을 해달라고 해서 법회 날짜에 맞춰 갔다. 그런데 그 절 인근에 현수막을 보고 정말이지 온몸에 이가 스며든 듯 몸에 반응이 왔다. “ 00사 창사 10주년 법인 큰스님 초청법회” 그 때 세속 나이가 42세였다. ‘큰’이라는 수식어는 이렇게 허세와 과욕을 벗고 겸손과 정직을 구현해야 할 산중에도 스며들었다. 그 뒤부터 어느 곳에서 법문이나 강의 요청이 오면 먼저 큰스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도록 당부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크게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고, 그럴 듯 하게 보이려는 호칭의 속내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장과 허세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근자에서 세속에서 호칭에 시비와 논란이 일고 있다. 도련님, 아가씨, 시아주버님 등 가족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 같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에서 나온 호칭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올바른 호칭은 단순히 호명의 차원이 아니라 존중과 평등의 관계 정립이 된다. 호칭은 때로는 아첨, 굴신, 모멸감을 안겨준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일 출신의 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 쉐핑(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은 무시 당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이름부터 지어주었다. 개똥이, 돌쇠, 삼월이, 언년이 대신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의 존엄과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 했다. 이름이 정당해야 관계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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