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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절친, 기세춘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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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특히 재야 동양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 기세춘(84) 선생이 그렇다. 그는 전봉준·이승만·박정희·김대중·신동엽·문익환·신영복 등 ‘인물 근현대사’를 관통했다. 3·1운동 백돌을 앞두고 그를 찾은 이유다. 지난 8일 대전정부종합청사 인근 아파트로 그를 찾았다. 그는 치매 초기인 두살 연상의 부인과 단둘이 살고있다. 거처는 현대식 아파트지만, 그는 어느때와 다름없이 한복차림의 선비풍이다. 거실엔 그가 번역 작업중인 3천쪽 분량의 <다산 주역> 등 고서뿐 아니라 신문 스크랩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공맹의 시대만이 아니라 현실을 사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숙소 겸 서재 벽면에 ‘學而時習’(학이시습)이란 글이 붙어있다. <논어> 첫구절로 신영복(1941~2016) 선생이 써준 글씨다. 신영복은 그와 뗄레야뗄수 없는 관계다. 기세춘은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1963년 동학혁명연구회를 발족시켜  초대회장을 맡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것에만 미쳐 우리것은 저열한 것으로 치부되자 동학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전봉준의 법정 심문기록인 ‘공초’를 독회하며 공부했다. 그런데 동학연구회 학술위원장을 맡았던 신영복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무려 22년을 복역했다. 기세춘은 밖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도 감옥에 있었다. 그런데도 신영복의 그의 저서에서 “기세춘형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또 신영복이 감옥에서 한문학과 서예를 사사받은 노촌 이구영이 자신이 설립한 이문학회에서 자기 뒤를 이으라는 요청에 신영복은 “나보다는 제대로 배운 기세춘 형이 맡아야한다”며 기세춘이 강연을 잇도록 했다. 또한 신영복은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다시 기세춘과 얽히지마라’는 주위의 강권을 물리치고, <중국역대시가선집> 4권의 방대한 저서를 기세춘과 공동으로 번역해 세상에 내놨다. 신영복과 기세춘을 이어준 것은 사상이나 이념이었을까. 기세춘은 “그게 아니라 선비정신”이라고 한다.

 

기세춘글-.jpg» 기세춘 선생은 <주역>의 대가이지만, 방문에 "점 칠 필요 없다. 오직 시대 소명에 따르면 된다"는 내용의 글을 써놓았다.

 기세춘은 고봉 기대승의 15대손이다. 고봉은 아버지벌인 퇴계 이황과 조선 성리학의 최고 논쟁인 사단칠정논쟁을 8년간 이끌었던 유학자였다. 기세춘의 큰할아버지는 구한말 호남의병대장이던 기삼연이다. 그의 조부인 기삼연의 동생 기동우는 전남 장성에서 전북 정읍 북면으로 이주해 서당 훈장을 했다. 그 때 정읍 이평면에선 전봉준이 서당 훈장을 했고, 강일순도 그 일대에서 서당 훈장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정읍은 고부군 소속이었는데, 고부군수가 탐관오리 조병갑이었다. 당시는 서당이 정보 소통 창구여서 그곳에서 혁명의 기운이 모아졌다고 한다.

 기세춘도 어려서부터 서당학동이었고, 10세에 사서삼경의 최후의 경전인 <주역>을 뗐다. 그러나 이땅의 현대사는 그를 유학도로서 외길을 걷게 두지않았다. 일제시대 많은 지식인들처럼 그의 부친도 좌익활동을 했다. 의병장 조상과 부친의 영향으로 그는 전주사범고 재학 때부터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의혈동지회를 결성할 정도로 일찍부터 ‘저항’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첫 교사부임지가 박정희와 김재규의 고향인 경북 선산이어서 그들의 인척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로 인해 육영수로부터 ‘성심여고에 다니는 딸(박근혜)의 결벽증을 어찌해야하느냐’는 자문을 받기도 했다. 그가 서울교육청을 거쳐 종로도서관에서 근무할때는 민주당 부대변인이던 김대중에게 당시 ‘금서’들을 몰래 대출해주는 창구 구실을 했다. 또 전주사범 선배이자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이 편집주간으로 있던 <교육평론>잡지에 취재부장으로 일하며 ‘일제의 아류 교육’을 비판하기도 했고, 사월혁명연구회를 창립해 혁명정신을 이어가는데 앞장섰다.

 인물만이 아니라 접한 종교도 다양했다. 유학도로 출발했지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할머니를 위해 부친이 마을에 세운 교회에 다녔고, 젊은시절엔 한때 입산에 산사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 사상 이념을 거쳐오면서 그는 “모든 종교와 경전과 인문학이 말하는 것은 하나”라고 한다. ‘서로 사이 좋게 살자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누구도 소외시키지않은 공동체성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전봉준집-.JPG» 동학혁명연구회를 창립한 기세춘이 고향 전북 정읍에 있는 전봉준 생가를 찾았을 때 모습이다.

 그는 뼈속부터 저항가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러나 아픈 개인사와 역사들이 공동체성을 일깨워준 것 아니냐고 말한다. ‘현대사에서 좌건 우건 어느 누구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승만의 친위대에 의해 두들겨맞은 좌익 부친의 아픔만 본것이 아니다. 한의사였던 외삼촌은 그 좌익들의 즉결처분으로 죽었다. 또 그의 큰누나는 위안부가 되지않으려 간도로 피신했다가 해방뒤 귀국하던 중 폭격으로 남편을 잃고, 순천에서 경찰을 만나 개가했으니 그도 여순사건으로 잃는 연속적인 비운을 맞았다.

 그가 공자식 혈연주의보다 좀더 폭넓은 사랑과 비폭력을 주창한 묵자를 들고나온 것도 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묵자에게서 마르크스의 평등과 예수의 사랑을 동시에 보았다고 했다.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서 기세춘과 옥중서신을 주고받아 <예수와 묵자>를 공저로 펴냈다.

 그는 우리의 가장 큰 병을 주체의식의 결여로 본다. 조선의 사대모화사상과 일제때의 친일과 해방후의 친미는 자기 것을 망각한채 온통 자기 정신을 빼앗겨버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제에 해방되고서도 군대만 다녀오면 온통 군대 얘기 밖에 안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 국민이 제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한 옛 조선의 영광을 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우리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기에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외래사상 하나에 정신이 팔리고 명분에만 휩싸여 다양한 가치와 창의성을 짓밟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신동엽이 가라던 껍데기는 실은 친일파나 우익만이 아니라 오직 명분에만 사로잡혀 다양성을 짓밟은 짓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것도 ‘만물이 더불어 살아가야할 운명공동체라는 자각인 천인합일을 주장하는 선비정신’이라고 했다. 그 ‘오래된 미래’인 선비 정신으로, 서로를 아프게 한 폭력과 분열 이전으로 되돌아가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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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하늘아래 땅위가 이 지구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는 천하에 효자는 없다.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아무리 효도를 한다고 해도, 부모님의 쏟아 부워 주신 사랑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될 정도로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하는 것에 1/100이라도 부모님께 정성을 다해도 우린 너무 쉽게 효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어머니께서 임종 직전에 호흡이 거칠어 지셨다. 턱밑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복받쳐서 눈물이 하염없이 났다. 그런 경황 중에도 정신을 차려 다행스럽게 "그만 아퍼 하시고 편히 가세요. 다음에 꼭 또 뵈요"라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정작 임종을 하시니 눈앞이 막막해서 억장이 무너졌다. 하늘인지 무너지는 고통이라는 천붕지통[天崩之痛]이란 말이 실감된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가오니 아픔 보다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효도할 수 있을 때는 안하거나 다음으로 미루고 나서는, 정작 효도할 기회나 시간도 안주시고 돌아가시니 원망스럽기 까지 하니 스스로 돌아봐도 마음이 참으로 못됐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마음이 아퍼 눈물이 흐른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는 아들이 죽자 너무 상심하여 실명까지 했다. 자식이 먼저 죽었다면 이런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아파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해 보며, 스스로를 위로할 정도로 세월은 정말 약인가 보다.

 

어머니께서도 생전에 막내 딸을 여의셨다. 상냥한 누나여서 참 친하게 지냈는데 덧없이 세상을 버리니 안타깝기만 했다. 어머니는 울다가 지쳐 쓰러져 상족들 방으로 모셨는데도 소리없이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때 그런 아픔을 전혀 실감을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이다. 직장에 다니는 조카가 간밤에 어머니[막내누나]를 보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계속 눈물이 나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새벽에 전화가 온다. 꿈속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어머니한테 달려가 껴안았는데 바로 꿈에서 깼다고 한다.

 

감정은 소중하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 장애를 느낀다. 어떤 느낌인지 알고 편하게 울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건강한 마음이다. 울 수 있을 때 한 없이 울면서 그 감정을 행복하게 누리라고 했다. 그리고 울음이 그치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매일 한가지 이상 선행을 하라고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나이도 불혹도 한참 지나 5학년이 되었다. 어머니를 만날 날이 그리 멀지 않다.

See you again!

 

이 글을 오늘 새벽 하염없이 울어준 사랑하는 조카에게 보낸다. 사진은 네팔 카투만두 한 사원에 계신 자비로운 부처님이다. 오늘 하루 돌아가신 어머니의 미소가 그리워질 것 같다.

현재의 생각이 미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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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jpg»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책의 그림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자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당신은 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해도 청년은 자신을 쥐라고 여겼습니다. 어느 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낸 의사는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맞아요, 당신은 쥐입니다.” 청년은 자신을 쥐라고 인정해 준 의사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데, 당신은 정말 대단한 의사군요!” 의사는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변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쥐가 아닙니다. 드디어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이제 완치되었다고 생각한 의사는 그를 퇴원시켰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청년은 공포에 몸을 떨며 다시 병원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밖에 고양이가 있습니다.”의사는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은 이제 쥐가 아닌 사람이라니까요. 더는 고양이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청년가 떨면서 대답했습니다. “저도 제가 변한 것을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 고양이도 그 사실을 알까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생각의 방향이 운명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어떤 생각을 하였느냐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 두 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유는 바다나 바람이 아닌 키의 방향 때문이듯이,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은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임스 알렌은 현재의 당신의 모습은 당신의 과거 생각의 결과이며, 미래의 당신의 모습은, 당신의 현재 생각의 결과이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항로는 생각의 방향에 따라 결정됩니다. 생각은 파장을 일으켜서 새로운 환경에 반응하고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세상은 생각한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은 살아있는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글북에 등장하는 모글리는 자신을 늑대라고 생각하고 늑대처럼 행동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떨어질지라도 생각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생각의 지평을 넓히면 인생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 바른 생각일까요? 뇌사를 하였어도 심장이 뛰고 있으면 아직 살았다고 말하는 것 같이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생각, 양자택일이 아닌 조화로운 생각, 산과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통합적인 생각, 한 곳에 머물러 정지되지 않고 역동적인 생각, 한 쪽 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로 보는 통찰하는 생각, 실패의 경험을 차곡차곡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비우는 생각입니다. 사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은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다분히 망각과 왜곡을 거쳐 온 편집된 주관적 객관화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자기 경험에 갇힌 생각이 아닌 내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미래가 암울할수록 앞길이 막힌 것 같을수록 생각은 열어야 합니다.

배 고픈건 참아도 배 아픈건 못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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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제 세계에서도 잘사는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비교하는 마음과 경쟁심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불행하게 잘 산다는 거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번뇌는 질투심 같아요.


저 역시 한국 사람인가 봐요.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렸을 때 100명이 ‘좋아요’ 하면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잘 알려진 어떤 스님이 글을 올리면 몇천 명이 ‘좋아요’ 해요. 금세 불행해집니다. 글이 얼마나 좋으면 그럴까 싶어 저도 한번 읽어 봅니다. ‘별거 아니네’ 하고 생각하면서 비판까지 해요. 질투심은 비판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남의 덕을 하찮게 여깁니다. 질투심이 생기는 거죠.


질투심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번뇌라고 합니다. 행복의 가장 큰 장애는 비교하는 마음이 아닐까 해요. 남의 공덕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불행해하죠. 이보다 천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악귀의 정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질투심은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숨은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명예욕이 많은 사람은 질투심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예욕이 심합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늘 시선이 바깥에 가 있는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Comparing(비교), Criticism(비판), Competition(경쟁), 3C입니다.


부처님은 남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찾으면 남의 허물을 봐줄 수 있습니다.


질투심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수희찬탄(함께 기뻐하는) 수행을 소개합니다. 질투심을 알아차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이 많아서 얼마나 좋을까. 수희찬탄합니다. 더욱 복이 많아지고 더욱 행복해지기를 함께 바랍니다.’ 남의 공덕을 함께 기뻐하면 그 공덕이 우리에게도 옵니다. 아주 쉽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뛰어난 방편입니다. 행복하거나 복이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행복을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면 우리도 행복합니다. 남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 되면 행복한 순간이 아주 많아집니다. 수희찬탄 수행은 어려움 없는, 시기 질투를 바로 없애는, 공덕자량을 한꺼번에 갖게 하는 너무나 훌륭한 수행입니다. 지금부터 잘나가는 사람, 돈 많은 사람, 예쁜 사람, 행복한 사람을 볼 때마다 수희찬탄해 보시겠어요? 잃을 것 없이 참된 행복의 원인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누가 작은 행복을 찾았으면 함께 기뻐할 만하죠. 행복은 같이 이루는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합니다.

종교계, 3·1절 일제히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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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와 개신교, 불교 종교계 대표들이었다. 각기 다른 종교인들이 민족의 자주 독립과 평화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100년 전 대동의 뜻을 모아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가 100돌을 맞은 3·1절 정오에 일제히 종을 함께 울리기로 했다. 전국의 모든 사찰과 교회, 성당, 교당, 향교 등에서 동시에 한 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소속 7대 종단 지도자들은 1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결의하고,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100년 전 국민 모두가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것 같이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가 그 정신의 계승자이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함께 번영하는 나라의 주인공”이라며 “3월1일 100주년에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저력을 보여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인 천주교 김희중 대주교와 공동회장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이홍정 목사,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원불교  교정원장 오도철 교무, 유교 김영근 성균관장, 천도교 이정희 교령,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박우균 회장 등이 참여했다.
 또 이용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강자 공동대표, 흥사단 류종열 이사장 등이 함께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선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이갑산 상임대표가 보수쪽 의견을 대표해 “지금까지 광화문의 촛불과 대한문의 태극기로 갈라져 행사를 열던 진보와 보수가 3·1절 당시처럼 모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경찰도 양쪽을 차벽으로 분리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7대 종단지도자들은 오는 20일 해외 종교지도자 및 역사학자 등 20애국 250명이 도라산전망대에서 세계종교인평화기도회를 열고 기도문을 낭독하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로 했다.

 각 종단별 행사도 이어진다. 천도교는 ‘3·1혁명과 천도교’학술대회를 열고, 불교는 ‘백용성-태극기의 사용과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세미나를 개최하며, 개신교는 3·1절 오전11시 ‘3·1운동 100주년 그리스도인 고백과 다짐’을 발표한다.

“사형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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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는 범죄인을 도덕적 반성과 개선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사회방위의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것입니다. 범죄인을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함으로써 사회를 보호하는 목적은 기본권을 보다 덜 제한하는 형벌인 종신형 또는 감형 없는 무기징역형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달성될 수 있습니다.” 


12일 오후 서울 안국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위원장인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대표)가 사형제도 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형제도를 폐지해야할 이유를 항변했다. 이 자리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배기현 주교도 함께해 충실한 심리를 헌법재판소에 호소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전국 성당에서 ‘사형폐지와 종신형 입법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해 현재 10만2517명이 서명했으며, 서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헌법소원의 청구 주체는 존속살해 혐의로 구속기소 돼 지난해 12월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제1형사부로부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ㄱ씨다. 천주교 인권위원장을 지내며 오랫동안 인권 변화를 해온 김형태 변호사가 ㄱ씨를 도와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과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지난해 ㄱ씨에 대한 판결 당시 법원은 ‘사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에 대해서는 “(사형은) 가장 강력한 범죄억지력을 가지고 있다”며 기각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변호사는 “모든 개인의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각  개인에게 그 생명은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며 “비록 타인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하고  훼손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또 “그동안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에 대해 거듭 합헌 결정을 했으나 1996년 7대2, 2010년 5대4로 위헌 의견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헌법재판관 다수가 후보자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면서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국민여론사에서도 국민 3명중 2명이 ‘대체 형벌도입을 전제했을 때는 사형제도 폐지에 동의’했으니, 헌법재판소의 결단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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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란 말을 남기고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10주기 추모미사가 16일 오후2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됐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주례하고 한국 천주교 주교단 및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 오늘 미사에는 사제, 수도자, 정관계 인사, 일반 신자 3,000여 명이 참석해 함께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했다.

 염 추기경은 추모 미사 강론에서, “오늘 이 자리는 그저 그분을 추억하는 자리가 아니다”며,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과 도전이 있겠지만, 추기경님께서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하는 메시지를 통해 남기신 사랑과 감사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도 살아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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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은 김용삼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김 추기경을 기렸다.
 문 대통령은 추모사에서 “김 추기경님은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셨지만, 우리는 추기경님을 통해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사랑을 전한 예수님을 보았다”며, “오늘 추기경님께 지혜를 물을 수 있다면, 변함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라’고 하실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대화하겠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역지사지할 때, 전 세계도 평화의 길을 지지하고 도와줄 것이다. 추기경님께서도 하늘에서 계속 기도해 주실 것”이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독재정권 탄압 속에서 추기경님은 불의한 권력에 맞선 젊은이들을보호해주셨다”며 “저도 추기경님과 인연이 깊은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하면서 불의와 타협하거나 힘과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배웠다”고 말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님은 한국의 가난하고 불의한 역사와 묵묵히 함께하셨다”며 “정치적으로는 장기독재 정권을 계획하는 정부에 대해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것인지 물으며 시대의 어른으로서 권력에 당당히 맞서셨다”고 회고했다.

 김 대주교는 “5.18에 대해서는 당신 생애에 가장 쓰라린 아픔을 준 비참한 역사의 한 사건이라며 슬픔을 감추시지 않았다”며 “근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모욕적이고 반역사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신다면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떤 심정이시며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실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교황청대사인 슈에레브 대주교는 추모사를 통해, “먼저 기쁜 마음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격려와 특별한 인사를 전한다. 특히 교황님께서는 김 추기경이 보편 교회와 이 땅의 민주화 역사에 영혼의 참된 목자로서 기여하신 특별한 역할을 상기하셨다”며 “김수환 추기경의 전구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 땅의 지속적인 평화와 확고부동한 화해의 여정에 함께해 주시기를 빈다”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3.jpg» 1974년 7월23일 옛 중앙정보부로부터 소환을 통보받은 당시 천주교 원주대교구장 지학순 주교(맨 왼쪽)가

 미사 예물 봉헌 시간에는 ‘0216 이음’ 캠페인 모금액을 봉헌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0216 이음’ 캠페인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일인 2월 16일을 기억하며 재단 법인 바보의 나눔에서 3회째 진행하고 있는 특별 모금 캠페인으로, 지난 2018년 11월 19일부터 진행된 이번 모금에는 총 418명이 39,105,996원을 기부했으며, 이 금액은 전액 의료 복지의 사각 지대에 있는 다문화 가족과 이주 노동자들의 치료비로 사용될 예정이다.

 한편,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0주년을 맞아 김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가 세상을 향해 지녔던 지향과 정신을 이 시대에 다시 한번 구현하기위해 추모사진전과 유품전시회, 기념음악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이날 김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구미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도 추모 미사와 기념행사가 진행됐다.
 1922년 대구에서 출생한 김 추기경은 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1969년에는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당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중 최연소였다.
 김 추기경은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인사들과 핍박받던 노동자들을 명동성당에서 보호해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일컬어지게 했다. 김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각막을 기증하고 선종하자 40여만명이 조문했고, 장기기증이 급증하기도 했다.

3·1운동 남북공동유적조사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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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북한에 3·1운동 유적 조사를 비롯한 3·1운동 관련 남북공동사업을 제안했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3·1운동 100주년 사업이 1회성 행사에 치중되어있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지지않고 있다”면서 남북유적조사와 함께 3·1운동기념관 건립과 3·1 특별법 제정을 통해 3·1운동의 정신을 미래 100년을 여는 구심점이 되도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추진위 상임대표인 박남수 전 천도교교령과 평화재단 이사장 법륜스님, 박경조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 김대선 원불교 전 평양교구장, 박인주 전 흥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단체는 종교계와 시민단체 민간 주도로 5년전 발족돼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해왔다.

 추진위는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했던 서울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월1일 오후 2시에 기념식과 기념공연을 갖고, 기미독립선언서의 골자인 ‘자유, 평화, 상생’의 내용을 담은 ‘3·1운동100주년 선언문’을 발표한다.

  박남수 위원장은 “3·1운동 때 개신교와 불교, 천도교가 손을 잡고 비폭력 평화 독립을 선언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면서 “대의를 위해서는 누구를 배척하거나 견제하지않고 하나 된 3·1 정신으로 한반도 평화 노력의 기폭제로 삼기위한 후속작업들을 이어가야한다”고 밝혔다.
 박위원장은 이어 “3·1운동 당시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의 교세중 3분2의 북쪽에 있었고, 개신교 중추였던 평안도 남강 이승훈과 천도교의 중추였던 함경도 최린 등을 중심으로 북쪽에서 준비가 더 철저히 이뤄져 3월1일 당일 남쪽에서는 서울에서만 만세운동이 일어났던데 반해 북쪽에서는 평양, 진남포, 함흥 등 6곳에서 일어날만큼 거셌으나 유적 등의 조사가 남녁에 비해 미흡해 체계적인 공동조사가 필요하다”도 말했다.

 법륜 스님은 “3·1운동은 국민통합의 정신을 보여줬지만, 남북이 분단되고, 진보와 보수 등으로 나뉘어 미완으로 남겨졌다”며 “새로 만드는 대한민국은 3·1정신을 바탕으로 해 자주 독립 평화를 중심으로 국민합의에 의한, 국민통합의 국가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자가 ‘3·1운동과 한일관계’에 대해 묻자 법륜 스님은 “3·1독립선언서의 정신은 일본에 대한 원한을 갖고 한일관계를 풀려는게 아니고 억압하고 병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이를 시정하기 위함이니, 진실을 밝히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함께 가자는 것이니 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일본 지도층도 전향적인 자세로 임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박경조 전 한국기독교회협의회 회장도 “지금까지 양심적인 일본 종교인들이 방한해 개인적으로 반성하고 사죄했으나, 개인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반성이 있다면 뗄레야 뗄수 없는 이웃국가로서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왜 그리 자신을 고통속에 방치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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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9-.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아내에게 의견도 말하고 고집도 부려 보세요


내 삶의 주인 되기 사사건건 짜증 내는 아내에 주눅 든 남편 “어찌하면 아내 맘 돌릴 수 있나요?”
Q. 저는 올해 딸아이를 시집보냈습니다. 문제는 결혼 전부터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내가 엄청난 짜증을 내는데, 집안이 살얼음판이고 모든 식구가 괴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아내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고, 친정이나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는 이미 끊어진 지 오래여서 친정과 시댁 제사는 물론 집안 대소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습니다.

딸아이는 공공연히 “엄마로부터 탈출”을 외쳤고, 급히 결혼하느라 아내의 꿈인 임용시험도 접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무한 책임을 지는 남편의 자세를 요구받고 있으며, 무엇을 하든 간에 잔소리와 짜증, 욱하는 성격, 눈물 등 모든 것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내는 작은 것에 짜증을 내며, 자기 기대치에 부합하는 답이 아니면 화부터 냅니다. “남자가 먼저 알아서 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그것이 어렵습니다. 가령 딸에게 전화를 했냐고 해서 했다고 하면 “왜 했느냐?”에서 시작해 “무슨 말을 했느냐?”며 점검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속을 몰라준다고 구박합니다. 전화를 안 했으면 또 “왜 전화도 안 했느냐?”며 짜증을 내는데,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딸에게 보낸 문자도 들여다보는데, 무슨 독재 시절에 서신 검열을 당하는 기분입니다. 어떤 일을 해도 자신이 없고 마음이 위축되어 그냥 회피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아내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 말고는 일상적 대화는 끊어졌고, 작은딸은 아내와 사소한 충돌이 있은 뒤로는 직장일을 핑계 대며 며칠에 한 번 늦게 집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술 담배도 안 하며, 친구와 교류도 특별한 취미도 없고, 다만 직장에 오래 있다가 집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출근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내에게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하나요? 아내의 힘든 마음을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을까요? 제가 모르는 제 성격의 부족함이 있으리라 봅니다. 김상준

 

A. 힘들어하시면서도 어떻게든 아내를 이해하려고 고민하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글을 읽어 보니 아내분은 가족관계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공격적인 태도를 갖고 있네요. 김상준님은 그런 아내의 공격에 대해 참는 것으로, 그리고 아내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는 방식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하셨던 것 같습니다. 참는 것은 사실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저는 김상준님이 아내를 이해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아내의 그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참으셨나요? 집에서 잠만 자는 생활은 또 얼마나 삭막했을까요?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얼마나 긴장하셨을까요?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친구도 취미도 없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하셨는데 어떻게 괴로움을 달래셨나요?  


저는 또 묻고 싶습니다. 왜 그토록 자신을 고통 속에 방치하셨나요? 왜 아내의 무한 책임 요구에 일찌감치 선을 긋지 않으셨나요? 당신은 왜, 그녀가 그토록 마음대로 분노와 짜증을 표현하도록 놔두셨나요? 딸과 아버지 사이의 문자 내용을 아내가 함부로 보도록 허락하신 이유는요? 아내의 요구를 왜 무조건 들어주셨나요? 어떤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돌아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감동하고 또 무엇에 분노하는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는 무엇이 약점이고 무엇인 강점인지,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됐는지 등등 자신에 대해 최대한 많은 생각을 해 보세요.  

 

취미활동을 찾아 해 보시고, 재미있게 읽거나 들을 만한 책과 강의, 또는 텔레비전 드라마, 교양프로그램도 자주 보세요. 끌리는 것들을 보고 거기서 자신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지 경험해 보세요. 이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느끼고 경험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아내와 건강하게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무조건 상대에게 맞춰 주려고 하면 상대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점점 더 당신의 영토를 빼앗으려 할 겁니다. 내 영역, 내 영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면 관계는 성립되지 않아요. 내가 없는 관계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또 다른 한 가지는 부부관계에서 왜 그토록 참고 피하셨는지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가족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는다고 해서 평화가 유지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 세월 동안 아프게 느끼셨을 겁니다. 혹시 우울증이 있었거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나요? 그런 죄책감 때문에 상대의 행동을 무조건 허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성들이 침묵하거나 참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남성들의 심리도 여기에 한몫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상준님의 경우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도록, 어른이 되기를 요구받고 있네요. 어떻게든 가족의 어른으로서 절반의 책임을 지셔야 할 때입니다. 따님들이 엄마 때문에 고통받는 것 같은데, 사실 거기에는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한 아빠의 책임도 있습니다. 딸들이 지금은 엄마를 미워하고 있겠지만 더 깊은 마음의 층에는 무력한 아빠에 대한 원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힘드시겠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세요.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아내에게 얘기하세요. 괴롭고 힘들었다고 고백하십시오. 아내가, 그러는 당신은 뭐가 잘났는데라고 하거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양반이라고 따지면, 그 이유를 들어 보고 미안했다고 앞으로는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당신의 의견을 말하고 고집도 부려 보세요. 아내가 강요해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마세요. 그보다는 다른 방법이 좋지 않겠느냐고 대안을 제시하세요. 고집을 부리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사과하고 고치면 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 달라 하고 고마워하세요. 아내가 님을 비난하고 괴롭히면 방어하고 화를 내셔도 됩니다. 그 대신 아내가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면 듬뿍 칭찬해 주세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교류이고, 건강한 상호작용입니다. 실수와 갈등, 불화를 감내하면서 시도하고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 말이지요. 어쩌면 당신의 아내는 이런 살아 있는 관계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을 쌓으면 경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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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jpg» 연극 퇴계연가

 

차가운 겨울 이른 아침의 청냉함을 코끝으로 맞으며 안동댐 호반길을 따라 도산서원(도산서당 포함)으로 향했다.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단체가 주관하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답사팀과 종가(宗家)순례 일정을 함께 한 덕분이다. 이 지역에 처가가 있는 어떤 회원의 오랜 활동으로 친분은 물론 문중의 기여도 덕분에 답사객이 아니라 손님으로써 환대와 아울러 비공개구역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후한 접대문화인 접빈객(接賓客)’은 말할 것도 없고 사당까지 참배하는 봉제사(奉祭祀)’라는 종가의 양대문화를 두루 누렸다.

 

도산서당을 지을 때 승려들의 기여도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10여년 전 인근에 있는 용수사(龍壽寺)를 찾았을 때 이미 들은 바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은 20세 때 용수사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한 인연으로 절집과 친분이 두터웠다. 제자와 후손들을 수시로 용수사로 보내 책 읽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번에 그런 흔적까지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인연을 만난 것이다.

 

도산-.jpg» 퇴계 이황의 유적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안의 완락재(玩樂齋)라는 공간 옆에 부엌을 끼고있는 아주 작은 방에는 정일(淨一)스님이 머물렀다고 한다. 스님은 이 집의 실질적 준공자다. 먼저 목수인 동시에 기와장인(匠人)인 스승 법연(法蓮)스님이 도편수 직책을 맡아 공사를 시작했다. 일의 순서상 기와굽는 일이 우선이었다. 재정이 부족하면 경주까지 가서 기금을 모아올 만큼 적극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본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병으로 입적했다. 제자인 정일(淨一)스님이 그 뒤를 이어받아 5년만에 완공(1561)할 수 있었다.

 

그 때 건축주인 퇴계선생의 설계도를 존중해달라는 당부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이후의 용도까지 고려하여 임의로 마루방을 넓히는 일부 설계변경을 했다. 건축가와 건축주의 이심전심 합의였다. 뒷날 그 마루도 좁았던지 한강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선생이 마루 한 칸을 더 달아냈다고 한다. 하기야 서당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이다. 가정집이 아니라 학교다. 공공건축의 노하우는 당시에 절집목수가 최고임을 알았기 때문에 전문가를 존중하는 묵인이었던 셈이다. 원칙과 실용성을 겸비한 마음씀씀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낙성 후에도 정일스님은 안살림까지 일정부분 맡았다. 서당이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절집인 까닭에 공양주(주방 책임자)로써 지역사회의 학동들을 뒷바라지 했다. 혹여 스님이 출타할 경우에는 학생을 받지도 못하고 때로는 집으로 보내야 할 만큼 기여도가 높았다. 유생과 승려가 함께 한 공간이라는 또다른 의미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신은 삶 자체가 소박하고 검소했다. 사당의 위패도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 다섯 글자였다. 이름을 제외한다면 두 글자 뿐이다. 묘소의 비석도 마찬가지다. 앞에 붙은 수식어는 퇴도만은(退陶晩隱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에 영원히 숨은 곳)’이라는 4글자였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했던가. 지나친 예우가 오히려 실례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장황한 수식어 때문에 오히려 주인공의 본래이름이 묻혀버리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법정(1832~2010)스님 위패는 절집에서 관례적으로 이름 앞에 붙이는 10자 이상되는 모든 수식어를 생략하고 비구 법정이라는 단 4글자만 썼다. 그 자체가 무소유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어 모두에게 적잖은 울림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에도 (退)’에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머물던 자리가 현재의 지명대로 한다면 도산면(陶山面)이며 동네이름은 토계리(兎溪里). 계곡을 따라 토끼가 다닐만큼 작은 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토계는 자연스럽게 퇴계가 되었다.

 

묘소참배를 마친 후 선생의 태실이 있는 노송정(老松亭)을 찾았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은 단종임금께서 타의로 퇴위한 이후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를 선택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를 안다는 의미를 빌어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하였다. 소나무를 대신한 향나무가 엄청난 넓이의 그늘을 자랑하며 집 입구마당 한 켠을 뒤덮고 있다.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이 아니라 반향(盤香)이 당신의 뜻을 오늘까지 말없이 전한다. 노송정 종가 뒤편에는 조상들의 묘소관리를 위한 재실인 수곡암(樹谷庵)을 건립했다. 기문(記文)에 의하면 용수사 설희(雪熙)스님이 수곡암을 지었다고 한다. 동당에는 유생이 거주했고 서당에는 설희스님이 거처했다. 종가에서 선물받은퇴계선생 일대기(권오봉 저)에는 고맙게도 이런 부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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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이창건 어른께서 종가해설사 역할을 했다. 햇살이 가득한 넓은 마루에 일행들이 길게 걸터앉아 명문가의 내력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설명을 하다말고 필자와 눈을 맞추면서 자애로운 미소와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는 처음 노송정 집자리를 잡아준 사람이 승려였기 때문이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선배스님의 공덕을 함께 칭송했다.

 

이계양은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있는 은거명당인 경북 봉화에서 훈도(訓導 향교 교육을 담당한 교관)를 지내며 소일했다. 어느 날 안동으로 오다가 고개길인 신라재에서 쓰러져 있는 노승을 발견하고는 정성을 다해 구호했다. 노승이 은혜를 갚고자 좋은 집터를 잡아준 것이 현재의 자리라고 한다. 이후 가문은 날로 번성하였다. 손자인 퇴계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퇴계선생의 탄생에서 별세이후 흔적을 답사하며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덕을 쌓는 집안에는 좋은 일이 많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름없는 평범한 노승을 구해준 적선의 씨앗이 명문가를 이루었고 이후 유가(儒家)와 불가(佛家)가 서로 교류하면서 한 차원 더 높은 지역문화를 꽃피웠다. 이후 지역의 절집(봉정사)201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서원(도산서원 병산서원) 역시 2019년 등록예정이라는 큰 경사의 밀알이 된 것이다.

 

너무 죄의식을 갖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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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은 일부 신학자들이 심리치료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중 하나입니다.
자존감을 중요시 하면 교만해진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반해 심리치료에서는 병적인 죄책감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합니다. 인간 정신의 건강함은 자존감에 달려있는데 지나친 죄책감이 자존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요.
 

일부 보수적 신학자들은 인간의 죄로 인해 주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무슨 자존감이냐고 날을 세우고 심리치료사들은 왜 교회가 신자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신경증에 걸리게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평행선을 달릴 것 같은 이 두가지 이론은 사실 서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강도입니다. 자아강도가 약한 사람들은 부모에게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에게 죄의식은 독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가뜩이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시달리며 사는데 거기다가 주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돌덩이를 얹으면 우울의 늪에 가라앉아버립니다.


그래서 신경증인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과 보살핌에 대해서만 묵상하고 무너진 자아를 일으키고 보수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심리치료에서 죄의식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건강한 죄의식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깊은 숙고를 해주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존감 자신감이 회복된 사람들은 눈을 들어 세상의 존재성을 보라는 것이 죄의식의 진정한 의미란 것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분들이 신경증적 상태에서 살아가시기에 종교인들이 신자분들에게 무작정 주님께 지은 죄를 깊이 반성하자고ㅡ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종교인들은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행복을 가르치셨는데 왜 수난과 죽음에만 집착하는지
자기 신앙의 편향성에 대해 깊은 숙고와 심리분석을 받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과 시인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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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JPG» 20일 제1회선시포럼이 열린 대흥사 경내에서 월남사 주지 법화 스님과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 황지우 시인(왼족부터)

 

‘개구리 한마리 풍덩’과 같은 간결한 일본의 하이쿠는 동아시아 정신의 응결체로 서구의 격찬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하이쿠에 영향을 미친 원조인 우리나라의 선시(禪詩)는 진흙밭이 묻혀 있었다. 20일 땅끝인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진흙에 묻힌 진주를 꺼냈다. ‘제1회 한국선시문학포럼’에서였다. 대흥사는 ‘80년 전에는 내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선시를 남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미 서산의 시에까지 영향을 미친 고려말 선승 진각혜심(1178~1234)은 대흥사 말사인 월출산 월남사에서 선풍을 휘날리며 수많은 선시를 남겼다. 또한 조선조말엔 대흥사 일지암을 중심으로 다성 초의선사와 강진에 유배온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이 교유해 남도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곳이다. 마음에 스파크를 일으켜 전율케하는 선시를 통해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는 이들을 포럼 현장에서 만났다.
 

학담-.JPG» 제1회선시문학포럼에서 발표 중인 학담스님


 남도 르네상스의 매개체로 ’선시’가 떠오른 것은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과 황지우 시인의 만남에서 의해서였다. 해남이 고향인 황 시인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거쳐 교수직을 정년 퇴직한 지난해 8월부터 낙향을 준비하면서 일지암에서 방한칸을 빌려 묵었다. 5권의 시집을 냈으나 20년 동안 시를 쓰지못했던 그는 일지암에서 다시 시안이 열려 24개의 시를 탈고했다. 애초 <게눈속에 핀 연꽃>과 <나는 너다>처럼 선시풍의 시를 썼던 황시인은 일지암에서 진각혜심과 소요태능의 선시를 읽고 감전된 듯했다고 했다. 특히 진각혜심의 시로 후에 서산에 의해 인용되었던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붉게 타오르는 화로에 한 점 눈이로다) 대목에서였다. 이에 법인스님과 차담을 나누며 ‘선시’를 되살려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이번 선시포럼의 제목이 ‘마음의 피뢰침’. 이기적 욕망만이 지배해 벼락 맞아 마땅한 세상에 선시로 피뢰침을 꼿아보자는 것이다.

 

월남사-.jpg» 진각혜심선사가 주석하며 선풍을 휘날리며 선시를 남긴 전남 강진 월출산 월남사

 이 일대야말로 선시 1번지가 되기에 적격이었다. 더구나 법인 스님이 7년 전 일지암 암주로 온 뒤부터 일지암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조계종 승려들의 교육을 하는 교육원 교육부장과 실상사 화림원 원장을 지내고 불교를 넘어 넓게 사귀어온 그는 종교와 나이는 넘어 어울린 초의-다산-추사의 교류장을 되살리기엔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그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답게 민초들의 아픔을 멀리한채 산사에서 음풍농월만 하는 것을 비판하며 농사철이면 들판에 내려가 농민들이 감자를 캐거나 김장배추를 뽑는 현장에 울력을 자청해 비지땀을 흘렸다. 그리고 매달 농민들과 함께 일지암이나 들판의 비닐하우스 안에서 음악회를 열어 지역민들과 어울렸다. 얼마전엔 울력 품삵 대신 농민이 보내준 몇통의 김장김치를 서울에서 성매매여성들과 그 자녀들과 살아가는 자립지지공동체 김미령 대표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진각혜심의 선시 가운데도 민초들의 아픔과 애민을 노래한 게 4편이 전해진다”며 르네상스를 지역의 민초들과 함께 꽃피울 의지를 내보였다.

 

차담-.jpg» 19일 전남 강진 월출산 월남사와 백운동별서 등을 둘러보고 해남 대흥사에 돌아와 법인 스님과 함께 차담을 나누고 있는 문인들

 특히 진각혜심의 월남사엔 법인스님의 제자벌인 법화 스님이 자리잡고 여민동락하면서, 그곳을 선시의 본가로 만들어보겠다고 나서고있다. 월남사가 있는 월남마을은 월출산의 기암괴석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인데 보물 3층석탑이 있어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더구나 인근엔 호남의 3대정원의 하나인 백운동별서와 다산초당, 무위사 등 옛선인들이 교유하던 장소와 차밭이 어우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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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포럼에 참석한 문인들도 전날 도착해 이곳들을 둘러보고  빼어난 정신세계와 경치의 조화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포럼엔 선교를 넘나들며 대작을 내놓았던 학담 스님과 박규리·김명인·최승호·차창룡(등명스님)·고영섭·이은봉시인, 하응백·권희철 문학평론가, 차차석 불교철학자 등이 참석해 선시 야단법석을 펼쳤다.

 진각혜심과 동향인 화순에 혜심원이란 절을 세우기도 했던 학담 스님은 “진각선사는 세계의 실상에 대한 참된 자기물음을 갖게 해 간화선의 사구화를 벗어나게 했다”고 말했다. 사찰에 10년간 머물며 시를 써 ‘공양주시인’으로 불렸던 박규리 시인은 “선시를 이해하는 관건은 ‘시의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이해’에 있다”고 밝혔다. 선시를 김명인 시인은 ‘정신계의 섬광’으로 표현했다. 진각혜심의 선시에 대해서 최승호 시인은 ‘벌거벗은 허공’으로, 차창룡시인은 “복잡함의 단순화’로 설명했다.
 법인 스님은 “깨달음의 시구로 이 시대 마음의 장벽을 걷어내는 선시포럼과 축제를 월남사를 중심으로 매년 2차례 가량 열겠다”고 말했다.

천주교 일제시대 독립운동 탄압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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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jpg» ▲황해도에서 안중근과 함께 선교했던 빌렘신부가 루쉰감옥에서 안중근을 면회하는 모습.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미를 처단하자 안중근의 천주교 신자자격을 박탈한 뮈텔주교는 이 면회를 한 빌렘신부도 처벌했다.

 

한국 천주교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과거사를 참회하고 사과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20일 발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통해 “백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 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고 밝혔다.
 김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말했다.
 

김희중.jpg»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 한국 천주교가 일제 강점기의 천주교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천주교는 2000년 ‘쇄신과 화해’라는 과거사 반성문을 발표했지만 포괄적인 형식을 취했다.
 천주교는 1919년 당시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명은 천도교(15명), 기독교(16명), 불교(2명) 인사들만으로 구성됐다.

 김 대주교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며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침묵과 제재에도, 개인의 양심과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천주교인들도 기억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이는 한국 천주교회의 지난 잘못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좌절에도 쓰러지지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그들을 본받고 따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우리는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로의 다름이 차별과 배척이 아닌 대화의 출발점이 되는 세상, 전쟁의 부재를 넘어 진정한 참회와 용서로써 화해를 이루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를 반성하고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 한반도에 참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뮈텔.jpg» 구한말과 일제시대 43년간 한국 천주교 최고 수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

 구한말과 일제시대 때 43년간 한국 가톨릭 수장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뮈텔 주교(1854~1933)는 1919년 3·1운동 직후 서울 용산 대신학생들을 만나고 난 뒤 쓴 일기에서 “한국 학생들은 나를 붙잡고 그들의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설명하려 했다. 어떤 학생들은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고 적었다. 뮈텔은 또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한 문서에서 “선의의 소수 애국자를 제외하면 자칭 ‘의병’들의 대부분은 약탈자이거나 산적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적었다.

 이 때문에 3·1운동 뒤 상해임시정부에선 내무총장 이동녕의 명의로 천주교인들에게만 보내는 ‘천주교 동포여’라는 공포문에서 “전 한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며 자유를 부르짖을 때 어찌 30만 천주교 동포의 소리는 없느냐”고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뮈텔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해 종부성사(죽기 전에 주는 천주교 의식)마저 거부하고,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는 사실을 일제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1911년 1월11일 일기)하는 등의 친일 행적을 보였다. 2010년 ‘안중근의사 순국 100돌 추모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뮈텔주교의 안중근 관련 행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건강 재산 직장을 잃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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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황금 돼지해라고 잔뜩 기대를 걸었으나 연초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지독한 몸살 감기다. 코와 귀가 모두 막히고, 침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목에서는 고통이 심했다. 코가 막히면 산소 공급이 제대로 안 되니 두통은 계속되고, 입과 입술은 오랜 가뭄 뒤의 논밭처럼 쩍쩍 말라갔다. 그동안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스승이 있어, 그것을 잃어보아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문장이 떠오르는 악몽 같은 며칠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스승이란 재산, 직장, 그리고 건강을 잃었을 때를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봐야 진정한 자기 자신과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 초반부터 나는 그 세 명의 스승 가운데 한 명과 만난 것이다.


아프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잠시 정지 상태가 된다. 한동안 외면했던 나 자신을 바라보고,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는 좀처럼 돌아보기 힘든 시간이다. 그동안 자유직업인으로 살면서 내 힘의 끝까지 도전해보겠다고 했지만, 내 육체적 능력의 한계, 더 나아가 인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왔던 것은 아닌지 눈을 돌리게 된다. 가끔 이런 문자를 보냈던 후배들이 생각난다.

 

“선배, 언제 저녁 한번 사주세요!”

그 행간의 의미를 안다. 여기서 밥은 위의 공복감을 채워주는 단순한 한 끼의 음식이 아니다. 저녁 사달라는 말과 술 한잔하고 싶다는 제안은 곧 ‘제가 요즘 힘들어요!’라는 말의 동의어일 테니까. 사람 관계와 의사소통에도 적절한 타이밍이란 것이 존재하여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 힘들 때 나누는 밥 한 끼와 차 한 잔은 평범할 때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다. 도무지 승복하기 힘든 직장 내의 인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조직의 장래가 암담하게 보이는 날이면 조용히 사무실 구석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구조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40~50대 직장인이 세 명 이상 모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화의 주제가 뭔지 아세요? 그것은 ‘도대체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란 질문입니다. 그냥 답답해요.”

 

그렇다. 요즘 직장인들의 마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답답함, 그것이다. 누구나 가끔 불안한 미래와 마주 앉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중년의 아픔은 쉽사리 드러내고 말하기 어렵다. 자기의 삶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시선은 멀리 향하는 법이다. 가끔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자리가 실제 이상으로 커 보일 때도 있다. 혹시나 그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실제 이상으로 미화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글과 강연을 통해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나는 자칭 ‘글로생활자’라 명명해왔다. 낭만적인 어감을 가진 ‘글’과 매우 현실적인 ‘생활자’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뤄진 조어(造語)다. 나는 생활이라는 후자에 방점을 찍었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글이라는 전자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듯싶다. 어감이 낭만적이기는 하여도 실상은 날마다 막노동으로 연명하는 ‘근로자’ 못지않게 고단한 삶이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고 있지만 나에게는 예외다.

 

새벽 3시 원고를 쓰다 붉은 코피를 흘리기도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휴지통에 휴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몸에는 두꺼운 담요를 두른 채 쓰고 있다.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몸이 아프면 잠시 병가를 내고 쉴 수 있지만 글로생활자는 그럴 수가 없다. 글로생활자에게 글을 실어줄 매체란 존재의 근거다. 영어의 ‘데드라인’이란 말이 그러하듯 마감 시간은 직업의 생과 사를 가르는 선과 같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의 중환자실 한 모퉁이에서도 노트북을 두드려야 했으며, 입대한 아들의 외출 면회하러 간 날에도 글을 써야 했다. 그게 엄정한 현실이다.

 

화려해 보이는 것과 달리 강연자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경우 강연자로서 내 업(일)의 본질은 지식, 경험, 기술, 정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감성노동자다. 강연과 강의를 듣는 청중과 수강생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먼저다. 만약 강연장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그것은 마음과 귀가 닫혔다는 의미다.

 

소통, 공감, 리더십,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지만 실제로 작동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많은 기관에 가보면 기관장이나 책임자의 언어가 현장에서는 다르게 이해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어는 상상력이 상상력을 부르고,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그럴 때 강연자로서 내 역할은 통역이다. 그것은 외국어 통역보다 더 어렵다. 공감해주고 감정을 통역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 정신없이 즐겁게 떠들 때도 정신의 피뢰침을 잔뜩 곤두세운다. 글감을 찾고 강연의 주제를 얻기 위해서다.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고독한 표범처럼 지내야 한다. 가끔은 자신을 주변과 완전히 고립시킬 필요도 있다.

 

직장인들의 삶이 고달프지만, 프리랜서의 삶은 몇 배 더 가혹하다. 그런데도 이 일을 왜 하는가? 내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글 쓰고 강연한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 일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가족을 위해, 나를 의지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내 일을 사랑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내일이 찾아온다.

죽음은 생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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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보는 삶


죽음이란 무엇인가? 孔子에게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아직 생에 대해서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 하셨다고 한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아무도 답해 줄 스승이 없는데도 질문하는 것은 그것이 삶에 대한 질문과 같기 때문에 우문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늘 질문하고 배워야 한다.


전생과 현생, 그리고 소멸 이후의 시공에는 문턱이 있다. 죽음이란 생의 이쪽과 저쪽의 시공간 사이에 있는 문이다. 한 생명이 언제 어떤 곳인지 모르는 시공으로부터 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 들어오면 출생이고 이승이고 문을 열고 다시 나가면 죽음이라 한다. 생이란 집은 좁아 사람으로 북적인다. 문을 열고 나가면 뜨락이고 마당인데 저승은 무한과 영원성의 시공이다. 무한하고 영원한지도 알 수 없으나 알 수 없음 자체가 무한이고 영원이란 말이다.


전생과 이승과 저승


출생 이전에 전생이 있었는지, 아니면 나 이전의 존재가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듯이 죽음 문턱 너머의 저승에 다음에 또 다른 어떤 문이 있는지도 모른다. 추석이 불가하다. 경험이 없는 초월적 영적, 이데아의 세계로 설명될 뿐인데. 확실한 진리 하나는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은 생과 사의 문을 열고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비밀을 알아냈다. 그것도 두가지를 알아냈다. 죽지 않으려면 첫째 죽음의 문이 열릴 때 문고리를 단단히 잡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숨쉬기를 잠시도 절대 멈추지 않고 숨을 쉬는 것이다.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죽는 순간까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이미 그런 고수들이 엄청 많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 문고리를 너무 단단히 잡고 집착하는 바람에 이미 다시 이쪽 문턱 너머로 돌아왔는데도 문고리를 쥐고 사는 것이다. 잡은 문고리에 손만 놓으면 문은 닫히고 이승의 방안으로 돌아오게 될텐데 죽어도 문고리를 놓지 않고 있다가 힘이 빠져 저절로 문턱에 걸쳐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생명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미 숨이 멎어버린 나를 살려내고자 누군가가 인공호흡을 열심히 시키고 있는데 조금만 힘을 내서 숨을 쉬면 살아날 것인데 시체처럼 늘어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울증과 정신분열과 실패에 좌절하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통과 두려움과 고통의 극한 감정인 죽음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삶이 재미없고 권태로운 시간으로, 의무감의 수행 때문에, 그리고 두려움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무감과 고독과 병고의 고통과 내 존재가 지워져버릴까 하는 고독감에 잡히면 행복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가 감정인데 그 감정들이 그토록 두려운 이유는 그 끝이 죽음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고 시체처럼 불감증으로 살면서도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루에도 무수히 문을 열고 닫고 들락거리며 사는데 문이 닫히면 죽음이고 문이 열리면 살아있는 거니까 죽음이란 부딪히면 순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고통스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낀다 해도 순간일 뿐이다.


죽음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울까? 죽음을 증언해 줄 사람이 없다. 산 사람 중에는 죽음을 경험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자들도 죽음에 가까운 체험인 것이지 진짜 죽음이라면 그것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임사체험자들은 죽음 가까이 가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도 힌트로 삼을 만은 하다.

 

부딪히면 순간일 뿐인 죽음


보나벤뚜라 성인은 죽음이 무엇인지, 정말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인지 아닌지, 죽기 전에 까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을 겪은 후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자에게는 고통도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것에 지례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인가?"가르쳤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려주는 이도 없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죽음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던가를 목격하면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번뇌와 고통과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하다.


죽음의 창문 이쪽에서 저쪽을 보는 것은 상상이지만 창문 저쪽에 나를 두고 지금 살고 있는 이쪽 내 생의 현실을 보는 것은 실화고 실제이기 때문에 죽음 이쪽의 삶,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죽음까지의 나의 삶과 행복을 지혜롭게 설계하고 용기있게 맞이하는 프로그램을 설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 살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죽음 아니겠는가?

 

죽음은 운명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죽음이란 것에는 얼굴이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어서 언제 어떻게 어떤 죽음이 찾아올지 전혀 감지할 수 없다.

오래 전 한 여름에 내 동창 신부 둘이서 겪은 일이 있다. 둘이서 여름휴가를 괌으로 가기로 약속해서 일요일 저녁 출발하는 대한항공 여객기 항공권을 어렵게 구했다. 신부들에게 주일은 매우 피곤한 하루다. 오후가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무 피곤하니 내일 출발로 바꾸어 보자고 합의가 되었다. 여행출발은 연기했고 항공권은 취소했다. 대신 좌석이 만석이라 대기중이던 누군가가 그 항공권 자리를 구했을 것이다. 이튼 날 새벽 그 대한항공기가 괌 공항에 착륙하다가 야산에 추락하여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그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나 죽음의 항공권을 예약했음이 분명하니까 죽었어야 할 내 친구 신부들이 앉았을 자리에 엉뚱한 어떤 사람이 대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참으로 우연이고 불행한 일이다. 운명이란 것이 있는 걸까? 생과 죽음이란 것이 운명으로 찾아오고 피하게 하는 걸까? 우연일까? 신의 장난일까?

 

죽음은 생의 동반자 이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하느님을 원망할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정비가 불량하거나 일기가 고약한 날의 항공기 운항은 그럴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고 이건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것보다는 죽음에는 순서도 없고 시공의 질서도 없는 죽음 자체가 혼돈이다. 죽음은 생과 늘 함께 동거하며 동행한다.


우리가 사는 방에서 문 하나만 열면 죽음이란 것을 각성할 뿐이다. 그로므로 내게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그냥 올 수 있다는 지식만으로 충분하다. 다만 그래서 살아있음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이란 것을 잊지 말고 나와 너의 사이좋음과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마을 노인들은 혼불이란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구네 집에서 혼불이 나간 것을 보았다는 말이 돌면 길어야 2~3일 안에 그 집의 노인이 돌아가시게 되는 것을 종종 보며 살았다. 노인들은 자신의 수의를 만들어 놓고 묘자리를 지정해 놓기도 하고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연과 창조질서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센서가 예민한 영성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영감이 접수되지 못해 혼불을 보지 못한다.


죽음의 운명은 언젠가 한번 나를 찾아올 것이니 오는 죽음을 거부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이 분명하다. 그럴 바에는 죽음을 친구로 여기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더 빨리 찾아오는 것도 아니니 혐오할 이유도 없다.


남의 덕 빌려면 내가 덕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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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82-2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김금화 씨가 23일 오전 5시 57분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1년 황해도 연백의 가난한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김씨는 천덕꾸러기로 자라다 열두 살대부터 무병(巫病)을 앓았다. 고인은 열네살에 시집을 갔다가 구박과 구타에 못이겨 2년만에 탈출하고, 17세에 외할머니이자 만신(萬神·여자 무당)인 김천일 씨에게 내림굿을 받고 무녀가 됐다. 그러나 일제와 6·25,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굿은 미신으로 치부돼 때론 경찰서에 끌려가고, 때론 총구의 협박을 받으면서 모진 세월을 견디면서도 굿을 이어갔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한 고인은 무교인 방수덕 씨와 인천과 경기도 이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65년 서울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는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해 ‘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연기상을 받으며 민속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미국 로스앤젤레스 녹스빌  국제박람회장에서 열린 친선공연에서 ‘철무리굿’을 선보여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특히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며 어장의 풍어(豊魚)를 기원하는 ‘서해안풍어제’로 유명했다. 고인은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로 인정됐다. 이 굿은 황해도 해주·옹진·연평도에서 성행하던 굿으로,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 공동 제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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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이후 백두산 천지와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대동굿과 진혼굿 등을 공연해 서구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데 기여를 했다는 평을 받았다.

고인은 사도세자와 백남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한 진혼제와 세월호 희생자 추모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고인은 황해도 지역에서 노인들의 만수무강과 극락 천도를 기원하는 닷새간의 만수대탁굿도 펼쳤는데, 이를 본 도올 김용옥 선생이 “너무도 강렬한 느낌에 주저앉아 엉엉 울렀다”고 고백한 바 있다.


고인은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에 취임하고, 2005년 인천 강화도에 무교시설 ‘금화당’을 열어 후진 양성과 무속문화 전수에 힘썼다. 2014년에는 고인의 일생을 담은 <만신>이 개봉됐다. 박찬경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영화상을 받았다.이에 앞서 201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비단꽃길>도 고인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서슴없이 작두에 올랐던 고인은 국립무형유산원이 2017년 펴낸 구술록에서 “무당은 됨됨이가 제일 중요하다. 남의 덕을 잘 빌어주려면 내가 먼저 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된 다음부터 우리 무당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며 “그래도 다들 옛것을 찾으면서 즐거워하니까 나도 기뻤다. 내가 가진 재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황훈(자영업) 씨가 있다. 조카 김혜경 씨는 서해안 배연신굿및 대동굿 이수자다.
빈소는 인천시 동구 청기와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5일 오전 6시 40분, 장지는 인천 부평승화원이다.

3.1운동 백년 같은듯 다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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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들-.jpg»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반도독립선언서 발표 계획을 밝힌 다종교인들

 

  백년전 종교인이 주축이던 3·1운동 때처럼 여러종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오는 28일 오전 11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가 25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개신교 대표인 이정배 전감신대 교수는 “백년 전과 다른게 있다면 당시는 대부분 성직자였지만 이번엔 평신도가 주축이 되었고, 또 당시는 33인이 모두 남성이었지만 이번엔 여성들이 대거 동참해 선언문 초안 작성과 같은 주요 역할을 맡았다”고 말했다.

 

 불교개혁연대 대표인 박광서 전 서강대 교수는 “백년전 선열들의 뜻을 좆아 펼치기보다 물신주의와 탐욕으로 타락헤 성스러움과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한 종교인의 현실을 성찰하며 적폐에서 벗어나 사람이 살만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선언을 한다”고 밝혔다.
 종교인 33인 이름으로 발표한 이 선언문은 ‘종교인이라면서도 자기가족 이기주의, 종교 패거리주의와 폐쇄적인 국가주의와 인간중심적인 반생태적 삶을 회개하며 좀 더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며, 고난과 인내와 상생의 한반도 역사에서 배우면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이번 선언문엔 3·1운동을 이끈 천도교·개신교·불교 외에도 33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가톨릭에서 가톨릭개혁연대 대표 김항섭 한신대 교수 등이, 유교에서 황상희 성균관대 박사 등이 함께 했다. 천도교 대표인 김춘성 부산예술대교수는 “매번 모임이 깊은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는 2년 전 원효탄생 1400주년과 루터의 종교개혁 500년을 돌아보며 각 종교의 개혁문제를 논한 것을 시작으로 함께 모여 10여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선언문을 준비하고, 3·1정신 탐구서인 <3·1운동 백주년과, 한국 종교개혁>이란 공동 저술서를 발간했다.

 

태화관-.jpg» 100년전 3.1운동 당시 태화관. 여러종교 소속으로 자리를 함께한 민족대표들

 이 책에서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는 일제 치하에서 한국 불교의 일본화 고장과 실태를 밝혔고, 옥복연 여성과젠더연구소장은 일제 시대 애국운동을 전개한 여성불자들의 사례를 발굴 소개했다. 유교의 황상희 박사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저항의식을 시기별로 분석했다. 가톨릭의 우리신학연구소 경동현 소장은 3·1운동 당시 프랑스 주교들의 영향력 탓에 정치적으로 보수화된 가톨릭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기술하면서, 가톨릭 성직자들과 달리 이 땅의 신자들이 교회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경우를 여럿 소개했다. 개신교의 장신대 손은실 교수는 억압받던 식민지 백성들에게 공감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역할과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섰던 개신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리더쉽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길수 천도교 중앙도서관장은 3·1운동은 종교인들의 예지력과 순교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운동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특히 천도교의 개벽 사상이 그 생명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한 전 여신학자협의회장 이은선 전 세종대 교수는 이 책 말미에서 “3·1 정신을 저마다 주장하듯 특정 종교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유학, 천도교, 대종교 그리고 불교, 기독교의 정신사가 합류된 통합적 영성의 틀에서 풀어냈다.

 

 

2019 한반도 독립선언서

 만물이 새롭게 움트는 2019년의 봄, 오늘 우리는 지금부터 백 년 전 우리 집 지구의 한반도에 울려 퍼졌던 3·1독립선언의 포효를 기억합니다. 그 함성과 항거를 되새기며 우리도 오늘 새롭게 우리의 독립과 자주, 민주와 평화를 선포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일에서 우주의 대 기운과 세계 개조의 큰 뜻을 품고 일어섰던 3·1독립선언의 권위가 우리를 이끌고, 만세로 이어질 우리 염원과 신앙이 그 길잡이입니다.

 

19193, 2천만 대한의 민중은 남녀노소, 원근각처와 직업과 신분을 불문하고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총칼 앞에서도 크게 일어나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주를 외쳤습니다. 동양의 평화를 염려하며 도덕과 인의로 나아가는 인류 새 문명의 물결에 크게 화답하여 온 세상에 그 기상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또 다른 식민과 억압, 비주체와 비인간의 현실을 목도합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가 아직 표류하고 있듯이, 지난 식민지 시기의 악은 여전히 우리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오랜 분단 속에서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던 남북관계가 급진전되어 평화와 통일 이야기가 한껏 무르익기도 했지만, 이웃 강국들의 사욕과 간섭으로 언제 다시 전쟁과 식민의 이야기로 반전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계급과 성, 세대와 종교와 역사적 신념 등의 차이로 갈등과 분쟁이 심각합니다. 종교마저 화해와 통합의 일군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분쟁을 부추기고, 왜곡된 이데올로기와 거짓뉴스의 진원지로까지 추락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떨치고서 다시 일어서고자 합니다. 백 년 전 이 땅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화합하며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분연히 일어섰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서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은 갈라서 누구보다도 서로를 심하게 학대해 왔고, 외세에 매달리며 한편으로 패권적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뼛속까지 근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쫓아왔던 경제 제일의 신자유주의 제국은 한반도 삶의 모든 영역을 점령하여 우리로 하여금 끝없는 물질적 탐욕에 빠지게 했고, 여기서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한반도의 제 종교는 예전 3·1독립운동에서 민족이 의지할 곳은 오직 종교밖에 없다는 신뢰의 자리로부터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스스로가 물신주의에 빠져서 시대의 염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형국을 딛고서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 종교인들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어떠한 인간적인 조건에 종속됨이 없이 모두가 스스로 하늘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각자는 국적이나 외모, ()의 구별이나 학벌, 재산의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 땅 위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지며, 일과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훼손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과 의무가 있음을 선언합니다.

종교와 국가와 직업과 학식과 신체의 건강 여부도 바로 이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고, 그 위에 어떤 형식적인 권위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따라서 오늘 현실의 종교적 삶을 위해서 각 종교가 두고 있는 성직제도는 그 자체로 절대적일 수 없고, 직분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런 뜻에서 오늘 많은 종교 부패의 원인이 되는 성직의 타락과 오용은 지양되어야 하고,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몸의 존재입니다. 몸과 거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거룩이 현현되고, 몸이라는 한정이 곧 거룩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단순히 생명 없는 물질로 치부되거나 돈벌이 수단이나 쾌락의 도구와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한반도의 삶에서 우리 몸이 당하는 고통이 하늘을 찌릅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몸이 피로에 절어있으며, 열악한 식사와 주거로 심각한 병에 노출되어 있고, ()의 상품화로 크게 병들고 있습니다. 거기서 여성과 아동과 청년은 차별당하고, 건강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잃고서 권력가와 자본가의 소모품처럼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예전 이 땅의 독립운동가들은 한 나라에 국토인민이 있으니 독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하며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그 국토와 인민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으니 위기는 더욱 중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우리 모두는 과감히 떨치고 일어나야겠습니다. 우리의 노동이 인간다운 노동이 되고, 우리 의식주가 다시 정도를 찾아서 생명을 살리고 삶을 살찌우는 영적 토대가 되어야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리 국토인 한반도의 토지가 보다 정의롭고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일이 긴요합니다. 이 땅에 몸으로 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자신의 땀의 대가를 얻을 수 있도록 한반도 땅의 문제가 바로잡혀지는 일이 요청됩니다. 종교인으로서 지금까지 이 일에 힘쓰지 못하고 오히려 불의와 탐욕에 가담해 왔던 시간들을 반성하며, 이제부터라도 우리 신앙이 참으로 몸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질적으로 실천될 수 있도록 몸의 필요물들을 함께 나누고, 생산하고, 창조하는 일에 같이 할 것을 선언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참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종교인이라고 말로는 되뇌지만 자기가족 이기주의와 지역 연고주의, 종교 패거리주의와 폐쇄적인 국가주의와 인간중심적인 반생태적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회개하며 앞으로는 좀 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살겠습니다. 물질적 성취만을 강조하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자유와 자발성을 억누르고 죽여온 것을 반성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차별하며 혐오하고 소외시켜온 것을 회개합니다.

이 모든 일을 반성하며 3·1독립의 선언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의’(正義)인도’(人道)의 정신으로 신뢰를 저버린 일본을 탓하는 대신에 그 앞날까지도 걱정하면서 세계대동’(世界大同)의 이상을 펼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다시 그 이상을 우리 것으로 하면서 인류 공동체 집에서 우리의 선한 역할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오늘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바로 그 길로 가는 첫걸음임을 선언합니다. 3·1운동의 선인들이 잘 간파했듯이 오늘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평화의 갈림길이 되는 것을 더욱 깊이 인지하면서 우리 종교인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큰 화합과 통일과 배려의 새 날을 열어가겠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거룩한 분노가 우리를 다시 일깨우고, 19193·1독립선언과 상해임시정부수립의 결사가 새롭게 우리 귀에 울리고 있으며, 19604.19혁명의 함성과 더불어 19805.18광주항쟁의 자유와 용기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1987년 민주항쟁을 이어서 2017년 촛불시민혁명의 환한 빛과 진리가 우리를 계속 인도하니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코 지금과 같이 사악한 물신주의에 빠져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잔혹한 이기주의의 먹이로 내어줄 수 없으며, 삶의 용기와 의지와 선함을 무()로 돌리는 소외와 외로움과 자기 멸시에 빠져 살지 않겠습니다. 과감히 그 질곡과 노예성을 끊고서 더욱 인간답게, 이 세상이 다시 사람이 살 만한 세상, 모든 생명이 자신의 자리를 얻는 세상이 되도록 힘을 모으겠습니다. 지금 온 인류 문명이 새롭게 찾고 있는 포스트휴먼의 길을 위해서 고난과 인내와 상생의 한반도 역사에서 배우면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 세상을 위한 책임과 주인의식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반도 종교인 공약 삼장을 선포합니다.

 

- 물질과 정신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되어가는 물질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선하고 귀하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존엄과 자유과 사랑의 담지자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 우리 몸은 거룩하다. 어느 경우에도 권력자의 폭력과 쾌락과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 몸에 대한 어떠한 속박과 폭력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 몸의 안녕과 건강과 생명감과 창조력이 보호받고 배려 받을 수 있도록 국가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공동체들은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

 

-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날마다 더 선해지도록, 더 진실하고 아름다워지도록 결심하고 행위하는 그 지점으로부터 세계 평화와 인류 개조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이 시대 종교인들의 참된 믿음()이며 신념이어야 한다. 그 한 걸음(一步, 日步)씩 나가는 일에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홀로 절대화될 수 없고, 모두의 앞에 놓인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 손잡아 주고 격려하고 돕는 일이야말로 오늘 이 땅의 모든 종교 공동체가 주력하는 일이어야 한다.

 

2019228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경동현,김권이,김나리,김미령,김유철,김춘성,김항섭,김현진,김형남,

나지용,민정희,박광서,박길수,박병기,박순희,배병태,선병삼,손원영,

손은실,심국보,옥복연,이미림,이병성,이원진,이은석,이은선,이정배,

임종수,정경일,최명림,최우혁,황경훈,황상희



 

법륜스님이 말하는 3.1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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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JPG» 해방후 귀국한 임정 요인들이 대각사를 방문해 찍은 사진에서 김구를 가리키는 법륜 스님. 사진엔 김구와 유림, 이시영, 김창숙, 조소앙, 이범석 등 상해임시정부 요인 30여명이 백용성이 설립한 대각사 대웅전 앞에서 대각사 스님들과 함께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모래알’이라며 부정적 신념을 주입시켰다. 그러나 3·1운동은 이를 단번에 뒤집고 다른 종교인들이 민족 대의를 위해 협력함으로써 한민족을 하나되게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더욱 빛나고 있는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은 진리 탐구와 민생 구제를 둘로 보지않았던 근세 고준한 종교인들이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1운동에 나선 천도교와 기독교(개신교)에 비해 불교는 대표단에 단 두명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그 역사성에 비해 미미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천도교 중심의 3·1운동 조명에서 아웃사이더였던 불교계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며 33인 중 한명인 백용성 스님(1864~1940)을 중심으로 한 역할을 새롭게 조명한다. 27일 오후 2시 ‘3·1운동100주년기념토론회’ 주최로  서울 조계사에서 열리는 ‘독립운동가 백용성-잊혀진 100년의 진실’토론회에서다. 이 토론회 발제자는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이다. 그는 이 토론회에서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자격으로 발제자로 나서,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와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과 김택근 <용성평전> 저자와 토론을 펼친다. 법륜 스님을 23일 서울 서초동 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먼저 만나 과연 ‘잊혀진 100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들었다.

 

 그는 먼저 “은사 도문 스님(84)으로부터 백용성의 3·1운동과 독립운동 비사를 고교 때 출가한 뒤부터 50년 가까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며 서두를 꺼냈다. 도문 스님은 만석꾼 재산을 날릴 때까지 대대손손 독립운동을 도운 임동수 선생(1865~1945)의 증손자로 젖먹이시절 백용성의 무릎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의 은사 동헌 스님(1896~1983)은 백용성의 독립운동을 가장 가까이서 도운 인물이다.

 

 “은사(도문) 스님이 ‘해방 뒤 백범이 귀국하자마자 임시정부 요인 30여명과 함께 대각사를 찾아 5년 전 고인이 된 백용성 스님이 쌀가마니에 넣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귀로 흘려 들었는데, 2년 전 당시 사진이 나타났다.” 김구는 귀국 뒤 군중집회 말고 개인적으로는 손병희 묘소와 도산 안창호 묘소에 이어 백용성이 설립한 대각사를 3번째로 찾았다고 한다.

 

 동헌 스님 회고에 따르면 만해는 백용성을 스승으로 모시며 독립운동을 논의했고, 백용성은 천도교 손병희 교주와 구체적으로 준비해 왔다고 한다. 손병희와 백용성의 각별한 관계는 스승대부터 이어져 왔다고 한다. 동학 1세 교주 최제우가 관에 쫓길 때 전라도 남원 덕밀암 은적당에 1년간 숨겨준 게 백용성의 스승 혜월 스님이라는 것이다. 최제우는 그곳에서 동학 경전 <동경대전>을 썼다. 혜월은 그 대가로 승적을 박탈당했다. 손병희와 백용성의 인연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손병희의 딸(방정환의 부인)이 백용성의 최대 후원자이자 도문스님의 증조부인 임동수의 금강산 별장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법륜 스님이 도문 스님의 5천쪽에 달하는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한 발제문에선 백용성이 3·1운동 거사 전부터 천도교만의 단독 거사를 준비 중이던 손병희를 설득해 동학과는 대척점에 있던 서학(기독교)도 참여케 하고, 개신교계의 5천원 자금 요청에도 응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신들의 세계를 33천이라고 보는 불교적 우주관을 반영해 독립은 인간의 힘만으로 안되고 하늘의 보우하심을 받아야 하니 33인으로 하자’는 제안도 용성 스님이 했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은 “백용성은 전국을 6년 동안 다니며 처음엔 한일합방으로 관직을 빼앗긴 이들이 가장 먼저 나라 찾기를 원하리라 여기고 정승들과 고을 원님들을 찾아다녔으나 하나같이 독립운동에서 발을 빼는데 반해 백성들은 굶주리면서도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다음에 세울 나라는 왕과 귀족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 설파했다.”고 전했다.

 

법륜1.jpg» 법륜 스님은 1995년부터 매년 여름 탐방단을 이끌고, 간도와 연해주 등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유적지를 찾았다.

 

 또 법륜 스님은 “1922년에 간도 오지인 명월촌과 봉령촌에 700정보(210만평)씩 농장을 만들어 독립운동 후방 거점으로 삼았는데 1941년 안수길의 소설 <원각촌>에 나오는 이상향 공동체가 바로 그 농장이었다”고 말했다. 안수길의 아버지 안용호가 백용성이 용정에 설립한 대각교당의 핵심인물이었고, 안수길은 서울 대각사 일요불교학교 교사였다는 것이다.

 

  발제문엔 백용성이 윤봉길을 김구에게 보내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만나 항일연합군을 제안했다는 부분도 들어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백용성이 3·1운동으로 2년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그가 설립한 대각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등 항일독립운동가로서 분명한 증거들도 있지만, 3·1운동 재판기록엔 단순 가담으로 나와 있고, 이후 상해임시정부 자금지원과 윤봉길 파견, 항일연합군 제안 등은 오직 노스님의 구술 뿐이어서 아직 증거가 없는 주장 수준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민주화 투쟁도 비밀리에 하는데 일제 때 투쟁은 말할 나위가 없다”며 일본인들이 남긴 재판기록만 의존할 경우 실제 역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에게 백용성은 사표다. 백용성의 생가에 은사 도문 스님이 조성한 사찰 죽림정사의 주지이기도 한 그는 정토회원들의 수행을 이끌면서도, 제3세계 구호활동과 환경운동에 이어 평화재단을 설립해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삶에서 수행과 중생구제가 둘이 아니었던 백용성의 대승보살정신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스승 백용성을 넘어 더 많은 이들의 뜻을 새기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백용성의 행적만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렇게 ‘민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마음들이 모아져 3·1운동과 4·19의거, 촛불혁명으로 나타났다. 이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수많은 이들의 숨은 노력에 보답하고,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라’는 그 대의를 완성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남북 동서가 있고,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겠는가.”

아픈 이들 찾던 김수환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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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이란 가톨릭 호칭이 일반인들에게 친근해진것은 김수환추기경 때 부터입니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의 어른으로서 자리매김을 하시다가 떠나신 추기경님 .철없는 아이같은 어른들이 판을 치는 작금에 어른이신 추기경님의 부재가 깊이 느껴지고 갈수록 그리움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우기 요즘같이 살얼음판을 딛는듯한 시기에 그분의 한말씀이 얼마나 아쉽고 그리운지요. 시인 박노해는 거룩한 바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른이 그리운 시대 큰 어른이 가셨다 . 영하의 추위속에 고요한 긴줄 . 멈춤 침묵 돌아봄 정화 . 울고싶고 기대고 싶어도 의지할 언덕하나 없어 삶의 무거움이 가슴에 응어리진 사람들 .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아 거룩한 바보를 찾아나선 사람들 말없이 느린 행렬로  난 바보야 난 바보야 가슴치며 가슴치며 새벽강물로 흘러가는사람들....’

 그래서 어떤분들은 푸념을 하기도 합니다 . 죽어야 할놈들은 장수를 하고 오래오래 살아야야 할분들은 하늘에서 일찍 불러간다고. 큰그릇이 안계시니 자기밖에 모르는  좁쌀영감들 속좁은 옹기들이 판을 친다고 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부모가 부모노릇을 잘못하면 아이들이 문제아가 된다고 하는데 어른이 없는 우리나라가 딱 그 처지가 아닌가 합니다.

 신부들은 자기 축일날 아침 아홉시쯤 이면 전화기앞에서 대기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축하전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짧은 대화엿지만 군대의 지휘관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이 아주 좋앗던 기억이 납니다. 또 길을 가시다가 갑자기 방문해서 ‘어떻게 사는지 보러왔다’고 해 놀라고 기뻤던 기억도 납니다. 신부들과 스스럼없는 관계를 갖고자 했던 자상한 분이었지요.그러나 항상 자상하고 따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아주 날카로운면도 있었지요.

 서품을 받기전 피정 마지막날 추기경님과의 면담시간 . 나이순으로 줄서서 면담을 기다리는데 먼저 나온 동창들의 얼굴이 똥씹은 표정. 왜 저러지 하다가  내 차례. 근엄한 표정의 추기경님이 물었습니다. “자네 서품성구가 무엇인가?” 서품을 받는 신부들은 평생 지침으로 삼을 말씀을 성경에서 골라서 서품성구로 합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하나되게 하소서’입니다. 그랬더니 ‘그 성구를 사용하는 사람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 못보았네’ 하는것입니다. 그리곤 아주 무거운 침묵. 속으로 ‘아 난 탈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앞서한 동창들의 얼굴이 왜 그랬는지 알 듯 했습니다.

 공포스런 독재정치하에서도 날선 말씀을 서슴치 않았던 추기경님 .그 당시 안기부요원이 당신이 그렇게 정부를 비판하면 신부들의 파일을 다 공개하겠다고 협박을 했지만 ‘마음대로 하라’고 한 추기경님의 서슬푸른 대응에 꼼짝을 못했다는 일화 등등. 당신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닌 시대를 이끌어가는 큰 그릇 지도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분도 힘겨움이 있었습니다. 불면증 . 온갖고뇌에 시달리시면서 얻은 병 아닌 병. 그래서 당신은 하루 세시간을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신적이 있습니다. 선종십주기 김수환추기경님같은 큰 그릇이 나오길 기도해봅니다.

나 자신이 되고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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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 무렵을 미국 켄터키주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보냈다. 현대의 위대한 영성가요 작가인 토머스 머튼이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로 살았던 곳이다. 미국에서도 탈종교화 현상이 급격히 전개되면서 겟세마니의 수도자 수는 크게 줄었지만, 머튼을 만나기 위해 지금도 찾아 오는 이들이 한 해 오천 여 명이다. 나도 머튼에 이끌려 겟세마니를 찾아 갔지만,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또 한 명의 겟세마니 수도자가 있었다. 머튼이 ‘성인(聖人)’으로 부르며 존경하고 사랑했던 노수도자 스테픈 신부다.
 

 스테픈은 수도원 밖은 물론이고 안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평범한 수도자였다. 게다가 어느 공동체나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인 ‘웃기는 친구’로 취급받던 이였다. 그가 수도자의 본분인 기도보다 정원의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를 ‘오직 하느님만’ 바라야 할 수도생활을 방해하는 집착으로 여긴 수도원장은 스테픈에게 정원 가꾸는 일을 금지했다. 스테픈은 원장에게 순명했지만, 그래도 수도원 여기저기에 몰래 화초를 심곤 했다.

 

머튼-.jpg» 미국 켄터키주 트라피스트수도회 소속으로 살았던 토마스 머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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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격했던 수도원장이 세상을 떠난 후 수도원 책임을 맡은 새 원장은 스테픈이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를 수도원 정원사로 임명했다. 그 후 스테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원에서 지냈고, 수도자가 준수해야 할 매일의 기도에는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수도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그가 아름답게 가꾼 정원은 수도자들의 작은 기쁨이었다. 어쩌다 수도자들의 가족이 겟세마니를 방문하면 스테픈은 그들에게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 선사했다.

  성 프란치스코 축일 오후, 스테픈은 수도원 입구의 작은 정원으로 가서 성모상 가까이에 있던 나무 아래 누웠다. 마침 정원을 지나던 한 수도자가 그런 스테픈을 의아해하며 바라보았고, 스테픈은 그에게 인사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숨을 거뒀다. 그날 스테픈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머튼은 그의 죽음을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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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튼이 아니었다면 스테픈은 겟세마니 공동체에서도 금세 잊혔을 것이다. 그는 스테픈을 추모하는 조시를 썼고, 자신이 죽기 몇달 전 했던 한 강연에서 스테픈의 삶과 죽음을 인격적 성숙과 완성의 표지인 ‘최종적 통합’의 본보기로 소개했다. 스테픈은 다른 누군가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즉 ‘정원사’로서 신과 인간과 자연을 온전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라는 머튼의 믿음과도 일치한다.

 스테픈과 머튼은 수도원 뜰에 친구처럼 나란히 묻혀 있다. 젊은 시절 두 사람과 함께 생활했던 한 노수도자에게 스테픈이 죽은 정원을 물었더니, 내가 머물고 있는 독방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라고 알려줬다. 역설적이게도 ‘오직 하느님만(God Alone)’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정원이다. 봄이 살포시 발을 들여놓고 있는 정원을내려다보며, 그곳에서 다정히 함께 거니는 스테픈과 머튼을 상상하는데, 두 ‘성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묻는다. ‘친구여, 그대는 무엇이 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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