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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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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도 안간 스님이 어떻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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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jpg» 자신의 모자를 뺏어쓰고 장난을 걸어오는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법인 스님

 

붓다에게 질문한 사람들 - 첫째

 

1.간혹 이웃하여 사는 사람들이, 장가도 안 가신 스님이 어떻게 세상일을 속속들이 아느냐고 묻는다. 저자에서 절집은 한참 먼 거리 산중에 있다. 또한 출가수행의 단어는 단절과 은둔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세상일에 먹통인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부처님은 번뇌와 욕망에 무심하라고 했지 세상사에 무관심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일들에 대한 바른 통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건의 발생 원인과 결과를 잘 하는 지혜를(세속지,世俗智)를 강조했다. 또한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에 세간해(世間解는 세상일을 잘 이해하고 해결해 준다는 뜻이 있다.

2. 여튼 종교인들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사연을 들어주다 보니 다양하게 세상일을 알고 있다. 산중에 사는 나도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마냥 한가한 대화만을 나누는 게 아니다. 때로는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연들을 듣는다. 부담 없는 잡담을 나누는 경우도 있다. 진지한 주제로 학술토론회의 경지까지 가는 대화도 있다. 어느 분야의 전문 소양을 갖춘 사람이 오면 함께 차담에 참여한 사람들과 즉석에서 강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서로 노래와 시가 오고가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문과 풍류가 꽃피우기 좋은 곳이 절집이다.

산중 절집은 바다와 같다. 산과 강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백천지류의 물들이 바다에 모이듯, 여러 사람과 여러 사연이 모여드는 곳이 절집이다. 그래서 절집은 늘 고요하면서도 말들이 넘쳐난다. 절집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대방광은 무한으로 넓고 다양한 시공간을 말한다. ‘화엄은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는, 어느 누구도 주눅들지 않고 참여하는 꽃들의 어울림으로 꾸며진 꽃밭을 말한다. 그래서 화엄경을 잡화엄식(雜華嚴飾)’이라고 한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라는 노래가 바로 잡화엄식, 화엄경의 세계다. 여러 사연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절집은 늘 잡설의 꽃이 핀다. 잡설이 모이면 경전이 된다. 온갖 잡설이 모여 대방광화엄세계를 이루었다. 나무 잡설 보살 마하살!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3. 경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부처님이 제자들은 모아 놓고 강의한 내용이 경이 된다. 철학적 주제가 강의 내용을 이루기도 하고 일상의 일들을 주제로 도덕과 윤리 강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누구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면 그 내용이 전승되어 작은 경전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즉문즉답이 모아져 편찬된 경전이 의외로 많다. 또는 인생상담이 그대로 경전이 된다. 다음은 묻고 답하는 상담으로 만든 작은 경을 보자.

 

부처님이 라자가하 죽림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흉악이라는 별명을 가진 촌장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흉악이라고 부르는 것에 무척 속이 상해 있었다.

부처님, 사람들은 저를 가리켜 자꾸 흉악이라고 부릅니다. ‘선량이리고 불려도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많을 터에 흉악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그 다음은 듣지 않아도 뻔할 것입니다. 도대체 저는 어떤 행동을 했기에 이렇게 나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요?”

부처님은 촌장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촌장이여, 그대는 무엇보다도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여 남에게 화를 자주 내고, 화를 내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하며, 남들은 그 때문에 그대에게 나쁜 이름을 붙이느니라. 또 바른 견해, 바른 말, 바른 업,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을 닦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화를 내는 것이니라. 스스로 화를 내면 남을 화나게 만들고, 남이 화를 내면 자신은 더욱 화를 내게 된다. 그리하여 그대는 흉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느니라.”

부처님,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는 바른 소견을 닦지 않아서 남에게 화를 잘 내고, 화를 잘 내기 때문에 나쁜 별명이 붙었나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화를 내는 일과 거친 말을 삼가겠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간단하면서도 마음에 와닿았던지 그는 그 자리에서 삼보에 귀이하고 재가 신자가 되기를 다짐했다. _ 잡아함 32910흉악경, 홍사성 번역.

 

4. 세상의 길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싯다르타는 진지하게 온몸으로 물었다. 생노병사의 근원적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생명이 싸우지 않고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질문이 있는 자는 스승을 찾고 세상의 작은 일에도 예민한 촉수로 이치를 살피고 탐구한다. 그리고 전신으로 그 길을 깨닫는다. 청년 싯다르타가 자신과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마침내 그 답을 찾았다. 이어 제자들이 부처님께 질문했다. 금강경도 질문으로 시작한다. 구도심을 발한 보살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유지해야 하느냐고. 부처님이 이에 답한다. 그 무엇에 갇히거나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마음을 쓰라고 간명하게 핵심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그 시절, 마을 촌장이 답답한 가슴을 부처님께 열어 보였듯이 오늘도 내 이웃의 많은 사람들이 아픈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 받고 싶어한다.

사람이 묻고 사람이 답하면 바로 경이다.  


한국, 미국보다 평화로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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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스킹-.JPG» 비폭력흑인인권운동 마틴 루서 킹의 막내딸 버니스 킹 목사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을 100  ‘3·1독립선언 대표한다면미국엔 1963 828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광장에서  마틴 루서  목사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아이 해브  드림) 있다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으로 비폭력흑인인권운동을 펼쳐 1964 역대 최연소인 35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전설적 인물  버니스 (56) 목사가 한국을 찾았다.

 

 22  막내로 신학박사이자 변호사이기도  버니스 킹은 아버지가 암살 당한  어머니 코레타 스콧 킹이 설립한 킹센터의 대표로 2012 취임해 아버지의 공식 후계자로 활동하고 있다그는 부모의 비폭력인권운동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비폭력365’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킹과 함께하는 학생들’ 모임을 꾸려 비폭력 원리를 교육하고 있다. 4 서울 여의도의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를 만났다.

 

 킹센터는 지난해 3 마틴 루서  추모 50 행사를 오바마 당시 대통령과  클린턴·지미 카터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했다그는 추모행사에 참석했던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 이영훈 목사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68년 마틴 루터  목사가 암살을 당했을  버니스 킹은 한창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던 5살이었다그는 “ 일로 인한 분노 관리가 오랫동안 힘들었고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다 고백하면서 “그러나 분노는 자신을 먼저 좌절시키고 파괴시키기 때문에 거기에 사로잡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말했다그러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보고 배웠다 “분노가 생길 때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우울해질 때마다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조언했다.

 

킹.jpg» 1963년 8월28일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광장에서 25만여명의 군중들에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아이 해브 어 드림)란 연설을 하는 마틴 루서 킹

 

 그는 비무장지대를 견학하기도 했지만, “한국이 미국보다 평화롭고 평안한 느낌을 받았다 첫인상을 전했다특히 그는 “한국에선 경찰들조차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했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언제 어디서 총기사건을 당할지 몰라 두려운데 한국은 그렇지 않아보인다 것이다.

 

  그는 남북 문제와 관련해서도 “폭력과 전쟁은 어떤 상황에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면서 “남북이 직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통을 많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폭력적 대화의 중요성 강조했다.

 

 지난 1 다종교인들이 한목소리로 독립을 선언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석했던 그는 ‘종교  갈등 대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도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서로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말했다.

 

 버니스 킹은 “전날 청년들과 나눈 희망토크에서 ‘한국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질문이 있었다 소개하면서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서로 소통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해야 한다 제안했다그는 특히 ‘청년은 문제의 제기자가 아닌 해결자가 되어야  역설하기도 했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청소년 자신이 변화를 이루는  앞장 서야 하고자신이 해결책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이 이를 해낼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는 “아버지도 흑인들이 처한 너무도 힘든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바꾸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기에 이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도움이   있었다 덧붙였다.

 

 버니스 킹은 미국 개신교에서도 동성애 문제 등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꼽히는 남침례교 소속 목사이다그는 미국감리교단 안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과의 갈등 사례를 소개하면서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차이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려움은 계속될  밖에 없다 말했다

서로 기운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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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항암(橋杭岩)-갈등으로 인하여 서로 기운만 소진한 채 결실없는 일을 하다

                

3-.JPG              

 

컴퓨터에 입력한 자료들을 안전하게 모아 둔 외장하드에 문제가 생겼다. 초조함이 손끝으로 모였고 몇 번의 클릭 끝에 자료확인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머릿 속이 하얘졌다. 서랍 안에 고이 두었고 실수로 충격을 가한 일도 없었다. 자료가 사라질만한 별다른 이유가 없었기에 간단한 고장이라 여기고 급한 마음으로 종로구청 인근의 컴퓨터 가게로 갔다. 점장은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그냥 두고 가라고 한다. 얼마 후 종로의 솜씨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동의한다면 용산구의 전자상가단지에 수리의뢰를 대행해 주겠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년 전에 노트 북이 오염되어 간 곳도 용산이었다. 그 때 기존의 저장된 원고가 몽땅 사라지면서 하늘이 노랗게 바뀌는 경험을 했다. 섬세한 성정의 동료는 바닷물에 빠졌던 자료도 복원한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을 알고 있다면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컴퓨터 맹인을 안심시켰다. 며칠 뒤에 노트 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상태로 주인의 품에 안겼다. 그 바람에 용산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생겼다. 그 기억 때문에 흔쾌히 용산으로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외장하드 속의 사진자료는 기대와 달랐다. 1/3은 날아갔고 2/3 정도만 겨우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가장 최근 사진은 작년(2018) 가을에 일본 고베(神戶)에서 열린 한국 중국 일본 불교관계자들이 모인 행사였다. 본 행사 후에는 늘 덤으로 관광이 뒤따른다. 절집속담에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했다. 틀에 짜인 규격화된 본행사도 의미가 적지 않았지만 느슨하고 자유로운 관광이 더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다. 그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다시 살폈다. 공식행사 사진 뒤로 이어지는 관광사진을 확인하면서 몇 달 전의 일을 어제처럼 떠올렸다. 이것이 문자기록과는 또다른 사진기록의 힘이다.

 

그 목록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화면은 혼슈(本州)의 가장 남단인 구시모토(串本)에 있는 교항암(橋杭岩하시구이-이와)이다. 육지에서 섬을 향해 이어진 40여개의 크고 작은 바위가 약 850m 가량 이어진 곳이다. 그 모양이 마치 자연이 만든 교각처럼 보인다고 하여 다리기둥바위라고 불렀다. 그 옛날 화산이 폭팔할 때 육지에서 분리되며 바다로 떨어진 병풍처럼 긴 바위가 오랜 세월동안 물과 바람에 씻기고 깎인 탓에 지금같은 모양으로 남았다고 한다. 멀리서 찍고 가까이서 찍고 심지어 떠나는 버스 안에서도 그 앞을 지나가며 소형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릴만큼 강렬한 영감을 준 명승지였다. 동시에 일본열도에서 한반도의 원효스님만큼 유명한 공해(空海구카이774~835)대사의 일화가 남아있는 성소(聖所)이기도 하다. 성소에는 반드시 스토리텔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가이드의 설명과 관광안내판이 전하는 내용은 단순하리만치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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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대사와 요괴가 다리놓기 시합을 했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은 하룻밤이다. 초저녁에 시작했다. 한동안 진도가 비슷하게 나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자정이 지날 무렵에는 요괴의 패색이 짙어졌다. 지는 것보다는 무승부가 낫겠다고 판단한 요괴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재주를 발휘하여 진짜 닭처럼 새벽 닭소리를 목청껏 길게 뽑았다. 정해진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한 대사도 약속대로 미완성의 상태에서 작업을 중단했다.

 

섬은 늘 육지로 향한다. 반대로 땅끝에 서면 또 끝을 찾아 섬으로 가고자 한다. 그것이 인간의 심리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섬과 육지가 연결된다면 이익을 얻기도 하겠지만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작은 손해 때문에 다리가 이어지길 원하지 않는, 감추어진 내심을 요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만약 닭소리가 없었다면 쌍다리가 만들어졌고 함께 힘을 모았다면 왕복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의 다리조차 완성하지 못한 채 철썩이는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교각 수십개만 볼거리로 남겼다.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경쟁심과 승부욕은 전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 전설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남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심술까지 보태지면서 극적 긴장감까지 더했다. 결국 갈등으로 인하여 서로 기운만 소진한 채 결실없는 일을 한 셈이다. 대사의 선의까지 빛이 바랬다. 바다 위의 돌기둥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을 경계하는 자연이 만든 교실인 것이다. 어쨋거나 미완성이라는 아쉬움과 불완전함이라는 미학이 주는 아름다움 위에 종교적 신화까지 합쳐진 신비로운 관광성지를 찾아간 기억이 다시금 새롭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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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은 둘이 아니니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 변호사)

돼지-.jpg 

늦은 봄이었던 것도 같고, 운동장가 포플라 이파리들이 다 피어난 초여름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 신나게 신발주머니 휘두르며 교문을 나서던 어느 토요일 오후가 생각납니다.

저 뒤편 강당에선 큰 북, 작은 북 쿵쿵거리고, 심벌즈 챙챙거리고, 캐스터네츠 딱딱거리고, 학교 앞기쁜 소리사고교야구 중계방송 소리가 거리를 넘실댔습니다.‘와와함성소리, 밴드부 트럼펫 소리. 그리고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 놀라 빵빵대는 삼륜차 경적 소리.

어느 한 순간 온 천지에 삶의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 꼬맹이 시절에서 반백년이 흘러 이제는 삶의 슬픔, 존재의 덧없슴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 친구 둘을 보냈습니다. 한 친구는 시집도 안가고 조그만 출판사하면서 부처님 책들을 열심히 보시하다가 갑자기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저렇게 예쁜 사람에게 어찌이것도 다 인연이니라말씀하실 수 있나요. 혼자 살던 또 다른 친구는 주방 냉장고 앞에 엎어져 삶을 마쳤습니다. 그는 매일 소주 두세병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십여년 전 돌아간 어머니 영정 사진을 향해 오늘은 어떤 주식을 살까요 묻고 어머니 시키는 대로 주식을 사고팔았습니다. 아버지 다른 형이며 여동생과는 소송을 벌이고 연락을 끊고 지내왔기에 자기가 죽으면 전 재산을 좋은 데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유언공증을 하겠다 해서 대낮부터 만나 같이 술 한잔을 걸쳤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증사무실 가는 길에 나를 보고 욕을 해대는 거였습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너 나 빨리 죽으라고 이따위 유언공증 하라 꼬득이는 거냐?” 내 꼬맹이 시절 어느 순간 문득 천지에 가득한 삶의 기쁨을 온 몸으로 느꼈던 것처럼, 친구는 차들과 사람들로 가득 찬 강남 거리 한복판에서 갑자기 죽음의 슬픔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공증은 뒤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화장해서 산으로 데려간 겨울 아침 그의 전 재산은 가장 미워했던 형제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습니다. 아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저 수십억 재산을 녀석이 공증하도록 하셨더면 얼마나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었을꼬.

 

그렇습니다. 삶이 우리에게, 그리고 이 추운 겨울 흰 눈 덮인 산속에서 먹을 것 찾아 헤매는 길고양이에게 주는 이런 저런 모양의 괴로움, 슬픔들. 어린 시절 영원히 계속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삶의 기쁨은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존재의 슬픔으로 바뀌어 갑니다. ‘세상은 덧없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그래서 엄청난 벽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기댈 커다란 위안이 있습니다. 서로 죽이고 죽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공자님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 어짐과 의로움(仁義)을 가르치려 평생 수레를 타고 힘들게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셨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석가세존도 깨치고 나서 이레를 번민하셨다는 거지요. 홀로 독립하여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고 모두가 서로 기대어 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어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할 텐데 이걸 가르쳐야 하나. ‘왜 내가 없어? 너는 너고 나는 나야.’이렇게 나올 텐데. 그럼에도 당신은 제자들의 비난과 배반, 후원하던 왕들의 몰락등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쉼 없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본을 보이셨지요.

 

예수님도 당신 가르침을 사람들이 제 잇속대로 받아들이는 걸 보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셨지요. 그래도 당신은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할 걸 알면서도 율법과 기득권을 향해 단호히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가 복이 있다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거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고, 누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느냐고.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셨지요.

그리하심으로 그 분들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둘이 아니라, ()요 전체이신 당신 안에서 하나임을 몸소 보여주셨지요.

 

 이 글은 <공동선 2019. 3,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안식년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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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안식년을...  

 

산위4.jpg» 소백산 산위의마을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는 아이들. 사진 산위의마을 제공

 

어머니와 동생과 세모자가 입촌해서 고등과정을 검정고시와 독학으로 전북대 아동교육학과를 입학했던 장길산 사도요한 군의 졸업식이 지난  222있었습니다.

 

길산이는 이미 2월초부터 마을에 와서 중고등부 꼬뮌스쿨 교사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마을 꼬뮌스쿨생은 현재 고3급 우경진 요안나 1명 뿐이지요.^^ 검정고시를 마쳤고 20학년도 대학에 도전합니다. 4일에는 금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에 합격한 김태경 스텔라가 입학했습니다. 마을에서는 신경 써준 것도 없는데 자기 주도로 진로를 잡아가는 아이들이 모두 대견하고 감사할 뿐이지요.

 

최근 'SKY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줄곧 수석을 다투는 아이들은 자부심도 크겠지만 의외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합니다. 우리 세대 부모님들은 당연하게도 학력이란 거의 없고 자수성가하신 분들이 일반이지만 지금 부모 세대들은 명문대 출신들도 많게 마련이어서 명문대 출신 부모를 둔 아이들은 입시의 스트레스가 훨씬 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벌써 수년 전 일이지만 제가 아는 분의 아들도 늘 전교수석이었는데 고3 때 옥상에서 투신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부모 모두 명문대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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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자녀들이 마을에서 노동하고 지내면서도 자기 진로를 넉넉하게 찾아가는 것을 보아 와서 그토록 심한 상실감으로 지내는 걸 보지 못했는데 종종 청소년 학생들과 상담을 해보면 늘 암담함이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이 중학과정을 마친 후에 1년간 안식년을 지내게 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정착되고 시스템화 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님들과 공교육 담당자들에게 제안하는 것입니다.

유치원부터 10년 동안 숙제와 학원과 책만 들어다보게 했으니 1년 동안 몸도 정신도 스마트폰도 쉬게 하면서 여행도 하고 일도 하고 사회봉사도 하고 지내며 자기 미래를 설계해 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정신세계가 확실히 건강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입시에 재수 삼수도 하는데 1년 안식년으로 쉬게 하는 게 뭐 어때요? 경쟁에 낙오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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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톨릭교회의 신학교에서는 재학생활 중간에 반드시 학업을 중단하고 휴학을 의무화 하고 있습니다.  자기 성소와 인생관을 다시 질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인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인 사제양성 교령으로 의무화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장치입니까?

저는 자녀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안식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정부 교육부 탓하지 말고요. 부모님과 자녀들이 결단하고 실행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생각만 있으면 자유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니까선택이지요. 인생에는 그런 선택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샬롬  

송아지가 유난히 적게 태어났는데, 그래도 씩씩하게 자라주고 있어 고맙다. 아이들도....

 

 

북간도의 십자가 문동환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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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1.jpg» 9일밤 9시께 별세한 문동환 목사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으로 불렸던 문동환 목사가 9일 오후 550분께 별세했다. 향년 98.

고인은 해사스런 귀공자형의 외모처럼 편하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한맺힌 민중들을 놓을 수 없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떠돌이를 자청한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일제시대 북간도 한인사와 독립운동사, 교육사, 민중사, 민주화운동사, 기독교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00살이 다 되도록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명하면서 거짓들과 싸운 종교개혁가이자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공동체운동가였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 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 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이 공부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 강원용 등이 수학했다. 은진중 교목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었다.

 

고인은 어린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같은 이가 되고싶어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한다. 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전에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의 안내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회고한바 있다. 그는 그 이후 거제도 아양리라는 농촌으로 내려가 1년간 목회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독재가 시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않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 대중 앞에 나설 때, 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

 

문2.jpg» 문동환(뒷줄 왼쪽 넷째)·문혜림(왼쪽 다섯째)씨 부부가 형수 박용길(왼쪽 여섯째)씨 등 가족들과 2002년 2월 중국 룡정시 동커우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다.

 

그가 1972년 낸 <자아확립>이란 책의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토론하고 발표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하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도입했다. 그의 제자였던 정호진 목사는 고인의 <세계와 나>라는 수업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혁명적 전환으로 스스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 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특별한 점은 관념에 머무르지않고 늘 실천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삶을 배우기 원했고, 캠퍼스 자체가 민주적 삶의 체현장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그가 학생과장으로 재직 때 학생, 교수, 직원, 교수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게 캠퍼스생활위원회였다. 이 생활공동체를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등의식과 참여의식을 배우고 실천케 한 것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게 선교신학학대학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 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 세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만든 새벽의집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 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과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 유신헌법 공포는 그를 더욱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삭발을 하며 투쟁을 하다 1975년 해직됐던 그는 동료 해직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763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와이에이치(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유신정권의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시작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하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당합당에 반대해 정계에 은퇴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그는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예수냐 바울이냐>. 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 절대권력, 권위주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변호인>을 본 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의 한신대 제자였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 숭배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혜림씨와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 사위 정의길(<한겨레> 선임기자)씨 등이 있다. 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이다.

빈소는 연세대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8, 장례예배 오전 9시 서울 수유동 한신대학원 채플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 (02)2227-7500.


 

다산 정약용을 놀라게 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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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를 희롱한 스님

 

추사와 초의-.jpg»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상 

1801,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한동안 이쪽저쪽을 못 드나들어 몸과 마음이 병이 들었다. 외로운 심사에 고적한 밤을 견디지 못하고 온몸이 감전된 듯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술로 불난 가슴을 달래야 했다. 먹은 음식은 수시로 체했다. 그래서 차를 멋스런 풍류로 대하기보다 몸의 체증을 내리는 약으로 삼았다. 당시 다산의 살림살이는 이쪽만 있었다. ‘저쪽이 없거나 빈약했다. 그는 혼자 있었고, 침묵해야 했고, 혐소한 공간에 정좌했다. 그의 시간은 치떨리게 조용했고, 그 시간이 무서워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렇게 이쪽이라는 한쪽에 갇힌 삶은 답답했다. 저쪽이 필요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고, 말을 하고 싶고,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저쪽이라는 한쪽이 절실했다.

 

유배생활이 한해 두해 이르자 다산의 남루한 처소에 저쪽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다산의 강진 유배 생활은 18년이다.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 동문 밖 술집에서 처음 몸을 눕혔다. 동천여사라고 다산이 칭한 곳이다. 을축년(1805)에는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지냈고, 병인년(1806)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이청)의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무진년(1808) 봄에 현재의 다산초당이 있는 곳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강진 사람들은 몹시도 다산을 꺼렸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에는 마음이 약하고 또한 모질다. 중인 계급의 아들들이 하나 둘 배우고자 모여들었다. 평생 다산을 스승으로 섬겼던 강진 고을 아전의 아들인 십오세 된 황상이 배움을 청했다. 손병조, 황경, 황지초, 이학래 등 동천여사에서 맺은 읍중제자들이 배움을 청했다. 드디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을 하고, 가르치고, 함께 소풍을 갈 저쪽이 생긴 것이다. 다산에게 저쪽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다. 다산초당의 18제자들과 삶의 이쪽저쪽을 왔다갔다 했다. 조금이나마 삶의 울체가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저쪽의 편에 속하는 한쪽이 있었다. 바로 강진 고을 옆 동네 해남 대둔사(대흥사)의 승려들이었다. 혜장, 초의, 색성 등과 유교와 불교, ///차로 가르치고 배우고 나누는, 이쪽저쪽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화엄세계가 남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평생의 지기였던 초의와 추사의 우정은 이미 널리 알려진 터, 그리고 24년 연상인 다산이 초의를 얼마나 아꼈는지 어느 정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다산은 수십 항목에 달하는 증언(贈言)을 따로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줄 정도로 초의를 사랑했고 독려했다. 또한 차를 청하는 명문에 해당하는 몇 편의 걸명소(乞茗疏) 중에서 다산의 글이 있는데, 그 상대는 백련사의 혜장 선사였다. 십년 연하인 혜장과 다산이 나눈 편지와 시는 그들이 얼마나 이쪽저쪽을 드나들며 벅찬 가슴을 나누었는지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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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둔사 스님들 가운데 다산이 좋아했던 은봉이라는 스님이 있다.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다. 은봉 스님은 강진읍 뒷 편에 있는 고성사의 서기승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총무나 재무 소임에 해당하는 사판승인 셈이다. 1805년 다산의 평생 제자 황상이 시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고성사에 몸을 틀었다. 그 때 고성사의 서기 은봉 스님이 시에 호기심을 보이자 황상이 시작법을 알려준다. 시작법을 들은 은봉 스님이 그날 밤 쑥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지은 시 한 편을 황상에게 내밀었다. 그 시를 보고 황상은 놀랐다. 아니 이렇게 훌륭할 수가? 황상은 은봉 스님의 시를 사의재(강진읍내 주막집 옆에 지은 다산의 교육장)의 스승에게 보냈다. 황상의 편지와 함께 은봉의 시를 본 다산은 흥분했다. 다산이 황상에게 보낸 답장을 보자.

 

내가 물었지. 안목이 없고 보면 다른 사람의 곱고 미운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의 좋고 나쁜 점도 스스로 알 수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은봉은 평생 서기승으로 자처했을 뿐이다. 나 또한 그렇게 대접했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 시재(詩才)를 보았구나. 네가 모름지기 지성으로 이끌어서 몇 달 안에 시승(詩僧)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게 해주렴. 꼭 그래야 한다. (이상과 이하 번역은 정민 교수)

 

다시 보내 온 은봉의 시에 다산은, 은봉의 시재는 사람을 정말 놀라게 한다면 이렇게 말한다. “내가 10년을 관각(館閣 조선시대 홍문관·예문관·규장각을 통틀어 이른 말)에서 노닐었다만, 이처럼 발전이 빠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 이 같은 시재는 실로 처음 본다그러나 다산의 이런 일방적이라 할 수 있는 관심과 애정에 은봉 스님은 시 짓는 일에 그리 열정을 쏟지 않는다. 그래서 다산의 조바심과 서운함도 컸다. 이런 은봉의 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당대의 최고 학자에게 인정과 칭찬을 한 몸에 받았는데도 왜 은봉 스님은 문학에 열의가 보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불교와 선가의 풍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에 분별과 논리가 외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선가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가풍이 시에 심드렁했을 수도 있다. 지금도 절집에는 언어와 논리에 대한 불신이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 겨우 시 한 편만이 남아 있는 은봉의 자취가 놀랍게도 다산의 명저 <목민심서>에 남아 있다. 그 글은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큰스님이 불린 서산대사의 글을 멋지게 패러디 한 것이다. 살펴 보자.

 

서산대사 휴정이 축원문을 지어 승려들에게 아침저녁으로 외우게 했다. 만덕사(지금의 강진 백련사) 승려 근은(은봉)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서산대사께서 축원문을 지었는데, <삼전축원문 三殿祝願文> <제궁축원문 諸宮祝願文> <백료축원문 百僚祝願文> 같은 것이 다 이것입니다. 도내의 방백은 지위가 더욱 높아 산에 사는 중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주 합하께서 선정을 행하시는 것도 축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지요. 소승이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도내의 방백께선 절에 오지 마시옵고, 성주 합하께옵서도 짚신 공물을 줄여주게 하옵소서’ ”듣는 자가 모두 웃엇다. 이 말이 비록 웃자고 한 말이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볼 수가 있다“ -목민심서, 6, ‘호전육조 戶典六條평부 平賦

 

자못 은봉 스님의 역설적인 발설이 통쾌하다. 이 패러디를 읽고 보니 나는 은봉 스님이 왜 시 짓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지 짐작이 간다. - 대체 시를 짓는 일이 뭐하자는 거야, 그리고 부처님 전에 그런 축원하라고 지시가 내려 오는데, 그런 축원은 또 뭐하자거야, 내게는 실로 시 짓는 일이나 성스러운 축원의 글들이 어줍잖고 어설프기만 해. 내 곁의 사람들이 저리 힘들고 초라하게 살고 있는데 말이여. - 아마 은봉은 이런 심사였을 것이다.

 

선대의 서산 대사가 후대의 은봉의 이 패러디 글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분명한 것은 은봉에게 할(- 고함 쳐서 깨침을 이끄는 방법)이나 방(몽둥이질로 깨침을 이끄는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란 나의 확신!

 

경청하는 대화법이 이렇게 갈등을 풀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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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서클1-.JPG» 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강산이 골백번 바뀌어도 대화는 보기 어렵다. 대화보다는 여전히 제 말과 주장과 평가만이 난무하니 양자의 독백이다. 이처럼 공감이 없는 관계는 힘들어지고, 갈등의 골은 회복되지 않는다. 인간의 과학지식은 로봇을 만들 만큼 진화했지만, 여전히 옆사람과 대화는 어려워한다.


이렇게 경청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인공지능의 ‘코딩’과 같은 대화 방식을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어처구니없는 발상 같지만 실제 이런 구상을 실현시켜 ‘관계의 평화’에 희망을 준 인물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다. 그는 1984년 ‘비폭력대화센터’(CNVC)를 설립해 비폭력대화법을 보급했다. 이 대화법의 핵심은 ‘듣기’다. 그냥 귀로 듣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다시 반복해서 말해줌으로써 ‘내가 당신의 말을 (‘내 편견과 판단으로’가 아니라) 그대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 간단한 대화술이 가져다준 것은 어떤 무기보다 효과적이었다.

 

지난 1~2일 인천 새봄교회 ‘평화영성센터 품’에서 이진권 목사와 김석봉 비폭력평화훈련센터 소장이 진행하는 ‘회복적 서클’(Restorative Circle) 워크숍이 열렸다. 비폭력 대화에 대한 마셜 로젠버그의 선구적 연구에 힘입어 등장한 새로운 모델이 ‘회복적 서클’이다. 이 모델은 학교폭력과 왕따가 많은 학교나 직장, 가족 내 갈등 현장에서 힘을 발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모델은 도미니크 바터라는 활동가가 인디언들이 공동체의 갈등 시 원으로 둘러앉아 대화하는 방식을 계승해 1990년대 중반 브라질 빈민가에서 사용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브라질 학교와 지역공동체에 확산되면서 브라질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됐고, 세계 20여국에 전파되면서 유엔기구에서도 주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2011년 도입된 이래 비폭력평화물결,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좋은교사운동, 갈등해결과대화, 개척자들, 회복적생활교육연구회 등을 통해 교육되고 있다.


‘회복적 서클’은 ‘회복적 정의’를 목표로 한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갈등과 다툼, 피해가 생겼을 때 처벌과 강제, 구금 등으로 문제를 처리하지만, 늘 가해자는 너무 지나치게 벌을 받았다고 하고, 피해자는 너무 벌이 적다고 하며 누구도 만족하지도 않고, 당사자 간 갈등과 원한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어서 처벌과 응보가 아닌 손상된 공동체의 치유와 관계의 회복, 공동체로 복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복명상-.JPG» '회복적서클'을 시작하기 전에 명상을 하는 참석자들

 

25명이 참석한 이 워크숍은 듣기 훈련으로부터 시작됐다. 둘씩 짝을 지어 마주보고, 한 명이 최근의 관심사에 대해 2분간 이야기를 하면 상대는 이를 듣고, 1분간 경청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식이다. 참석자들은 이런 단순한 대화에서 상대가 자기 말을 경청해서 반복해주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기 말이 상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진 데 대한 안도감이었다. 이 연습에 익숙해지면 다음엔 상대방 말의 사실뿐 아니라 느낌과 욕구까지 경청하고 이를 상대에게 이야기해주는 훈련이 전개된다. 말만 경청하는 데서 나아가 상대방의 속마음까지 경청하는 훈련이다.

 

이런 기초훈련을 통해 경청이 준비되면 이제 ‘회복적 서클’이 시작된다. 먼저 조를 짜서 ‘서클’, 즉 원으로 둘러앉는다. 그리고 각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자신의 갈등 사례를 꺼내놓는다. 이날 각자가 꺼내놓은 것 가운데 투표로 선정된 대표 사례는 교회에서 장로와 집사로 절친했던 둘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생긴 갈등이었다. 집사는 회사를 운영하는 장로가 같이 일해보자고 해 입사했는데, 얼마 안 있어 사장이 ‘능력도 안 되는 인간이 일도 열심히 안 한다’고 말한 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회복실습4-.JPG» 패턴대로 질문하는 '회복적 서클'진행의 시연을 보이고 있는 김석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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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로 나누어 '회복적 서클'연습을 하는 참석자들

 

이런 갈등이 발생했을 때 한쪽이 대화모임을 원하면 사전모임을 갖고 △어떤 말과 행동이 있었는지 △무엇을 다루고 싶은지 △대화모임에 누구를 초대하고 싶은지를 대화한 뒤 본모임을 열게 된다. 대화는 패턴이 정해져 있다. 핵심은 역시 경청과 반복이다. 진행자는 먼저 직원에게 묻는다. “지난번 일로 인해 ○○○님이 지금 어떠한지, 누가 무엇을 알아주시기를 원하시나요?” 어떤 대화든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 질문을 받은 직원은 “사장님이 내가 일할 때는 안 보고 잠시 쉴 때만 보고서는 게으르다고 단정해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럼 진행자가 사장에게 “무엇을 들으셨나요?”라고 묻는다. 그때 사장은 “여전히 자기가 잘했다고만 하네요”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이렇듯 경청하지 않고 자기의 판단으로 말하면, 진행자는 대화 과정을 반복한다. 결국 사장이 직원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 때까지 한다. 만약 서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의미 전달이 안 될 때는 진행자가 ‘저는 조금 다르게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입니다’ 식으로 의미를 전달해주어 대화를 돕기도 한다.

 

조별로 진행된 서클에서 조원들은 진행자와 사장, 직원, 팀장, 교인 등 배역을 맡아 패턴을 연습했다. 역할극을 하며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석자들은 흥미있어 했고, 부부싸움에서도 아이를 진행자로 놓고 이 패턴대로 해보고 대화해 보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본 서클에서 대화가 잘 진행됐을 경우, 막바지엔 실행방식(약속)을 정한다. 그 약속은 두리뭉실해선 안 된다. 만약 왕따 피해자와 가해자 간 서클이라면, ‘둘이 예전처럼 매주 화요일 2교시가 끝나고 매점에 함께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처럼 약속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회복책들-.JPG» '회복적 서클'과 관련된 서적들

 

 ‘회복적 서클’은 무엇보다 자발성이 중요하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서클은 이뤄질 수 없다. 피해자의 경우 ‘나보고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것이냐’며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대화모임은 법정 심판처럼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사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 말고 내면의 진심과 욕구 같은 것까지 꺼내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폭력평화물결 박성용 대표는 “학교폭력 당사자들 간 대화모임에서 처음엔 불만에 가득 찼던 가해 의심 학생이 점차 피해자의 심정을 공감하고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해지고, 피해 학생도 가슴의 응어리가 풀리는 모습을 보면 놀랍다”며 “대화는 문제아조차 회복의 기여자가 되게 한다”고 말했다.


좀 망가져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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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jpg» <나의 아저씨> 드라마 화면 갈무리.

 

요즘 뒤늦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아는 분이 꼭 한번 보라고 권해주어서 보게 되었어요.

<나의 아저씨>는 망가진 영혼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사람의 고통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많은 사람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 세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는 ‘괜찮아’입니다. 망해도 괜찮아. 50년을 살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어도 괜찮아. 사업이 망해도 괜찮아. 큰 죄를 지어도, 큰 실수를 해도 살아갈 수 있고 희망이 있다는, 우리 다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둘째는 ‘아무것도 아니다’입니다. 남자 주인공이 바람피우는 아내 때문에 무척 힘들어하다가 스님 친구의 절을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 친구였어요. 스님 친구가 뒤에서 슬쩍 안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친구의 따뜻함을 거부하다가 이내 받아들입니다. 종종 대사로 나오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이 드라마의 주제인 것 같습니다.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무상을 아는 것이 고통을 넘기는 비결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인정하면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은 낭만(로맨스)을 넘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자신의 고통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됩니다. 고달픈 삶을 사는 고달픈 영혼끼리 서로 지켜주는 따뜻한 러브 스토리입니다. 서로 집착하는 끈적끈적한 보통의 러브 스토리가 아닙니다.


‘나도 너도 아파. 그래서 우린 친구야’라는 겁니다. 나는 바닥이지만 너는 이렇게 되지 말라는 마음으로 서로 지켜줍니다.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상대방은 그렇게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 책임지는 인간의 참모습을 보여줍니다.

 

슬픔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생각하게 하고 삶의 아픈 본질을 알게 합니다. 삶은 아픕니다. 행복을 약속하지만 고통을 줍니다. 허망한 꿈을 평생 좇다가 망가집니다.

 

그런데 고통이 있어도 망가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지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엄청 괴롭습니다. 그리고 엄청 따뜻합니다. 엄청 우울합니다. 그리고 엄청 인간적입니다. 삶과 똑같은 거죠. 누구의 삶도 쉽지 않습니다. 힘든 걸 당연하게 여기세요. 앞으로 나가세요.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을 지켜주세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대사에서)


우리 잘난 척 안 해도 돼요. 못해도 괜찮아요. 우리 다 같은 처지예요.

충고하려면 희생 각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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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jpg

 

꽃붕어 두 마리가 먹이를 찾아 물속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태어난 아롱이와 검둥이였습니다. 아롱이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롱이는 얼른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들었습니다. 검둥이가 깜짝 놀라며 아롱이를 타일렀습니다. “저 지렁이는 낚싯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아롱이는 검둥이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봐. 네가 저 지렁이가 욕심이 나서 그러는 거지?” 그러고는 아롱이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검둥이는 아롱이를 더는 물속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15세기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는 “요구받기 전에 충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충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현명한 사람은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충고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현명하기 때문에 충고를 받을 필요가 없고 어리석기 때문에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충고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것은 상대를 생각해서 말한다고는 하지만, 자기와 관점이나 방식이 다르기에 답답해서 내뱉는 말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충고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소리로 여기게 하고 오히려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인간 사회에서 충고는 필요 없는 것일까요? 충고하는 사람의 자세와 진정성의 문제입니다. 글자 뜻대로 풀이하면 충(忠)성스러운 고(告)함입니다. 신하가 주군에게 어떤 일을 간(諫)할 때, 주군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겠다는 자세로 말하는 것이 충고입니다. 따라서 충고를 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충고하는 자가 갑(甲)의 자리에 앉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고를 가장한 지적질로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면서 하는 많은 충고가 사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잘못을 지적하는 충고는 듣는 귀를 막아버리고 반발심을 유발합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나은 점을 칭찬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선택의 기회를 주는 조언을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요청하지 않는 섣부른 충고는 참견에 불과하고 서로의 관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검둥이가 아롱이를 향해 진정한 충고를 한 것이라면 아롱이에게 낚싯바늘을 달고 있는 지렁이의 위험을 지적한 뒤에 자신이 친구를 위해 그 지렁이를 먹음으로써 아롱이를 깨닫게 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친구 아롱이가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했어야 합니다. 입이 근질근질하더라도 그의 입장을 존중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희생을 전제로 한 충고를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미국에서 더 재밌는 설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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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와하나님나라

 

강강-.jpg» 350명이 함께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

알렐루야알렐루야! 얼쑤남녀노소모여한데어울러져흥겨운자진모리장단에맞춰부르는노래소리가덮인메이플릿지마을에높게울려펴집니다. 우리전통가락은뭔가사람들의마음을휘어잡는이상한힘을가지고있는듯합니다얼마금요일저녁공동체잔치풍경입니다

 

잔치가있기주전, 교회형제들이저를찾아와우리가한국을너무모르고있는같다며한국의밤을열자고제안해왔습니다. 8영국에서미국메이플릿지공동체에이사온번도한국의밤을하지않았습니다한국의하면단연한국음식이빠질없습니다. 그나마 영국공동체에선다른한국가족들이있어함께힘을모아여러번보았지만이곳에선저희가족뿐이라 350명의한국음식을만든다는것이엄두가나지않아지난 8년간조용히지내왔습니다. 그러나이제는형제들이발벗고나서니이상뒤로없어동안우리에게보여준형제들의사랑에보답하는마음으로공동체가한국설을보내기로했습니다.    

 

 

세배-.jpg» 한국에서처럼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큰절로 세배를 하고 있다.

일주일전부터한국의광고가있어많은이들이잔치를기대를하고있었습니다. 이미여기저기서한국음식을먹어경험이있는사람들은메뉴가뭔가요?” 하고 궁금해합니다. 우리는드러내놓고말하지는않고 ‘불고기와다른음식가지를준비하고있어요라고살짝귀띔을해주면! 내가가장좋아하는한국음식이예요. 날을기다리겠어요.”라며기뻐합니다. 잔치날에의뜸은음식이죠. 누군가한국음식을 아주좋아한다고말하면집에초대해만들어주고싶어집니다. 어느누구라도맛있는한국음식을맛보면  맛에빠져들고자연스럽게한국을사랑하고한국을알고싶은욕망이생기게됩니다.  

 

이번설날메뉴는모두가좋아하는불고기, 잡채, 김밥 3종세트(참치김밥, 캘리포니아김밥, 햄과치즈김밥) 김치입니다. 드디어설날이다가오자아내와나는뉴저지에서설날사용할재료들을잔뜩사왔습니다주방에선그동안우리가정성스럽게길러도축한신선한소고기 100파운드를가져와불고기양념을해서재웠습니다. 한쪽에선자매들이음식에들어갈채소들을열심히썰었습니다공동체식구들이워낙많아잡채에들어갈당근만써는데도세사람이붙어도두시간이넘게 걸립니다. 불고기에넣을파만써는데도 2-3시간보통은야채를자를기계를사용하는데한국음식인지라직접손으로자르니점점미안해집니다김밥을돌돌말때는다른일터에서댓명의자매들이몰려와힘을보탰습니다. 모두들하하, 호호재미있어하면서자른김밥도집어먹고진짜잔칫집처럼떠들석합니다

 

서너명의자매들은아내에게한국음악이있으면틀어달라고우리가가지고있는국악CD틀어주었더니더욱신나게일합니다. 불고기나김밥은그래도까다롭지않는데350분의잡채를요리하는것이쉽지않아보입니다. 인터넷에서레서피를발견해그런대로쉬운방법을찾아시도했는데도아니나다를까간장소스물이너무많아빼느라한바탕야단법석을떨고그래도여전히맛이만족스럽지않은지아내가애를많이먹네요나는맛만있던데어쨌든이곳사람들어느누구도진짜잡채의맛을몰라모두들맛있다고좋아하니감사하지요

 

기와밟-.jpg기와-.jpg

강강술래 도중 기와밟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

 

저희공동체는여러가지파이등디저트를워낙만들지만한국의디저트는과일을빼놓을 없습니다. 그래서오늘은특별히한국을생각하며한국의겨울간식인귤과포도그리고파인애플로구성된 모듬과일접시입니다. (파인애플은내가좋아해식품담당형제에게요청했더니아주기쁘게지원해주었습니다.) 

드디어저녁 6잔치시간이다가왔습니다

식당로비문을열고들어오면한국의아름다운사계절풍경을담긴3분짜리동영상을있습니다. 한국의사계절동영상을보고는사람들이놀라말합니다. “아름다운나라입니다. 한번보고싶어요.” 다른볼거리는초승달처럼웃음을짖고있는양반탈독특한한국의색감을느낄있는조각보, 청록빛깔을전복껍데기로만든자개보석함, 신실함과사랑을상징하는원양새, 대나무로만든단소, 도자기수저받침대와숟가락과 젖가락, 둘째처형이국화와동백꽃을손수그려만든한국부채, 어린이한복, 전통개량활현무궁등등한국정서가가득히담겨있는것들을누구나눈으로보고손으로만져보게진열하였습니다

어른들에게는빛깔이화려하고복잡한색상의자개가눈길을끕니다. “도대체어떻게이런오묘한빛깔을만들어수있나요?”라며감탄을자아냅니다. 그래도어린이들이게는활이인기만점입니다. 너도나도것없이활시위를당겨봅니다. 유빈이는옆에서친구들이하는것을보고는한국의 활은크기는작지만탄력이높아세계최고로멀리수있는기록을가진활이라며자랑스럽게설명합니다

전시테이블한쪽에는접시에한국사탕을가득담아놓고는오직젖가락만사용해집으세요.’라는 글귀와함께젖가락을그릇옆에놓아두었습니다. 행사가끝나고로비에가보니 식기에가득담아놓아던사탕이하나도남지않았습니다. “아니모두들젖가락질을이렇게잘하나?” 혼자속으로생각했습니다. 다이닝테이블위에는하얀식탁보를깔고  위에다가한국을상징하는빨강색과파랑색초와  같은색의네프킨으로장식하고오늘의메뉴와함께한국에관한OX퀴즈가담긴팜플렛이세워져있었습니다

모두들들뜬마음으로즐겁게자리에앉자그날함께한 350명이한목소리로 흥이절로나는한국노래를신나게부름으로설날만찬이시작되었습니다. 젊은청년들이아침부터저녁까지하루종일준비한음식을식탁으로나르자마자여기저기서이렇게연하고맛있는소고기는처음먹는다며탄성을지릅니다역시한국의불고기가인기최고입니다. 보통식사때에는포크와나이프를사용하지만오늘은누구나 젖가락을사용있도록식탁위에젓가락을놓았습니다. 우리가족과같은테이블에앉은친구데릭은나와함께종종한국음식을먹어서그런지이젠젖가락질이제법입니다. 하지만다른이들의  서투른젖가락질을보니절로웃음이나옵니다. 만찬도중에내가젖가락으로완두콩그릇을먹는사람에게는푸짐한상품을줍니다.”라고광고를했습니다. 식사가끝나고형제가찾아와그렇게하려고했어요, 근데다른맛있는음식들이너무많아그것들을먹느라고포기했어요.”라며은근히자신의젓가락질솜씨를자랑했습니다. 

 

남생-.jpg수염남생-.jpg어린이-.jpg

호명된 연령대들이 함께 가운데로 나와 남생이(거북이) 흉내를 내며, 남생이춤을 추고 있다.

식사가어느정도끝나가고한국의관한상식퀴즈정답을맞추는시간입니다. 정답을모두맞춘자매와형제가한국배와유자차를상품으로타가자모두들너무부러워합니다. 한국배는이곳배와달리달고아식하며즙이많아한번사람들은맛을잊지못합니다. 유자차또한이곳에서맛보지못하는상큼하고새콤달콤한맛으로  이곳사람들에게아주인기만점입니다유자차맛에반한자매는오렌지로유자차처럼만들어보았지만맛이안난다며아쉬워합니다


한국상식문제가끝난그동안우리가야심차게준비한브루더호프형제들불닭볶음면도전비디오를보여주었습니다. 얼마우연하게영국남자불닭볶음면도전동영상을보고는너무웃겨우리도한번도전해보기로했습니다.  


평소매운맛을아주즐기는몇몇형제들과그렇지않은형제들을섞어서 9명이불닭볶음컵라면에도전했습니다. 우리도사람들이하도맵다고해서시도할엄두를  못내아직먹어본적이없어아내가그만물을일반컵라면처럼부었네요. 그래서그런지매운맛에익숙한형제는생각보다별로안맵다며매운것없냐며금새먹어버렸지만반면에매운맛에익숙하지않은형제들은땀을뻘뻘흘리며너무매워서2리터짜리우유병을통째로마시며난리가났습니다. 공동체가모습을보며배꼽을잡고뒤집어졌습니다


나중에몇몇형제들이제게찾아와자기들도도전해보고싶었다며아쉬워합니다. 스컹크소동유빈이를격려한유빈이친구댄절은가만히제게오더니자기도매운맛을보고싶다고(?) 해서붉닭컵라면을선물로주었습니다.   


맛있는저녁만찬이끝난  식탁들을치우고모두들원을그리고앉아설날세배를설명한모든어린이들과학생들이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세배를드렸습니다. 세배를받은분의할아버지께아이들에게덕담(Wish)들려달라고부탁드렸는데왠일인지혀가자꾸꼬여wish 발음이안되어번이고헤매자랜디할아버지께서자기고향에선wish성훈처럼발음한다고위트있게말하자모두들박장대소합니다. 주로부모님말씀들으라덕담과함께(동서양을막론하고부모님말씀잘듣는가장중요한같습니다^^) 할머니들께서세배돈대신미리준비한빼빼로를아이들에게나누어주었습니다


세배공동체가함께하는강강술래시간입니다. 사실공동체에와서야한국을알리는춤으로강강술래를접하다보니보통우리가아는손잡고빙글빙글도는강강술래외에문지기놀이, 남생이놀이, 청어엮기, 덕석말이, 기와밟기등다양한춤이강강술래춤에함께  있다는알게되었습니다손잡고도는건  한국에서텔레비전을통해자주봐서알겠는데. 외의춤들은잘몰라아내가여기저기묻고, 유튜브를통해배웠습니다. 그러나 350명이강강술래를하는것이쉽지가않아유빈이선생님인어니형제에게도움을청했습니다. 어니는오랜세월아이들가르친경험이있고댄스를가르치는데도일가견이있습니다. 먼저어니와  유빈이반아이들이 강강술래를배웠습니다


공동체전체가강강술래를시작하기전에춤은추석이나, 설날, 정월대보름에우리민족이추던춤이라는설명을하고나서어니는통솔력있게강강술래춤을이끌었습니다. 다함께원을만들어손을잡고아내가메기는소리로강강술래앞부분을부르면공동체전체가받는소리로강강술래하며  후렴구를답하며중모리, 자진모리등의장단에맞춰천천히걷다가거의뛰어가며원무춤을열었습니다.   


덕석몰이는 ‘몰자몰자덕석몰자하는메기는소리와비온다덕석몰자받는소리를부르면서앞사람이달팽이같이안쪽으로 둥글게돌아가면뒤의놀이꾼들이차례로덕석(멍석)말듯이겹겹이돌아드는춤입니다이어풀자풀자덕석풀자  ‘해난다덕석풀자부르게되면 말아놨던멍석을다시풀듯이다시돌아나와원래의형태로돌아오게되는데돌면서 옆으로비껴가는형제들의얼굴들을보고서로기뻐하며  활짝웃는모습에마음까지훈훈해집니다.  

 

남생아놀아라춤은남생이는거북이를지칭하는말로써거북이가껍질에서고개를뺏다가넣었다하는모습과뒤뚱뒤뚱옆으로걷는웃긴모습을흉내내선창하는사람이남생아놀아라부르면남생이가앞으로나와춤을추게되고나머지사람들은촐래촐래가논다하며답합니다. 어니선생님이남생이대신수염기른형제’, ‘이름에알파벳 S’시작하는사람들을부르자거기에해당되는사람들이정말가관도아닌웃긴춤을추면서가운데로왔다가사라져갑니다.   ‘3-4학년어린이들놀아라부르자갑자기아이들이땅을기면서진짜거북이처럼흉내내며춤을춥니다. 모습이얼마나귀여운지역시아이들답습니다. 다른사람들은  흥겹게박수치며  ‘촐래촐래가잘논다답하면서형제들과아이들의춤을지켜보며웃느라장난도아닙니다.

 

남생이춤에이어기와밟기시간입니다.  50미만의모든형제들이나와허리를숙여앞에있는형제의허리를잡고기와를만들면어린아이들이아빠엄마의손을잡고형제들의등을밟고지나갑니다. 장난끼있는형제들몇몇은일부러등을이리저리움직여아이들이휘청휘청스릴넘치게걷게합니다. 옆에서이것을지켜보는재미가만만치않습니다. 마지막아이가기와밟기를끝내자모두가손뼉치며환호합니다. 춤이끝나고아이들이와서춤중에서도기와밟기가제일재미있었다며여전히흥분되어우리에게말해줍니다 


다이닝 룸에 삼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둥근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은 어린 아이 청년들 노인들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멀찍감이 떨어져 지켜보니 사람들이 신명나게 노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드문 풍경이였습니다. 이곳이 미국인지 한국인지 나도 잠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춤은 한국 놀이이지만  춤을 추는 이들이 모두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바탕 춤으로 한국의 열정을 몸으로 경험한 후 끝으로 분단을 상징하는 비무장지대(DMZ)를 소개하며 한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한국의 밤은 막을 내렸습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모든게휴식을취하는시간이였어요. 일년에 3번씩은이런행사를해야겠어요.”

한국을마음으로몸으로느끼는소중하고의미있는시간이였어요.”

한국의분단의현실을정말가깝게느끼게되었어요.”

어떻게한국의미래를하나님이인도하실지기대가되요. 한국을위해기도할께요.”

 

다른공동체에살면서한국의밤에초대받은형제의감사편지입니다

‘….. 어제한국의행사는경이로웠습니다. 무엇보다도하나님께서분의일을위해우리모두를함께모이게하심을감사드립니다. 다이닝룸에이렇게많은형제들, 자매들, 어린아이들이함께하는것은우리에게훗날언어를초월해모든민족과족속이천국잔치에초대되어질하나님나라를맛보게하는시간이었습니다. 어제밤은좋은시작이었습니다. 이는하나님의도움으로계속되어지고성장할입니다. …..’


분의편지를읽으면서 한국의밤이땅에하나님나라의전진을위해조금이나마기여했다는것에동안의 수고한모든피로가씻겨나가는같았습니다. 우리가경험한한국의초창기브루더호프에조인한스위스형제한스마이어의말을생각나게합니다.  

 

물줄기를따라거슬러올라가면물이흘러나오는근원과만난다” - 한스마이어

낙원빌딩에 엔피오피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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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영리단체(NPO)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소신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서울 종로 낙원악기상가로 유명한 낙원빌딩 5층에 개관한 ‘엔피오피아’(NPOpia)다. 그야말로 엔피오들의 유토피아가 생긴 셈이다.
 이 공익사업을 벌인 곳은 기독교공익법인 한빛누리재단이다. 이 재단은 공익경영센터를 공식 발족하고 NPO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공유오피스를 만들었다.


 엔피오피아는 부대시설 120평을 포함해 총 270평(약 900㎡) 규모로, 40명이  동시에 근무할 수 있는 공유오피스와 1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멀티미디어 강연실,  세미나실, 다용도 전시공간, 중소형 회의시설, 휴게공간 등을 복합시설을 갖췄다.
 일반적인 기업형 공유오피스와 달리 NPO를 위해 민간이 운영하는 최초이자 최대다목적공간으로, 시청 앞 서울시NPO지원센터보다 1.5배가량 넓다.

 공익경영센터는 공익경영아카데미를 운영해 NPO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해왔다.
 그동안 국내외 연수과정을 통해 2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으며, 7기 과정은 오는 21일부터 5월 16일까지 10주간 진행된다.
 비영리단체 및 시민운동 분야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강사들이 수강생들에게 NPO 경영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전한다.
 공익경영아카데미는 초기에는 기독교단체에서 일하는 실무자들 중심으로 과정이 진행됐으나, 점차 일반공익기관과 사회적기업 실무자들도 찾고 있다고 공익경영센터는 밝혔다. 엔피오피아 역시 종교와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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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피오피아의 모습들

 한빛누리재단은 인천국제공항, 국립중앙박물관, 월드컵 상암구장, 청와대 본관과 춘추관 등을 설계한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였던 정림건축의 고 김정철 회장(1932~2010)이 2004년 설립한 선교재단이다. 재단은 현재 9천여명의 후원자와 함께 연간 20억원 이상을 70여개 선교단체 및 공익기관에 지원하고 있다.
 재단이 운영해온 공익경영센터는 올해 별도 조직으로 독립해 엔피오피아와 공익경영아카데미 운영을 맡는다.

 공익경영센터 김경수 대표는 “궁극적으로 비영리기관 생태계가 건강하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며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기독교만이 아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고 말했다.

인연, 멀리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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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운 관계를 다루는 3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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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함: 관계가 너무 좋지 않아서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계속 해가 되면 멀리하는 것이 최선일수도 있습니다. 함께 있어서 좋은 일이 없으면 가능한 만큼 멀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멀리 할 때는 친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희망이 전혀 없는 것 같으면 마지막 단계로 이혼, 이별도 괜찮습니다. 


• 자비심: 관계를 통하여 용서와 내려놓음과 겸손을 배웁니다. 아집을 닦는 기회로 삼고 자비심을 실천합니다. 유독한 관계를 유익한 관계로 탈바꿈 할 수 있다면 엄청난 공부가 될 것입니다. 

• 받아들임: 주어진 인연을 존중하고 일체 개념을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립니다. 감정을 만들지 않도록 잘 알아차립니다. 늘 변하고 알 수 없는 관계의 무상함을 열린 마음으로 허용합니다.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을 일깨워주는 원인으로 삼고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림 속으로 녹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쁜 감정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정당하게 바른 말과 행동을 합니다. 가장 높고 깔끔하고 훌륭한 방법입니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던 유독한 관계에서 해를 입지 않고 수행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3가지 다 활용해 봐도 좋습니다. 수행자에게는 유독한 관계가 큰 선물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게 되고 공부거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피입니다.

 

당신을 위해 결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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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차 주부 “결혼 전 자상했던 남편, 결혼 뒤 비난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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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고등학생 아이가 둘 있는 18년차 주부입니다. 결혼은 저의 삶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결혼 일주일 전 남편은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지키느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충격적인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살 충동과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나 이젠 다 나아서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결혼 전 남편은 나를 보석처럼 여겼고 뛰어난 유머 감각과 섬세한 배려심으로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고, 부모님과 사는 삶이 편안해서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게 부드럽게 접근하는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은 변했습니다. 신혼 시절 임신을 해서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논문도 써야 했던 저에게 남편은 늘 불만을 말했습니다. 음식 못한다, 청소도 못한다, 결혼을 잘못했다며 집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남편을 위해 각종 요리를 했지만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먹지 않고 나가 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여름에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코를 막고 날 더러운 벌레 보듯 했던 기억이 납니다. 출산 뒤 아이가 울면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결혼한 지 1년쯤 되던 날, 그는 내가 싫어서 직장을 멀리 있는 곳으로 간다며 내 곁을 떠났고 아이와 나를 남겨두고 한달에 한두번 집에 왔습니다.

 

남편에게 수시로 이혼하자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남편과 헤어지지 않은 이유가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아이에게 좋은 가정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뭔가가 잘못이라면 나만 잘하면 이 가정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내 삶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그리고 부모님께 아픔을 안겨 주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잘못되면 동생들도 결혼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버텼습니다. 남편 앞에서 무릎도 꿇고 잘못했다고 늘 빌었습니다.

 

외국에서 같이 살 때도 남편은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었고, 다른 주부들과 비교했습니다. 제가 무능력자인데다 제 스스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며 그걸 사람들에게 말하겠다며 협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부부에게, 이웃에 사는 주부들에게 자신의 가족사며, 내 흉을 시시콜콜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울기도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직장 관계로 주말부부를 하고 있고, 남편은 많이 변했지만 아직 저는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남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나무


A. 고통의 시간을 꿋꿋이 견디고 감내하며 저력을 키워온 사람들을 저는 존경합니다. 그사이 그들에겐 고통을 직면할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상처로 생긴 굳은살이 훈장처럼 보입니다. 나무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문제와 제대로 직면해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남편이 왜 그랬을까, 내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내용의 질문은 사실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들이죠.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결혼하는 게 아니고, 결혼해서 어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무님 부부도 그랬을 겁니다.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그래서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소녀와 소년이 만난 것이지요.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에 보답하려는 착한 소녀와 엄마를 지키느라 유년기를 잃어버린 소년이 결혼했습니다. 소녀는 인간의 삶에서 밝음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소년은 세상의 어둠을 너무 많이 지켜본 아이였습니다.

특히 소년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지키면서 격심한 분열을 겪게 됩니다. 하나는 엄마의 시선이고, 하나는 아빠의 시선이지요. 엄마와 동일시됐을 때 소년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아빠의 시선으로 보면 엄마는 혐오스럽고 답답한 사람이었겠지요. 소년의 마음속에도 무능력한 엄마에 대한 분노가 자라고 있었을 겁니다.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 보호가 필요했으니 말이지요.  

 

엄마에 대한 염려와 분노는 그대로 아내에게 향했습니다. 소년은 아내가 엄마처럼 노력하지도, 문제를 직면하려고 하지도 않고, 무능력하다고 길길이 뜁니다. 늘 술취한 아빠가 집에 들어올 때 아들이 느꼈던 심정으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엄마, 피해요. 아빠에게서 도망쳐요. 그렇게 무기력하게 굴지 말고, 혼자 나가서 씩씩하게 살아 보란 말이에요!  

반면에 소녀는 세상의 어둠이 두려웠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건 옳지 않고 나쁜 것이니까요. 그래서 소년이 하는 말이 아득하게 느껴졌고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소년도 자신이 왜 아내를 괴롭히는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거예요. 알았다면 그렇게 오래, 자기 아내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끝없이 상대를 비난합니다.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해소할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상대에게 그 책임을 떠넘깁니다. 자신의 문제가 자기 안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착한 소녀는 수많은 시간을 남몰래 울었을 겁니다. 자기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굴욕도 감내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문제와 직면할 힘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특유의 강한 힘과 저력으로 소녀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어느덧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무님, 우선 남편의 말을 들어 보세요. 그가 당신을 비난하거든 말을 중단시키세요. 나를 비난하지 말고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게 뭔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해 봐요 하고 말하세요. 그의 말을 충분히 듣고, 당신이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당신도 이야기하세요.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외롭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 많은 시간들을. 그에 대해 길고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으세요. 그리고 그를 더 지켜보세요. 그가 진짜 변한 건지 아닌지.  

그다음 전적으로 당신의 판단으로 미래를 결정하세요. 그가 요구한 것들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와 기꺼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롯이 당신의 행복과 존엄을 위해 결정하세요. 이제 남편의 불행한 과거도, 당신의 부모님도, 자식도 그 결정의 주요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망연자실할때 가만히 있지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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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연자실
인격내부의 여러가지 감정들이복잡하게 얼키고 서로 견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상태에서는 일을 하거나 사회적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빈약한 정신구조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소위 신경증이라고 말합니다.


이런상태는 심리적으로 죽어가는것입니다. 이런때 아무것도 하지않으면 붕괴속도는 더 빨라집니다. 그리고 심리적 등창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때에는 움직이고 무언가를 해야합니다.
그래야 어두움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자아를 구할수 있습니다.


화가 고흐는 평생 신경증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작업을 통하여 정신병으로 진행하는것을 막았습니다. 아무것도 할수없을때 무언가를 하는것, 그것이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재개발현장에서 지독한 무기력감에 시달릴때, 술에 취해 현실을 잊고픈 유혹이 밀려왔을때, 자전거를 타고 그냥 달렸습니다. 밤이 와서 불안감 우울감이 덮쳐올때 미친듯이 글을 쓰고 또 썼습니다. 외부의 적보다 내안의 적이 더 문제란것을 인식하고 포기하자는 유혹자의 소리와 싸웠습니다. 그랬더니 서서히 나를 붕괴시키려는것들이 물러나고, 힘이 솟는것이 느껴지더군요.


망연자실. 나를 덮치려는 어두운 것들에 굴복하지마세요. 그것들은 덩치는 크지만 근성있는것들은 아닌지라 버티고 또 버티면 제풀에 물러납니다.


승리보다 배움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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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손자가 장기를 두었다. 손자가 매번 졌다. 손자가 말했다. “할아버지, 재미없어요. 맨날 지고”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 할아버지가 져주랴? 네가 항상 이기면 너는 배우지 못하게 돼.” 손자가 말했다. “할아버지, 난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기고 싶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기고 싶다고?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배우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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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기면 기분은 좋지만 배우지는 못합니다. 성공과 성장은 다릅니다. 성공은 이기는 것이고 성장은 배우는 것입니다. 성공한다고 항상 성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성장하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성공은 이기는 것이지만 성장은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는 것입니다. 이기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성장의 원리입니다. 세상에는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장은 여러 개의 실패가 모여서 된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실패의 구슬을 모으면 성장의 왕관이 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영적 성장도 많은 실수와 실패를 딛고 끝까지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성공보다는 성장에 가치를 두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나쁜마음, 나쁜행동 도긴게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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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보다 말보다 마음이 업을 만듭니다. 행동보다 말보다 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동기가 행복을 만들고 고통을 만듭니다.
누구를 죽이고 싶으면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악업을 만듭니다. 고통의 씨앗이 심어지고 악한 마음의 경향을 강화합니다.
여자랑 자고 싶으면 관계를 갖는 것과 비슷한 업을 갖게 됩니다. 갈망이 심해집니다.
업은 마음의 경향성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경향은 동기로 만들고 강화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좋아하면 우리에게 불행의 원인이 생기며 다른 사람의 행복에 기뻐하면 우리에게 행복의 씨앗이 심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행동에 찬성하면 우리가 그 행동을 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선행을 찬탄하면 우리가 그 선행을 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갖게 됩니다.
선업 악업,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 조심하이소!

스트레스를 이기는 쉼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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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대표적 월간지인 <불광>의 4월호 주제는 ‘세계불교의 흐름을 바꾼 티베트 불교의 힘’이다. 그만큼 서구에서 티베트불교의 영향력은 확산일로에 있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이 로마에 나라를 잃었지만 방랑의 여정에서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티베트인들도 중국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세계를 떠돌면서 영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그 바람이 간단치않다. 지난해말 티베트불교 고승인 삼동린포체가 방한해 큰 반향을 불러왔고, 지난달엔 티베트의 선(禪)인 족첸을 미국에서 전하고 있는 낄룽린포체(56)가 세첸코리아와 행복수업 초청으로 방한해 티베트 명상붐을 일으켰다.


 그가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5박6일 이끈 족첸안거수행엔 80여명이, 서울 덕성여대평생교육원에서 2일간 한 대중수련엔 130여명이 각각 참여해 티베트의 명상이 한국에서도 이제 대중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쉼의 기술>(담앤북스 펴냄)이란 책도 출간한 낄룽린포체를 만나, 책 부제대로 ‘욕망과 불안에 지친 삶을 변화시키는 명상법’에 대해 물었다.

 쉼의기술.jpg “붓다의 가르침은 삶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명상을 방석 위만이 아니라 일상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는 먼저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명상’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에서 명상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용까지 대주는 것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집중력을 키워줘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면서 “명상은 불교를 믿든 믿지않든 종교와 상관 없이 자신의 삶을 위해 누구나 배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상은 스트레스를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불행과 우울함을 치유할 수 있다. 명상은 우리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줄수 있다.”
 그는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명상에 익숙해지면, 방석에 앉아 있지않은 시간에도 자연스럽고 노력 없이도 행복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는 명상법을 일곱가지로 정리한다. 일곱가지 명상법이 약간씩 차이가 있긴하지만 모두가 ‘우리의 마음을 쉬게 하고 이를 열어 명료함과 단순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곱가지 명상의 공통점은 차분하지 못하고, 거친 말썽꾸러기 마음을 점진적으로 길들여 집중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과정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길들여지지않은 말은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 멀리 달려나가거나, 공격하거나, 땅을 차서 먼지를 일으키고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좋은 훈련사는 참을성을 가지고 말이 조용하고 얌전히 있을 수 있도록 천천히 가르친다. 그래야 더 행복하고 평화롭게 인간과 사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티베트 오지인 캄지방 태생인 그는 18세기에 낄룽사원을 설립한 낄룽린포체의 5번째 환생자로 어린시절 인정을 받아 10대에 3년간의 치열한 수행을 거쳐 17살의 어린 나이로 대사원인 낄룽사원의 주지를 맡았다. 그는 1993년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서양인 제자들을 만났고, 그 이후 가르침을 요청하는 서양인들의 요청에 따라 미국 시애틀에 명상센터를 꾸려 미국과 유럽 남미, 인도, 동남아 등지에서 족첸 명상법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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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의 전통 수행자이면서도 대중수련에서 세속적 질문에도 흔쾌히 답하는 걸 보면 신세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대중수련에서 한 여성 참석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차여서 마음이 아픈데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통상 탐욕으로 관계를 맺는다. 불교는 늘 변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떤 관계도 고정된게 아니다. 상대도 변화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당신도 스스로 자책하고 비난하지 않고, 자신에게 자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족첸의 핵심 요소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또 ‘직장에서 내가 내린 결정에 동료가 이의를 제기할 때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편안하게 마음을 열고 적대감을 표출하지않고도 그 사람과 관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며 “명상의 평안한 에너지를 가진다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을 수 있어도 이전보다는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될 것이고, 점차 (마음) 열림이 가진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명상의 기술만이 아니라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않았다. 현대인들이 일, 경쟁, 공부, 심지어 가족생활로 인한 중압감에 압도돼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마음이 바빠지는데, 행복, 우정, 안락함, 사랑, 성공, 기쁨 같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적 세계에만 의존해 물질만능주의를 따르는 생활방식을 택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7세기 인도의 고승 산티데바의 말을 빌어 평화와 행복을 위한 동기를 새겨주었다.
 "이 세상에 어떠한 기쁨이 있든지 간에, 모든 것은 다른 존재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데서 온다. 이 세상에 어떠한 고통이 있든지 간에, 모든 것은 오직 자신만이 행복해기를 갈망하는데서 온다."

나만 힘든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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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여행이란 낯선 침대와 만나는 행위다. 낯선 것은 침대만은 아니어서 음식이 다르고 거리의 풍경도 다르고 언어와 풍습,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같은 것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 하는 이유다. 그러한데도 우리는 왜 먼 길을 떠나려는 걸까? 뒤집어보면 바로 그 다름과 낯섦이 여행자를 설레게 한다. 먼 곳으로 이끄는 동력이다.

그런 생각에 도달할 즈음 포르투갈 북부의 ‘포르투’라는 낯선 도시가 나를 유혹했다. 비시즌이라 매우 저렴한 항공권이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익명이 끄는 유혹이었다.

“아는 사람 단 한 명 없고, 말도 모르는 곳에서 완벽한 이방인으로 지내보면 어떨까?”


혼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가급적 발바닥으로 그 도시를 만날 것, 검소하게 지낼 것, 현지에서 생활 체험을 많이 할 것, 이런 3원칙이었다. 호텔이 아니라 현지인의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리기로 했다. 관광 중심지에서 살짝 비켜 있던 그 집은 포르투의 은퇴자 부부가 방 여러 개를 세놓아 생활하는 곳으로, 투숙객들은 대부분 장기 체류자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건축학 석사 과정의 남녀 커플 유학생, 디자인 일을 한다는 헝가리 여성 직장인, 온라인 마케팅 일을 하는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30대 남자, 러시아에서 온 여행업 종사자 등 글로벌 하숙집 분위기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그 집에는 작은 규칙이 있었다. 저녁 7시가 되면 부엌에 모여 저마다 준비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눴다. 개인의 영역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되 식사 때만큼은 모여 함께 만들고 나누는 공간, 진정한 의미의 공유부엌이었다.

부엌은 흡사 세계 음식 경연대회가 열린 것 같았다. 한국의 전골 비슷한 포르투갈의 프란세지냐, 헝가리의 굴라시(매운 수프), 프랑스의 양파 수프,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송아지 고기로 만든 커틀릿) 같은 것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대부분 아직 주머니에 여유가 없는 까닭도 있겠지만, 절약 정신이 배어 있었다.

“한국 음식은 어떤 거야? 한번 만들어봐!”

 

그들은 나에게 요리 동참을 권유했다. 멀고도 먼 극동에서 온 중년 아저씨를 글로벌 식탁에 끼워준 것은 물론 고마웠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다른 음식 재료 준비 없이 왔던데다, 솔직히 말하면 요리를 할 줄 몰랐던 까닭이다. 국경을 벗어나 혼자가 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생활해왔는지 깨닫는다. 삶의 가장 기초인 식사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는, 초라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심은 심정이었다. 초면에 아무것도 안 하고 얻어먹기도 무엇해서 나는 설거지를 자청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돌자 헝가리에서 온 여성이 어디선가 술 한 병 들고 왔다. 슬로바키아 산악 지대에서 생산되는 ‘타트라트’(Tatrat)라는 이름의 75도 독주였다. ‘불탄다’라는 어원을 가졌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큼 독한 술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말 목구멍이 불탔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람들은 더 가까워진다. 식탁에 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굳이 대륙의 끝에 있는 이 도시까지 온 이유는 뭐냐?”

“포르투는 날씨가 좋고, 무엇보다 물가가 무척 싸. 우리는 여기서 살고 싶어. 부모님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우리 힘으로 살 거야. 일단 우리 전공인 건축 분야에서 인턴 자리는 나왔으니 여기서부터 뭔가 천천히 만들어보려고 해!”

독일 옆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온 남녀 커플의 답변이다. 그러자 프랑스에서 온 남자가 끼어들었다. 보르도 출신답게 와인에 일가견이 있고 요리 솜씨까지 뛰어났다. 외국 여러 곳을 이동하며 일하고 있는 덕분에 영어가 매우 유창했다.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 전까지 함께했던 회사가 파산했어. 몇 달 일한 건 무용지물이 된 셈이지. 그래도 나는 돈과 자유의 균형을 잃고 싶지 않아. 여기서 힘을 길러 다른 도시로 옮길 생각이야.”

그는 디지털 노마드였다.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유목민처럼 도시와 국가를 이동하는 삶이라는 단어 뜻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유란 얼마나 힘들 게 얻어지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헝가리 여성에게 물었다.

 

“지금 너는 뭐가 가장 간절하냐?”

“나는 포르투에서 자리잡고 싶어. 유럽연합에 통합되어서 이곳까지 건너올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좋은 일자리는 구하기 힘들어. 헝가리는 한때 유럽의 변방 취급받았거든. 이제는 중심으로 나갈 차례야.”

 

서울에 있을 때는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로운 줄 안다. 당연하지만 이들에게도 저마다 다른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도 희망이 큰 만큼 더 불안한 미래와 싸우고 있었다. 포르투라는 도시는 대륙의 한쪽 끝에 있어 변방이라 할 수 있다. 식탁에 함께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아직은 변방, 주변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조앤 롤링을 꿈꾸고 있었다. 포르투갈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가 이혼한 영국 여인,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때면 카페에서 냅킨에 뭔가 메모하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는 그 여자 말이다. 허접해 보일 수 있던 그 메모는 어느 날 <해리포터> 시리즈가 되어 황금을 낳는 연금술사 구실을 했다. 그처럼 인생의 반전을 이뤄낸 곳이 바로 포르투란 도시였다. 그렇다. 힘들수록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 변방은 어느 날 갑자기 중심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총 내리면 우리는 같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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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jpg»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들이 학살된 퐁니퐁넛마을에서 추모의 기도를 올리는 순례단들. 사진 밝은누리 제공

 

얼마나 긴 길을 걸어야 인간이 인간으로 불려질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전쟁터를 날아야 포탄이 없어질까/ 얼마나 더 죽어야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반전 가수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의 가사처럼, 상흔의 현장을 찾아 걸으며 묻고 돌아온 이들이 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단이다. 서울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에서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함께 살고 있는 밝은누리를 중심으로 한 순례단은 21일 순례기를 들려주며 여전히 먹먹한 느낌을 전했다.

 

13-.jpg» 지뢰 폭발로 양눈을 실명한 베트남인 응우옌럽이 전쟁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밝은누리 제공

 

 

11-.jpg» 학살된 민간인들을 위한 위령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순례단들. 사진 밝은누리 제공

 

 순례단 70여명은 지난 14~19일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마을인 하미마을과 퐁니·퐁넛마을을 찾아 희생자 가족들을 만났다. 1968225135명이 숨진 하미마을에서는 한국 군인들이 사탕을 나눠준다며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을 난사한 뒤 탱크로 밀어붙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불까지 질렀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순례단은 늘 일제에 대한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분노하다가 가해자의 입장으로 그들을 대면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 감히 용서치유같은 걸 언급할 수도 없었다.

 

 증언자로 나선 이는 전후 이 마을에서 밭을 일구다 지뢰가 터져 두 눈을 실명한 응우옌럽이었다. 그는 당시 참상의 현장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어머니 팜티호아가 생전에 늘 증오심을 벗어나 해원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고는 순례단의 기도회에 함께했다. 순례단은 처참했던 아픔을 지닌 그들을 바로 볼 수 없어 찬송하며 기도했다. 그 기도의 응답인 듯한 말을 한 이는 반레 시인이었다.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란 장편소설의 작가이자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그는 베트남전에서 부대원 300명 대부분이 죽고 살아남은 5명 중 하나다. 반레는 그때 죽은 전우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합친 새 이름이다. 그런 그의 눈에 증오심이 아닌 평화가 영글어간다는 게 희한한 일이었다. 반레 시인은 늘 어머니가 들려주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의 어머니는 네가 적을 향한 총구를 거둬들일 때 거기엔 적이 아니라 단지 한 인간이 서 있단다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서로를 겨눈 총을 내려놓으면 누구나 아파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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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레.jpg»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열망을 순례단들에게 들려주는 반레시인. 사진 밝은누리 제공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는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탐욕가들은 늘 증오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그 속으로 몰아넣어 서로 죽이게 부추기기 마련인데, 반레 시인을 비롯한 이들이 참혹한 참상을 겪고서도 그 작동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다고 했다. 반레 시인은 우리가 승리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였다고 말했다. 정인곤 공동체지도력훈련원 간사는 가족과 마을 분들이 죽거나 다치는 걸 보고 여전히 그 슬픔을 안은 채 살아가면서도 슬픔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이들을 보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토록 깊은 상흔 속에서도 어떻게 용서와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로선 공감이 쉽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대해 최철호 대표는 우리는 여전히 제국주의가 만든 분단체제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천년에 걸친 중국 지배와 프랑스 백년 지배, 미국과 일본을 차례로 물리쳐 승리했다는 자부심과 정신적 우월감이 있는 듯하다무조건적인 증오심을 경계하며, 프랑스에 대해서도 탐욕에 젖은 전쟁지도자들과 선량한 프랑스 백성들을 구분해야 한다우리를 돕는 프랑스 국민들이 있어 우리가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고 베트남 국민을 설득한 호찌민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평화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한 것 같다고 평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참상의 와중에도 아기들에게 베트남의 얼과 역사가 담긴 자장가를 들려주며 세상도 베트남의 역사도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희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순례단이 부른 평화와 희망의 노래는 한국 아이들의 마음에도 씨앗이 되어 심어졌다. 심지연(덴마크대사관 직원)씨가 데려온 세살 딸은 매번 반복해 듣는 순례단 노래를 외워서 가끔씩 엄마, ‘지치고 어두워진 얼 밝혀~’ 해줘하며 조르기도 했다. 열살, 네살 두 아이를 데려온 김하룡 변호사는 아이들이 전쟁 당시 사진을 보며 이 형 누구야’, ‘이 삼촌 누구야묻곤 한다이 아이들의 몸에 각인된 평화의 열망이 새로운 한국을 여는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14-.JPG»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순례중 역사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하는 순례단. 사진 밝은누리 제공

 

16-.jpg» 광주 5.18항쟁 영령들이 잠든 망월동묘역에서 기도회를 하는 순례단. 사진 밝은누리 제공

 

17-.jpg»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에서 기도회를 하는 순례단. 사진 밝은누리 제공

 

그랬다. 이들이 생명평화 고운울림이란 순례단을 꾸려 2017년 세월호 합동분향소가 있던 안산과 제주 4·3학살 현장, 부산 유엔묘지, 광주 5·18항쟁 현장, 고성 통일전망대 등을 순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난해 여름엔 고대사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 간도·연해주를 누비며 기도한 것도 다음 세대가 열 세상은 지금까지의 증오의 싸움판과는 다른 평화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열차 안과 바이칼 호수에선 기도회에 구경하러 몰려든 관광객들이 이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공명을 일으켜 함께 펑펑 울면서 치유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들의 순례는 그런 위로만이 아니라 치열한 배움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치유와 평화란 망각으로써가 아니라 깨어 있음으로 열린다는 것을 알기에 가서, 보고, 기록하고, 기억했다. 심지연씨는 지금 사는 인수동 마을 뒷산에 조병옥 박사의 묘가 있어서 그곳에서 만날 약속을 하곤 했는데, 제주4·3 현장을 돌아보며 그가 바로 학살의 주요 책임자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놀랐다고 했다. 허정은 생동중학교 음악교사는 “4·3 제주에서 빨갱이 잡는다고 무차별 살해한 이들이 베트남에 투입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고, 베트남 참전자가 다시 5·18 광주에 투입돼 시민들을 죽였듯이 폭력과 살육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명확하게 기록하고 반성하고 일상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관성대로 힘의 논리대로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마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순례단은 410~14일엔 일본을 찾아 일제 한인 징용 피해 현장과 재일조선인들의 우리학교, 해방 뒤 귀국하던 중 폭침된 우키시마호 현장을 찾아 아픔을 위로하고 보듬으며 기도하고, 애즈원과 야마기시 공동체를 순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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