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껏, 꾸준히 일에 몰두하는 사람만이
행복과 휴식이 무엇인지를 안다.
일하지도 않고 쉬는 자는 휴식이 주는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
그것은 식욕이 없을 때 하는 식사와 마찬가지니까.
-카를 힐티의 <행복론>에서
성심껏, 꾸준히 일에 몰두하는 사람만이
행복과 휴식이 무엇인지를 안다.
일하지도 않고 쉬는 자는 휴식이 주는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
그것은 식욕이 없을 때 하는 식사와 마찬가지니까.
-카를 힐티의 <행복론>에서
명상은 행복해지는 것보다 우리의 근본적인 행복과 연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참본성은 이미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참본성의 행복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본성의 지혜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본성의 사랑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명상은 깨달음으로 가는 것보다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도입니다.
어떻게 본성의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생각 없는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순수 알아차림은 자유와 지혜와 자비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몰라도 되는 마음입니다.
무엇을 알아 낼 필요 없고
무엇을 해결할 필요가 없고
바라는 게 없고
두려워 하는 게 없는
개념화 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있고
온전히 살아있고
온전히 지족하고
온전히 쉬고 있는
마음입니다.
편안하면서 깨어있는
마음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세요.
행복하기 위해 살지 마세요.
행복으로 사세요.
사랑하기 위해 살지 마세요.
사랑으로 사세요.
Meditation is not so much about becoming happy, but rather connecting with our fundamental happiness.
Our true nature is already happy, already peaceful.
We have to learn to live by the happiness of our true nature.
We have to learn how to live by the wisdom and love of our true nature.
Meditation is not so much about getting realization but rather expressing realization; sustaining realization.
Realization itself is the path.
So how can we live by the light of our true nature?
We have to learn to sustain thought-free awareness. This pure awareness is endowed with freedom, compassion, and wisdom.
Another way to express it, is the Don't-know mind.
It is the mind that doesn't need to know.
Doesn't need to figure out. Doesn't need anything. Doesn't hope; doesn't fear.
Doesn't conceptualize.
It is the mind that is
Fully awake
Fully alive
Fully content
Fully at rest.
Relaxed and awake.
We should not stray from this.
Don't live to be happy.
Live by happiness.
Don't live to love.
Live by love.
퀘이커라는 흥미로운 종파가 있습니다. 퀘이커와 그 창시자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조지 폭스
-내 속에 있는 신을 깨달으라고 가르친 퀘이커교 창시자
서양 종교 중에서 선불교 전통에 가장 가까운 종교를 하나 꼽는다면 많은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퀘이커교Quakers를 지목할 것이다. 영국인 조지 폭스조지 폭스George Fox(1624~1691)에 의해 시작된 속칭 퀘이커교는 본래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로서 한국에서는 ‘종교 친우회’, 혹은 ‘친우회’라 한다. 퀘이커교에서는 내 속에 ‘신의 일부that part of God’가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퀘이커교도들은 내 속에 있는 신을 직접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믿고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힘쓴다. 퀘이커 내에도 일반교회와 비슷한 예배 형식으로 예배하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예배programmed worship가 있기는 하지만, 퀘이커 예배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프로그램 없는 예배unprogrammed worship’로서, 기본적으로 ‘친우들Friends’이 한 자리에 모여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내 속에 빛으로 계신 신의 움직이심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내는 침묵예배이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내면의 빛이 비추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하여 짧게 몇 마디씩 간증을 한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직업적인 목사minister가 없고 모두가 모두에게 ‘봉사’하는 ‘봉사자들ministers’만 있을 뿐이다. 십일조 등 전통적인 예배의식을 배격하고 특정한 교리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퀘이커 교도들의 깊은 영성과 이런 영성을 통한 열성적인 사회봉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종교학의 대가 루돌프 옷토Rudolf Otto는 그의 유명한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개신교에서도 퀘이커교에서 실행하는 이런 침묵의 예배가 널리 채택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1, 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와 영국 퀘이커 봉사위원회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내가 만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퀘이커 교도가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퀘이커 운동은 미국 역사 초창기에 독립운동, 흑인해방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등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는 그 별명 ‘Quaker State’가 말하는 것처럼 퀘이커 지도자 윌리엄 펜William Penn(1644~1718)이 1681년 영국 왕 찰즈 2세로부터 얻은 땅에 평화와 관용이라는 퀘이커의 이상을 실험하기 위해 세운 주이다.
» 퀘이커 정신에 따라 만들어진 미국 필라델피아를 상징하는 시청사
그 주에 있는 가장 큰 도시 ‘필라델피아’는 그리스어로 ‘형제우애’라는 뜻으로, 시청 첨탑 꼭대기에는 윌리엄 펜의 동상이 서 있다. 2009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35만 정도의 교인들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평화운동이나 사회개혁 운동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종교 사상가 함석헌(1901~1987) 선생님이 퀘이커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필자도 캐나다로 유학 가서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부정기적이나마 캐나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에 이런 저런 모양으로 참여하고 있다.
마침 한국 친우회 홈페이지에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에 관해 훌륭한 글이 올라와 있기에 이를 간추려 본다.
17세기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였다.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왕정으로 뒤바뀌는 정치적 격변은 물론 지금까지 내려오던 가톨릭과 종교개혁으로 새로 등장한 개신교 간의 갈등으로 사람들은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어느 파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사람들을 ‘구도자Seekers’라 불렀는데, 그들은 주로 신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새로운 계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조지 폭스도 이런 ‘구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사람들 중 일부를 모아 일종의 신앙 운동을 전개하고 이것이 오늘 퀘이커라 불리는 종교의 시작이 되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청교도 신앙이 강했던 레스터셔, 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불리던 방직공紡織工 아버지와 다른 부인들보다 뛰어난 교양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네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조지 폭스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공식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비해 신앙심이 깊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그의 십대 시절, 폭스는 신부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한 채 어느 구두 제조업자겸 목축업자 밑에서 일했다. 그는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했다. 물건을 속여 팔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의 성실과 정직을 비웃었지만,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윌리엄 펜에 의하면, 폭스는 양치는 일을 아주 좋아해서 양치는 솜씨가 훌륭했는데, 양치는 일은 순결하고 고독했던 폭스의 성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일로서, 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 사역하고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1644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심각한 고뇌에 휩싸였다. 친척들이나 여러 목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해결을 구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사는가, 그들의 신앙의 실상이 어떤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번민과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를 두고 친척들은 결혼을 시키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에 입문하라고도 했다. 그러나 영적 진리에 민감한 젊은이에게는 그러한 제안이 슬프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즈음의 심경을 자신의 일기Journal에 이렇게 기록 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고뇌하던 폭스는 하나 둘 깨달음을 얻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이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된 일”이라 했다. 신이 그에게 열어 보이신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의 자녀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자격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아니다”, “신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신다”, “여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녀는 평등이다” 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깨달음들이 있긴 했지만 폭스의 고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번민을 씻기 위해서 ‘열림’의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만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달한 결론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국 퀘이커(종교친우회) 모임. 2005년 모습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
폭스는 이 음성에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이 음성은 영의 문제로 고민하고 진리를 고대하던 그에게 이전의 다른 어떤 깨달음보다도 더욱 크고 뚜렷한 것이었다. 폭스가 들었던 그 음성이 후에 ‘내면의 빛’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것이다. 그 빛은 또한 ‘속에 계신 그리스도’,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것’,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증거’ 등으로도 불리게 된다.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이다(요한복음 1장 9절). 이 음성은 이후 폭스 자신의 생애와 퀘이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이 있은 후에도 그에게 성경이 크게 열리는 체험이 있었고, 사물의 이치가 훤히 보이는 경험이 있었다. 그는 신의 무한한 사랑과 위대함을 깨닫고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모든 체험들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마치 새로이 만들어져 바뀐 것처럼 용모와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다. 변화된 폭스에게 이제 세상은 온통 거두어 들여야 할 신의 씨앗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후 미주에도 건너가 얼마동안 머물면서 자기의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
우리는 변화된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조지 폭스의 경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J 목사님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옆칸 에 앉은 사람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J목사님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예, 안녕하세요"속으로 '목사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중에도 사람들이 알아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때 옆 칸에서 또 말을 걸어왔다. “목사님 ,점심식사 하셨어요?” J목사님은 민망하지만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볼일 보고 나서 식사할 예정입니다.” 잠시 잠잠해지더니 조금 후에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사님, 이제 그만 전화 끊어야겠습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자꾸 옆 칸에서 말대답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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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의 정의는 "어떤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 근로 조건이 원인이 되어 걸리는 병"입니다. 교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르치려 들고 공인 회계사는 모든 일에 증빙을 요구합니다. 검사나 경찰들은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대다수의 목사님들도 직업병에 걸린 듯합니다. 음식점에서나 길에서 '목사님'하는 소리만 들어도 자기 얘기인줄 알고 긴장하고 낯선 거리에 가면 건물에서 십자가를 찾는 것은 목사님들의 직업병이 깊다는 증거입니다. 과도한 직업병은 자신의 본질을 놓치기도 합니다. 말씀을 전하기만 했지 듣지는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삶 자체가 이야기 보따리로 가득찬 화가를 찾아가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감(日鑑)스님 방에 한국 수묵화의 대가인 김호석(1957~)화백이 들렀다. 혼자 오는 경우는 별로 없고 늘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무리지어 나타나곤 한다. 비좁은 자리지만 억지로 밀고 들어가 합석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청하지 않아도 가야할 자리라면 알아서 간다”는 불청지우(不請之友)를 자청하는 것은 야사(野史)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4월21일) 제주도에서 두달간 열린 전시회를 마쳤다고 했다. 법전(法傳 1926~2014 조계종 11대 12대 종정)스님을 모델로 한 수묵화도 출품했다. 줄곧 애용하던 먹이 아니라 목탄을 사용하여 수묵화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운을 뗀 후 목탄수묵화를 사진영상으로 보여주었다. 40대 시절의 앞모습 한 점과 60대 뒷모습 두 점이었다. 서있는 앞모습은 과장된 검은 칠로 인하여 그 강직함을 더욱 드러내는 효과를 얻고자 했다. 뭐든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험작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의미는 적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론 모험이기도 하다.
제주도 전시를 위해 제작된 화보를 대충 훑었다. 의외로 뒷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여러 점 있다. 진짜미인은 뒤태까지 미인이라고 했던가. 보는 이에게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뒷모습을 그린 윤곽선만 봐도 누구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솜씨가 문외한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스승은 ‘절구통 수좌’였다. 한번 앉으면 꿈적도 앉고 참선에 몰입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붙여준 별명이다. 그러나 화백의 해석은 달랐다. 절구질을 하면 안에 있는 알갱이도 밖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것을 쪼아먹으려고 참새가 주변에 모인다. 그것이 주위에 사람을 모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노라고 했다. 절구통에 대한 작가의 또다른 후덕한 해석이었다.
그 인연으로 며칠 뒤 작업실까지 찾게 되었다. 아파트 상가 3층이다.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갔다. 복도끝 꺾어지는 곳에 자리 잡았다. 문 앞에는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화분용 의자 두 개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그 옆에 표구까지 끝난 액자 두점이 포장한 상태로 등짝을 드러낸 채 벽을 기대고 섰다. 화실은 석고상 화선지 벼루 먹 붓 등이 무질서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를 유지한 공간이다. 미세먼지를 대신한 종이먼지가 풀풀 날리는 탁자주변에 빙 둘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목탄그림을 고칠 때 식빵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요새 식빵은 기름기가 많아 지우개로 쓸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인물화 작업을 하다가 필요하다면 생가(生家)에 가서 흙을 가져와 물감에 섞기도 했다. 쥐의 수염 혹은 노루 겨드랑이 털을 뽑아서 붓을 만들기도 했다. 거친 느낌이 필요할 때는 칡으로 만든 붓인 갈필도 사용한다. 삶 그대로가 이야기 보따리였다.
어쨋거나 이 자리에 둥지를 틀고난 뒤 오랜 세월동안 수백점의 작품과 수십번의 전시회를 성공리에 치루어 낼 수 있는 창작의 산실이 되었다. 작가에게는 나름의 명당인지라 쏟아지는 언어 속에서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알게 모르게 뚝뚝 묻어났다. 손끝이 무르익은 시기의 작품을 접한 어떤 이는 “오도자(吳道子)에 버금가는 솜씨”라는 찬탄문자까지
보냈다고 하면서 ‘정말 민망한 일’이라고 낯빛을 붉혔다.
수묵화의 원조는 당나라 화성(畫聖)으로 불리는 오도자(吳道子680~759)다. 궁궐과 절집에 많은 그림을 남겼다. 당나라 때 미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양귀비의 정인(情人)인 현종(玄宗)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그의 재주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한다. 잠시 포도청에서 하급관리를 지낼 때 일이다. 그의 작품인 수배자 그림으로 방(榜)을 붙인 덕분에 현상금까지 걸린 도둑을 잡았다고 했다. 명망을 떨칠 무렵 임금의 부탁으로 궁궐에 다섯 마리 용을 그렸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으며 비가 오려고 하면 그림에서 안개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고 한다.
선어록을 읽다가 오도자를 만났다. 그림이 아니라 글자를 통해 그 이름자를 만난 것이다. 당송시절을 풍미했던 선사들의 대화 속에 “그림은 오도자”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 까닭이다. 당시에 수묵으로 그린 관세음보살상은 오도자가 가장 뛰어났다. 충북 청주에서 출판된 최고의 금속활자본『직지』에는 “오도자의 관음상은 그 자체로 사찰이다.”라는 양산연관(梁山緣觀)와 대양경현(大陽警玄943~1027)이 나눈 작품평이 실려있을 정도다. 작품이 신화가 된 것이다.
명품 성화(聖畵)는 많은 사람들이 찾기 마련이다. 물론 인물화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라의 솔거(率居)가 경주 황룡사 벽에 그렸다는 소나무 역시 성화대접을 받았다. 사람 뿐만 아니라 참새까지 찾아왔기 때문이다.(물론 그 결과는 미끄러져 땅바닥에 떨어져 부상당한 참새의 속출이었다.) 별다른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름만 전하는 송나라 영안(永安)선사가 남긴 유일한 선문답 소재가 ‘소나무 그림’이다. 물론 선사의 소나무와 솔거의 소나무가 동일한 소나무라는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소나무라는 증거도 없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입니까?”
“벽 위에 마른 소나무를 그려 놓으니 벌들이 앞다투어 꽃술을 모우는구나.”
과연 중국에서 경주까지 그 먼거리를 왔을까? 그림 매니아라면 오지못할 이유도 없겠지.
소중한 사람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하라
-마이클 불룸버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우리들이 봉착하는 어려움은 그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칼릴 지브란
대언담담(大言淡淡). 큰 말은 힘이 있다.
소언첨첨(小言詹詹)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줄곧 현대의 악에 대해 경고합니다. 예전에는 꼬리달리고 시뻘건 것들을 악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보이지않는 악에 대해 경고를 합니다.
현대의 악은 수익에 대한 집착, 생명경시풍조입니다. 체코정부가 국민건강을 위해 금연운동을 펼치려했습니다. 그러자 필립모리스라는 담배회사가 연구 끝에 담배가 정부에 이익을 준다는 이론을 체코 정부에 내놓았습니다. 담배를 계속 피우면 노인들이 일찍 죽을것이고, 그러면 정부는 노인연금을 아낄수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 논리에 대해 체코국민들은 분노했고 필립모리스측은 즉각사과했다고 합니다.
오래전 어떤 경제학자가 지구의 인구밀도로 보아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했다가 철퇴를 맞은적이 있는데, 그 이론은 은밀하게 지금도 끊임없이 실행되고 있습니다.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대판 선민의식주의자들입니다.
돈이냐 생명이냐는 오래된 논쟁인데, 갈수록 더 치열해지고 비열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교황께서는 악이라고 한것입니다.
온갖 명분을 다 걸어대지만 결국은 돈을 벌어서 나만 호의호식하겠다는 사람들과 한사람의 생명이라도 구하겠다는 사람들간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분명함이 식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칠레 피노체트 독재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치안이 좋아졌다고 피노체트를 옹호한사람들이 있었지요. 필리핀 마약소탕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때도 치안이 좋아졋다고 하는이들이 있었지요. 우리나라도 전두환정권 때 삼청교육대 덕분에 치안이 좋아졌다고 하는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죽음쯤은 나의 안전함을 위한 비용이라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엿보입니다. 오래전부터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했기에 근대화가 되었다고 하는사람들이 있었지요. 수많은 민초들이 굶고 쫓겨나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한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지독한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지독한 이기심이 교황께서 지적한 악인 것입니다. 여러가지 명분들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 안에는 생명이냐, 수익이냐,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하는 물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란한 논리들 화려한 논리일수록 사기꾼들처럼 무언가를 숨기고있고, 그내면에 있는것은 악입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살아봐’라고 유혹하는, 악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천사가돌문을굴렸네
“호산나호산나주의이름으로오시는왕께호산나”
당나귀가맨앞에서길을인도하면어린아기들은아빠의무등을타고, 엄마들은꼬마들을손수레에태워밀고, 나이드신할머니는젊은자매가미는휠체어에타고온식구들이종려나무가지를흔들며호산나를외치며공동체마을을돕니다.
이천년전한번도사람을태어본적이없는어린당나귀를예수님께서타시고예루살렘으로들어오실때그곳에모인군중들이바닥에옷을깔고종려가지를흔들며이땅에왕으로오신다윗의자손을찬양하던날을기념하기위한행진입니다.
오늘은특별히행진도중종려주일바로전날 86세의나이로하나님의부르심을받으신 로즈마리할머니집앞에 멈춰할머니의생애를기억하며호산나노래를불렀습니다. 로즈마리할머니는브루더호프초창기독일뢴공동체에서태어나나찌시절영국으로옮겨간후 2차대전발발로파라과이로부모님과함께이민왔다가간호사가되어평생공동체의모든아기들과엄마들, 할머니들을돌봐오셨습니다.
젊었을때부터다른청년들이캠핑이나피크닉을갈때에도주저하지않고뒤에남아도움이필요한한사람, 한사람을 큰사랑으로보살펴많은젊은자매들에게귀한모범과도전이되었습니다. 또어디엔가삶에지치거나뒤쳐져외롭고힘들어하는사람들을보면마음속깊은곳에서나오는사랑과정성을담아격려하는편지를보냈습니다. 절망가운데방황하고있다가로즈마리할머니의깊은마음이담긴편지를받고큰위로를받은사람이한둘이아닙니다. 한부부는머나먼나라에서브루더호프공동체에장기간동안 방문을하고 다시본국으로돌아간후에도자신들을잊지않으시고 지속적으로격려편지를보내신그분의사랑이결국은자신들을공동체로다시돌아오게했다고고백합니다.
작년할머니의85세생신때수많은사람들이빈카드를선물로보냈습니다. 할머니는선물받은카드를보시고는더많은이들에게격려카드를보낼수있게되었다며너무기뻐하셨습니다. 이제할머니께서는예수님과함께하늘에서종려나무가지를흔들며인자한웃음으로우리를내려다보시고힘내라며호산나를외치시겠지요.
해마다이맘때가되면 12년전우리가처음 브루더호프공동체를방문했던일이생각납니다. 2007년 3월한국을떠나면서따뜻한봄날을기대하며 미국에있는우드크래스트공동체로향했습니다. 그런데왠일입니까? 우리가도착한 곳은파릇파릇새싹이돋고 꽃이활짝핀 그런곳이아닌하얀눈이덮인 산마루였습니다.
우트크레스트의풍경은마치한국을떠나오기전새로운생명을기다리며꽁꽁얼어붙은나의마음같았습니다. 우리가족이도착한시간은밤 11시가가까운늦은밤이었지만호스트부부가기쁘게우리를맞이하고저녁을주었습니다. 결혼한지얼마안된신혼부부도그밤중에찾아와많은한국친구들을알고있다며환영해주었습니다.
생각지도않은겨울왕국에다시돌아오자제일신난건당시 4살이었던하빈이입니다. 매일유치원에가면아이들과함께신나게 눈썰매를탑니다. 한국에선큰맘먹고일년에한번용인에버랜드에가야탈수있는눈썰매를매일타니너무좋아합니다. 어떤곳은언덕이가팔라저도타기를두려워하는데나이드신 50대중반의아주머니들도주저않고아이들과함께눈썰매를즐깁니다. 눈썰매에푹빠진하빈이는결국은눈썰매를타다넘어져얼굴에큰상처를내어집으로돌와왔네요. 한국에선얼굴에조그만상처라도생기면자국이남을까봐비싼독일제상처안나는반창고를붙이곤해서아내가혹시몰라몇개챙겨온것이있어하빈이얼굴에붙여주었습니다. 얼굴의¼을덮으니좀흉하기는했지만그래도상처자국남는것보다낫겠지싶어 1-2주일을나두었다가반창고를떼니상처가아물고마법같이자국없는깨끗한얼굴이되자옆에서지켜보던이웃들도신기해하네요. 조금이라도상처나면야단법석을떠는환경에서살다가 바깥에서하도뛰어노니넘어지고상처나는것은흔한일이라별로대수롭지도않게여기는이상한나라(?)에살다보니그이후로마법반창고는우리집에서도사라지고말았습니다.
» 종려주일행진
우드크래스트에서받은처음인상은이상하게도그곳에도착하는순간거룩한산에서있는평안을느끼면서본향으로돌아온것같았습니다. 그곳에서인류의심장박동소리를듣는듯했고뭔가모를생명의열기와희망이내마음속에꿈틀거리기시작했습니다. 처음한달동안매일예배시간에부활절에관한노래를불렀는데두꺼운책한권이모두부활절에관한노래로한국찬송가에있는몇몇노래외에는거의모르는노랬였지만가사하나하나가마음깊이울려왔습니다. 하루는바하의마태수난곡을 공동체전체가불렀는데난생처음듣는곡이고영어로불러가사가뭔지잘몰랐지만그대곡을들으면서 예수님의고난과죽음그리고부활이깊이마음속으로와닿으면서주체할수없는눈물을쏟고말았습니다. 옆에앉아있던호스트제임스도함께눈물을흘렸습니다. 천사가돌문을굴려예수님의부활을외친것처럼어두운밤에갇혀있던내영혼의돌문도굴려지고예수님과다시살아나그동안표류하던내영혼의닻을깊이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겨우내내죽어있는것같은꽁꽁얼어붙은대지에서연한잎을내밀고 노란꽃망울을떠뜨리는수선화를보면예수님의부활을알리는나팔수같습니다. 나팔과같이생긴부화관에6개의노란꽃잎이받쳐있는수선화를보노라면“예수다시사셨네”하며온세상에외치는것같습니다. 수선화뿐만아니라고운자색의목련, 분홍빛의벚꽃, 향기만발한하야신스등온갖꽃들과너무나싱그러운연두빛의새잎을내는나무들을보면모두겨울이끝이아니라고, 어두움을통과해야새로운생명이온다며예수님의부활을우리에게속삭이는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봄에부활하신것이결코우연이아닌것같습니다. 실제로수선화와튜율립등봄에피는꽃들은늦가을에 심어추운겨울을지내야만꽃을피웁니다. 추운겨울을지내지못한경우에는화분에알뿌리를심어냉장고에일정기간두어야만꽃을피울수있습니다.
» 종려주일 행진을 하는 공동체의 아이들
엄마옆에서젖을빠는엊그제태어난아기양과너무나앙증맞게귀여운세마리의아기염소들, 부활절전날에태어난송아지모두우리에게예수님의부활을알려주며기뻐하는듯합니다.
부활주일새벽이되면들판에큰모닥불을피워공동체식구들이모여해뜨는걸지켜보며부활절노래를함께부릅니다. 드디어아침 7시반이되자브라스밴드형제들이예수님의부활을알리는나팔을불어연주하자 하나둘씩식당앞으로모입니다. 오늘은특별히주변의이웃들을아침식사에초대해함께예수님의부활을축하합니다. 식당로비에는고등학생들과 청년들이몇일동안정성을다해Easter garden(부활의정원)을만들었습니다. 그동안정성들여키워온온갖꽃들을심고펌프를이용해위에서부터물이흐르는계곡과분수도만들고병아리와, 메추라기새끼, 갓태어난아기염소도옆에함께놓아아이들뿐만아니라어른들의마음도환하게합니다. 모두들기쁨에찬밝은얼굴로 “Happy Easter!(행복한부활절되세요!)” 하며서로손을내밀어따뜻하게악수합니다.
아침 8시반쯤에다이닝룸문이열리자모두들활기차게안으로들어가정성스럽게만든자신의이름표가놓여진자리로가앉았습니다. 테이블마다노란수선화꽃병이 놓여있고 다이닝룸중앙에는초를이용해염색해만든멋진그림들이새겨진계란들이장식되어있고벽에는어린아이들이색종이로꽃들을접어걸어놓았습니다. 가지각색으로예쁘게물들인삶은계란으로옆사람과계란치기를해누구계란이제일튼튼한지내기도해보고갓구운빵과소세지그리고오렌지와코코넛으로만든상큼한페스츄리로맛있는아침식사를한후유치원생부터청년들까지모두나와그동안함께연습한 합창도하고공동체전체가부활 노래를마음껏불렀습니다.
아침식사를끝낸후유빈이학교아이들이숲길에만든십자가산책로로향했습니다.한아이는 점토로당나귀를만들어천으로오린옷들과종려나무가지위에올려놓았고, 어떤아이는보리떡 5개와물고기 2마리도만들어놓았습니다. 유빈이는학교에서부터양동이에물을날라 갈릴리호수도만들고배를띄어놓았네요. 옆에는모닥불을만들어물고기를굽고있는듯한장면도있고이끼긴돌로무덤도만들고작은십자가도꽂아놓고꽃도심어놓는등아이들이조그마한손으로부활절을생각하며만들어놓은것들이우리어른들에게잔잔한감동을주네요.
산책길끝에다다르면우리형제들이묻혀있는공동체묘지가있습니다. 며칠전 하빈이가속해있는고등학생들이묘지한쪽끝을열어언덕에세개의십자가를세우고예수님의돌무덤을만들었습니다. 무덤문은토요일까지닫혀있었지만오늘은예수님이부활하신날이라무덤의돌문이옆으로굴러져있습니다.
내가제일좋아하는흑인영가중하나를부르면서예수님의돌무덤처럼 차갑고굳어진우리마음의돌문도매일매일굴려져 새생명이움트고자라길소원해봅니다.
“The angel rolled the stone away
천사가돌문을굴렸네”
천사가돌문을굴렸네. 천사가돌문을굴렸네
빛나고눈부신아침나팔소리가들려올때천사가돌문을굴렸네
마리아가동이트자달려왔네.
돌문이굴러갔다고하늘로부터소식이들리네.
“내구세주를찾고있어요. 어디에있는지알려주세요.”
높은산위로부터돌문이굴러갔네.
많은병사들이돌문앞에지키고섰지만, 누구도막지못하고돌문이굴러갔네.
천사가돌문을굴렸네. 천사가돌문을굴렸네
빛나고눈부신아침나팔소리가들려올때천사가돌문을굴렸네
얼마 전 일지암이 자리한 두륜산 너머 장전리 마을에서 열리는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귀촌한 어느 선남선녀가 연을 맺고 집들이를 겸하여 혼인식을 올리는는데 축사를 해달라고 내게 청을 넣었습니다. 3년전부터 일지암에 자주 오는 한쌍입니다. 나이가 좀 드신 신랑은 도시의 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셨습니다. 사물놀이로 길을 열면서 잔치를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함께 하면서 익살스런 객담이 오가며 잔치는 흥겹고 정겨웠습니다. 선남선녀의 앞날을 위해 짧은 축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과 예수님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한밤중에 큰 병이 걸려 고통스럽게 몸부림칠 때, 부처님과 예수님이 당장 달려오겠습니까? 아무리 부르고 기도해도 두 분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병원으로 급히 모실까요? 바로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신통력으로 여러분을 병원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119구급대원이 모십니다. 또 부처님과 예수님은 아픈 여러분을 수술하지 못합니다. 의사가 여러분의 병을 고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내 곁에 있는 배우자가 수호자이고 구원자입니다. 119구급대원이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길을 인도하는 보살)입니다. 의사가 약사여래부처님입니다”.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법문을 각색하여 축사를 했습니다. 두 분의 앞길이 가시밭길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기원하면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날 혼인식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서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하객 중에 어린이 한 분이 감나무에 올라가 잔치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웃으며 흐뭇하게 바라봤습니다. 사실 이 친구가 수시로 나무와 담장을 오르는 일은 우리에게는 흔한 모습입니다. 일지암에 오면 높은 돌담을 장비도 없이 오릅니다. 나름 암벽 등반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최영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우리 땅끝 마을에서 영홍이는 여동생 유진이와 함께 유명 인물입니다. 큰 형 최영훈 군은 의젓합니다. 뭘로 유명하냐구요? 가수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영홍이와 유진이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납니다. 평소 못 말리는 개구쟁이지만 무대에 오르면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 영홍이는 노래가 끝나면 금새 온갖 장난에 여념이 없습니다. 여튼 영홍이는 해남 진도 등지에서 열리는 공연에 출연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단지 어린이가 부르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높은 음악성으로 공감과 감동을 줍니다. 세월호의 아픔이 남아있는 팽목에도 출연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해원’이라는, 남도 음악 모임에서 공연을 했는데 5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노래를 잘 불러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영홍이 삼 남매는 해남으로 귀촌한 가족입니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고, 선생님이었던 아빠는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아빠는 작은 학교 살리기에도 열심입니다. 일지암 일도 잘 도와주십니다. 오늘도 마른 소나무를 잘라 찻상과 의자를 만들어 멋진 찻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푸른 신록의 생살이 돋아나는 두륜산을 감상하며 연못 옆에 마련한 야외 카페에서 이제 막 돋은 찻잎을 따서 싱그러운 차회를 즐겼습니다. 영홍이 가족들은 해남 살이가 매우 즐거운 것 같습니다. 특히 아이들 교육 환경에 매우 만족하는 듯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말을 잘 안들으면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 그러면 외할아버지 계시는 부산으로 이사 간다” 이런 협박에 아이들은 쥐 죽은 듯 꼬리를 내립니다.
세 아이는 참 명랑하고 정겹습니다. 그리고 나름 예의도 바르고 마음씀도 섬세합니다. 무엇보다도 몸이 부지런합니다. 몸 쓰는 일을 꺼려하지 않고 즐깁니다. 요즘 아이들 스마트폰에 열심하여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참 신통합니다. 작년 여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날은 제가 글을 통하여 몇 번 소개한, 틈틈 노동수행을 하는 ‘땅끝 차여사댁’ 밭에서 감자캐기 울력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워낙 밭이 넓고 수확량이 많아 열대엿 명이 모여 감자 캐기에 동참하였습니다. 햇볕은 따갑고 날은 후덥지근한 날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수시로 차여사댁 식객을 자처하는 여러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소릿꾼과 사물놀이꾼, 선생님들, 한 동네 사람들, 광주에서 온 사람들이 일손을 모았습니다. 영홍이 아빠와 삼 남매도 팔을 걷어 부쳤습니다. 동네 할머니 애들을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매우 좋아하십니다. 애들이 일을 하러 밭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특하고 신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애들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 라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런데 웬걸, 일하는 품세가 제법입니다. 일은 대충하면서 장난치다가 한 두시간 지나면 슬그머니 빠지겠지 했는데, 뙤약볕 아래서 어른들과 진지하게, 진득하게 감자를 주워담습니다. 한 할머니가 감탄합니다. “오메, 오메, 저것들 좀 봐. 요새 애들 아니네. 요새 애들 아녀” 왜 그리 감탄하는지 슬쩍 곁눈으로 봤는데 그럴만 합니다.
감자 캐기는, 먼저 삼태기에 담아 다 채워지면 큰 마대자루에 넣고 트럭에 싣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무거운 마대 자루에 옮겨 싣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애들은 자기들 삼태기에 감자를 담으면서도 틈틈 곁눈으로 할머니들의 삼태기를 살핍니다. 할머니들의 삼태기에 감자가 다 채워지면 재빠르게 마대 자루에 넣습니다. 애고~ 신통방통 보살 마하살! 이러니 얼마나 애들이 오지고 귀엽겠습니까? 요새 애들이 아니라는 말이 딱!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다가도 애들은 애들입니다. 이렇게 분위기 화기애애 잘 나가다가 돌발사태가 생겼습니다. 영홍이 동생 유진이가 서럽게 훌쩍입니다. 공개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실 초등 2학년 유진이는 울음 공주입니다. 재미있게 놀며 웃다가도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급 울음입니다.(유진이 취미는 오빠들 괴롭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유진이는 울다가 웃다가의 간격이 매우 짧습니다. 여튼 한여름 감자밭에서 유진이가 왜 울었냐고요, 그놈의 ‘돈’때문이었습니다. 애들이 일하는 게 이뻐서 할머님 한 분이 만원을 영홍이에게 주고 유진이에게도 주려했는데, 아뿔싸! 할머니 주머니에 돈이 없네요... “오메, 어쩐다냐. 돈이 없네, 아가야, 미안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입을 삐죽삐죽하던 유진이가 급기야 서럽게 훌쩍입니다. 모두들 어쩔줄 모르고 곁에 있는 영홍이는 못내 난처한 표정입니다. 그래도 수입은 지출할 수 없는 법, 영홍이는 꿋꿋하게 돈을 지켰습니다.
힘겹게, 즐겁게 일을 하다가 마침내 밭일의 최고 재미, 새참입니다. 수려한 두륜산과 훤히 트인 들판을 바라보며 맛나게 수박과 막걸리를 먹으며 정담을 나눕니다. 그 때 어김없이 영홍이가 본업의 기질을 발휘합니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바위에 올라가 맘껏 목청을 뽑으며 노래합니다. 매미들이 설 자리를 잃을까 은근 걱정입니다만, 여튼 이 아이의 노래는 피로를 확 풀어줍니다. 영홍이는 높은 곳만 있으면 올라가고 시키지 않아도 흥이 나면 노래합니다. 이만한 복이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일하고 노래하니 별유천지가 한가한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갑니다. 서로가 손을 모은 덕분에 그 큰 감자밭이 말끔합니다. 마무리하는데 동네 할머니 한 분이 감탄합니다.“ 워따! 저 놈 보게, 하는 짓이 영판 속이 꽉 여문 놈이네” 왜 그런가 하니 첫째 아이 영훈이가 큰 밭을 두루 살피면서 감자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나무 신통방통 보살 마하살!
그 날 우리 모두는 품삯으로 푸짐한 감자한 포대씩을 받았습니다. 저녁에 영홍이 아빠가 사진 몇 장을 보내왔습니다. 그 날 품삯으로 받은 감자를 쪄서 가족들이 맛나게 먹는 모습입니다. 아! 애들에게 이 감자 맛은 얼마나 맛있었을까요. 굳이 ‘한 티끌에 삼라만상 우주가 담겨있다’라는, 화엄경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을 설명하지 않아도 애들은 그 이치를 몸으로 깨달았을 듯 합니다. 아! 일미(一微)를 일미(一味)로 바꾸면 훨씬 실감나겠습니다(니들이 이 감자 맛을 알아?).
영홍이 삼 남매는 제 앞에서 거리낌이 없습니다. 몸짓도 말도 서슴없습니다.그래서 제가 은근 기분이 좋습니다. 앞에서 혼인 잔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날 저는 영홍이에게 한 방 먹었습니다. 잔치기 끝나고 다들 모여서 땅끝 차여사님이 마련한 남도 음식을 마당에서 뷔페식으로 먹었습니다.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는데 영홍이가 “고기도 많은데”라고, 말하며 저를 살핍니다. 나물과 함게 부침개 몇 종류를 담았습니다. 그 때 영홍이가 큰소리로 외칩니다. “야! 스님이 살생했다” 햄과 굴 부침개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이 놈은 그렇게 말하고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제가 아주 만만한가 봅니다. 저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입니다. 요즘은 워낙 깔끔한 환경을 좋아하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벌레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데 영홍이 남매들은 벌레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감자를 캐다보면 지렁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애들은 지렁이를 보면 손에 올려놓고 쓰다듬고 만지며 같이 놉니다. 마치 제인구달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합니다. 이런 아이들 곁에 또 신통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엄마와 아빠입니다. 아이들이 나를 놀리고 몸 장난 걸어오면 대개의 부모들은 말립니다. “스님한테 그런면 안돼‘ 하면서요. 나무나 담벽을 타고 오르면 위험하다고 못 하게 합니다. 그런데 애들의 부모님은 그저 지켜봅니다. 내가 찻상 앞에서 차를 내려고 하면 애들이 서로 ”내가 팽주할꺼야“하고 내 자리를 밀어냅니다. 팽주(烹主)은 차를 우리는 역할을 말합니다. 엄숙한 찻자리에서 떠들며 재미나게 차를 우려도 엄마아빠는 말리지 않습니다. 저는 평범 속에 비범을 봅니다. 그저 지켜 보는 일, 뭐든지 생명의 약동을 지켜보는 일, 이런 모습이 참 교육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간섭을 관심이라고 생각하고, 잔소리를 배려라고 생각하고, 거리낌없는 몸짓을 위험하고 버릇 없다고 생각하는, 이런 생각이야 말로 착각일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은 넘치면 내뿜는 기운찬 약동입니다. 대개 이런 생명의 약동은 변방의 삶터에서 원활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다만 이렇게만 커가기를 바랍니다. 함께하는 어른들이 다만 그렇게 그윽한 눈길로 지켜보기를 바랍니다. 삶의 신비와 기적은 멀리에, 별스럽게,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영홍이 눈길 무서워서 어찌 사나? “야! 스님이 살생했다“
» 첫날 세미나를 끝내며 촛불 둘레에 엎드린 참석자들과 스태프들. 사진 삶의예술학교 제공
바람 앞에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마저, 이 안온한 공간에서조차 마음의 촛불은 흔들릴까. 그 뜻모를 불안과 아픔의 근원을 찾아들어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난 3~5일 삶의예술학교가 진행하는 2박3일의 삶의예술 세미나였다. 경기도 남양주 축령산 자락 원불교오덕훈련원을 빌려 진행된 이 세미나의 핵심은 ‘시간여행’이다. 봄꽃이 만발한 이 아름다운 시공간을 떠나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순간을 향해 떠나는 여행이다. 어린이날에, 어버이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꽃잔치와 환호성과는 다른 슬프고도 아픈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아픈 개인사를 헤집는 ‘다크투어’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화병을 원으로 둘러싸고, 장미 꽃 한송이를 자기 앞으로 가져온 뒤, ‘최고 아름다웠던 한순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처럼 아름다운 것마저 과거는 때론 가슴 한켠을 콕 찔렀다. 50대 남자 참가자는 ‘자신이 두세살 때 몸이 아팠을 때 도회지의 병원으로 데려간 아버지가 아픈 아이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서커스장에 데려갔던 일’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언급하며 눈물을 훔쳤다.
첫날 오후 본격적인 시간여행이 시작됐다. 촛불 둘레에 원으로 앉은 11명의 참석자들에게 세미나의 총감독격인 삶의예술학교 유진박 대표(64)가 질문을 던졌다.
“언제, 어떤 서로움, 외로움의 순간이 있었나요?”
“일찍이 가슴을 닫아야 했던 어느 순간이 있었나요?”
“‘세상을,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라고 마음 먹게 됐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 삶과예술세미나에서 원으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참석자들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내면엔 파문이 이미 일렁이기 시작했다. 질문은 고요한 호수에 던진 돌팔매였다. 쭈볏쭈볏하던 참석자들 사이에서 한 여성이 나섰다. 아직도 이 지구에 땅을 딛고 있지않은 것 같다는, 즉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40대 여성이었다. 그가 치매에 걸려 누워있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10살 때 부모를 여의고 홀로 되어 천애고아가 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의지할데 없는 어린 아이가 살아야했던 세상, 수없는 좌절과 실패 속에서 커온 아버지의 상실을 말하며 그는 목놓아 울었다. 그는 실패투성이인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그 아버지의 심중으로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대신한 통한의 아픔을 토해냈다. 그는 아버지를 멀리하려했지만, 이미 아버지의 무력감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게 박혀있었다는 것을, 자신은 아버지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 통곡이 말해주었다. 유진과 미국인 부인 마샤 보글린이 깊은 한 숨을 토해내며 공명했다. 그러자 다른 참석자들이 원 안으로 들어와 그를 안아주었다. 그의 가슴이 울음으로 진동할 때마다 포옹한 이들도 함께 진동했다. 그러자 여기 저기에서 화장지를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 공감이 동토처럼 얼어붙은 마음을 풀리게 한 것을까. 그는 한번도 내놓지못한 화해의 말을 꺼냈다.
“아빠, 그 험한 세상을 사느라 얼마나 힘드셨어요”
» 삶의예술세미나를 끝니면서 스태프들이 참석자들을 둘러싸고 곪아터진 상처를 위로하며 축복해주는 모습
애증으로 얽힌 부모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그가 대신 해준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신음하며 눈물을 터트렸다. 그는 “아빠는 비난이 아니라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면서 아빠를 위로했다. 그의 시간여행에 유달리 공감하며 눈물을 쏟았던 한 남자가 다음 고백에 나섰다. 대기업에 다니는 40대 후반의 그가 꺼낸 것도 ‘아버지’였다. 그는 “초등학교만 나왔던 아버지는 누구와도 대화할줄을 모르고, 사람들과의 대면을 피했다”고 했다. ‘명절 때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도 아버지만은 그 자리를 피해서 일만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번도 아버지와 대화를 해본 적도 칭찬도 위로도 공감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과 좀체 어울릴줄 모르고 홀로 일만할줄 알았던 아버지같은 답답하고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지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몇년 전 자신을 돌아보니, 자신도 오직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헌신만 하지, 아무 행복도 모른체 일만 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했다’며 눈물을 쏟았다. 깊은 외로움이 느껴지는 그의 등을 유진·마샤 부부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모두가 안아주었다. ‘당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해주는 포옹이었다.
» 삶의예술세미나를 이끄는 유진박과 마샤 부부
많은 눈물을 흘린 뒤 그는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던 아버지를 증오가 아닌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 뒤 세미나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때마다 마술처럼 변해가는 그의 표정과 공감력이 모두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는 2박3일의 세미나를 마친 뒤 “내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안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며 공감도 마비돼 가족이 자살했을 때도 눈물이 나오지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여행 뒤 자신의 외로움과 약점을 스스럼 없이 고백하고, 타인의 아픔에도 누구보다도 깊게 공명하고 위로하는 공감자로 변해있었다.
‘시간 여행’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틀째 ‘존재를 드러내는 힘을 키우는’장이 펼쳐졌다. 살면서 ‘예스’해야할 것을 ‘예스’를 해야하고, ‘노우’할 것은 ‘노우’해야했지만 그렇지 못한 게 대부분의 삶이었다. 때로는 부모와 교사의 권위에 눌려서, 혹은 폭력의 위압 때문이나 먹고사니즘 때문이기도 했다. 유진이 시연을 보였고, 자발적 신청자가 앞에 나서 자신이 해보고 싶던 둘 중 하나를 꺼내 외쳐보는 것이다.
» 삶과예술세미나에서 타인이 꺼낸 상처에도 함께 공명하며 울어주었던 참석자들이 서로 허그를 하면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있다.
이번엔 40대 초반의 여성이 나섰다. ‘번아웃’돼 최근 직장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는 이였다. 그는 ‘싫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노우’를 변형한 것이었다. 유진이 선창하면 따라하는 식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력이 너무나 약해서 늘 아팠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는지 사는지 건강상태엔 무관심한체 오직 공부만 강요했다고 한다. 목표 성취만을 최우선시 때론 당근을 주고, 때론 채찍을 휘두르던 부모에게 아이로 돌아가 ‘싫어’를 외치는 것이었다. 처음에 작은 목소리로 ‘싫어, 싫어’를 하던 그는 무의식적 상처를 건드린 유진의 날카로운 선창으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 ‘싫어’, ‘싫어’를 외쳤다. 그의 외침이 점차 울음으로 변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꾀병이 아니라 정말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야했는데도 엄마 아빠가 하나가 되어 결석하면 안된다고 무조건 학교에 데려다주고 가버렸다”며 펑펑 울었다. 그는 욕망을 위해 끝없이 밀어붙이기만했던 부모에게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해보고 부모가 원하는 ‘스카이’에 진학하고, 부모가 원하는 직장에 갔지만, 결국 번아웃되고만 절망감을 토해내다가 쓰러졌다.
» 2박3일 삶의예술 세미나를 마치고 봄꽃처럼 화사해진 참석자들과 스태프들
유진과 마샤는 상처의 화농이 터져 고름이 터져나오는 이들을 껴안고 위로해주었다. 유진은 “한국은 유달리 아픔의 역사를 겪은 부모 세대의 트라우마가 현세대로 고스란히 전해져 상처가 깊고 자존감이 너무도 많이 훼손된 상태여서 심리적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샤는 따스한 미소를 담아서 “우리가 비록 지구에서 온갖 상처를 입었지만 본래는 이미 온전한 존재였다”면서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존재들인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사랑을, 진리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왔다”고 위로했다.
이 세미나를 창시한 유진박은 9살에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 4년뒤 캐나다로 이주해 성장한 뒤 미국의 영성공동체 에미서리에 가담해 지도자가 됐다. 그는 부인 마샤와 함께 2007년 영구귀국해 주로 제주도에서 활동하다 지난해부터 서울 등 수도권에서 삶의예술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세미나는 이번 첫단계를 비롯해 4단계까지 심화과정들이 있다. www.aolschool.org
가령 반반한 판자를 굽은 판자 위에 두게 되면 아래에 있는 굽은 판자도 반반하게 된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바른 자를 위에다 앉히면 백성이건 부하이건 바르게 되어 심복하게 될 것이다.
-공자
세상은 아름다운 책이지만 그것을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거의 쓸모가 없다.
-C.골도니(이탈리아의 극작가)
저는 위선자입니다. 스승 역할을 하지만 스승의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하면서 용서를 못 하고, 화내지 말라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스님은 스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성직자라는 게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의사의 고통이, 지도자는 지도자의 고통이, 주부는 주부의 고통이, 수행자는 수행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고 다 버리고 떠나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해피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저는 해피스님이 아니라 회피스님인 거 같아요. 마음의 어려움은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피하는 것은 많이 익숙해져서 쉽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마음 구석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놓습니다.
마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른 데 가서 수행을 찾습니다. 절에 가서 108배 하고 집중수행 가서 명상합니다. 아니면 아픔을 안 느끼려고 여흥을 취하거나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불안은 커집니다. 사람들 만나고 영화도 보러 가고 바쁘게 지냅니다. 알게 모르게 기본적인 불안과 슬픔을 안 느끼려고 온갖 전략을 실행합니다.
기본적인 불안과 슬픔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苦), 산스크리트어로 ‘두카’입니다. 수다 떨 때 영화 볼 때 법회 참석할 때는 두카를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아픔과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쳐 보지만 그것은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조용한 외로움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작은 가시처럼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두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이 있습니다.
우리의 수행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용기입니다. 용기는 직면하기 어려운 것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용서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놓아집니다. 정화가 일어납니다. 인정이 깊을수록 정화도 깊습니다. 인정이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입니다.
108배와 좌선이 수행이 아닙니다. ‘이 뭐꼬’가 화두가 아닙니다. 싫은 것을 직면하고 어려운 것을 하고 두려운 것을 파고 들어가고 집착하는 것을 놓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며 화두입니다.
알아차림은 인정, 인정은 내려놓는 것, 내려놓는 것이 하심입니다. 여기에 정화와 성장이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직면하면 생각보다 아프고 두렵지 않습니다. 아프고 두려운 이유는 무시하고 외면해서, 안 보려고 해서 아프고 두려운 것입니다. 직면하면 아픔이 지나가고 실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실 고통은 허깨비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직면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모든 어려움이 이생의 숙제일 수 있습니다. 이걸 확인하게 되면 천천히 쉬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가져 볼 수 있어요. 저도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권리이며 이생에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고 가질 것입니다.
큰 성공을 거둔 한 사업가가 심한 정체성 혼란에 빠졌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청해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히말라야 산속 접근하기 힘든 아주 신비로운 곳에 살고 있다는 성스럽고 경이로운 한 도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업가는 어렵게 그곳을 찾아가 백 살이 넘은 도인을 만났습니다. 도인은 자신을 찾기 위해 고생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특별히 그에게 도움을 베풀 것을 승낙했습니다. “자,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 사업가는 조심스럽고 고뇌스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삶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도인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습니다. “삶은 끝없는 강이다.” 사업가는 그 말을 듣고는 실망하여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끝없는 강이라고요? 저는 온갖 고생을 마다 않고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삶이 끝없는 강이라고요?” 이 말을 들은 도인은 사업가의 반응에 충격과 흥분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아니 그럼 인생이 강이 아니란 말이냐?”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나 이미 자기 마음속에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가 만든 경계를 넘어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고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배우자를 고치고, 자식을 고치고, 이웃을 고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모두를 고치려고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고치는데 자신의 인생을 낭비합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과, 인생에는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작가 거투르드 스타인는 “해답은 없다.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고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생은 해답이 없이 흐르는 강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삶에서는 해답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해답이 없이 무의미하게 흐르는 강이 아닙니다. 분명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있습니다. 정답이 유일하게 정해진 것이라면 해답은 다양한 해결 방안을 포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정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은 인생에 해답이 있음을 믿고 닥치는 모순를 타파하고 막아서는 장벽을 극복하려고 투쟁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 (요한, 변호사)
지은 지 6백년이 넘은 노트르담 성당에 불이 나서 지붕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배우 안소니 퀸이 그 역을 맡았던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가 온 몸으로 매달려 종을 치던 종탑은 다행히도 무사하답니다. 높디높은 지붕 꼭대기에서 거만스럽게 온 세상을 내려다보던 쇠로 만든 수탉 조형물이며 예수님 가시 면류관도 온전히 살아남았답니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들이 다 그렇듯이 노트르담 성당도 온통 황금빛을 띠는 제대며 천정의 화려한 조각들, 스테인드글래스 성화들로 신자들을 압도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위하시며, 오늘 아침 우리 집 마당에 떨어져 죽은 직박구리 새의 목숨도 일일이 세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 화려한 성당 안에 거하고 계실 듯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에 차서 십자가 죽음의 길까지 마다 않고 걸었던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돌아보면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오 11:12)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화려한 성당이 상징할 법한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한다니요? 온 세상이 전지전능하신 당신께서 다스리는 나라인데 어찌 감히 폭력이 도처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건가요?
하긴 엊그제 보니 천주교 주교회의 앞마당에도 천주교신자라는 이들이 몰려와서 빨갱이 주교들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더군요. ‘빨갱이’와의 화해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주교님들까지 욕보이는 걸 보면 예수님 말씀이 맞는 거지요. 예수님은 서로 미워하며 다투지 말고, 생각과 처지가 다르더라도 화해하고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 제자들이라는 이들이 당신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를 향하여 미움의 언어폭력을 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온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핵무기가 무려 2만개. 1위는 러시아 7천개, 미국이 6800개, 프랑스 300개, 중국 270개, 영국 215개, 파키스탄 140개, 인도 130개, 이스라엘 80개, 그리고 북한이 60개로 9위랍니다. 우리도 보수 일각에서 핵무기를 보유하자고 주장하고 있지요.
미사일 경쟁도 치열합니다. 러시아, 중국은 최근 소리보다 10배나 빨라서 상대방의 방어가 불가능한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큰소리치고 있고 미국도 같은 수준에 가 있습니다. 소리가 1초에 340m를 가니 10배면 1초에 3.4km, 1시간에 무려 12240km를 날아가 핵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겁니다. 우리도 러시아로부터 기술을 배워 소리보다 3배 정도 빠른 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주요 군사강국들은 오래 동안 무기감축 협상을 벌여왔고 어느 정도 진전도 있던 터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그간의 감축 협정을 무효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 마당에 이미 북한보다 백배 천배 강한 핵과 미사일을 가진 강대국들은 이제 막 자신들의 대열에 들어서려는 북한을 상대로 마치 만악의 근원인양 몰아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과연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곳 맞기는 한 건가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그것을 가져다 정원에 심으면 나무가 되어 새들이 가지에 깃들고,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신께서 만드셔서 악과 폭력은 얼씬도 못하는 꿈속의 이상향이 아니라, 폭력을 쓰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으로 지켜내고 겨자씨나 누룩처럼 키워내야 할 우리 평생의 일터,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이 길이 권력과 황금과 명예와는 영 거리가 먼 고난의 길임은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셨지요. 신자라는 이들로부터 ‘빨갱이’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주교님들도 그 길을 따르고 계신 거고요.
하느님 나라는 노트르담 성당 황금빛 제대가 아니라 폭력으로 가득한 이 고통스런 세상 속에 있습니다. 화려한 성당은 불에 타 무너져 내릴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고난 속에서도 겨자나무처럼 누룩처럼 날로 커져갈 겝니다.
이 글은 <가톨릭신문> 4. 28자에 실린 <공동선> 발행인 김형태 요한 변호사의 것입니다.
무신론.
신을 부정하는 이론을 펴는 무신론자들을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버린자들로 규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신을 부정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질않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한 칼 마르크스나 '신은 인간의 투사에 지나지않는다'고 주장한 포이에르바흐와 심리학자 프로이드 등의 생애를 보면 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의 뜻을 구현할 교회와 종교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무지 즉 은폐성 같은 것이 무신론자들을 만들엇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는 무신론자들의 경고처럼 자칫 정서적 폭력을 행사할수 있는 가능성을 다분히 가지고 잇습니다. 사람들은 신의 뜻을 운운하는 성직자들에게 함부로 덤빌수 없기에 때로 심리적으로 기형적으로 종교인들의 심리적노예가 되기도합니다. 이런 자기모순을 직시해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모순된 행위를 멈출수 있습니다.
신 바리사이즘. 가학적 신앙관은 피학적 양태를 가지기도 합니다. 양날의 칼같은 신 바리사이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않으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고통이란 무엇입니까?
생각과 감정의 본질을 놓치고 생각과 상호 작용하는 것이 업이며 습관이며 고통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공성이라고 합니다.
공성의 상대적인 표현은 무상과 연기입니다.
모든 감정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일시적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감정을 구체화해서 집착합니다.
일시적인 것을 오래가게 견고하게 실체화 합니다.
고통은 구체화(생각으로)하는 만큼 있는 것이고 구체화 하지 않는 만큼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생각의 공한 본질을 알아차립니다.
생각은 마음 뿐이고 지각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특별한, 견고한 독립적인 존재함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해가 뜨면 해빛이 나듯이 마음이 있으면 생각이 일어납니다.
해빛이 꽃도 비춰주고 쓰레기도 비춰 주듯이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대상에 의해서 일어나는 생각은 그저 생각 뿐입니다.
수행자는 이것을 알아 생각의 본질을 놓치지 않아서 생각이 힘없이 사라집니다.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 본질을 놓쳐서 생각에 빠지는 것이 고통입니다.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의 본질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입니다.
색에서 공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은 2차 대전 때에 가족들과 함께 곤경에 처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독일군에게 발각이 되어 체포되었다. 수용소에 갇힌 지 10일만에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체포된 지 3개월 후에는 수용소에서 자매 벳시를 다시 만났지만 벳시는 얼마 후에 많은 여인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코리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코리는 전쟁이 끝난 후 많은 곳을 돌아 다니며 전쟁과 포로수용소의 참상, 그리고 그곳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강연요청이 왔다. 요청을 수락하고 강연을 하던 어느날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그녀의 손에 입맞추며 격려와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 그녀는 자기에게 다가 오는 한 남자를 알아 보고는 온 몸이 얼어 붙는 듯했다. 그 남자는 수용소에서 온갖 몹쓸 짓을 하던 사람이었다. 코리의 자매 벳시도 그 남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었다.
코리는 순간 머뭇거렸다. 그러나 용서하고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기도를 드렸다: “주님,저는 그의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저의 감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평화로운 기운이 그녀의 팔과 온 몸에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과거의 비통한 기억들도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코리는 그 남자에게 말했다: “진심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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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의지로 용서가 가능할까? 마음은 용서한다고 다짐하지만 깊이 상처 난 영혼은 막상 그를 보면 다시 트라우마의 진액을 품어냅니다. 용서가 증오의 악순환을 끊고 미움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 상황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특별 은혜입니다. 주님이 영혼의 상처를 덮어주시고 마음을 녹이셔야 가능합니다. 오늘도 난 그놈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은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