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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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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바로 성장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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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jpg

 

인색한 마음이 일어날 때가 보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미움이 일어날 때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낙담이 일어날 때가 용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짜증이 일어날 때가 자제를 연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싫은 사람과 같이 있을 때가 자비를 배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불쾌함이 일어날 때가 내려놓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화가 날때가 인욕수행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원치 않은 모든 상황이 가장 훌륭한 수행의 기회입니다. 수행자에겐 좋은 상황보다는 안좋은 상황이 더 이롭습니다. 좋은 상황은 공덕을 까먹게 하고 오만하게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어려움이 큰 도움이 됩니다. 모든 원치 않은 상황을 기회로 삼아 우리의 혜택으로 돌려보세요. 하루하루에 주어지는 훌륭한 기회들을 놓치지 마세요. 일상 말고 다른데 수행을 찾지 마세요.
프라이팬은 뜨거울 때 닦아야 잘 닦아집니다. 번뇌도 일어날 때가 닦을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입니다.
밖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는 것이 방법입니다. 상대방을 해결하지 않고 마음을 해결합니다.
좋은 상황을 안좋은 상황으로 보고
안좋은 상황을 좋은 상황으로 보도록 하세요. 이것이 바른 견해이며 수행자의 관점입니다.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디엔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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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포럼-.JPG» 사진 왼쪽부터 서울대교구 민죽화해위원회 정세덕 신부, 구스만 카리키리 교황청 라틴아메리카위원회 부의장 부부, 헝가리의 페테르 에르되 추기경, 요제프 클레멘스 주교.

 

“(공산정권에서 핍박 받던) 헝가리 교회가 자유화 이후 용서를 이야기한 뒤, 사람들이 ‘너무 약해빠진 것 아니냐’, ‘필요하다면 보복 같은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공격을 받곤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주최한 ‘2019한반도평화나눔포럼’ 참석차 방한한 헝가리 ‘에스테르곰-부다페스트’ 대교구장 페테르 에르되 추기경은 20일 서울대구청에서 포럼에 참석한 유럽의 대표단들과 가진 공동간담회에서 ‘남북한과 남남내 이데올로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에르되 추기경은 “용서란 사회의 불의가 일어날 때 방어하지말거나 보호하지 말라는게 아니다”며 “세상엔 인종말살처럼 해결하거나 보상하기 어려운 범죄들이 존재하기에 용서는 험난한 여정이지만, 교회는 가해자가 용서를 청하지않아도 먼저 용서하라는 부름을 받았기에, 그런 예언자적 사명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교황청 내 보수파였던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개인비서이기도 했던 요제프 클레멘스 주교(교황청 평신도 평의회 차관)는 나치의 가해 국가인 독일과 피해국가인 폴란드와 화해 사례를 들어 “폴란드 정부는 독일 정부에 대한 반감을 계속 유지하고, 분노에 불을 지켜 불이 타오르기를 바랐지만 폴란드 주교회의가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용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서를 빕니다’라는 그 유명한 말을 했다”면서 “이 말은 서로 상처를 입은 남한 내에서도, 또 남과 북 사이에서도 유효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과 같은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독일교회의 예도 들면서 “화해와 일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본성, 즉 디엔에이에 속한다”면서 “그렇기에 눈 앞만을 보지 말고, 멀리 보면서 일치 속에서 미래의 화해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게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이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2차대전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위한 젊은이 교육을 예로 들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2차 대전 뒤 프랑스의 드골대통령과 독일의 아데나워총리가 양국 젊은이들 사이의 교류 모임에 지금까지 연인원 900만명이 참석했다. 분열을 위한 거짓정보와 선입견, 편견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나도 1970년대초 그 모임에 참여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편견을 극복하는데 최상의 레시피다. 남남에도 남북한에도 사용되면 좋을 레시피다.”

  우루과이 몬테비디에오의 에푸블리카 대 교수이자 변호사인 카리키리 교황청 라틴아메리카 부의장은 크레멘스 주교의 교육론을 뒷받침해 “정치적 협상도 필요하지만 전국민이 진정한 평화 건설에 형제적 유대감을 갖기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카리키리 부의장도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면서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극복해야할 세가지 요소를 이렇게 언급했다.
 “한국 젊은이들이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표에 무관심해질 위험이 있다. 자기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남북한 화해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해지는 것 말이다. 그러면서 남에게 과시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수인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그저 자신의 복리와 자신의 돈만 염려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또 하나는 이데올리기다. 이데올로기는 젊은이들을 왜곡된 시각으로 가둬버릴 수 있다. 진정한 평화의 건설자가 되지못하고 이데올리기의 하수인이 되게 해버릴 수 있다. 진정한 교육은 이걸 넘어서게 해야한다. 젊은이들이 사랑과 정의와 진리와 행복을 위해 높은 소망을 지니도록 해야한다.”
 전 사피엔자대 교수인 부인 리디세 마리아 고메스 망고와 함께 포럼에 참석한 카리키리 부의장은 오는 6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들 부부의 결혼 50돌을 기념하는 미사를 바티칸에서 직접 봉헌해주기로 약속할만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카리키리 부의장은 “몇 달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우에 따라 북한을 방문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북한에 대한 교황의 관심은 너무도 크다”면서 “교황은 남북 화해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2016년 첫개최 이후 지난 18일 4번째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연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남북 분단 전 북에 있었던 57개 가톨릭 교회를 기억하면서 ‘내 마음 속 북녘본당갖기운동’을 가져 신자들이 북녘의 한 본당과 유대를 맺어 영적 교류를 갖고 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을 펼쳐가기로 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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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글씨.jpg» 무위당 장일순의 서예글씨

 

장일순-.jpg» 생전의 무위당 장일순

 

 #아침마다 먹는 생야채가 내겐 보약입니다. 유기농산물을 믿고 먹을 수 있도록 해 한살림생활협동조합의 뿌리는 원주의 무위당 장일순(1928~94) 입니다. 무위당의 25주기를 기념하는 생명협동문화제가 지난 16일 시작돼 6월4일까지 일정으로 원주 일원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이  쓴 <장일순 평전>(두레 펴냄)도 출간되어 그의 면모를 좀 더 깊숙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암담한 시대 마음이 외롭거나 영혼이 적막할 때면 무위당을 찾던 리영희는 ‘다시는 장일순과 같은 사람이 나오기 힘들것’이라고 아쉬워했지요. 대통령도, 고관대작도, 법조인도 추기경이나 주교도 아닌, 변변한 직업조차 없던 그를 말이지요. 무위당은 시골마을에서 시내까지 20분이면 갈 길을 2시간 걸려 다녔다고 합니다. 풀섶의 여치와 귀뚜라미와 민들레와 토끼풀과도 인사를 나누고, 개구리 소리와 뜸북이 소리에 응답도 해줬겠지요. 동네 아이들, 노인들, 장돌벵이와 말동무도 했고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그렇게 느리게 느리게 갔더랍니다.

 

수경스님.jpg» 서울 화계사 주지 시절의 수경 스님

 

 

공양송.jpg

 

 #선방에서 수행하던 수경 스님은 1990년대 환경운동에 투신해 환경운동을 주도했지요. 그런데 문수스님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소신공양을 한뒤 2010년 모든 활동을 접고 잠적했습니다. 선승의 활발발한 기상과 특유의 인간적 매력으로 ’운동’의 에너지원이었던 그의 부재는 환경운동판에도 깊은 상실감을 주었지요. 그런데 그가 사라진지 9년만에 그의 이름이 달린 작은 책자가 배달되었습니다. 50여쪽에 불과한 <공양>이라는 소책자입니다. 그는 머리말 ‘수챗구멍 속의 우주’에서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 출가한지 한달만에 밥을 짓던중 수챗구멍에 쌀을 흘려보냈다가 쫓겨날뻔한 일화를 들려줍니다. 숨은 도인이면서도 평생 일만하던 벽초 스님이 어느날 공양간의 수챗구멍에서 내려 보낸 쌀, 콩나물대가리, 밥풀들을 바가지에 주워 담아 행구고 그 자리에 그걸 먹었다고 했습니다. 책자 속엔 장일순의 제자인 이철수 판화가가 새기고 수경 스님이 쓴 ‘공양송’이 담긴 엽서가 들어있습니다. ‘이 밥은/숨쉬는 대지와 강물의 핏줄/태양의 자비와 바람의 손길로 은 모든 생명의 선물입니다//이 밥으로/땅과 물이 나의 옛몸이요/불과 바람이 내본체임을 알겠습니다’. 수경 스님이 밥상에서 대하는 ‘진지(眞知)’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배심원들1.jpg» 개봉중인 영화 <배심원들>

 

배심원들2.jpg

 

 #홍승완 감독의 <배심원들>을 보았습니다. 지난 2008년 국민이 참여하는 역사상 최초의 재판이 열리는 날에 대한 영화입니다. 일당 10만원을 받기 위해 온 배심원 8명은 ‘저 높은 곳에 계신’ 지금까지의 심판자들과는 많이 다른 이들입니다. 모친살해 피의자와 같은 임대아파트에 살던 20대 여성,  파산신고해 ‘신용불량’ 상태에 있는 청년, 30년간 장례식장에서 주검을 닦은 염장이, 10년간 남편 병수발을 들던 노인 등이었습니다. 배고프고, 넘어지고, 아프고, 서러워본적이 별로 없는 높으신 분들과과 달리 찢겨지고 넘어진 자들은 아무도 동정하지 않은체 살인범으로 낙인 찍힌 피의자가 있던 아주 아주 낮은 곳으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느껴봅니다. 으르렁대는 개를 무조건 두들겨패기보다는 ‘개가 짖는 것도 무서워서 그런거잖아요’라는 배심원들의 감수성 점수를 사법고시 합격 점수보다 높게 쳐주고 싶습니다. 배심원에 의한 재판에서는 일반 재판보다 무죄율이 3배나 된다고 합니다. 무지란 명문대나 고시에 낙방한만큼 지식이 부족한게 아니라 작은 이들의 신음소리에 둔감하고 아픔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아닐까싶습니다.

 

자승스님.jpg» 조계종 전 총무원장 자승 스님

 

원행스님.jpg» 조계종 현 총무원장 원행 스님
 
 #감로수는 불교에서 고통중생들의 목마름을 달래주는 ‘진리의 생명수’입니다. 조계종이 지난 2010년 수익사업을 해 승려노후복지기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하이트진료음료에서 공급하는 ‘감로수’란 생수를 종단내 사찰에서 판매케하고있습니다. 약수물이 좋은 산사에조차 반환경적인 패트병들이 나뒹구는 것부터 모양새가 좋지않습니다. 그런데 상표사용료 가운데 5억원이 넘는 돈이 자승 전총무원장 관련자가 내부이사로 등록된 단체에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조계종 총무원 노조에 의해 제기됐습니다. 그러자 종단은 노조원 3명을 징계했습니다. 수사가 진행 중이니, 사실관계를 확인한 이후 책임을 따져 물어야할 사안임에도 미봉만 서두르고 있습니다.
 조계종은 지난해 11월 원행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했지만, 여전히 자승 스님이 상왕으로 군림하다고 있다고합니다. 위만 쳐다보면 낮은 곳의 목소리들이 들릴리 만무합니다.

기이한 조오현스님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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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의 열반 1주기를 맞아 지난 15일 밤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에서 대부분 생전의 조오현 스님과 인연이 있던 시인과 소설가, 문예잡지 발행인 등 문인들과 스님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추모세미나에서 조현 기자가 발표한 '조오현 스님의 인간적 면모'글 전문입니다.

 

무애춤-.JPG» 지난 16일 설악무산 조오현스님 1주기 행사가 열린 강원도 속초 설악산 신흥사 법당에서 추모다례제에 앞서 한 유랑승이 조오현 스님의 무아자재한 삶을 나타내는 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다.

 

당주조한(噇酒糟漢):장형을 맞을 말, 맞을 짓을 골라서 하다

 

아침 5시에 문자가 딩동하고 울렸다면 뭔가 급한 일이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고독과 그리움을 천석고황처럼 껴안고 몸부림치던 설악 무산 조오현스님은 자신을 독거노인이라고 했다. 내 노모도 40여년 전 홀로 돼 독거노인으로 지내고 있지만 이 표현은 스님에게서 더욱 적절하다. 5시라지만 실은 취기로도 잠재우지못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남의 단잠까지 깨우지않는 배려심으로 분초를 늦추고 늦춘 시간이니 그로선 가장 늦은 시간이다. 서울 북쪽 끝 수유동에서 남쪽 끝 서초동으로 오려면 먼거리지만 아직 거리가 한산한 시간이니 택시를 타면 20분이면 올 것이라고 채근한다.

하지만 불초는 급한 호출해 호응할만큼 배려가 없었다. 평소 대중교통만을 이용하는 분수대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두번 갈아타고 가곤했다.

 스님은 서울에 머물때면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불교평론>이 있는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 주석하다가 10여년 전 남부터미날역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을 토굴로 삼았다. 문을 열러 나온 스님은 신발도 신지않은 채였고, 바지춤 밖에 내의가 삐져나와있기 일쑤였다. 산승이 도심의 오피스텔에 출몰하는 까닦을 알리 없는 이웃 거주자들이 그 복식과 불콰해진 모습을 보면 아마도 남의 집 상가집에서 모처럼 술상을 받아 밤을 샌 조선시대의 광대나 사당패로 볼만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아무리 취기가 올라도 선수( 先手)를 빼앗기는 법이 없었는데, “이것이 납자의 본분상입니까란 질문이라도 받은 듯이 낙승을 자처했다. 낙승(落僧)이란 낙방한 중이란 뜻으로, ‘30년 넘게 밥보다 술을 많이 먹고, 담배나 피우며 밥만 축냈으니 중이 될려다 못된 중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절 받고 돈 받는게 중 아니냐고 했다. 또한 만해마을을 만들어 만해축전을 열고, 만해상을 유명 인물들에게 주는 것을 놓고는, “이만하면 만해를 팔아 장사를 잘했제라며 담배 연기를 뿌옇게 내뿜었다. 그야말로 하룻밤 추위를 녹이려 절간의 보물인 부처님을 쪼개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넣고 있는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선사가 목불을 태우다)의 언행을 하면서도, 천연덕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그는 <벽암록>을 쓰면서, 자신에 대해 이 술찌게미나 먹고 취하는 당주조한(噇 酒糟漢) 같는 놈! 백주에 장형(杖刑)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는데, 잔나비 상호로 베시시 웃으며 능청스럽게 만해장사를 운운하며, 그야말로 장형 당할 소리만 골라서 해대는 것이었다.

 허나 그 정도는 권두언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왜 시()를 쓰게 됐느냐면으로 묻지도 않는 답을 이어갔는데, “국민학교도 안나왔다고 무시하길래 뽐내려고 시를 썼다고 했다. 1970년대 설악산 신흥사 주지를 할 당시만 해도, 본사 주지는 시청에 학력과 경력까지 들어가는 이력서를 첨부해 등록을 해야했는데, 시장과 국회의원이 국민학교도 안나왔다고 안알아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시인은 알아준다는 말을 했다. 대학교수들조차도 자신을 소개할 때 시인이라고 할만큼 시인이라면 알아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시인이 누구냐고 했더니, 젊은사람들중엔 이근배시인이 <한국문학> 잡지도 내고 있어 알아준다고 했다. 그래서 이근배 시인을 불러 시집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에게 대한민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뭐니 뭐니 해도 미당 서정주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1년만에 시집을 만들어 교정지가 왔는데, 이 시인의 평론이 미당과 자신을 비교했는데, 미당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듯 보였단다. 그래서 자신이 이를 뜯어고쳤다고 한다. “서정주의 시는 화려하나 조오현의 시는 오만하다. 서정주는 가꾸고 있으나, 조오현은 버리고 있다.”고 자기가 자신의 시를 남의 이름을 빌어평했다는 것이다.

 그가 탔던 수많은 상들이 그저 그의 후원의 덕화를 입은 이들이 갚은 은공 정도가 아니었을까라고 폄하의 생각을 유도할만한 말만 골라서 해대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보면 그가 하버드대나 버클리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초청 받아 강연을 했다는 것도 그런 정도로 이해되어도 이상할게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인도에서 시성 타고르와 조오현의 시를 비교하는 세미나를 여는데, 동행할테냐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어찌 타고르에 갖다붙일까라며 가당치않다는 생각에, 핑계를 대어 거부한 것이었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면서 감히 한산과 습득의 흉내를 내고, 명예까지 탐하지않은가라는 의심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취기가 오르면, 자신의 탄생 비화를 들려주었는데, 이는 그야말로 장광설의 화룡정점이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밭일을 하다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중 전라도에서 무슨 일로 도망을 다니던 사람이 어머니를 범해 자기를 낳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형제들과 얼굴이 닮지않아 처음엔 무당집에 맡겨졌다가 꼴머슴으로 절에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부친을 알수 없는 선종의 5대조사 홍인대사는 자기의 성씨를 불성(부처의 성)이라고 했고, 고구려 시조 주몽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자식이라고 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내세울 수 없는 부친을 이렇게 신화화하는 경우는 숱하지만, 자기의 출생을 사통으로 인한 것으로 희화화하는 것은 익히 본 바가 없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조오현(曺五鉉)과 조현(曺鉉)은 같은 창녕조씨에 돌림자 현자까지 같으니 너는 내 동생 아니냐고 하는데도, 그가 과연 조()씨인지 아닌지도 더욱 미궁에 빠져들었다. 스님은 마시던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라 홀짝이며, 이렇게 조오현이란 돌멩이로 공기돌 놀이도 하고, 제기도 차고, 물수제비도 뜨며 1인극을 하는 것이었다.

 

무산흔적-.JPG»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의 1주기 추모세미나가 열린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

 

 

금선탈각(金禪脫殼):허물을 벗은 매미처럼 자유롭게 살다

 

 근세 선의 증훙조인 경허선사가 견성을 한 뒤 처음 가진 법회에서였다. 속가의 어머니도 소문을 듣고 와 법회에 참석했다. 과연 견성 도인의 법은 어떤 것인까하고, 시선을 경허에 집중하고 있던차 법상에 오른 경허가 갑자기 옷을 벗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않은 알몸으로 말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너무도 놀란 어머니는 내 아들이 견성을 했다더니 미쳐버렸구나라며 법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경허가 혼자 중얼거렸다.

 온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쓸쓸히 깨어있구나

 그 뒤 경허는 장터에 가서 곡차를 동이째 털어놓고 얼굴을 붉게 단청했다. 경허는 시자 만공을 데리고 가던중 곡차를 마시고는 지나가는 아녀자를 껴안고 입술을 맞췄다. 그러자 마을 장정들이 잡아 죽이려고 경허와 만공을 쫓았다. 잡히면 꼼짝없이 맞아 죽을 판이었다. 강을 건너 겨우 도망을 치는 경허를 따라서 구사일생한 만공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길을 가는 경허에게 따지며 물었다. “스님, 어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여인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해도해도 너무하지않습니까

 그러나 경허가 말했다. “나는 그 여인을 내려놓은지 오래인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껴안고 있느냐

 만공의 의뢰를 받아 만해는 경허의 사후 <경허집>을 썼고, 조오현은 경허를 사숙했다. 광인처럼 나신으로 춤을 추는 듯한 스님에게서 어느 순간 경허를 보았다. 손자병법 21계에 금선탈각(金禪脫殼)의 계가 있다. 매미가 아무도 모르게 허물을 벗어버리고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스님이 역해해 출간한 <벽암록> 84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옳다고 해도 옳다고 할 만한 것이 없고, 그르다고 해도 그르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옳고 그름을 이미 버리고 얻었다거나 잃었다거나를 모두 잊어버리면 깨끗한 벌거숭이가 되어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다. 말해 보라. 내 앞뒤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이 설두선사의 법문에 대해 해석을 붙인 원오선사의 정라라(淨裸裸 적쇄쇄(赤灑灑)’를 소개했다. 즉 원오는 진리 당체를 아무 것도 걸치지않은 벌거숭이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장자>에 나오는 송나라 원군(元君)의 화가일화도 이와 다르지않다.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 때 많은 화공들은 명령을 받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는데 한 화공은 늦게 도착했다가 그림도 그리지 않고 자기 숙소로 가버린다. 그리고 숙소에서 옷을 홀랑 벗고 벌거숭이로 쉬고 있다. 원군은 그야말로 참된 화공이라고 한다.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다. 온갖 아름다운 겉모습보다 아무런 치장이 없는 그 바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정신이 초롱초롱한 아침 시간임에도 스님의 술과 담배와 옷매무새와 비화에 현혹돼 그 바탕의 성적(惺寂)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분하기 그지없다. 여우 같은 의심으로 먹고 사는 기자의 업습의 한계에 갇혀버린 것이다. 성스럽게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위선과 거짓이 사무쳐있는 종교가의 이면과 실상을 숱하게 보아오면서도, 여전히 겉모습의 이분법에 사로잡히고 만 탓이다.

 더구나 스님의 무용담은 무협지 같은 것이어서 의심을 늘 부채질해 현혹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198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식당일을 하던중 가톨릭 신부의 초청으로 성당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 황진이와 백호 임제의 시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 후 인기 강사로 떠서 텍사스주로부터 귀빈증서를 받고, 휴스턴시 등 18개 시에서 명예시민증으로 받고, 미국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로부터도 명예지휘검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영국에 가서는 우리 한국에선 예의 바른 사람을 영국신사라고 한다고 서두를 꺼내고, 한국에 와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둘러본 엘리자베스 여왕의 우아한 모습을 찬사하며 비위를 맞춰주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다시 그 영광의 자리에 서 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 “<날 좀 보소>란 민요가 사람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아니냐네가 날 봐주질 않으니,나도 날 좀 봐달라고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야기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면서는, 바지춤도 제대로 여미지않는 채 미국 등 서양에서 수많은 제자를 둔 국술원 총재 등이 자신을 따르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젊어서는 한 주먹 했다고 권투 폼을 재기도 했다. 영락 없이 무성영화 속의 채플린 같은 모습이었다. 

스님과 젊은시절부터 교유했던 이근배 시인은 천변만화하는 설악산을 어떻게 몇번 올라보고 다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오현 스님은 그의 호 무산(霧山) 그대로 범인들이 좀체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안개산이었다고 회고했다. 평생의 지인조차 그럴만큼 스님은 마치 상상 속의 용()처럼 변화무쌍했다.

 

원오는 설두의 법문에 박자를 맞춰 화답한 선서(禪書)<격절록>(擊節錄)을 남겼다. 격절(擊節)이란 핵심을 찌른다는 뜻이다. 원오가 설두의 법문에 무릎을 치며 탄복하고 칭찬한다는데서 격절탄상(擊節嘆賞)’이란 말이 나왔다. 그런데 허물을 벗어버리고 훠이훠이 날고 있는 그의 무애자재한 본래면목에 격절탄상은 고사하고, 나 또한 경허 모친의 우를 되풀이하고 만것이다. 조주처럼 신발을 머리에 이고, 운문의 간시궐(幹屎厥·똥막대기)을 짚고 허우적거리듯 비틀거리는 그 모습을 그저 광대놀음으로 여겼을 뿐이다. 매미 허물에만 현혹돼, 술에 넘지고, 담배에 또한 번 넘어지고, 곡예극에 다시 넘어지며 진흙밭에서 허우적거렸으니, ‘맹인 코끼리 만지기식 군맹모상(群盲評象)이었다. 강을 건넌 뒤에도 갈길을 가지않고 뗏목을 붙들고 낑낑대는 꼴이었다. 허수아비의 광대놀음에 취해 시퍼런 칼날이 녹스는 줄도 몰랐으니, 벗개불처럼 뗏목줄을 단칼에 베어내 함께 훠이훠이 나르듯 가지 못하고 미망의 밧줄에 매어있었던 것이다.

 

발표-.JPG»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 1주기 추모세미나에서 '인간 조오현의 면모'에 대해 발표하는 조현 기자

 

화광동진(和光同塵):숨은 보살을 누가 알아보는가

 

 근세 숨은 고승 33인의 삶을 추적하고 그들의 제자들을 만나 <은둔>이란 책을 펴낸 적이 있다. 많은 스님들이 그 책에 대해 과분한 평을 해주었다. 스님과 인연이 닿은 것도 <은둔><한겨레>에 시리즈로 쓴 것을 본 스님이 만남을 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스님은 조현은 앞으로도 꼭 붓을 놓지않고 불법의 당체를 드러낼 책임을 져야한다고 경책과 격려를 해주었다.

 <은둔>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 채 세상 속에 숨어들어 대승의 길을 연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보살들을 조명했다. 33분의 고승은 모두 열반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화광동진의 살아있는 보살이 앞에 나타났을 때는 이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스스로 청맹과니였음을 고백치않을 수 없다.

 그랬으니 스님이 펴내 내게 던져준 책도 수년간 제대로 펼쳐본적 조차 없었다. 뭐 볼 게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잠이 오지않아 뒤척이다가 스님의 <절간이야기>를 집어들었는데, 그 날 밤은 저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소쩍새 울음 같은 호곡소리를 들었다. ‘절간 이야기1’은 새벽 사지가 다 부러지는 뼈마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아궁이의 군불을 때는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이야기다.

 양산 통도사 극락교 그 돌다리, 장골 열 사람의 목도로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 큰 돌덩어리 누가 들어다 놓았는지 아는 사람 있능교?” 울할아버지가 익산 미륵사지에서 혼자 야밤중에 들어다 놓았니더. 밀양 표충사 대웅전 대들보는 또 누가 짊어지고 왔능교? 울아부지가 짊어지고 왔니더. 그 대들보 짊어지고 오시다가 허리뼈가 부러져 아니 지게가지가 부러져 그날로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했니더. 운명하실 때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날 부둥켜안고 시님들 말씀 잘 듣거라이. 배고프면 송기 벗겨먹으면 배부르다이.’ 하고 갔니더.

 다른 이야기에서는 캉캉한 시골 노인과 염장이 등이 등장한다. 고승도 대시주자도 아니다. 절 집 주위 가장 소외된 중생들이다.

불가에서 유정설법을 넘어 무정설법까지 알아들은 소동파의 시만큼 널리 회자되는 시도 드물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산빛이 어찌 그대로 청정법신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어찌 시냇물과 솔바람의 소리만 있겠는가. 진정한 무정설법은 중생의 삶이다. 시인묵객들이 노래하는 시냇물과 솔바람에 묻혀버려 들리지않는, 중생들의 신음 소리 말이다.

그러나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글을 못쓰고, 아파도 아프다는 말조차 못하는 고통 중생의 화농이 스님의 시집에서 터져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하는 시와 소설을 읽어보면 새로운 기교와 기법을 가미해 달리 현혹할 뿐이라는 감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이날 밤 스님의 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글에서 기교가 아닌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들의 애응지물(礙 膺之物)이 가슴에 걸리지않고는 나올 수 없는 통한이 서려진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친듯이 그의 다른 책들까지 찾아내 읽어보니, 하나 같이 가장 연약한 이들의 심중에 가닿는 동체대비(同體大悲) 아님이 없었다. 더구나 글이 글로 끝나지않고 보살로 화작(化作)하는 것을 보고 나서, 여우 같은 의심을 끊을 수 있었다.

 간혹 서울 정릉 흥천사를 비롯한 절간에서 스님을 뵌 적도 있는데, 그는 절에서 상좌들에겐 호랑이 같으면서도, 부목이나 공양주 보살이나 심부름꾼이나 대중들에겐 자비롭기가 봄바람 같았다. 남이 더 무시하고 하대하는 이들을 더욱 아끼고, 존대하고 공경했다.

 이런 태도가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대승의 보살도로 행해졌다는 게 더욱 뜻이 있다. 설악산 신흥사가 있는 속초와 낙산사가 있는 양양에서 신흥사와 낙산사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들이 얼마나 여법하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본 이들은 소아적 불교의 나태함에 대한 한심함을 단번에 벗고, 미래 불교의 대안에 환희작약하지않을 수 없다. 또한 백담사가 있는 인제에서 백담사가 용대리 주민들과 백담사까지 운행하는 버스 기사들을 얼마나 불보살처럼 공양하고 모시는지를 보면, 그 모방할 수 없는 모습에 고개를 숙이지않을 수 없다. 스님이 열반 직전까지 주머니를 다 털어서 공양하고 모신 것도 이들이었다.

 

다비.jpg» 1년전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의 다비식 

 

간난신고(艱難辛苦):버려지고 찢긴 상처가 진주가 되기까지

 

 조오현은 1932년 경남 밀양시 상남면 이연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조선 초기 이래 창녕 조()씨의 집성촌이었고, 조선. 명종 때는 조말손이 기근으로 굶주리는 고을민들을 구휼했다고 전한다.

 스님은 어려서 무당집에서 지내다가 여섯살 때 경남 밀양 종남산 은선암에 맡겨져 소머슴으로 살았다. 절에서 서당에 보내줘 천자문과 사자소학과 명심보감 등을 배웠다. 그는 소금쟁이와 노는데 한눈이 팔려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꾸중을 듣고 가출을 해 도시로 나가 떡장수, 배달꾼, 막노동 등을 하다가 절로 귀환했다. 그는 한 절에서 노스님을 시봉하는 시자를 했는데 그 절이 너무 가난해 매일 탁발을 해 끼니를 해결했다.

 어느 날, 탁발을 나간 그는 한 집 앞에서 반야심경을 두 번이나 외며 염불을 했는데도 집주인이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나병 환자부부가 구걸을 하러 왔는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나병환자들에게만 쌀을 주었다. 그 주인은 나병환자에겐 한됫박의 쌀을 주면서도 그에겐 방아도 찧지않은 겉보리 한줌만을 주었다. 이를 본 그는 부처님보다 나병환자가 더 낫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따라가 같이 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거절한다. 하지만 조오현은 끈질기게 그 부부들을 설득해서 먹고, 자고, 구걸하면서 그들과 반년동안 움집에서 함께 산다. 그는 그들 부부의 따뜻함과 배려심으로 전에 느끼지 못한 평화를 누렸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남자 나병환자는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문학도 좋아하고, 시도 썼다. 그는 조오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세계 명작 책을 구해 가져다주며 명작의 줄거리를 들려주며 감상담을 나누기도 했다.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은 것도 그 때였다. 그 나병환자는 기인같은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스님에게 자기 아내의 젖을 빨아라고 하고는, 그렇게 하면 이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그들이 조오현에게 혼자서 읍내로 나가 구걸을 해 오라고 했다. 혼자서는 구걸을 시키지 않았던 분들이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시키는 대로 구걸을 해서 움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보이지 않았고, 잘 지내라는 당부 편지만 있었다. 그는 그 나병환자를 잊지못해 여기 저기 수소문해가며 전라도 해남까지 갔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다시 출가한다. 이번에야 말로 스스로 승려의 길을 택한 발심출가다. 그는 당시 은사였던 밀양 성천사 인월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무문관>에서 언급했다. 스님은 도반인 조계종 전계대화상 성우 스님의 소개로 해인사에 와서 조계종 전종정인 고암스님에게 수계를 받아 승려인증을 받는다. 스님이 대처승의 상좌여서 승려로서 제대로 길을 가지못할 것을 염려한 성우 스님은 수계를 받은 스님을 해인사 강원에 넣으려했는데, 그 때도 남의 눈치를 살피지않고 태연하게 절에서 담배를 피는 바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도반 조오현과 성우 스님 등은 승려시인회를 결성해 시문학 활동을 했고, 스님은 이라는 시동인으로도 활동한다. 그러므로 30대 중반부터 이미 시를 써온 셈이다. 그러니 그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시인이 됐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닌 셈이다.

 당시 성우 스님은 스님의 열반 뒤 조오현의 단면을 알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한번은 청도 신둔사라는 절의 객실에서 하룻밤 함께 묵은 적이 있는데 그날 밤 신둔사에 강도가 들었다. 한창 자고 있을 때 복면을 쓴 강도가 들어와 턱밑에 칼을 들이밀고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혼비백산한 성우 스님은 벌벌 떨며 걸망 속까지 열어 보이며 가져갈 것 있으면 다 가져가라 했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고 배짱을 부렸다고 한다. 강도는 어이가 없었는지 눈만 한 번 부라리다가 나갔다. 성우 스님은 이 때 오현 스님에 대해 이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만의 길을 갈 사람임을 간파했다고 한다. 아마도 좌고우면하지않고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담대한 성정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다져진 것이기도 할 것이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쫓겨난 뒤 삼랑진 금무사 약수암에서 6년간 정진하며 상당한 체험을 했지만, 그는 어떤 불교적 체험을 통해서보다는, 간난신고의 고해바다를 건너며, 삶의 이치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게 어느 순간 세상 이치가 훤해져버렸다고 했다.

 

유랑승-.JPG» 설악무산 조오현스님의 1주기 추모다례제가 끝난 뒤 조오현 스님의 제자 신흥사 주지 우송 스님으로부터 객비를 받기 위해 가는 유랑승들

 

지독지정(舐犢之情)-새끼를 핥는 어미소처럼 약자를 껴안다

 

 어미는 목매기 울음을 듣지 못한 지가 달포나 되었다./빨리지 않은 젖통이 부어 온 몸을 이루는 뼈가 자리다.통나무 구유에 담긴 여물 풀냄새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다 알고 있다.//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어미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임을,/ 곧 어미를 잊을 것임을.// 어미는 젖을 떼기도 전에 코를 꿰었다./난생 첨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아파서만은 아니었다.//어린 눈에 뿔을 갖고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어미도 미웠다./그러나 그 어미는 그 밤을 혀가 마르도록 온 몸을 핥아 주었다./그리고 다음날 팔려갔다./보았다./죽으러 가는 그 어미의 걸음걸이를,/꿈쩍 않고 버티던 그 힘 그 뒷걸음질을,/ 들입다 사립짝을 향해 내뻗던 뒷발질을,/동구 앞 당산 길에서 기어이 주인을 떠 박고 한달음에 되돌아와/젖을 먹여주던 그 어미의 평생은 입에서 내는 흰 거품이었다.’

 스님의 <어미>라는 시를 읽으면, 간뇌도지(肝腦塗地)하는 중생의 애닮은 고통이 36천 뼈를 시리게한다. 어미소와 송아지의 심중에 어쩌면 이토록 일심과 동체에 이를 수 있을까, 그 경지가 아득해질 뿐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떠나 절집에 맡겨졌던 그에게서 오세암동자의 모습이 떠오르곤한다. 아무도 없는 깊고 깊은 겨울 설악산 암자에서 불모 관세음보살에 의지해 모진 겨울을 난 어린 동자의 애닮은 그리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어려서 모정이 결핍되면 사람을 믿기 어렵게 되고, 그 분리불안의 공포를 떨치기 어렵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분석이다. 스님도 그 그리움과 짙은 애수가 골수에 맺혀 시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 응어리에 걸려 있지만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이 어머니같은 자애로운 보살이 되었다. 칼로 베어내는듯한 파도가 스쳐간 상처를 진주로 토해낸 조개처럼.

 그는 내게 생모가 90세가 넘어 백담사로 찾아왔는데 만나지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고향 읍내 여관을 잡아 묵으며 자기식 이별을 고했고, 끝내 상가엔 가지않았다.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인도 다람살라를 찾은 부모를 따라온 한 한국인 소년이 어떻게 해야 부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소년이 엄마라고 답하자, 달라이라마는 엄마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고, 또 이웃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넓혀 온 세상사람, 온 중생을 다 사랑하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답했다.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세상의 가엾은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승화하며 그 자비를 확산해갔던 스님의 모습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관대작들과도 가까이 지냈지만, 그가 늘 세심하게 정성을 쏟은 이들은 약자들이었고, 만해상을 준 이들도 대자비를 확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금강산 건봉사에 거행된 오현스님의 다비식의 대미는 한 유랑승의 무애춤이었다. 그 노승은 스님의 법구가 활활 타오르는 다비식장에서 춤을 추며 오현스님을 보냈다. 깊고 깊은 상실의 아픔이 베인 춤사위였다.

 스님이 주석하는 설악산 신흥사나 백담사엔 선방 결제나 해제 때면 유랑승들이 몰려들었다. 종단에선 승려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를 못 주게 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를 상좌들이 제지하면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라고 오히려 호통을 치곤했다. 그렇게 사찰 내에서도 객비나 동냥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워 어느 절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을 스님만큼 승려 대접, 사람 대접 해주는 이는 요즘 풍토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스님은 말년에 유랑승을 모아서 자신도 한번 가보지 못한 인도성지순례를 가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불교평론>의 홍사성 주간도 스님은 늘 그런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한번은 <불교평론> 사무실 보조원을 채용했는데 엉뚱한 실수 투성이어서 홍 주간이 그만두게 하려 했을 때였다. 스님은 너처럼 잘난 놈은 어디 가서든 먹고 사는데, 저 녀석을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홍 주간이 도저히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청소라도 시켜라며 그 청년의 월급은 따로 챙겨주었다.

 정념 스님이 서울 성북구 돈암2동 흥천사에 조실채를 멋지게 지었다. 오현 스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결국 스님은 살지않고 오피스텔 토굴과 무문관을 오가다 입적했지만, 처음엔 서울의 사찰에서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데 기대감이 큰듯했다. 스님은 조실채의 이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절에서 조실채는 염화실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절집 용어 외엔 달리 생각나는게 없었다. 1~2주일을 나름대로 고민해봤지만, 그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스님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손 잡고 오르는 집’.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격절탄상이 터져나왔다. 그 이름만큼 불교의 이상, 그리고 그가 살아온 동체대비적 삶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저 높은 것을 향한 욕망으로 노력하고 정진한다. 그런 발분망식의 정진만으로도 수행가에선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점차 타인에 대한 대비심은 사라지고 개인의 명예욕만이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오현스님은 늘 손잡고 올랐다. 아무도 쳐다보지않는 자들, 무시받는 자들, 버려진 자들, 아픈 자들, 약한 자들과 함께.

스님은 2011년엔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간 대학생들이 집시법 위반으로 약식기소돼 1인당 15~5백만원의 벌금고지서를 받고 힘들어한다는 <한겨레> 기사를 보고는 한겨레신문사에 벌금총액인 13천만원을 기부해 벌금을 대납하게 했다. 이 사실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않을 것을 전제로 해 당시 한 스님의 기부로만 알려졌다.

 혹자는 스님이 가난한 문학인들과 예술인들과 약자들을 지원한 것을 두고 절집돈으로 인심을 쓴 것 아니냐고 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신흥사보다 절 수입이 몇배나 되는 사찰들이 우리나라엔 있지만 그 사찰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공적인 곳, 혹은 이름 없이 보살도를 행한 것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돈이 들어오는대로 그 돈이 가장 요긴하게 쓰일 곳, 가장 필요로 한곳, 가장 빈한한곳, 가장 아픈 곳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다. 그래도 돈이 그에게서 머물러 있는 법이 없었다.

오현 스님은 20~30대 때 빈한하기 그지 없는 경남 밀양 삼랑진 금무사 약수암에서 홀로 살았다. 그 곳을 방문했던 정휴 스님에 따르면 법당엔 돈을 들여 산 불상이 아니라 자기가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을 모셔두고, 그 옆방 거처엔 <현대문학> 50여권이 쌓아놓고, 파랑새 담배 한 갑을 천정에 고무줄을 달아 늘어뜨려놓아 누워서 책을 보다가 고무줄을 잡아당겨 담배를 피우곤했는데, 방안은 넉넉했고 조금도 어색하거나 가난에 쪼들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천진하고 소탈한 성품이 가난 속에서도 안빈낙도의 넉넉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어찌 궁궐같은 대찰에만 꽃이 핀다고 하겠는가. 일심이 청정하면 움집엔들 우담바라 없겠는가. 스님은 이미 30세 안팎의 젊은 나이에 빈부에 얽매이지않고 자유자재한 삶을 터득해 살았던 것이다.

 

스님들.JPG»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의 1주기 추모다례제 

 

대지약우(大智若愚):비루먹은 말이 천리를 날 듯이

 

 스님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게을러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지않다는 것이 <벽암록><무문관>에서 꼬리를 밟혔다. 흥천사 조실채를 작명할 때 이미 번개를 잡아채는 지혜에 혀를 내둘렀지만, <벽암록>의 서문을 보고 다시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아둔함을 좀체 벗지못한 이 둔재로서는 그의 활발발한 종횡무진이 부러울 뿐이었다. 스님은 자신을 한없이 비하하했지만 그 속에든 천재성을 다 감출 수는 없었다. 가끔식 우리끼리 나누는 대화중에 스님은 어려운 문자를 쓰는걸 거의 피했지만, 어지간한 불교의 한문 경전들을 꾀고 있을만큼 천재적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스님은 털털했다. 옷매무새도 단정치 않았다. 손도 잘 씻지않았다. 그러니 사람 자체가 허술하게 보이기십상이었다. 그에 비해 신흥사 주직직을 물려받은 우송 스님은 티끌 하나 묻지않게 새하얀 승복을 풀칠 해 빳빳하게 다려 입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우송 스님은 처음 조실스님을 가깝게 모실 때는 스님께서 왜 그렇게 술, 담배를 하시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스님의 진면목을 본 뒤부터 이를 시비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우송 스님은 조실 스님은 말씀은 화려하게 꾸며하지 못하지만 힘이 있었고, 뜻이 좋았다면서 아랫사람에게 한번 일을 맡기면, 그 다음엔 믿어주었다고 했다.

 사람이란 조그만한 권력이 있어도 이를 좀체 놓치못하고 이를 두배 세 배 누리려 하기 일쑤다. 그러나 스님은 그렇지않았다. 1년중 6개월을 감옥과 같은 무문관에 들어가면서도, 나와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또다른 무문관이나 다름 없는 오피스텔에서 홀로 지내는 게 안타까워 스님, 이제 연세도 있으니시, 절에서 시봉을 받으시지, 왜 이렇게 지내시느냐고 하면, 그랬다.

 노인네라는게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하게 돼 있어. 늙으면 죽어야하는데 죽지도않고 잔소리만 해대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 잔소리꾼이 어른이라고 앉아있으면 절에 손님이 와도 늙은이만 찾고 주지한테는 들리지도 않으면 주지는 허수아비가 되는거야. 그러니 나처럼 늙은 노인네는 절에서 피해주는게 돕는거라.”

 그렇게 상좌들의 고충을 생각해서 절을 나와 홀로 지내며, 전혀 곡기도 들지않고 막걸리로 허기나 채우며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매사 사리가 분명했고, 일신의 편리를 도모하기보다는 사리를 따랐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가산불교연구원에 주석하던 지관 스님은 말년에 오현 스님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 했다. 지관 스님은 동국대 총장을 거친 불교계 최고의 학승이자 현직 총무원장이었다. 지관 스님은 당대의 대율사로, 해인사에서 오현스님이 젊은날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쫓아낸 자운 스님의 상좌다. 지관 스님은 은사와 달리 오현 스님이 술, 담배를 하는 것을 승려들이 시비하면, “겉만 보지 말고 그 안살림을 보라며 오현 스님을 두둔했다. 오현 스님도 지관 스님이 금석문의 꽃인 역대 고승들의 비문을 망라해 정리한 <역대고승비문총서 7>을 보고는 원효 이후 지관 스님만한 학자가 없다며 칭송했다. 지관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일 당시 조계종 총무원과 <조선일보사>간의 갈등이 커졌을 때, 조선일보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에게 지관 스님에게 직접 가서 사과를 하게 한 것도 오현 스님이었다. 두 어른은 식사를 함께 하면서도 말이 없었다. 이심전심이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가 서로의 진면목을 익히 본 지음(知音)인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불교계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가산불교연구원이 현대 대장경 불사격으로 진행중인 불교대백과사전 <가산불교대사림 22> 발간작업이 설립자인 지관 스님의 열반 후 위기에 봉착하자 아무도 몰래 연구원 이사장을 맡아 수십명의 연구원들을 지원해온 것도 오현 스님이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상가가 문전성시지만, 정작 정승이 죽고나면 상가가 텅빈다는 염랑세태는 현대에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도 지기지우의 사후에까지 의리를 베푼 덕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손잡고오르는집.jpg» 서울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조실채. 조오현 스님이 짓고, 신영복이 쓴 글씨

 

불수불탐(不受不貪):받기 전에 주고, 섬김을 받기 전에 섬기라

 

 절집안이 어렵다. 갈수록 신심은 약해지고, 보시도 예전같지않다. 그러니 신도 대중들의 보시를 유도하기 위한 절집안의 아이디어도 천태만상이다. 그런데 오현 스님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살림보다는 베푸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계산법은 세간법과 반대였다.

 낙산사가 화재로 인해 전소되다시피한 뒤에 보인 행보에서도 그랬다. 낙산사는 당시 전각 20채 중 14채가 불타고 경내 80%가 소실되는 중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오현스님의 상좌인 정념 스님은 낙산사 재건을 위한 구걸에 나서기보다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다. 먼저 경내 10여개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고, 점심 때면 국수도 무료로 대접했다. 가장 궁핍할 때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역발상에 대해 정념 스님은 조실 스님의 가르침대로라고 했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 복원이 시급해 한푼이 아쉬운 시점에 오히려 낙산사 입장료를 없애고, 양양시내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시행했다. 그 뒤 복원불사를 하자마자 가장 먼저 은혜를 지역민들에게 돌리기 위해 60여억원을 들여 양양시내 2500여평에 유치원과 공부방, 도서관, 노인요양원, 노인복지관을 지어 양양의 아이들, 노인들이 무료로 좋은 시설에서 지내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서울 흥천사를 운영하게 된것도 오현 스님식 계산법과 배포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흥천사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왕비 신덕왕후를 위해 세운 원찰로 역사적 중요성이 큰 곳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경내에 한집 두집이 들어서면서 사찰인지 여염집들인지 구분이 모호한 지경이 되었다. 사찰을 재정비하라면 이들 집들을 모두 내보내야하는데, 무려 22가구가 들어서 있고, 세입자만도 60집이 되어서, 이들에게 보상비를 지급해줘야해서 조계종단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치한 상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주자들의 보상비도 늘어나니, 원찰의 회복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오현스님은 정념스님에게 거주자들과 세입자들에게 불만이 없도록 충분히 줘서 내보내도록 했다. 보상비만 110억원이나 됐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뭔가 이익을 볼려고 하면 절을 인수할 수 없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절을 인수할 수 있다고 했다. 대출을 받아 보상비를 모두 지급하더라도 이 정도 사격이면 목탁만 열심히 두드려도 대출 이자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에서 수입이 들어오는대로 대출이자를 갚으면 대중들은 무엇을 먹고 삽니까라고 걱정부터 했지만, 스님은 자기 돈 한푼 안들이고 은행 돈으로 점거자들을 다 내보내면, 서울에 이런 대찰이 남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 다운 배포가 아닐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조계종으로서는 서울 도심권에 가장 큰 규모의 대찰을 하나 더 확보한 셈이었다.

 스님은 작은 것만을 탐하는 자는 작은데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베푸는 것만큼 남는 장사가 없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지폐를 나뭇잎으로 표현하면서 나뭇잎을 받고 좋아한다고 베시시 웃는 그였으니, 세속인들과 소유의 견처가 달랐다.

 그가 열반 몇해 전에 서울 한남동의 삼성가 오너의 자택에 초청을 받아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을 만났다고 한다. 홍라희 여사는 불교와 원불교에서 널리 존경 받는 분들을 자주 뵙고 있었다. 한결 같이 계행이 청정한 이들인데 이날 결이 다른 오현 스님과 마주한 것이다. 스님은 술을 청했고, 양주가 나왔다. 스님은 홍여사에게 술을 따라주고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스님은 이날 이재용 부회장에게 중국이나 후진국에서 버는 돈들을 가져 올 생각을 말고 그곳에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야 그들이 삼성을 적대기업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위한 자기 나라의 기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또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라고 했다. 자신들이 존중 받은 만큼 충성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스님께서 이 험한 세상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를 시봉한 김병무 만해마을 감사는 큰스님들이 3배를 받는 것과 달리 1배만 하도록 한뒤 자신도 상대와 맞절을 했고. 신도들 돈을 시주 받는 것은 독사보다 무서운 것이나 먹고살 것만 빼고는 다 대중들에게 되돌려주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조오현-.jpg»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

 

 

유혐간택(唯嫌揀擇):어느 손가락이나 다 내 손가락이다

 

 스님은 남다른 면모가 많았지만, 진보와 보수 간 동병상련의 이전투구판을 한세기 가까이 관통하면서도, 그 진흙탕 속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또한 산중에 은거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과 언론인, 고관대작들을 맞상대하면서도 양 극단의 어느 쪽을 경계하지도 않으며, 내치지도 않고, 둘을 다 아울러 껴안으며 화이부동(和而不同)했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가 만든 만해축전은 만해와 <조선일보> 설립자와 방응모와의 각별한 인연을 들어 우파신문인 <조선일보>와 공동주최했다. 그러나 만해대상은 김대중 전대통령, 리영희 선생, 이소선여사, 고은 시인, 김지하 시인, 조정래 소설가, 강원용 목사, 함세웅 신부, 법륜 스님, 두봉주교, 백낙청 선생, 신영복 선생 등 당대 대표적인 진보인사들에게 종교의 벽을 넘어 시상됐다. 그가 아니면 남남갈등의 시대에 대표적 우익신문의 이름으로 좌익으로 손꼽힌 이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 제3세계에서 군부와 독재자들의 폭압 아래서 목숨을 걸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는 평화·인권운동가들을 발굴해 시상함으로써 그들의 운동을 간접 지원했다.

그러나 신영복에게 만해상을 줄 때는 고충이 적지않았다. 오현 스님은 흥천사 조실채의 이름을 손 잡고 오르는 집이라고 작명한 뒤, “편액 글씨를 신영복 선생이 써줬으면 좋겠다면서 내게 부탁을 했다. 지인을 통해 신선생님에게 말을 전하니,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다. 신영복 선생님은 천성이 부끄러움을 잘 타 여러사람이 있는 자리엔 함께 하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조용하게 흥천사에서 오현 스님과 자리를 만들어 함께 식사를 했는데, 스님은 그 자리에서 신영복선생 부친의 함자를 부르면서, “밀양에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을 한 신학상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고 친밀감을 표했고, 신영복도 스님과 만남을 행복해했다.

 스님은 신영복에게 만해상을 주고싶어했으나 <조선일보>에서 신영복만은 안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다음해 다시 상정해 기어이 뜻을 이루는 뚝심을 내보였다. 그 때 심사위원단에게 보낼 추천서를 내게 당부했는데, 신영복과 함께 또 하나의 추천사도 당부했다. 쌍용자동차 해고근로자 등을 돕기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는 손잡고‘’라는 단체였다. 그는 당시 쌍용차 해고근로자들의 자살이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만해상을 주어 상금 5천만원으로라도 간접 지원해주고 싶어했다.

그는 평소 사람을 대할 때도 종교나 지역을 따지지않았고, 오직 인간됨과 뜻을 보았을 뿐이었다. 기독교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청계촌 피복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아무도 몰래 매달 후원금을 보냈다. 이 사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늘 조오현스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2011년 이 여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감으로써 유족들에 의해 밝혀졌다. 만해상 수상자를 결정할 때도 승려나 불자 여부를 따지지않았고, 만해마을에 유숙하는 문학인들과 그가 지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더욱 좋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했고, 승려들에겐 좁은 안목을 격파해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오도록 했다. 그의 법문은 늘 허울의 불교를 던져버린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절마다 교회마다 방송마다 신문마다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시끄로운 소음이 된 지 오래다면서 대장경의 글과 말 속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 여러분이 오늘 산문을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의 가슴 아픈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아라고 경책하고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소설가 이청준의 말대로 절집에만 당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 하라고 했다.

 그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돌아간 뒤엔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없듯이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천년전 중국 신선주의자들, 산중 늙은이들이 뱉어놓은 사구(죽은 말)만 들고 살지 말고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했다.

 불교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다.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이다. 한국 근대 100년만큼 일수사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역사도 드물다. 자신의 좁은 안목으로 노선이 같으면 선이며, 다르면 악이다. 선의 6조 혜능은 5조 홍인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은 뒤 자신의 의발을 빼앗으려달려온 혜명에게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 때 그대의 분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고 물어 선악 시비를 넘은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이끌었다.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相爭何事·달팽이 뿔 위에서무슨일로 다투는가) 석화광중기차신(石火光中寄此身·부싯돌번쩍이는 사이에 붙어있는 이몸이거늘)이라며 비웃을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스님은 내게도 틈만 나면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잘난 놈 못난 놈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빛나던등불의 하나인 코리아/그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너는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마음에두려움이 없고/머리는높이 쳐들린 곳/지식은자유롭고/좁다란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진실의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끊임없는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지성의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나의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지역이든 분별심에 빠지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포나 민족, 나라와 인류애는 제쳐두고 눈을 번득이며 총칼을 들거나 악구를 퍼붓기를 주저하지않는 야차들만이 득실대던 현대사에서 오현스님은 타고르가 말한 위대한 조선인의 모습을 잊지않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몸소 보여준 선구자였다.

 

 초반엔 스님이 배를 갈라 내장을 드러내 보이는데도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어느날 홀연히 스님을 신뢰하고 공경했으니 나의 전심(前心)은 무엇이고, 후심(後心)은 무엇일까. 한 미친 노인네가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매고 설악산 대청봉을 넘고 있는데, 아직 나 홀로 무산(霧山·안개산)을 헤매고 있다. 스님이 떠난 봄날은 벼랑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에 참 좋은 날이구나.

 

장애인에게도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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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서-.JPG

 

눈이 보이지 않으니, 미래도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히 편견이다. 1급 시각장애인으로서 대학 총사령탑에 오른 이재서(65·사진) 총신대 신임 총장이 그 증인이다. ‘전맹출신의 총장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으로 알려졌다.

 

총신대는 19천여개의 교회가 모인 국내 최대 기독교단인 장로회 합동 소속의 신학교로, 교직원 300여명·학생 4천여명의 세계 최대 규모 신학교다. 지난 10여년 총신대는 총장 등의 비리 의혹으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으로 25년간 재직하고 지난 2월 정년퇴임했던 그는 구성원들의 부름에 기꺼이 되돌아왔다. 그는 후보 19명의 예비선거에서 내내 1위를 하고 마침내 지난달 13일 재단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장에 당선됐다. 비신학 전공자로도 처음인 이 총장을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났다.

 

‘1급 전맹첫 총장 뽑혀 세계적 화제’ 
전임자 비리 등으로 10여년 내홍’ 
정년퇴직뒤 19명 후보 경선 승리

1977년 온종일 1인 시위 끝에 입학’ 
미국 유학 석·박사 따고 모교 재직 
교회 교단에도 차별있지만 버텨야

 

부부-.JPG

 

눈을 못 맞춰서 죄송합니다.” 첫 만남의 악수에서부터 자신의 눈을 소재로 유머를 던질만큼 그는 여유만만했다. 난마처럼 얽혀있는 학내 사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도 저는 눈에 뵈는 게 없지 않습니까라는 농담으로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의 미국 유학 시절을 비롯해 36년간 그림자처럼 지켜온 부인 한점숙씨도 남편의 그런 농담에 이골이 난듯 웃음으로 함께했다.

 

하지만 이 총장의 자신감은 그저 농담만은 아니다. 그는 대학생 때 장애인을 섬기는 밀알선교단을 만들어 40년간 전세계 21개 나라 100여개 센터를 둔 세계밀알연합으로 키워냄으로써 능력을 보여줬다. 위기에 봉착한 총신대 구성원들로서는 그만한 해결사가 없었던 셈이다.

저는 한눈팔 일은 없을 겁니다.” 전임 총장들이 비리 등으로 신임을 받지 못했기에 그는 투명하고, 공정하고, 소통하면 머지 않아 학교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자신에겐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고 했다. 장애인도 얼마든지 총장 임무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전체 장애인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천적 시각장애는 물론 가난과 차별까지 역경을 이겨낸 이재서 총장은 22견디는 수밖에 없었다며 인내를 강조했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15살 때였다. 어린 시절 앓았던 열병이 원인이었다. 전남 순천(승주)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형편 탓에 4남매 모두 초등학교만 다닌 뒤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는 라디오도 없던 시절 부모 형제들이 일하러 나가면 온종일 홀로 지냈다. “울고 아파하고 죽으려고 마음 먹는 것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어요. 극복할 길이 없어서, 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지요. 학교까지 날마다 5키로미터를 걸어다녔던 기억을 떠올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싸우던 일, 재밌게 놀던 일들을 온종일 회상할 뿐이었지요.”

 

뒤늦게 서울맹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장애로 불편함보다는 가난이 더 힘들었다. 그러나 같은 장애를 지닌 교우들과 함께 한 그 시절이 유일하게 차별을 겪지 않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뒤 총신대를 다니고, 미국 유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따고, 모교의 교수가 되어서도 학생 면접권조차 박탈 당하는 차별과 편견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21살 때인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의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그이지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차별은 여전했다. 그 가운데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19772월의 추운 어느날 총신대 본관에서 입학원서를 받아달라며 온종일 서서 애원하던 일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대학 공부를 한다는 것이냐며 수령을 거부하던 직원은 학장과 통화한 뒤 수업을 못 따라가면 언제든 정학이나 퇴학을 당해도 좋다고 약속을 한다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앞을 보지 못한 것도 서러웠지만, 그런 차별과 수모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총장은 그 수모를 견뎌낸 것이 가장 잘한 일었다고도 했다. 그때 너무도 자존심이 짓밝혀 죽고 싶었지만, 그때 뿌리치고 돌아와버렸다면 오늘의 자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절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움이 부족해 전공과목 책을 점자로 옮기는 동안 한 학기가 끝나버리곤 했단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은 공부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을 것이란 그런 편견을 확신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는 그래서 자신과 같은 장애를 지니거나 역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늘 인내의 중요성을 이렇게 상기시킨다. “세상이 끝난 것같지만, 이게 끝이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부딪치면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여, 미래가 없다는 절박감에 자포자기 하기도 하지만,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 좀 더 참고 기다려봐야 해요. 견뎌야 해요.”

남만 보고사는 사람을 보는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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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상담 그러면 아무말 하지않아도 점장이처럼 척척 답을 말해주거나 혹은 사람마음을 한번에 달라지게 하는 비법을 줄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담소에 주부 한 분이 찾아오셔서 하소연을 했다. 남편이 직장에서 승진 할 생각을 안하고 아들은 공부할 생각을 안한다고 한다.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은 불교에 심취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에 전념하고 있고, 아들도 아버지를 닮아서 공부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난후 답을 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물건을 고치려면 물건을 가져와야 고치는데, 물건은 없고 물건 주인만 오면 어떻게 고칩니까. 그리고 같이 산지 한참된 가족도 못고치는데 얼굴한번 못본 제가 어떻게 고칩니까.”
 “그래도 신부님은 상담을 많이 하셨으니 답을 주세요”

 “글쎄요. 일단 기본원리는 하나 알려드리지요. 사람은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자기행복을 추구하는데 지금의삶이 행복하면 아무런 변화가 없기를 바랍니다. 즉  지금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은 절대로 지금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싶으면 바꾸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인생원리입니다.”

 “좀 알아듣게 쉽게 말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남편과 아들을 불행하게 만드세요. 남편은 밥을 주지말고 아들은 돈줄을 끊어버리세요. 신부님은 혼자 사셔서 가족간의 정을 모르시니 그런 몰인정한 말씀을 하시네요. 가족끼리 어찌 그럴수 있나요?”

 무슨 짜증나는 소리야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고,  그렇다면 지금 제일 불행한사람이 자신을 바꾸는것입니다. 세 분 중 불행한사람이 누군가요? 남편 인가요 아드님인가요? 두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니 지금 삶을 바꿀 생각이 전혀없지요  마음을 바꿀 사람은 자매님 뿐입니다.

 “제가 어떻게 마음을 바꾸어야 하나요?”
 “일단 나를 불행하게 하는것들을 안보는게 좋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가 보는대로 감정이 생깁니다. 기분나쁜 것을 보면 화가 나고 기분좋은 것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아주 단순하지요.”

 “한집에서 살면서 어떻게 안보고 살수 있나요”
 “글쎄 그거야 자매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지요.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얼마 남지않았는데 바뀌지도 않는 남편 아들 생각하면서 아까운 시간낭비 하실것인가요? 남은 인생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사세요”

 “어떻게요. 저는 오로지 가정과 가족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그러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살것인지 자기가 하고싶은 것 목록을 만들어보세요. 가장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할수 있는것부터 시작해서 큰 비용 많은 시간 드는 것 까지.”

 그것까지 대신 만들어주면 안되냐고 한다. 밥은 밥은 자기가 퍼서 먹어야지 다른사람보고 먹여달라고 하는게 아니다. 이런 사람을 상담하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작지만 큰교회, 가톨릭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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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권-.JPG» 가톨릭 안동교구 현 교구장인 권혁주(왼쪽) 주교와 초대 교구장인 두봉 주교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가톨릭 안동교구엔 주교 2명, 신부 90명 등 92명의 성직자가 있다. 서울대교구가 주교 6명, 신부 912명인것과 비교해보면 안동교구가 얼마나 작은 교구인지 알 수 있다. 국내 16개 교구 가운데 가장 작다. 규모가 작다고 아름다운것은 아니다. 작음에도 사랑이 무한정 샘솟는 신비가 비로소 아름다움을 준다.


 현대 50년간 급격한 이농으로 교구민이 138만명에서 71만명으로 오히려 절반 가량이 줄어든 안동교구가 50돌을 맞았다. 교구 성직자와 신자들은 지난 26일 오후 2시 안동실내체육관에서 7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세례를 수많은 이들에게 주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도시로 떠나버렸으니 감사함보다는 쓸쓸함이 맴돌법할듯한 교구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구장 두봉 주교와 현 교구장 권혁주 주교를 24일 안동 안기산 숲으로 둘러싸인 안동교구청에서 만나자마자 숫자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프랑스인 두봉 주교는 작은 키와 90세라는 노구를 무색케할만큼 천의무봉의 꾸밈없는 발랄함으로 사랑의 아우라를 방사했다.  청년시절부터 자신을 멘토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한 권혁주(64) 주교를 바라보는 눈에도 사랑과 신뢰가 가득했다.

 

두봉-.JPG» 안동교구 사목 표어대로 `기쁘고 떳떳하게 살자'면 손을 드는 두봉 주교

 두봉 주교가 이른바 ‘잘 나가는’ 큰 교구가 아닌 안동교구에 자리잡은 것은 운명같은 것이다. 그는 잔다르크의 땅으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농사를 지어 채소를 팔아 생계를 꾸렸고, 형제 자매 5형제뿐 아니라 자기 부모가 맡아 돌본 사촌형제들까지 7형제가 복닦대며 함께 살았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한국에 파견됐다. 파견 전 프랑스에서 군복무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고아였던 전우가 한국에 파병돼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파견을 명 받았을 때 친구가 목숨을 바친 땅이자 너무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어서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대전에서 15년을 지낸 뒤 1969년 안동교구가 설립되면서 첫교구장으로 부임받을 때는 오고싶지않았다고 한다. 교황청 주도로 연 제2바티칸공의회에 따라 기존의 닫힌 교회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상에 활짝 열린 교회를 할 꿈에 부풀었는데, 유교의 고장 안동은 옛날방식만을 고집해 좀체 열린 교회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온 그는 유림들과 첫상봉에서부터 ‘공자님 말씀’을 외워가 언급하며, 자기부터 열린 모습을 보여주며 지역민들의 마음을 열었다.

 안동교구가 1973년 건립한 안동문화회관이야말로 열린 교회의 마중물이었다.  재정이 자립이 안돼 겨우 외국의 원조에 의해 살아가고 안동 내에 성당이 하나뿐인 허약한 교구 여건에 이제 그럴듯한 성당 하나 가져보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오랜 바람을 제치고, 두봉주교는 ‘가톨릭’이란 이름도 들어가지않은 문화회관을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안동에서 가장 높은 6층에, 최초로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이 건물은 예식장과 음악다방까지 갖춘 안동시민의 안식처가 되었다.

 

권혁주-.JPG»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무엇보다 두봉주교는 농촌사목의 대부였다. 1978년 안동가톨릭농민회가 창립됐고, 다음해엔 ‘오원춘 사건’으로 알려진 ‘씨감자 피해보상 농민운동’에서 고문 당한 농민편을 들었다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기도 했다. 한국 교구의 교구장은 한국인 주교가 맡아야 한다며 교구장 교체를 4번이나 교황청에 요구했던 그였지만, ‘괜한 말썽을 일으킨다’는 교황청의 사임 요구에 ‘그런 이유로 사임할 수 없다’고 버틴 강단을 내보이기도 했다.

 1990년 퇴임 뒤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지않기 위해 경기도 고양 행주산성 부근 조립식가건물 공소에서 지내다가 2004년 권 주교의 간청으로 의성의 작은 공소에 머물며 70여평의 텃밭을 직접 가꾸고, 지금도 전국 곳곳에 피정 강연을 다니고 있다. 2012년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3천만원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까지 모두 안동교구에 기증할 정도로 두봉주교의 교구 사랑은 지극하다.

 권 주교는 “취임 후 사목표어로 정하고, 50돌을 맞아 다시 다짐하는 표어 ‘기쁘고 떳떳하게’는 늘 입에 달고 사는 두봉 주교님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권 주교는 “안동교구에서 가난하고 작았기에 가족처럼 서로 알고 함께 할 수 있었다”며 “부족한 가운데도 나누면 기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새장에 갇힌 조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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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편지 4통도 한시 두 줄보다 못하더라

 

꽃피는 화려한 봄날에 큐슈를 찾았다. 하지만 구마모토(熊本)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혼묘지(本妙寺)에 도착하니 뭔가 알 수 없는 처연함이 밀려온다. 2016년 봄날에 일어났던 지진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기 때문인가. 이 절의 명물인 급경사 오르막 계단을 따라 길다랗게 층층이 나열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석등들도 더러 무너진 모습이었고 절 뒷편 부도(浮屠 승려의 사리를 모신 탑)가 모셔진 구역으로 가는 길목의 축대조차 제대로 손을 보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몇 발자국 내려가니 샛길이 나왔고 5분쯤 걸으니 역대주지들의 부도가 산언덕을 뒤로 한 채 길을 따라 일렬로 자리잡았다. 초대주지를 중심으로 좌우로 짝수 홀수 순서대로 번갈아 배치했다. 500여년의 인물역사가 타임캡슐처럼 저장된 곳이기도 하다. 3대주지 일요(日遙니찌요우1580~1659)스님 승탑(부도) 앞에서 일행들과 함께 두손모아 고개를 숙인다. 낡고 바랜 돌 빛깔과 말라버린 이끼 흔적사이로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자를 찬찬히 확인했다. 사실 혼묘지에서 느끼는 처연함은 지진흔적보다도 임진란의 상흔과 아울러 일요(日遙니찌요우1580~1659)스님의 사연때문이리라.

 

일요스님의 본명은 여대남(余大男)이며 어릴 때 이름은 호인(好仁)이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출신으로 의령여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을 피해 쌍계동 보현암(普賢庵)에서 수행하며 지내다가 임란 이듬 해(1593) 13세 때 포로신분으로 대한해협을 타의에 의해 건너게 되었다. 그럼에도 영특함을 인정받아 주군(가토기요마사加籐淸正)의 총애와 배려를 받았고 고향 암자에서 잡혀간 인연으로 인하여 다시 일본에서 출가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실력을 인정받아 31세 나이로 혼묘지(本妙寺) 주지가 된다. ‘고려상인(高麗上人조선출신의 훌륭한 스님)’으로 불리며 지역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40세 때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받은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귀국을 허락받지 못하고 79세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hon-.jpg      

 

사찰박물관에 부자지간에 주고 받은 편지 원본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지진의 여파 때문에 문을 닫아놓은 상태였다. 스님의 진영과 편지는 사진판으로 관람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한문으로 된 친필 원본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노성환 교수(울산대)가 한글로 번역한 4통의 편지글을 만나게 되었다. 2통은 아버지가 보낸 것이고 2통은 일요스님이 쓴 것이다. 일요스님의 마지막 편지는 부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1통은 이미 고향으로 보낸 편지다. 그런데 보낸 편지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리 2통을 작성하여 1통을 자신이 보관했기 때문이다. 손편지 시대에 손편지란 유일본인지라 나의 손을 떠나면 원본은 다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사인(私人)으로 부친께 보낸 글이지만 주지라는 공인(公人)의 직분도 망각하지 않았다. 사본을 공문아닌 공문형식으로 따로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공사(公私)를 둘로 나누지 않는 가치관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남겨진 편지가 뒷날 자신의 귀향을 가로막는 필화(筆禍)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 편지의 내용 속에 가장 원통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오늘까지 주군의 녹으로 먹고 살고 주인의 의복을 입고 자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동안의 은혜가 오히려 원통하다는 본심까지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일본사람은 없었고 같은 신세인 조선인들을 친구로 두고 있다는 내심까지 들통나게 된다. 심지어 뒤를 이어 영주가 된 아들(가토다타히로加籐忠廣)은 젊고 식견이 부족한지 (이 일로 인하여) 기분이 상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직설적인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았다. 아들의 편지내용이 너무 솔직하고 과격한 까닭에 이런 모습이 도리어 귀국 계획을 그르치고 있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주군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너는 아마도 오늘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노부모 봉양을 위한 천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청원을 올리라는 모범답안까지 제시할 정도였다.

새장속의 새처럼 감시받는 상태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여러 차례 오고가야 할 편지가 영주(領主)측의 검열과정에서 사라지거나 전달을 책임진 사람이 수고비만 챙기고 중간에서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사실도 남아있는 편지가 보여준다.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인사가 공인이라는 직분을 망각한 채 오직 핏줄이라는 인정에 끄달려 절제하지 못한 감정적인 편지글로 인하여 오히려 주변인들의 미움을 사게되어 마지막까지 귀국을 허락받지 못한 빌미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곁표현)를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현지의 생존방식을 잠시 포기한 결과로 인하여 틀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긴 편지글과 갖가지 읍소도 귀국의 결과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사적인 통로를 이용하여 편지를 전달하고자 시도하고 부친에게 선물 동원까지 부탁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토(加籐)집안이 몰락하고 이후 영주로 등장한 호소가와(細川)가문의 태도 역시 가토집안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남아있는 편지를 꼼꼼하게 다시한번 읽었다. 진심으로 귀국을 성사시키고자 했다면 검열까지 염두에 두고 좀더 용의주도한 자기검열을 통한 절제된 외교적 수사가 동원된 보여주기용 편지글이 필요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와중에 목숨을 부지하고 신분을 보장받은 계기가 된 원상한산석경사(遠上寒山石徑斜) 백운생처유인가(白雲生處有人家) 홀로 깊은 산에 올라 돌길을 걸어가니 흰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있네.”라는 두 줄의 필담을 구사한 경험도 있지 않았던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3)의 작품을 인용하여 그야말로 일부러 유식함을 보여주기 위한 자료로 활용했던 내공의 소유자가 아니였던가? 하동 땅 보현암에서 적에게 잡힌 이후 영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그렇게 어린 시절에도 직감적으로 알지 않았던가?

 

어쨋거나 4통의 편지와 두 줄의 한시를 읽고 한 줄의 평을 덧붙인다.

어린 여대남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지만 어른이 된 일요는 그렇치 못했다고......


삶은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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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에서 신입 사원 채용공고를 냈다. 1차 서류 심사 후 2차 면접로 채용하기로 했다. 1차 서류 심사에 뽑힌 우수한 지원생들을 한 방에 모아 놓고 인터뷰를 하기로 샜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통지가 없다. 여기 저기서 수군 수군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통지가 없다. 그러자 드디어 여기 저기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왜 시간을 안 지키지?", "왜 아무 소리도 없이 늦는거야?", "뭐 이런 회사가 다 있어?", "사람을 뭘로 보는거야?"등등. 불평, 원망이 터져 나왔다. 회사에서는 그 동안에 지원자의 모습을 다 녹화, 녹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뭐.", "그럴만한 곡절이 있겠지. 뭐."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느긋이 기다리는 지원자도 있었다. 1시간 30분이 지난 후 채용관이 나와서 발표했다.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합격자는 ....입니다. "아무 불평 없이 느긋하게 기다리던 사람이 합격 통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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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위트만(Howard Whitman)는 "인생은 기다리는 기간이다"(waiting period)라고 하면서 "어린아이들은 자전거 탈 때를 기다리고, 청소년은 자동차 몰 때를 기다리고, 의학도는 면허 받을 때를 기다리고, 젊은 부부는 자기들의 새 집을 살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기다림의 예술은 단번에 배워지지 않는다(The art of waiting is not learned at once.)"고 했습니다. 에멀슨(Emerson)은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은 타인보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타인보다 10분 더 기다리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도 기다리는 기간이고, 신앙 생활도 기도하며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성장에 도움 안되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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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jpg

 

수행과 수행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이 잘못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수행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나는 누구도 불성이 있는 신성한 존재이며 자신의 본성을 망각한 가여운 중생입니다.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고, 누구랑 같이 있고 싶고 누구는 피하고 싶은 분별이 행복의 큰 장애입니다. 
누구하고도 바른 견해와 자비심을 실천하려고 하면 됩니다. 지금 이순간에 같이 있는 분이 제일 중요한 분 입니다. 
만트라와 음악과 소음과 소란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모든 소리는 공성의 메아리입니다. K-pop도 만트라이며 칭찬도 비난도 수행거리이며 다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은 좋고 저 생각은 싫고 두려워하는 것이 습관이이며 모든 생각이 공성의 표현으로 알아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먹구름도 흰구름도 본질은 구름인 것처럼 모든 생각의 본질도 동등합니다. 
좋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서 너무 좋아하고 안 좋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서 낙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마음의 상태와 바깥 상황에 매달리는 것이 습관이며 마음을 보고 수행으로 돌리는 것이 도입니다. 
신심이 있으면 지금 있는 자리가 성지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벗입니다. 
바른 관점이 있으면 다 괜찮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보이는 모든 것이 관세음보살의 모습이며 들리는 모든 소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본성의 놀이입니다.

추가 김정희의 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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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jpg» 일지암

 

일지암과 초의 선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한잔의 차를 달일 수 있는

여자는 행복하다

 

첫 햇살이 들어와 마루끝에서

어른대는 청명한 아침

 

무쇠 주전자 속에서

낮은 음성으로

끓고 있는 물소리와

 

반짝이는 다기(茶器) 부딪치는 소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여자는 행복하다

 

정결하게 씻은 하얀 손으로

꽃쟁반 받쳐들고

사랑하는 사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여자는 행복하다 <후략> -차를 권하며, 김혜숙

 

차를 주제로 쓴 시 중에서 내가 애송하는 현대시이다. 단아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차와 정신의 어우러짐을 잘 표현했다. 고요히 내려 앉은 햇살, 정적을 방해하지 않는 물 끓는 소리, 하얀 찻잔의 조심스런 부딪침 소리, 무심의 경지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연두빛 차 한잔, 유정한 마음이다. 이렇게 무심하나 유정하고, 유정하나 무심한 경지를 옛 사람은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했다. 한 잔의 차에 깊고 고요하고 맑은 정신의 세계에 함께하는 경지가 바로 다선일미의 세계이다. 그 오묘하고 미묘한 세계의 문을 열면 한국 차의 중흥조인 초의 선사를 만날 수 있다.

 

법인시-.jpg» 서울 서촌 이서재의 집전에서 <하루 일지암>이라는 행사 도중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이 방문객들과 차담을 하고 있다. 사진 이서 화백

지금 차를 공부하고 차생활을 즐기는 차인들은 땅끝마을 대흥사 산내 암자인 일지암을 차의 성지로 생각하고 참배한다. 일지암이 우리나라 차문화의 명맥을 잇고 중흥시킨 도량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초의 선사(1786~1866)가 있다. 그는 당대의 불교 사상가이고 선사이자 차인이다. <초의시고><일지암문집>의 문학작품들은 차와 선의 향기가 깊고 그윽하다. <선문사변만어>라는 논문을 저술하여 당시 선운사의 백파 선사와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사상사에 활력을 심었다. 또한 초의 선사는 당시 강진에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 평생의 지기 완당 김정희, 그리고 24년 연하인, 남도 남종화의 시조인 소치 허유 등, 당대의 인문지성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사구시의 풍토에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초의 선사이지만, 무엇보다도 선사의 업적은 차문화의 중흥에 있다.

 

차는 외관상 식물에서 추출한 음료에 속하지만 그 맛과 효능이 특별하고 특출하다. 최초의 차서적인 당나라 육우의 <다경 茶經>에 의하면 차는 고대 염제신농씨 때부터 마셨다고 한다. <신농본초경>에는 신농이 100가지 초목을 맛보다가 하루는 72가지 독초를 먹었는데 차를 얻어 해독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차가 몸을 보호하는 약용의 효능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차를 마시면 사람이 힘을 얻고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고 여러 차문헌에서 말하고 있다. 대략 기원전 27백년 전부터 애용된 차는 지금도 다양한 진화를 하면서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럼 무엇을 차라고 할까. 커피, 모과차, 유자차 등을 통틀어 차라고 하지만 이는 편의상 하는 말이다.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차나무에서 딴 잎으로 만든 것을 차라고 한다. 만드는 방법과 발효도에 따라 대개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녹차·백차·황차·홍차·청차·흑차를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보이차는 흑차 계열에 속하고 오룡차는 청차 계열에 속한다. 차의 명칭은 지역에 따른 이름, 찻잎을 따고 만드는 시기에 따른 이름, 형태에 따른 이름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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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jpg» 다산초당

 

백련사-.jpg» 백련사

차가 특별하고 특출한 음료인 것은 우선 그 맛과 효능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초의 선사는 중국의 육안차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다고 말하는데 우리나라 차는 이 둘을 겸하고 있다고 말했듯이 우선 차는 맛이 있고 해독 작용을 하면서 치료에도 유익하다.

그러나 차가 특출한 점은 바로 정신세계에 맛닿아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불교적으로 차와 정신의 관계를 짚어 보자.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성립과 작용은 연기하여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연기(緣起),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서로 모여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가령 한 채의 집은 땅과 주춧돌, 기둥, , 지붕 등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한 톨의 곡식도 땅과 물과 바람과 햇볕과 미생물과 사람의 노동이 결합하여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그럼 마음과 정신의 영역인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불교에서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의 만남으로 정신의 영역이 탄생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매우 거친 형색과 교양없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의 애기를 들으면, 우리의 감정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반면 아름다운 꽃을 보고 향기를 맡으면 우리는 아름다운 감정과 기쁜 감정이 생긴다. 그렇다.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등의 모든 감정은 이렇게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나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감각기관 중에 하나인 미각 기능은 어떠할까? 오염된 음식을 먹으면 신체도 무너지지만 정신도 상쾌하지 못한다. 술을 과도하게 마시면 판단력을 상실하고 감정과 언행이 거칠어진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감정과 언행 등은 그 무엇과의 만남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차를 자주 마시면 어떤 감정이 만들어질까? 먼저 당나라 시대 노동의 노래한 칠완다가를 보자.

 

첫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주고

둘째 잔은 번뇌를 달래주고

셋째 잔은 마른 창자 헤쳐주니 오직 뱃속에는 문다 오천 권이 있을 뿐이다.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내니 평생에 불평스러운 일 모두 땀구멍 향해 흩어지게 하네

다섯째 잔은 살과 뼈대를 깨끗하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령스런 기운을 통하게 하고

일곱째 잔은 마실 것도 없이 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시원한 청풍이 일어난다.

 

차담-.jpg» 대흥사를 찾은 문인들과 차담을 나누는 법인 스님

 

법인1-.jpg» 법인스님이 홀로 머물고 있는 일지암

 

차는 이렇게 몸의 기운을 쇄신시킨다. 그리고 몸에 스며든 차는 정신의 세계를 청량하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중국의 차인들은 정행검덕(精行儉德), 초의 선사는 중정(中正), 일본의 다도가들은 화경청적(和敬淸寂)을 말하며 차와 정신세계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차가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맑고, 고요하고, 검소하고, 덕스럽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와 조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가 바로 차와 선의 일치인 다선일미의 경지이고 다도(茶道)라고 말한다. 초의 선사의 차생활은 단지 목마름을 해소하고 졸음을 깨우는 단계를 넘어 맑고 깊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와 합일을 이룬 다도의 경지였다. 왜 차가 단지 특별한 음료의 범위를 넘어 특출한 음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초의 선사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1786년에 태어났다. 15세에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다. 출가 때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초의(草衣)는 법호이다. 19세 영암 월출산에서 밤에 바다에 떠오르는 달을 보다가 마음이 열렸다. 그 다음에 대둔사(대흥사)에서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과 대면하고 교유를 시작했다. 초의 선사는 22세 화순 쌍봉사에서 최초로 시를 지었다. 27세 다산과 그의 제자 윤동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에 오르고 백운동 십이경을 그렸다. 현재 백운동별서는 이 그림에 근거하여 복원했다. 선사는 29세부터 대둔사에 머물렀다. 30세에 처음으로 한양을 갔는데 김정희, 김명희 등 당대의 지식인과 교류했으며 이 때 초의 선사의 차가 세상에 알려졌다. 1817년 다산은 유배에서 해제되었다. 39세에 일지암을 중건하고 81세까지 수행과 차생활에 전념하였다. 선사는 당시 차에 대한 지식을 보급하고자 43세에 지리산 칠불암에서 <만보전서>를 보고 차에 관한 문헌을 초록하고 45세에 <다신전>을 발간했다. 그 후 52세에 일지암에서 <동다송 東茶頌>을 지었다. 이 동다송이 세상에 나옴으로 차의 이론과 제다가 발전하게 되었다. 81, 82일 입적했다. 세납은 81세이고 법납 65세다.

 

사의재-.jpg» 사의재

 

백운동별서-.jpg» 백운동별서

 

일지암과 초의 선사가 의미있는 것은 단순히 차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차를 만들어 차생활을 했다는 외형에만 있지 않다. 다양한 교유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산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스님들에게 주역과 문장을 강의했고, 스님들에게 불경의 뜻을 물었다. 그리고 차를 매개로 시를 짓고 마음을 나누었다. 인문지성과 예술인들이 강진 백련사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을 근거로 차를 나누면서 아름다운 정신의 향기를 나누었다. 특히 초의 선사와 완당 김정희의 평생 우정 또한 차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완당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 중에 백미는 차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살펴보기로 하자.

 

편지를 보냈건만 한 번의 답장도 받지 못했구려, 생각건대 산 속에 바쁜 일이 필시 없을 터인데 세상 인연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여, 내가 간절한데도 먼저 금강으로 내려가 버리시는 겐가? 다만 생각해 보니 늙어 머리가 다 흰 나이에 갑작스레 이와 같이 하니 참 우습구려. 기꺼이 양단간에 사람을 딱 끊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이것이 과연 선()에 맞는 일이요?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에 얽힌 인연만은 차마 끊어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 없구려. 이번에 또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단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고함소리와 덕산의 몽둥이를 받게 될 터이니, 이 한 번의 고함소리와 몽둥이는 수백천 겁이 지나도록 달아날 도리가 없을게요. 다 미루고 줄이오

 

격조와 애툿한 정이 넘치는 글이다. 이렇게 초의와 완당, 다산과 혜장 스님은 차를 앞에 놓고 사상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 혼자서는 무심과 무위의 적정삼매에 젖어들고, 여럿이는 정담을 즐기는 풍류가 다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신과 향기가 깃든 곳이 해남의 대흥사와 일지암, 강진의 사의재와 다산 초당, 백련사이다. 오월은 차의 향기와 사람의 향기가 어우러진 계절이다.

자기 탐색이 없는 기도와 명상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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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소아 줄리앙ㅡ프랑스 철학자. 타자를 혐오하는 한국인을 분석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타인에 대한 좋지않은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나와 다른사람들에 대한 혐오감 마저 갖는 한국인의 문제는,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지못해서 그런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맞는이야기입니다.


상담은 다른사람의 문제를 보게하는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내면을 보게 해주는것인데, 이렇게 자기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을 보느라 타인의 문제를 볼 시간이 없어서 갈수록 외적차별성은 없어지고, 내적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한계성ㅡ내가 비난하고 미워하는사람이 나와 가장 비슷한 문제를 안고사는존재임을ㅡ서로 욕하는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아바타임을 보게되고 인정하게 되면서 '아하!'하거나 웃을일이 많게 됩니다.


 간혹 기도와 명상으로 자기감정 극복을 할수있다고 하기도하는데, 기도 명상 어떤것이건 자기탐색이 없는것은 기도나 명상을
자칫 자기기만 자기포장용으로 사용할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기내면분석 탐색으로 인식되는것이며, 이런 탐색과정이 두렵고 힘들어서 포기하면 마치 어두운 동굴 앞의 소년처럼
새가슴으로 살면서 자기와 같은 류의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살게됩니다.

생태마을공동체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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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이 줄고 (스마트폰) 접속만이 있는 혼삶의 시대,  그래도 ‘함께’ 행복을 찾고, 외로움을 고독사를 넘는 진정한 복지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축제를 연다. 한국생태마을공동체네트워크가 주최하는 ‘2019 생태마을 축제’가 오는 7~9일 충남 논산 양촌면 풍류도마을에서 펼쳐진다. 매년 한차례씩 각기 다른 장소에 열리는 생태마을축제는 올해로 세번째다.
 우리나라 마을공동체들이 총출동하는 유일한 축제인 이번 행사는 ‘생태-공동체-풍류’ 주제로 열려, 함께 어울려 즐길 뿐 아니라 각 공동체가 쌓아온 삶의 지혜 등을 나누는 교학상장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농촌에 기반을 둔 생태마을들과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도시의 공동체,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여러 단체들이다. 알려진 공동체로는 영광 생명평화마을(대표 황대권), 밝은누리(대표 최철호), 은혜공동체(대표 박민수), 민들레공동체(대표 김인수), 선애빌(대표 민경주), 야마기시산안마을(대표 김현주), 풍류도마을(대표 신현욱), 향기촌(대표 이영준), 보성 청미래마을(대표 황천수) 등이 있으며, 생태마을의 가치를 추구하는 여러 단체들과 세계생태마을네트워크 청년팀인 넥스트젠(리더 이동근) 등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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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철 실행위원장은 “지금까지는 소수 몇명만이 앞장서 축제를 준비해왔지만, 지난해부터 두달에 한번씩 마을공동체 대표들과 꾸준히 발전 워크숍을 진행한 결과, 올해부터 마을공동체들이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축제를 준비하기로 했고, 이번 축제를 기점으로 미래 세대들이 공동대표단에 참여하고,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가 중심이 되어서 지역생태마을공동체에서 생태마을에 대한 심층적인 지역순회포럼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축제에 앞서 3일부터는 <야생초편지>의 저자 황대권 선생과 적정기술 전문가들이 안내하는 야생자연캠프가 진행되고 있다. 이 캠프에서는 대둔산의 자연적 환경에서 맨손 맨몸으로 서바이블하는 기술을 익히며 야생의 공동체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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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적인 축제일정은 6월 7일(금) 오후2시 개회식과 조직재편총회를 시작으로 개시된다. 생태마을공동체네트워크는 생태적 조직을 추구하여 수직적인 조직구도가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마을과 공동체와 단체들에서 파송한 실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수평적으로 운영된다.

 생태마을공동체축제는 생태마을부스와 네트워크재편식, 야생자연캠프, 생태영화제로 구성된다. 여러 공동체의 문화공연(은혜공동체의 공연과 선애빌의 명상프로그램, 청년그룹 넥스트젠의 공동체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져 공동체적 맛과 멋을 즐기게 된다. 또한 생태마을 집담회(대화마당), 풍류이야기마당과 어울림마당 등의 축제스토리가 이어진다.
 이 축제엔 마을공동체로 살고있지않는 일반 희망자들도 참가 혹은 방문할 수 있다. 회비는 당일 방문 1만원, 1박 3만원, 2박 5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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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 정보]
   주 최 : 한국생태마을공동체네트워크 (http://cafe.naver.com/kecn)
 주 관 : 한국생태마을공동체네트워크 축제준비위원회 & 대둔산풍류도마을
 일 시 : 201년 6월 3일(월)14:00 - 9일(일)10:00
 -풍류도마을 야생자연캠프 : 6월 3일(월)-9일(일)
 -한국생태마을공동체축제 : 6월 7일(금)-8일(토)
 -대둔산 피크닉 : 6월 9일(일) 오전10시-12시(자유선택)
 장 소 : 대둔산 풍류도마을
 -충남 논산시 양촌면 바랑산3길 83-83
 -전화문의 : tel:041-742-1785(사무실), tel:010-2809-7720(신현욱)
 단체참가후원 : 10만원 이상 (계좌번호: 기업은행 228-028472-01-012 임진철)
 축제관련문의: tel:010-2697-0350 (이동근)
 **참가신청은 여기로!!! [구글 참가신청서 링크: https://forms.gle/e1AmHf1hMMtT6WNj6]

서소문역사공원의 정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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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탑-.jpg» 서소문역사공원에 들어선 대형 가톨릭 순교자 현양탑

 

서울역 옆 서소문역사공원이 3년4개월의 공사를 끝내고 1일 개방됐다. 지상1층~지하4층 4만6천여㎡에 국비·시비·구비 596억원이 투입됐다.

 그런데 이 공원은 이름과 달리 ‘가톨릭 성당 겸 순교자기념관’과 다름 없다. 개관을 앞둔 지난달 29일 공원 지하3층 콘솔레이션홀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주례로 50여명의 사제와 1천여명의 가톨릭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봉헌 미사’를 거행한데서 공원의 점유권이 서울시민에서 사실상 천주교로 넘어갔음을 말해준다.

봉헌미사1-.JPG» 염수정 서울대교구장의 주례로 봉헌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봉헌 미사’

 

유해봉안-.JPG» 서소문역사공원 지하 성당 제대에 봉안되고 있는 가톨릭 성인 5위의 유해 

 

국민이 낸 세금인 국가와 지방자치제의 예산을 종교계가 세력확장을 위해 쌈지돈처럼 쓰는 것은 비단 가톨릭만은 아니다. 불교계를 필두로 개신교 등 주류 종교들이 앞다투어 예산 빼내기에 나서고, 표심을 노린 정치인과 관료들은 자기 돈처럼 인심을 쓰고 있다. 가령 불교문화역사기념관은 정부 예산으로 지었기에, 조계종 총무원으로 쓰면서도 그 이름도 넣지못했다. 그러나 그 건물은 적어도 조계사 부지에 지었다.

 서울대교구는 서소문 밖 네거리가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 124위 복자 가운데 27위가 순교한 성지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활용해 성역화사업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와 ‘서소문역사공원바로세우기범국민대책위원회’는 조선말 사형집행장이었던 이곳이 천주교인들만이 아니라 반외세 반봉건 반부패를 외치며 민중을 위해 싸운 동학지도자 김개남 성재식 안교선 최재호 안승관 김내현 등이 효수당한 곳인만큼 명실공히 역사공원으로 만들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JPG» 개관을 앞두고 가톨릭쪽의 설명을 듣고 있는 문희상 국회의장과 박원순 서울시장 등 정치인과 관료들

 동학지도자들에 대한 유물은 이곳에 없다. 고려시대 여진족을 물리치고 남경(서울)건설의 주역이서 이곳에 설치됐던 윤관장군의 동상마저 사라졌다. 대신 한국 천주교 사료 140여종이 전시됐다. 이 중엔 ‘어서 함대를 끌고와 조선을 쳐부셔줄 것’을 요청한 황사영의 백서도 있다.

 외세가 물밀듯 밀려든 조선후기 백성들과 함께 싸운 동학도들은 가톨릭에 대해 외세의 서학이라며 발발했다. 그러나 가톨릭은 정의구현사제단 등의 민주화 헌신으로 외세와 일제의 앞잡이 종교라는 불명예를 씻고, 민중들의 종교로 거듭났다. 원주에서 지학순과 함께 천주교 변화의 주역이 된 장일순이 동학 지도자 해월 최시형을 사사해 생명운동을 펼침으로서 마침내 서학과 동학은 역사에서 하나되는 듯도 했다. 그 소중한 악수가 서소문에서 다시 두 동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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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jpg» 가톨릭 박해 시기별로 열거한 지하 전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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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소문 공원의 상징물로 선 대형 순교자 현양탑엔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란 글귀가 새겨졌다. 이것은 누구의 의(義)를 말하는 것일까.

 약한자들은 힘에 굴복해 평화를 얻으라던 ‘팍스 로마나’를 외친 제국의 의인가. 십자가를 앞세운 침략자가 아니라 피수탈민들의 현실적 구원을 위해 헌신한 남미 해방신학의 토대에서 나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일까. 일제 때 피맺힌 백성들의 신음을 외면하고 안중근을 살인자로 매도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장군에게 밀고해 일망타진시킨 조선가톨릭의 수장 뮈텔 주교의 의일까.

 

글씨-.jpg» 장일순 선생의 글씨. 목자 불망상민, 목자는 모름지기 가엾은 백성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뜻

 

 불가항력적인 서양총의 위협 앞에서도 노예로는 살수 없다고 외치다 죽어간 동학교도들의 의일까. 민주화운동가들을 검거하러 명동성당에 온 독재의 공권력 앞에서 ‘나를 밟지않고는 갈 수 없다’고 한 김수환 추기경의 의일까. 가톨릭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사제인 한스큉은 <왜 나는 아직도 기독교를 믿는가>에서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가치 위기에서 가치에 대한 최소한도의 의견일치마저 없다면, 갈등으로 인해 국가가 제대로 기능할 수도, 윤리나 도덕이 존재할 수도 없다”

이런 사랑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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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득나무1-.JPG» 너무도 사랑했던 아내를 떠나보낸 뒤 마치 아내의 내음을 맡듯이 나무를 껴안고 있는 송기득 교수

 

전남 순천시 봉화산 기슭에 머물고 있는 송기득(88) 교수를 찾았다. 봉화는 공동체의 위기에 타오른다. 그는 봉화다. 그러나 송 교수는 자신을 다 타버린 숯인양 “이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인 발걸음이냐”고 했다. 대학을 정년 은퇴한 뒤 2001년부터 계간지 <신학비평>을 내고 이어 낸 <신학비평너머>마저 지난해말을 끝으로 내려놓았으니, 그 말이 허언만은 아니다.


 그가 다른 글작업을 다 내려놓고도 끝내 놓지않는 단 하나의 글이 있다. ‘아내 정순애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의 아내는 2016년 7월22일 96세를 일기로 ‘몸옷’을 벗었다. 대학생 때 여순사건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전도사로 살며 아이 셋을 키우던, 11살 연상의 아내를 만나 그는 63년을 해로했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매일처럼 870통의 편지를 써 10권째 책을 냈다. 별난 사랑이다. 아내는 63년을 살면서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쌍둥이 큰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어릴 때도 엄마가 그랬느냐’고. 그 중 한 딸은 어린시절 너무 배가 고파 남의집 고구마를 훔쳤는데, 그 때 딱 한번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다고 했다. 그 때 고구마 주인이 집에 쫓아와 “전도사 딸도 남의 고구마를 훔치느냐”고 힐난하자 평생 말대답을 삼가던 어머니가 “전도사 딸은 사람이 아니다요?”라고 했단다. 인근 요양원에 사는 81세의 그 딸이 거동도 힘겨운 노구를 이끌고 점심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수양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서 혼자 남을 남편 걱정에 마음을 놓지못하는 것을 지켜본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고있다. 자신과 나이차가 7살 밖에 나지않지만, 자신을 키워준 수양아버지에게 효심을 다하는 것이다.

 

솔방울-.JPG» 거실에 내걸려있는 송 교수의 아내 고 정순애씨의 사진. 아내의 말년 그가 매일 산책길에서 주워와 아내에게 바쳤다는 솔방울이 놓여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송기득’만의 삶은 ‘특별한 사랑’에만 한정되지않는다. 그는 해창만이 바라다보이는 전남 고흥의 빈농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식구의 끼니마저 잇기 어려운 집안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어렵다는 부모 몰래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수산중학교에 합격하며 그의 신산한 삶이 시작됐다. 선산에서 소나무 몇그루를 베어 판 돈으로 입학금을 내고 한달에 쌀 한말, 된장 한단지, 간장 한병 이외 더 이상 지원은 요구하지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진학은 했으나 불도 떼지않는 토굴 같은 방에서 한겨울을 지내며 굶기를 밥먹듯했다. 그나마 수산중학교 1학년때 전교 1등을 하자 고향 수협의 추천으로 수산청에서 수산대학 졸업때까지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 고생을 면할만하자 그는 순천 매산중학교로 전학을 단행했다. 고향 교회에 봉사하러왔던 여수 손양원 목사의 설교를 듣고는 ‘나도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한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인근에 하나뿐이던 ‘미션스쿨’로 간 것이다. 고향에 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부친은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는 마당에 책을 모조리 집어던져버렸다. ‘이제부터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하고 가출한 그는 책을 떼다 팔러다니거나 보이열선교사 사택의 풀을 베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부패한 이승만을 몰아내자며 분필로 쓰고다니는 지하운동을 했고, 고2때는 부당하게 쫓겨나는 교감을 구명하는 일의 선봉에 섰다가 퇴학처분을 받고 졸업 직전에 구제받기도 했다.

 그는 또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던 보이열선교사가 형편상 등록금이 싼 지방국립대를 가라는데도 기어코 ‘미션스쿨’인 연세대에 합격했고, 연세대에 가려면 신학과를 가라는 요구도 거절하고 ‘무식한 목사가 안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한다’며 철학과 진학을 결행했다. 합격 뒤 고향에서 전도여행을 하느라 등록시기를 놓치는바람에 천신만고 끝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철학과 수석을 놓치지않아 전학년에서 한명만 주는 전액장학생으로 형편이 좀 나아진 듯했으나 4학때 폐결핵으로 무려 3년반을 병상에서 사투를 벌였다. 당시 광주 동광원에서 요양하면서 수양회 강연을 온 류영모의 강연을 들은 그는 “기독교 외엔 무지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여겼던 ’좁은 우물’에서 나와 그리스도교만이 아닌 드넓은 보편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부부1-.JPG» 송기득 정순애 부부

 투병 뒤 그를 너무도 아낀 교수들의 천거로 학부졸업생임에도 연세대 문과대 전임조교가 돼 주요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의 핵심을 모은 ‘인간과 사상’을 강연해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5·16쿠테타가 터져 군미필자를 몰아냈다. 폐결핵환자였던 처지도 받아들여지지않았다. 국토건설단에 지원해 강원도 정선 탄광에서 1년간 중노동으로 군복무를 대신하고 돌아왔지만, 그를 아끼던 교수들이 물러난 학교에서는 복직을 시켜주지않았다. 그는 그 때 2개월동안 무일푼으로 거지 행각으로 전국을 돌며 민초 구원자들을 만났다.

 그는 폐결핵을 치료해주던 여의사 여성숙선생이 시작한 목포의 한산촌에 내려가 불모지에서 폐병환자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낮엔 돌집을 짓고 밤이면 폐결핵환자들과 청석회라는 독서모임을 했다. 여선생의 친구로 한산촌에 자주 내려와 글을 쓰고 했던 민중신학학자 안병무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때였다. 폐병의 고통을 익히 겪은 바 있던 그는 한산촌이 갈 곳 없는 폐결핵 환자들의 안식처로 계속 남기를 희망하며 헌신했다. 그러나 한산촌에 디아코니아수도회를 설립하기를 원했던 안병무·여성숙 선생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로부터 53세에서야 목원대에 안착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따리강사로 보내야했다. 고단한 지식노동자였던 그는 수백차례씩 올랐던 북한산 월출산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목원대에서도 늦깎이교수로 안주하지않고 민중신학과 여성신학 한국신학을 개설해 토착신학의 길을 개척해갔다.

 그는 “‘예수 믿지않으면 지옥 간다’는 미신이 그저 성서와 찬송가를 끼고 교회만 가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만 바치면 된다는 수준의 ‘한국 기독교’를 만들었다”고 한탄한다. 그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외곬수 보수기독교인에서 탈신학자로까지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며 변신했다. 그래서 이젠 소신 발언에 거침이 없다. 그는 “지금 ’정통’이라는 이름의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는 무관하다”고 말하는것을 주저하지않는다.

송-.JPG» 이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송기득 교수

 

 “당시 로마의 법은 신성모독 죄는 돌로 내려쳐죽이고, 십자가형은 정치범에만 하는 것이었다. 서구에서 역사적예수를 탐구한 예수세미나의 결과 예수는 농민이었을 가능성이 98%라고 한다. 예수가 성전을 뒤엎은 것도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이다. 예수는 로마 압제에 저항하다 정치범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진리인 ‘대속자 그리스도’는 예수 이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저지른 죄를 예수가 대신 받아 자신의 죄를 사함 받으려는 불량한 심보는 양이나 소, 순결한 처녀같은 가엾은 희생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한 유대교의 제사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예수는 ‘사람은 안식일(모든 것)의 주인’이라며 사람의 주인됨과 주체성을 천명했는데, 대속론은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 떠맡겨 주체적인 존재인 사람을 비주체화시켜, 죄를 져도 처벌받지않고, 아무 노력도 실천도 하지않고 공짜로 구원을 얻겠다는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지적했다. 그의 대미는 ‘인간’으로 귀결된다.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은 로마의 지배세력과 헤로데의 독재권력,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체제의 집권자들이 일삼은 탄압과 착취로부터 이스라엘 민중이 해방되어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회복운동이었다. 실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역사 안에 실현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하느님나라를 외치고 하느님나라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십자가형틀에서 팜혹하게 처형되었다. 해방과 자유, 평등과 평화, 정의와 구원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하는 인간화가 실현된 세계가 예수의 하느님나라다.”

  송 교수와 아내는 가난하고 척박한 삶의 환경을 헤쳐나왔지만 가정에서, 또는 폐병 환자들 틈에서, 그리고 캠퍼스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냈다.  먼저 늙고 병든 아내를 위해 매일 산책길에서 주워다가 바쳤던 송방울들을 바라보는 노신학자의 눈이 촉촉했다.


신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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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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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는 하나로 일관된다는 공자님의 말씀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내가 무슨 큰 도라도 깨우쳤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삶과 학문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관심은 있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것은 곧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관심을 사로잡아 온 신에 대한 관심이다. 심도학사에서 운영하는 30여개의 프로그램 가운데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런 제목을 붙이고 보니, 새삼스럽게 그런 문제를 다룬다는 생각이 생뚱맞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신의 문제는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새롭다. 70대 후반의 나이지만, 나에게도 신의 문제는 여전히 새롭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신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삶을 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의 문제로 속알이하다가, 그 일을 거의 으로 삼고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간 신을 둘러싸고 제기하게 된 나의 문제의식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유신론, 무신론을 논하기 전에 신에 대한 모종의 관념이 전제되지 않는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당연한 말이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가끔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인 기억이 난다. 나는 물론 내가 성장해온 개신교 교회에서 주입된 신관, 그것도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반사로부터 들은 신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논의했다고 생각하니, 새삼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다. 그러한 신의 존재를 방어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마저 드니, 나의 어리석음을 이제 와서 자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회상해보면, 니체를 들먹이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던 나의 한 친구가 생각나고, 그가 나보다 훨씬 조숙했고 옳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신의 존재를 둘러싼 나의 관심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전환은 나의 대학시절 폴 틸리히(Tillich)라는 신학자를 알게 되면서 찾아왔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을 접했을 당시 내가 경험했던 충격과 해방감은 지금도 새롭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과 신앙이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 거의 무의미하게 될 정도가 흔해빠진 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개념과 이해를 가지고 문제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이란 우리 모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지고 사는 궁극적 관심이고, 신은 모든 부차적 관심에 우선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신론자는 실제상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틸리히의 생각이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나중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신관을 접하면서 더 심화되었다.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선(summon bonum, 힌두에서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다시 말해 至高善인 해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신관에 따르면, 신은 최고의 선(good, 좋은 것)이고 가치이며,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선과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신관이 나에게 상식이 되다 시피 했지만, 이러한 관념은 젊은 시절 한 동안 나의 정신적 도피처가 되었다. 요즈음은 거기에 한 마디 더 보태서, 신은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선과 행복의 원천이고 의미(meaning)의 토대라는 신관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우리가 신을 궁극적 관심사로 이해한다면, 죽음에 임박해서 신을 찾는 사람은, 나는(혹은, 당신은) 평생 무엇을 나의 신, 즉 궁극적 관심사로 삼고 살아 왔는지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물음으로 삶을 정리하고 가면,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삶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신관은 그 후로 이런 식의 신관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이 지닌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함의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좀 더 합리적이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신관을 모색하는 무모한도전에 나의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그 일에 매달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어느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프란시스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믿음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다. 우리를 뒤 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 흔들려야 할 신앙이다. 머릿속에만 머물고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개념일 뿐이다.”

신이 사랑스럽게 보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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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한없이 자애로운 눈으로 보는 것은 현재의 그대들 모습이나 과거의 그대들 모습이 아니라 그대들이 되고자 갈망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14세기 작자 미상의 <무지의 구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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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들이 많을수록 더 부유해진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윌든>에서

신이 할수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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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불가능한 일뿐이다.

 신께서 가능한 일들을 물질의 역학과 피조물들의 자율성에 맡겨 버렸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

만리장성에서 무엇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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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무료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큰절 대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담당하는 행원화 보살님이 청년 한 분과 함께 왔다. 행원화 보살님은 뭔가 의미 있는 차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내게 모시고 온다. 청년은 대안학교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과를 선택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즘 세상에 밥이 안 된다는 철학을 하겠다니, 참 신통한 청년일세내심 반가워서 좋은 차를 내면서 이런저런 가벼운 애기부터 꺼냈다. 청년의 관심 분야가 남다르고 사유와 성찰이 공부의 기본이니, 말이 통할 수 있는 바탕은 되겠다 싶어 먼저 돌발적 질문으로 수작을 건냈다.

 

) 그대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가 본 적이 있는가?

청년) 가보지는 못했으나 사진과 영상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 그래, 그럼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청년) (청년, 한 참 뜸들인다) 글쎄요, 별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 철학과 학생이니 지금이라도 별다른생각을 해야 하네. ! ‘엄청 크다,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관광객이 많이 가겠구나누구나 하는 상투적인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해보게

청년) 별다른 생각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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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이 사람아, 자네는 나의 이런 질문에 빠르게 답이 나와야 하네. 그리고 나에게 답을 가르쳐 달라고? 내가 말하면 자네는 내 말을 정답으로 생각할 셈인가? 지금 자네는 철학과 학생으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걸세. 왜 그런가? 자네는 늘 누군가의 답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자네가 먼저 질문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청년)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말씀 하시는 질문이라는 게 뭡니까?

) 그 질문이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네. 지금 눈을 감고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다시 상상해 보게. 완성된 지금의 건축물을 보지 말고 당시건축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해 보게나. 뭐가 보이는가?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청년) (점점 얼굴 표정이 매우 심각하게 굳어진다)... ! 그렇군요. 그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 막강한 권력자에게 강제로 징발을 당했고, 부실한 식사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힘들게 노역을 하고, 공사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많이 죽기도 했겠네요.

) 그렇지. 그 희생자들을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지도 않고 대충 매장했다고 하네. 자 노역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으니 이제 누구의 고통이 보이는가?

청년) , 강제로 징발된 사람들의 아내와 자식들, 부모님들이 보입니다. 얼마나 그립고 슬펐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끌려와서 희생되어야만 했을까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왜 그런 건축물을 만들어야 했을까요? 진시왕은 성 공사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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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네. 나는 거대한 성과 무덤을 볼 때마다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그 속에서 인간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네. 층층히 쌓아올린 견고한 성벽을 보면서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폭력이 보이네. 가슴에 한없는 슬픔과 분노가 솟구치네.

청년) 이제 조금은 알겠습니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상상질문이 무얼 말하는지 알겠습니다.

 

) 그런가? 잘 들어주고 말해주니 내가 고맙네. 이제 만리장성과 피라미드가 다른 모습으로 보일걸세.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것이 생성하기까지 숱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네. 그 연결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추적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철학공부가 아닐까. 참 의미있는 찻자리였네. 오늘 대화에 맞는 시 한 구절 읽어 주겠네. 당나라 말기 두목지가 20대에 지은 <아방궁부> 이네.

 

육국(六國)이 멸망하고(···) 아방궁이 생겨났다(···)

다섯 걸음마다 전각이요 열 걸음마다 누각일세

<중략>

대들보 받친 기둥은 남쪽 밭의 농부 수보다 많았고

서까래는 배 짜는 여인보다 많았으며

못대가리 번쩍이는 것은 곳간의 낱알보다 많았고(···)

악기의 요란한 소리는 길거리 사람들 말소리보다 많았다네(···)

 

※이 글은 <참여사회>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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