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즐기자꾸나! 한 젊은 승려가 밖에서 선원으로 돌아와 풀밭 한쪽이 말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선사가 젊은 승려에게 말했다. "선원 밖으로 가서 화초의 씨를 좀 뿌려주어라." "언제 씨를 뿌릴까요?" "아무 떄나!" 승려가 밖에서 씨를 뿌리는데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이런! 씨가 다 날아가 버렸잖아!" "바람에 날려간 건 상관없다. 내버려 두어라!" 승려가 밖에서 새들이 씨를 쪼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뛰어와서 말했다. "어떡하죠? 새들이 씨를 쪼아 먹어버렸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면 새들이 먹는 건 당연하지. 내버려 두어라!" 밤중에 한바탕 비가 내린 후 젊은 승려가 새벽에 선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사부님! 씨들이 다 비에 휩쓸려가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인연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초봄의 태양이 산 위로 올라왔다. 허허벌판이던 땅에 푸르고 연한 새싹들이 올라왔다. 원래 씨를 뿌리지 않았던 사원의 귀퉁이, 지붕, 담장에도 초록의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연한 새싹에서 각양각색의 꽃봉오리가 맺혔다. 차갑고 하얗던 겨울 색이 오색찬란한 봄의 빛깔로 바뀌었다. 사원 구석 곳곳과 산에 가득, 계곡에 가득 꽃들이 만발했다. 젊은 승려는 기뻐하며 사부에게 알렸다. "사부님! 사부님! 꽃들이 사원 귀퉁이 여기저기에 피었고, 온 산과 들판이 씨를 뿌리지 않은 곳까지 예쁜 꽃봉오리로 가득합니다." 사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저 즐기자꾸나!" 선은 깨달은 이후의 삶의 태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속에 좋음과 나쁨, 순함과 역함의 구분이 없고, 그저 때를 따르고 본성을 따르고 인연을 따르고 즐거움을 따를 뿐이며, 마음은 순간의 상황과 어우러져 자연에 순응한다. 어떤 때 어떤 장소라도 매 순간이 모두 천당이다. <매일 매일이 좋은 날 ①>(채지충 지음, 정광훈 옮김, 느낌이있는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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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즐기자꾸나!
하느님은 하느님일뿐!
내가 믿는 믿음에 대한 반성
10년도 넘었을 건데, 터키 중서부 지방을 보름 동안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니데’ 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민박을 했어요. 물론 무슬림들이지요. 그 가정의 대학3년, 고3, 초등 6년생인 3남매와 대화를 하는데 주로 진로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습니다. 영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등….
그런데 말끝마다 “인샬라! 인샬라!” 라고 합니다. ‘인샬라!’는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런 뜻이지요.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자기는 영어 교사가 되고 싶다. 내 꿈도 신께서 허락하셔야 한다.’ 뭐 그런 말이지요. 비록 습관성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언어문화에 감명을 받고 주일학교 학생이나 청년들에게 종종 강론을 했어요. 글로 쓴 적이 있어서 지난 번 에세이집을 낼 때 책에 수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책에서 읽은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러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교의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하였습니다. 약간 멍~해지고…. 나는 이슬람 신자들의 믿음을 보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자의 믿음생활에 대한 반성을 말한 건데 교회의 차이가 뭐냐고 반문하니 우문인지 현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형제님은 그리스도교의 신과 이슬람교의 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한 분 뿐’이라고 고백하는데 같은 하느님이 아니란 말인가?
하느님은 하느님일 뿐입니다. 어떤 신학자라 할지라도 지상의 여러 종교가 믿는 신의 존재방식이나 속성에서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고 그런 책도 없습니다. 다만 신에 대한 오해가 있을 뿐이지 신에 대해 서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면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은 하나뿐이라고 믿는 유일신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3대 종교가 있습니다. 서로가 믿는 신이 다르고 차별이 난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에 대해서 아무도 설명을 못하지요. 같은 것을 나눠 설명하려니까 제 말에 넘어가고 꼬이고 해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자라면 부활에 대해서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지만 부활이 어떤 부활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모든 존재 현상을 인간이 다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믿고 나서 깨우쳐 가려는 것입니다. 신이 먼저 있었고 교회가 생긴거지 교회가 있어서 신이 생긴 건 아니지요. 그러니까 신들끼리 싸우고 계급을 지어놓고 내 신이 최고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건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고백하는 허상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偶像이지요. 신은 평화 사랑 행복 정의와 절대진리의 신인데 진짜 신이라면 왜 싸우겠어요.
그리스도교의 신, 야훼 하느님 만이 진짜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정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스스로에게 속임 당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처럼 믿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우리 교회의 교리가 절대 옳다!’ ‘내가 믿는 하느님만이 하느님이다’ 라는 믿음이 다른 신을 믿는 이들과의 사이를 불화케 하고 불행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게 이스라엘과 미국이지요.
(벌써 일어나야 할 시간이네. 다음에….).
농구에 불교 조합, NBA 최고 팀 만든 필 잭슨
필 잭슨
NBA 챔피언스 11회 우승 이끈 ‘농구코트의 선 마스터’
<법보신문-알랭 베르디에의 세계의 불교명사 시리즈>
* 필 잭슨은 유명선수들을 적절히 조절하며 뛰어난 용병술로 NBA 챔피언즈 리그에서 11회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0년 미국 농구팀 LA 레이커스(LA Lakes)의 우승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인 로스앤젤레스의 한 거리. 수많은 시민으로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이 화려한 축제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농구선수에서 감독으로 변신
시카고불스·LA레이커스 활약
용병술 발휘로 마이클조던 등
스타선수 탄생시킨 NBA전설
불교철학 농구장에 대입시켜
명상 등으로 선수 정신 강화
요가·독서로 내면세계 강조
오랜 경험 토대로 한 저서
베스트셀러 이름 올리기도
그의 이름은 이토 노리아키(Noriaki Ito). 그는 로스앤젤레스시 리틀도쿄(Little Tokyo)에 있는 사찰 히가시 혼간지(Higashi Honganji) 주지스님이며 농구를 좋아하는 열성 팬이었다. 일본 출신의 이 스님은 농구감독 필 잭슨(Phil Jackson, 1945~)이 1999년 LA 레이커스팀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LA 레이커스팀이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 tion, 미국프로농구)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꾸준히 명상을 하는 잭슨이 부처님 가르침을 농구에 적용해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가 무려 2m3cm에 달하는 잭슨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친구와는 다른 그의 큰 키 때문에 자연스럽게 농구, 야구, 축구 등 스포츠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노스다코타 주립대학(North Dakota State University) 농구팀에 스카우트됐다. 졸업 후 1967년 뉴욕 닉스(New York Knicks)에 입단해 몇 년간 농구장에서 경력을 쌓은 잭슨은 돌연 감독으로 진로를 바꿨다. 선수보다는 감독이 더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농구감독으로 불리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그를 최고의 농구감독으로 만들게 했을까? 그는 다른 감독들과는
다른 훈련방식으로 그만의 농구 스타일을 만들어 냈음이 분명하다.
필 잭슨은 1945년 9월7일 미국 몬태나(Montana)에서 아버지 찰스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7~1978년 뉴욕 닉스팀에서 뛰었다. 이후 1978~1980년 뉴저지(New Jersey)팀으로 이적해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 선수로서 은퇴를 선언하고 1987년부터 코치로 변신, 후배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 보조 코치로 시작해 1989년 감독이 됐다. 이후 무려 6번이나 시카고 불스가 NBA 챔피언에 오르는 대기록을 보여준다. 1999년 LA 레이커스팀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팀을 5번이나 최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가 감독하는 동안 두 팀에서는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 데니스 로드맨(Dennis Roadman), 샤킬 오닐(Shaquille O’Neal) 등 스타선수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미국 NBA 챔피언스 리그 반지를 11번이나 차지한 그는 NBA의 전설이라고까지 불려진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잭슨의 경력은 불교철학을 농구코트에 적용하면서 완성됐다. 이토 노리아키 주지스님은 LA타임스(Los Angeles Times)와의 인터뷰에서 “LA 레이커스의 경기에는 불교철학이 강하게 드러난다”며 “필 잭슨 감독은 영적 혹은 정신적 영역과 육체적 영역 사이에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기자들로부터 “필 잭슨이 불교와 농구를 조합시킨 것 때문에 농구장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이토 스님은 “LA 레이커스 선수들에게서 개인의 콧대 높은 자존심과 혼자 해결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 걸 종종 목격했다”며 “불교에서는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잭슨은 유명선수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용병술에 강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개인보다는 팀워크의 중요성을 선수들에게 강조함으로써 경기에서 매번 좋은 결과를 냈다. 미국 언론들은 “필 잭슨의 이런 용병술은 선수를 어떻게 또 얼마나 잘 다스리는가가 좋은 감독을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준 다”고 언급하곤 한다.
*필 잭슨은 2013년 출간된 자서전 ‘열한 개의 반지-승리를 만드는 영원의 리더십’에서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거나 좌절할 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잠시 쉬어가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실제 잭슨은 ‘농구장의 선 마스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가 2013년 출간한 자서전 ‘열한 개의 반지-승리를 만드는 영원의 리더십(Eleven Rings-The Soul of Success)에는 “불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형 조(Joe) 덕분”이라고 쓰여있다. 오순절교회의 신자였던 그의 부모님은 강한 신앙심으로 자식들을 엄격히 교육했다. 텔레비전 시청이나 영화관 출입조차 철저히 금지했다. 잭슨은 그런 부모님의 교육방침으로 어릴 적 장래희망을 목사로 정하기도 했다.
동양철학이나 이웃종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형 조가 동양철학과 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점점 불교 철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불교가 훗날 NBA에까지 투영됐다.
언젠가 몬태나에서 열린 명상 모임에 참가한 잭슨은 생애 처음으로 명상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점점 더 불교 명상의 매력에 깊이 빠져든다. 잭슨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면 할수록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근본주의 신자로서의 가르침을 잊게 된다”며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농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수들의 이기심과 교만함을 줄여가는 것이 경기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의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믿는다. 그렇기에 선수들은 절제 속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만의 코치 스타일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놀라운 결과를 끌어냈다. 그는 1996년 NBA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감독’ 상을 받았고 ‘NBA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에도 뽑혔다. 11회의 NB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도 그는 명상을 멈추지 않았다.
잭슨은 현재 뉴욕 닉스팀의 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뉴욕 닉스 임직원에게 회사 일정 중 하나로서 명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또한 사원들과 뉴욕 닉스 선수들에게 명상뿐 아니라 요가나 독서를 통해 내면세계의 건강함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뉴욕 닉스의 주전 중 한 명인 트래비스 웨어(Travis Wear)는 “필 잭슨을 만난 이후로 매번 경기에 참여하기 전 명상을 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며 “경기 전 명상을 통해 마음속에 가득 찬 욕심과 야망을 덜어내는 것이 오히려 경기에 편안히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잭슨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며 곁에서 지켜보던 이토 노리아키 스님은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최종 목표는 우승이 아닌 것 같다”며 “오히려 그는 그가 맡은 팀이 얼마나 건강하게 성장해 나가는가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 ‘농구코트의 선 마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필 잭슨은 농구코트는 떠나 뉴욕 닉스팀의 사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임직원에게 “명상을 통해 내면세계를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토 스님을 비롯해 히가시 혼간지의 다른 스님들은 LA 레이커스팀의 팬으로 종종 농구 경기를 지켜본다. 필 잭슨이 경기 중 위기 상황에서도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평정을 찾고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는 뛰어난 수행자임을 눈으로 확인한다.
잭슨이 자주 들리는 몬테벨로(Montebello)에 위치한 소젠지(Sozenji) 사원의 톰 쿠라이(Tom Kurai) 스님은 “우리 인생에서는 일이 술술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헤쳐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막막할 때가 있다”며 “그런 와중에서도 평정을 찾는 것,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불자로서 행해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어 “거칠고 자존심 강한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선수들의 이기심과 욕심을 잭슨처럼 통제했던 감독은 처음”이라며 “실제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 데니스 로드먼과 같은 톱스타들의 자존심을 조절하며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최고의 성적을 만들어 낸 것은 필 잭슨 감독의 역량에서 비롯됐다”고 덧붙였다.
이토 노리아키 스님은 “흐르던 물이 나무를 만나 부딪히면 그곳을 뚫고 지나가려고 싸우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현명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하며 “이런 덕목들을 잭슨에게도 자주 일깨워 줬다”고 말했다. 잭슨은 저서에서 “이토 노리아키 스님 말씀을 토대로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거나 다칠 때, 한계를 느끼고 좌절할 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잠시 쉬었다 다시 시작하라는 조언을 해줬다”고 말했다. 이런 잭슨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한 저서 ‘일레븐 링즈-승리를 만드는 영원의 리더십’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부처님 말씀을 한 구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되새기며 경기장 안의 선수들 한 명 한 명에게 실천한 필 잭슨에게 ‘농구코트의 선 마스터’라는 별명만큼 잘 어울리는 다른 별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알랭 베르디에 저널리스트 yayavara@yahoo.com
※이 글은 <법보신문 www.beopbo.com>에 실린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장6절 |
스님을 위한 공양물이 공동체 위한 뷔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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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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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발우 들고 마을 순례
스님들 탁발 음식으로 식탁 차리면
공동부엌에서 만든 음식 더해 뷔페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고
독거노인, 점심과 저녁까지 싸가
거동 힘든 이들에겐 호박죽 배달
아속 레스토랑 6곳서도 나눔
1천원 내면 1만원짜리 채식요리
식당·슈퍼 옆 제일 목좋은 곳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노점상 내줘
조건 없는 베풂이 그곳을 명소로
아속을 떠나던 날
‘공밥’ 미안해 기부하려니 사양
일곱 번 방문 전까진 안된다며...
어릴 적 가장 아련하지만 따스한 기억 중 하나가 사랑방이다. 그닥 오래지 않은 30~40년 전만해도 우리 농촌마을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였다. 일할 때도 두레로 함께 했고, 내 집 일도 나 혼자 하기보다는 품앗이로 함께 했다. 농한기가 되면, 동네 여자들은 안방에 모여 바느질이나 마늘을 까며 수다를 떨고, 남자들은 사랑방에 모였다. 함께 하는 게 재미없고 피곤하기만 하다면 그렇게 할리 없는 일이다.
한국인들은 종교의 공동체성도 유별나다. 절이나 교회, 성당에서 모여 점심을 함께 먹는 곳이 적지않다. 우리나라가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해외로 나간 교회나 성당도 신앙의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교민들이 함께 먹고 정을 나누고 정보를 교류하고 서로 돕는 사랑방 구실을 한다.
한국의 종교 공동체는 이상이나 가치, 신앙만이 아니라 서로 희노애락을 나눈다. 어우러지는 이런 공동체문화는 갈등하고 상처를 헤집어 아프게 할 위험성도 내포하지만, 사는 재미와 의미를 배가시켜주기도 한다. 공동체의 성패는 여기서 갈린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조직의 쓴맛’을 느끼느냐, ‘조직의 단맛’을 느끼느냐다.
아속공동체 하모니의 비결도 독특한 ‘식사나눔’이다. 아속은 포틸락을 비롯한 출가자들이 모태가 된 공동체다. 타이나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에선 아직도 스님들이 새벽에 탁발하는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탁발하는 문화는 아속에서도 같지만, 그 탁발음식을 스님들끼리만 나누는 바깥과 아속의 나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속에서도 스님들이 새벽 6시쯤 온 마을을 돌며 탁발한다. 공동체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나 과일, 빵 등을 가지고 길가에 나온다. 사람들은 스님들이 기러기처럼 줄지어 가면, 바루에 공양물을 담아준다. 스님들은 공양받은 음식을 마을 한가운데 담마홀로 가져와 식탁 위에 뷔페처럼 차려놓는다.
<조현의 아속공동체마을 체험 사진 슬라이드>
» 시사아속 담마홀에서 스님들과 함께 식사하는 마을사람들.
식탁엔 스님들이 탁발해온 음식만 올라오는 게 아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어른 학생 너나할 것 없이 공동부엌에 우르르 몰려가 누구는 야채를 썰거나 다듬고, 다른 누군가는 양념을 빻고 밥을 해 뚝딱 부페식을 늘여놓는다. 쌀국수와 숙주나물이 곁들어진 팟타이, 빨간 국물의 툼얌쿵, 파파야 샐러드인 쏨땀 외에도 밭에서 방금 솎아서 삶아 낸 야채들로 푸짐하다. 이렇게 친환경적이고 맛갈스런 음식을 먹는 재미가 보통 쏠쏠한 게 아니다.
스님들이 먼저 음식을 바루에 담아가도 90% 이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면 누구나 와서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을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집에서 요리를 해먹기 어려운 노인들은 도시락통을 가져와 점심과 저녁까지 싸간다. 개개인은 몇스님에게 공양을 올렸을 뿐인데, 그 공양물이 공동체 전체를 먹이는 잔치가 된다.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도 그런 배려를 하는듯 누구나 가져가기 쉽게 1인분식 아예 비닐봉지에 담아 공양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시사아속에선또 더 푸짐한 음식을 마련해 빈민가에 가서 잔치를 베풀곤 한다.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게 결국 모든이와 나누며 공덕을 베푸는 자선이 되는 것이다.
아속다운 것은 어찌보면 먹는 것보다 잘 비운다는데 있다. 시사아속은 병든 몸을 디톡스(해독)하는 관장으로 유명하다. 시사아속의 공동화장실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변기 말고, 벽쪽에 콘크리트침대가 있다. 화장실 밖 빨래줄엔 디톡스통 수백개가 널려있다. 패트병 밑동을 잘라내고, 뚜껑에 얇은 고무호스가 달린 통이다. 시사아속 사람들은 화장실 침대에 누워 혼자서 항문관장을 한다. 정제수를 이 통에 담아 미니호스를 항문에 넣어 물이 장에 흘러들어가게 한 다음 변을 눈다. 아속사람들의 얼굴이 그처럼 맑은 것은 채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디톡스 덕인 듯도 하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시시때때로 관장을 했다.
내가 시사아속을 간 것도 공동체 체험보다 병 치료를 위한 디톡스를 해보고 싶어서였다. 아속에서 사나흘이 지나자 디톡스에 들어갔다. 시사아속의 촌장격인 수녀 아뻠이 디톡스 전문가다. 보통 4~5일간 단식과 동시에 하는 디톡스의 전과정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다. 새벽에 코코넛 오일을 한입 가득 머금고 20분간 있다가 뱉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 세번 ‘리턱’이란 노란가루를 효소에 타마시고 저녁엔 레몬즙 등을 마신다.
단식과 함께 매일 관장을 하기 때문에 며칠이 지나면 변의 양은 현저히 줄고 염소똥처럼 동글동글한 변이나 기름이나 거품과 같은 독소들이 배출된다. 그러면 아뻠이 그 변을 막대기로 저어보고 몸 상태에 대해 얘기해준다. 단식과 관장 후 변을 보면 그동안 주로 어떤 음식을 먹고, 술담배를 어느 정도 하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디가 안좋은지를 알수 있다고 했다.
인근에 사는 가난한 할머니도 나와 함께 디톡스를 했다. 그 때 게스트하우스엔 중국 광저우에서 온 밍웬이라는 30대 여성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발에 습진이 심해 아시아 전역으로 용하다는 곳들을 찾아다니다, 방콕의 디톡스센터에서 50만원 정도를 주고 디톡스를 했다고 한다. 원조인 이곳에서 무료로 디톡스 해주자 그는 “여기서 할 걸”하며 아쉬워했다. 최근 시사아속을 다녀온 산청민들레학교 김인수 교장에 따르면, 타이에서 의료법이 강화돼 시사아속에서는 디톡스 프로그램을 중단했다고 한다. 대신 아뻠에게 배운 이가 인근에 치유센터를 만들어, 우리돈 10여만원으로 4박5일 디톡스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한다고 했다.
5일간의 단식과 디톡스를 끝내니, 뱃살도 들어가고, 날아갈듯 가뿐했다. 단식 후 최초로 먹은 게 호박죽이다. 피줌이라는 수녀가 만든 것이었다. 피줌도 아뻠처럼 방콕에서 대학에 다니다 포틸락에 귀의해 아속공동체에 합류했다. 정치학도로 정치인이 되겠다는 명문가의 딸이 세속적 삶을 포기하고 출가자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자, 부모 형제들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방콕의 산티아속에서 30여년간 활동하며 포틸락을 보좌해온 피줌은 몇년전 실무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이곳 시사아속공동체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쉴 피줌이 아니었다.
피줌은 새벽이면 죽을 쒀 보온병에 담아 공동체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기 어려운 노인집에 돌린다. 그 호박죽은 천상의 맛이었다.
아속의 나눔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아속은 우본라차타니아속과 치앙마이, 바톰, 방콕 등 6곳에 아속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치앙마이 아속레스토랑은 시내에서 차로 30분 가량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외국인들까지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룬다. 우리 돈으로 1천원 정도면 다른 식당에선 1만원을 내고도 먹기 어려운 뷔페식 채식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대신 음식은 자기가 담아와야하고, 먹은 식기도 직접 씻어야한다. 아속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기가 먹은 식기를 직접 씻는 것처럼 손님들도 그래야한다.
» 바톰아속에서 꺄오스님(오른쪽)과 함께 거름으로 만들 바나나나무를 썰고 있는 조현 기자.
시사아속을 나오는 날이었다. 이른바 선진국의 손님이 후진국에 와 거저 얻어먹는 게 좋아보이지 않아, 기부금을 내놓았다. 그런데 아뻠이 돈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가 일곱번 방문하기 전엔 기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아속의 규정이 있다는 이유였다. 아속에선 손님들이 기부보다 함께 노동하며 참여하는 삶을 더 원한다고 했다.
방콕에서 차로 1시간반 거리인 바톰아속공동체에 가자 공동체가 텅 비다시피했다. 연말이 되면 타이 전역의 아속공동체 사람들이 1백여만평이 되는 우본라차타이아속공동체에 모여 함께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학생들은 모두 그곳에 가고, 주로 노인들과 승려, 수녀 몇 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옆엔 수녀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낮엔 이 공동체 정문 옆에 있는 아속레스토랑에서 봉사했다. 새벽부터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는 나를 불렀다. 음식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정성스런 음식을 매일 매일 할머니에게 받아먹자니 송구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톰아속 정문 앞엔 아속슈퍼가 있고, 그 건너편엔 아속이 운영하는 초대형마트도 있다. 그런데 호수가 있어 가장 경치가 좋은 정문 옆 땅엔 과일이나 커피 채소 등을 파는 다양한 노점상들이 있었다. 아속 땅인 그곳을 아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무료로 내준 것이다. 그래서 쇼핑이나 식사, 군것질을 하고 호수 가에서 쉬기도 할 겸 먼곳에서 차를 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않았다. 아속의 베품으로 젼형적인 시골거리가 고을의 명소가 된 것이다.
바톰아속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이는 비구니인 꺄오스님이다. 아침이면 그와 함께 출가자들의 오두막인 쿠티 구역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쓸었다. 식사 이후엔 바나나 나무를 잘라 거름으로 만들기 위해 토막내는 작업을 함께 했다. 조그만 몸집의 꺄오스님은 갸냘프기 그지없었다. 하루 한끼만 먹으니 힘도 없어보였다. 그와 바나나나무를 썰면서 오래도록 함께 머물렀다. 스님의 쿠티엔 살림살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가나 싶을 정도로 단촐했다. 한끼만 먹고 참새처럼 야윈 몸으로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평화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일까. 그의 평화와 헌신에 아무것도 보답할 게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렸다.
바톰아속을 떠나던 날. 꺄오 스님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는 단풍잎 모양의 편지지에 ‘나의 아들아’로 시작되는 편지를 주었다. 그가 내 나이를 알지 못해서든, 종교적인 수사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아무리보아도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심성을 가졌기에 ‘아들아’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편지엔 아인쉬타인의 말이 적혀있었다.
“참된 종교는 일상의 삶을 떠나있지 않습니다. 선량함과 정의를 가지고, 한 사람의 완전한 영혼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싫증남을 막아주는 비결
조금 지난 일이다. 많은 물건을 버리고 나서 방이 꽤 깔끔한 상태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자려고 누웠는데 희한한 감정을 느꼈다. 왠지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넘쳐났다. 늘 '더, 더!'하면서 물건을 끝없이 탐닉했을 때는 맛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내게 부족한 물건만 손꼽던 시절에는 지금 갖고 있는 물건에 대해 조금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감사는커녕 부족한 것만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던 방에는 사실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었으며 에어컨까지 있었다. … 앞서 설명했던 '익숙함'에서 '싫증'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뿐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게 보게 한다. … 감사하는 마음이 새로운 자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건을 새로 사거나 늘리는 자극보다 확실히 편안하고 기분이 좋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물건을 버린 후 찾아온 12가지 놀라운 인생의 변화> (사사키 후미오 지금, 김윤경 옮김, 비즈니스북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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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애욕의 벼랑 끝에 서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하루 평균 고도 400~800미터씩 올라간다. 고산병엔 장사 없다. 나 등엔 배낭 말고 염증과 통증까지 지고 간다. 그래서 ‘3계’를 정했다. 첫째 무리 안 할 것, 둘째 무리 말것, 셋째 절대 무리 안 할 것.
그럼에도 일반루트를 벗어나면 샹그릴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어김없이 고행을 택한다. 수직 산을 통째로 넘는 갸루행이 그랬다. 설산 경관이 장엄한 곳이다.
» 갸루를 둘러싸고 있는 설산
하지만 가파른 낭떠러지에 겨우 서 있는 마을을 어서 벗어나고 싶다. 고갯길에서 땀을 훔칠 때였다.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아가씨가 겸연쩍게 웃으며 옆에 앉는다. 커피와 차를 팔고 오는 길이란다. 왜 대처로 안 나가냐고 물으니, 노부모를 두고 혼자 갈 수 없단다. 효녀 심청이다. “이곳이 무섭지 않으냐”니, “왜 무섭냐”고 되묻는다. 광대에겐 평평한 아수라보다 외줄 위가 더 익숙한 것인가.
마낭은 해발 4천~5천미터 고지 적응을 위해 쉬는 마을이다. 그런데 티베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자인 밀라레파가 10세기에 수행한 동굴이 있다 했다. 밀라레파는 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백부가 모든 재산을 강탈해 가자 흑마술을 배워 친척을 몰살한다. 그 뒤 히말라야로 와 수행하며 참회하고 불보살이 된다.
히말라야의 불교 사원에는 어디나 희한한 부처 그림들이 있다. 불처럼 분노하거나 섹스하는 부처다. 왜 그럴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에너지가 분노와 애욕이다. 분노와 애욕에 집착하지도 금기시하지도 않고, 그 불타는 에너지를 깨달음과 자비의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게 티베트 불교의 매력이다.
왕복 세시간 걸린다던 동굴은 서너시간을 넘게 가도 나오지 않는다. 가는 내내 사람 한명이 없다. 밥 딜런의 노래처럼 얼마나 오래 걸어야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일까. 인간이 덜되면 나처럼 오랜 수고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벼랑 끝에 있는 밀라레파 동굴
숲과 고개를 몇개나 넘자 폐사터다. 자칫 미끄러지면 천길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길 아닌 길을 기어오른다. 벼랑 끝에 동굴이 있다. 밀라레파가 앉아 명상하느라 엉덩이가 말밥굽처럼 딱딱해졌다는 곳이다. 밀라레파는 하필 이 백척간두에서 명상한 것인가.
분노한 바람이 총알처럼 뺨을 때린다. <태백산맥>의 빨치산 하대치처럼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바위 뒤에 잠시 몸을 숨겨 마지막 담배를 피울 때의 평화가 이런 것인가. 서늘한 바람을 온마음으로 마주한다. 태풍의 핵은 비어 있던가. 짠내 나는 땀이 영롱한 감로수처럼 입가로 스며들고, 통증은 환희가 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단순하게 살기 위한 몇 가지 기술
3년째 집안의 물건을 줄이고 있다.
버리고, 기증하고, 나눠주고.
요즘 유행한다는 미니멀리즘,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아가려는 그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3년째인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 잡아서 마음먹고 안쓰는 물건 버리면 쉽게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해보니 그렇지 않다. 쌓여있는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수십년 동안 쌓아온 나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다시 마주보는 것과 같은 작업이기 때문에 그 층이 매우 여러 개여서 한번에 정리하기가 어렵다. 또 살면서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바뀌기 때문에 사들이는 물건의 종류가 바뀌므로 물건을 버리는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종류의 물건이 또 생기기 마련이다.
아직 진행형인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삶의 과정에서 몇 가지 법칙같은 것을 발견했다.물건을 줄이고 단순하게 사는 방법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하지 않았더니 불필요한 물건이 쌓이고 삶이 복잡해지더라는 뜻이겠다.
첫째, 소품은 필요없다.
기념품, 장식품, 액자류들이 나한테는 제일 필요가 없었다. 여행지에서는 꽤 괜찮은 물건처럼 보여 사온 것들이 집에만 오면 별로 예쁘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물건 1위가 된다. 잘 보이는 곳에 내놓으면 먼지가 쌓여 청소하기 귀찮고 집은 어수선해 보인다. 누구 줄 사람도 없다.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장식품을 늘어놓는 것보다 아무 것 없는 깨끗한 빈 공간이 훨씬 더 아름답다. 청소하기도 편하고 실용적이다. 소품 사느라 쓰는 돈과 시간도 절약되는 것은 물론이다.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실용적인 물건이 아닌 것들은 일단 손에 넣지 말아야 공간이 단순해진다. 필수품만도 적지 않다.
둘째, 싸구려는 사지 않는다.
집에서 입는 바지. 가격이 좀 나가지만 품질좋은 바지는 10년 가까이 입도록 멀쩡해서 나중엔 지겨워 버릴 정도였는데, 당장 싸다고 산 바지는 1년을 넘게 입기가 힘들다. 빨수록 늘어나고 털이 빠져 춥다.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사면 자주 사고 자주 버려야 해서 결과적으로는 좋은 걸 사서 오래 쓰는 것보다 여러모로 비용이 더 많이 든다. 좋은건 하나만 있어도 되지만, 질이 떨어지는 건 여러개가 있어도 불만족스럽다. 제대로 된 것으로 구비하고 있으면 관리해야할 것도 줄어들고 자주 사지 않아도 되므로 장기간으로 보면 경제적이다.
셋째, 가구는 최소한으로.
수납공간을 늘리는 것이 살림의 필수적인 기술처럼 여기는 풍조가 있으나, 이건 수납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일 뿐.
물건을 놓을 공간이 없으면 가구나 수납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줄이면 된다. 가구는 고정적으로 집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집을 좁게 하고, 또 공간이 있는 만큼 물건을 쟁여두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만큼 가구 자체를 줄여 물건이 있을 공간 자체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다보니 심지어는 '이런 조명을 달아야, 이런 식탁이 있어야 미니멀리즘이 완성된다'는 식의 마케팅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넷째, 금융상품도 단순하게.
15년 가까이 주식과 관련 파생투자상품 등에 투자해본 내 경험에 따르면 투자상품은 하지 않는 것이 단순한 삶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투자상품으로 이익을 본 적도 있지만 당연히 손실을 본 경우도 있었고, 합계를 내면 수익이 전혀 없거나 손해를 본 수준이 된다. 그 과정에서 신경쓰고 시간쓰며 고민한 기회비용을 생각한다면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이 되는 것이다. 골치아프게 신경써서, 번 돈은 없는 상황인 셈이다. 상술로 뒤범벅된 복잡한 투자금융 시장에서 개인이 사고파는 시점을 정확히 판단해 이익을 챙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방'터져서 큰 돈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것만 내 것으로 한다는 사고방식은 사람의 정신을 차분하게 만든다.
다섯째, 기본 물품으로 해결한다.
몇 년전 벽곰팡이를 지우려고 벽곰팡이제거 전용 스프레이를 샀다. 2만원 가까운 비싼 가격이었는데 양도 적고 효과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2000원이 안되는 락스를 썼더니 금방 지워졌다. 겉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비싼 가격에 파는 제품들이 실속없는 경우를 많이 봤다. 어떻게든 물건 많이 팔아 돈벌겠다는 시장논리의 어두운 면이다.
세상에는 별의별 아이디어 상품과 물건들이 많이 나와있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필요하거나 유용한 것은 아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소금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눈에 다래끼가 날 것 같으면 소금으로 슬슬 씻어주고 자면 다음날 말끔해진다. 감기 기운이 있으면 소금물로 코세척을 하면 된다. 몸에 난 여드름도 소금으로 한번 씻어주면 훨씬 줄어든다. 발도 소금으로 한번씩 닦아주면 냄새가 줄고 상쾌해진다. 양치할 때도 쓴다. 과일껍질에 묻어있는 농약도 소금으로 닦는다.
설거지, 청소, 얼굴 각질제거할 때에는 베이킹소다를 두루두루 쓴다. 설탕으로도 각질제거를 하면 피부가 뽀얗고 부드러워진다. 머리감을 때는 샴푸만 쓰고 굳이 린스를 쓰지 않는다. 바디클렌저같은 것도 따로 쓰지 않고 비누로 해결한다. 진공청소기같은 건 없고 밀대 걸레로 마른 걸레질, 젖은 걸레질을 모두 해결한다. 얼굴로션, 바디로션, 핸드크림이 꼭 따로 있어야 하는건 아니다. 순한 로션 하나로 얼굴도 바르고, 몸에도 바르고, 손에도 바르면 된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상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저렴하고 친환경적이고 몸에도 해롭지 않은 '기본재료'에 두고 해결하려고 하다보면 생활이 단순해질 수 있다.
갖고 물건을 줄이기 위해서는 물건을 줄이는 동시에 새로 사지 말아야 한다.(또는 최소한으로 사야한다). 계속 사들이면, 버리는 게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양은 줄어들지 않는다. 새로 들이는 것 없이 물건을 줄이면, 물건을 줄이는 티가 팍팍난다. 물건이 줄어들어 공간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한편, 이렇게 쓸데없는 것들에 힘들게 번 돈을 썼던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10만원짜리 열쇠고리는 도대체 왜 샀던 것인가!!!) 나를 많이 바뀌게 한 것은 그 '고통'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아무 쓸모없는 것이 돼버린 그런 물건에 집착하며 돈과 시간과 정성을 썼던 것이 허무해지자, 새로운 무언가를 사고자하는 마음이 많이 줄어들었다.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길은, 과거 나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정신 청소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가진 것 없어도 할 수 있는 일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일이 없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와 눈빛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고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대할 수 있으며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몸가짐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덜어 줄 수도 있다." 『잡보장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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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위의 父子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오롯이 나를 마주한 시간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온 엄선용·엄승재 부자
<복음과상황> 오지은 기자 ohjieu317@goscon.co.kr
*사진: 엄승재 제공
이번 ‘그들이 사는 세상’ 주인공은 작년 10월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을 다녀온 부자(父子)다.
지난 10월에 24일간 생애 처음으로 오롯이 둘이서 걷는 휴가를 보낸 엄승재(43) 독자와 그 아버지 엄선용(75) 선생. 애당초 계획에 없이 급작스레 아버지를 아들이 모시고 순례길에 들어섰으나, 결국 아버지가 순례길의 첫 코스인 피레네 산맥에서 아들 배낭까지 짊어지고 걸었다는데…. 연로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다녀온 특별한 여행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아버지는 무려 강원도 횡성에서 영하의 날씨와 눈을 뚫고 인터뷰 장소인 양평으로 달려와 주셨다!)
― 어떻게 아버지랑 단 둘이, 그것도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여행을 다녀올 생각을 하셨나?
승재: 직장 안식 휴가중이어서 원래는 혼자 다녀오려고 했었다. 지난 일도 되돌아보고 앞으로에 대해서도 생각하려고. 4, 5년 전부터 머릿속으로 여행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떠나기 2주 전인가, 같이 가자는 아버지 제안이 왔다. 너무 촉박하기도 하고 처음엔 거절했었다.
선용: 4, 5년 전부터 염두에 둔 여행인 줄은 나는 몰랐다.(웃음) 혼자 여행을 가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 같아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내심 방해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 두 분이 다른 마음이었나 보다.(웃음) 그런데 어떻게 같이 가신 건지.
승재: 아내한테 말하니까, 평생 아버지와 단 둘이 여행 갈 기회가 어디 있겠냐고 하더라. 아내한테 혼났다. 아버지가 말수도 적으신 분인데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신 게 걸리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비행기 표 한 번 더 끊고, 아웃도어 쇼핑몰에서 산 거 한 번 더 사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같이 가는 걸로 바꿨다. 내가 아내 말을 잘 듣는다. 아버지는 며느리 공이 있었는지는 모르셨다.
선용: 정말 몰랐다!
― 아버지 연세가 있으신데, 걷기 여행이 부담스럽진 않으셨나.
선용: 평소에 늘 걷고, 어릴 적부터 아침운동으로 쭉 걸어왔기 때문에 별 걱정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신당동에서 남산 중턱 꼭대기까지 걸어오르곤 했었다. (신당동에서 남산 꼭대기까지 도보거리는 대략 4~5킬로미터다.-편집자)
승재: 아버지보다는 내가 걱정이었고, 걱정이 적중했다. 산티아고를 걷는 중에도 제 뒤에서 걸으실 때면 자세를 똑바로 하라며 잔소리가 많으셨다. 다만, 여행 전에 아버지가 중간 중간 잘 사라진다(?)는 어머니의 경고가 있었는데 정말 그러서셔 몇 번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웃음)
선용: 나는 사라진 게 아니라 앞서 걸으며 구경하고 있었을 뿐인데, 길동무들에게 뒤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리나케 아들에게 돌아갔다. 아주 혼났다.(웃음)
승재: 전화 통화도 자유롭지 않고, 경찰한테 안 통하는 말로 잘 설명할 수도 없고, 정말 미친 듯이 찾았다. 몇 번 겪고서는 아버지가 “조개 표시로 순례 길이 안내되어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두세 번 정도 위기를 넘겼다.
― 모녀 여행은 많이 들었는데, 사십대 중반의 아들과 칠십대 중반 아버지의 오붓한(?) 부자 여행은 좀 특별하게 다가온다.
승재: 한국 여행객들 중엔 우리가 유일했다. 더 특별한 건 아버지가 아들을 끌고 다니는 바람에 같은 시기 길동무들 사이에선 꽤 유명해졌다. 첫 코스인 피레네 산맥이 정말 난코스였는데, 내가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서 그만 무릎에 쥐가 나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는 벌써 나보다 훨씬 앞에서 가고 계셨는데, 아들이 주저앉아 있다고 알려주는 길동무들 말을 전해 듣고 뒤돌아 오셔서 내 배낭까지 들고 산맥을 넘으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암 환자기도 하셔서 아버지가 안마를 많이 해주시는데, 힘들어하는 길동무들에게도 안마를 해주셔서 정말 인기가 좋으셨다.
선용: 아들이 길동무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봐서,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 나누면서 걷느라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 하고 앞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걸어오던 아가씨가 나를 만나서 아들이 쥐가 나서 못 오고 있다고 알려줬다. 얼른 내 배낭을 길에 던져 놓고 온 길을 내려갔다. 차라도 구해서 태워 가야 하나 하다가, 선뜻 세우기도 어렵고 하니까 내가 부축하고 배낭 들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 특별한 여행의 추억으로 남았겠다.
승재: 그것도 그렇지만, 아버지와 함께 걷는 기회 자체가 처음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았고, 아버지와 난생 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 시간이었다. 여태껏 궁금해도 못 물어봤던 것을 물었고, 여행을 하면 이야기도 더 잘되었다. 아버지가 워낙 말수가 없으신 분이었다. 온유한 품성이셔서 괄괄한 사람들한테 늘 당한다고 생각했었고 그게 가슴이 아팠었다. 이번 여행 중에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봇물 터지듯 많이 말씀하시더라. 고1 때 아버지의 어머니인 내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산부인과 이름까지 아직 기억하고 계시더라. 아버지의 사회생활 이력에 대해 품고 있는 궁금함도 풀게 되고, 그러면서 이해하게 된 부분도 많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아버지는 모르던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셨는지.
선용: 글쎄, 물어보려다 못 물어본 건 있고, 지금 아들이 40대 중반이 되는 나이니까 자기 인생을 살면서 많이 배우고 느끼고 연구하면서 잘 살아가려니 한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면 먹는 게 고생이려니 했는데 정말 맛있는 거 잘 먹고, 아들이 요리도 많이 해줘서 좋았다. 세탁도 도맡아서 하고.
승재: 주로 저녁을 많이 해먹었는데 식료품들이 싸서 왕새우나 연어를 토막으로 사서 스테이크로 구워 먹기도 하고, 순례자 숙소 내 식재료는 공유하니까 흔한 게 스파게티 면이라 스파게티는 정말 쉽게 해먹었다. 아버지가 원래 빵과자를 좋아하시는데 여기선 빵이 정말 싸고 맛있으니 좋았다. 나중에 감기 기운이 돌 땐 아껴놓은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 콜롬비아에서온 부자 Mauricio와 Mejia (사진: 엄승재 제공)
― ‘순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면?
승재: 작은 마을마다 어딜 가도 중심엔 성당이 있는 걸 보면서, 야고보 사도가 2천 년 전 이 길을 걸어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러 다녔을 걸 생각하면서,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발걸음이 이 작은 마을들을 바꾸고 전 세계 사람들의 발걸음을 여기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 편히 가도 발이 아픈데 그 먼 길을 오직 걷기만 하면서 숙식할 마땅한 곳도 없이 복음을 위해 다녔다는 것이 새삼 귀하게 다가왔다. 믿음은 그런, 길을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 길을 걸으면서 내 속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들이 쑥 올라오기도 했다. 분노한 일들, 증오한 사람들, 상처가 있고 용서가 안 되는 마음들, 계속 그런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오롯이 자기를 만나는 시간,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대면하고 자꾸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걷기만 해도 거기서 오는 메시지도 있고. 복잡한 생각들을 안고 걷는데 점점 걷는 것이 좋아지더라. 매일 일어나면 해야 할 일이 있고,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안도감. 그 만족감이나 평안함과 뿌듯함으로 위로가 되고 의미가 있었다.
선용: 다양한 사람들이 걷는 길에 나도 동행하면서 이 힘든 길을 단지 즐겁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열 번 온 사람도 있다는데, 기회가 되면 또 가려고 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마지막에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찬송을 부르는 수녀의 노랫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와중에도 정말 천상의 소리 같았다. 한 가운데 향을 퍼트리는 향로에도 감명을 받았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것입니다.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859
용감한 장군이 두려워한 것
장군과 찻잔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한 장군이 평소 애지중지하던 골동품 찻잔을 꺼내어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만지다가 갑자기 찻잔이 손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어이쿠!" 얼른 찻잔을 움켜잡은 장군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천만대군을 이끌고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들락거리면서도 한 번도 떨린 적이 없었는데, 어이하여 이까짓 찻잔 하나에 이토록 놀란단 말인가?" 장군은 미련 없이 찻잔을 꺠어 버렸습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사랑과 미움, 혹은 집착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화와 삶의 지혜를 어지럽히는 보이지 않는 장애가 아닐까요. 이우상(소설가) <개에게 우유를 먹이는 방법>(글·풍경소리, 전각·정고암, 그림·박준수, 운주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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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방을 바꿔 주십시오." "왜 그러냐?" "바람이 불면 창문이 덜컹거려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방을 몇 번이나 옮겼나?" "세 번째입니다." "그렇다면 방을 옮기기보다 그대의 마음을 바꿔야겠네." "네?" "자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방을 바꿔도 마찬가지라는 말일세." 박민호(아동문학가) <개에게 우유를 먹이는 방법>(글·풍경소리, 전각·정고암, 그림·박준수, 운주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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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다
4유형 - 세 번째
특별(창조)을 추구하는 사람
핵심동기 : 특별(창조)
자신의 시각 : 독특함, 의미추구, 개인주의
타인의 시각 : 질투, 인위적승화, 자유스러움
4유형은 현실 앞에서 움츠려 듭니다
4유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뛰어 넘으려는 적극적인 행동도 부족하지요. 현실적 노력과 갈등을 버거워하고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합니다.
삶이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4유형은 그래서 주어진 축복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은 힘든 곳이며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쉽게 우울해집니다. 세상이 자기보다 거대하다고 생각하는 4유형의 현실에 대한 움츠림이지요.
이런 현상은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갈등과 경쟁을 하기보다는 피하고 거부하지요. 쉽게 감정적으로 폭발하고 우울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안정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도 큰 고통 앞에서는 그것을 이겨내는 힘이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잠재력의 소유자가 또한 4유형입니다.
4유형은 새로운 세계를 추구합니다
4유형은 다른 사람의 장점과 자산은 크게 평가하나 자신이 가진 재능과 경험은 시시하게 여깁니다.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면서 부러워하는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 및 평가합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요.
자기존중감이 낮은 이들은 능력을 개발하지 않고 감정의 늪에 빠져듭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상상 속에서는 완성하지만 현실을 자각하면서 좌절하지요. 이것이 4유형의 수치심의 원천입니다.
사례 1> 꿈 ‘피아니스트’ :
- 상상 속에서는 이미 피아니스트가 되어 연주회를 하고 있다.
2>영화 ‘아마데우스’의 궁중 악사 살리에리
4유형은 때로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어느 때는 지나치게 말이 많습니다. 특히 자기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을 많이 합니다. 또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부적격하다는 느낌, 주목받지 못하고 무언가 나에게 잘못이 있다는 수치심을 그들은 말로써 저항하고 푸는 거지요.
사례 3> 4유형 직장인의 애환 :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들어왔나?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아~ 이번 일도 아닌 것 같아.’
또 다시 직장을 옮긴다.
이상을 꿈꾸면서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만족하지도 못하는 4유형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다른 것을 추구하면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이것이 지나칠 때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가족조차 현실감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책임을 맡길만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어렵지요. 시기가 많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도 합니다.
4유형은 뛰어난 심미안을 갖고 있습니다
4유형은 창조적 지향, 감정들과의 친화력, 고통에 공감하는 아름다운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잘 느끼고, 발견합니다.
에니어그램 유형 중 쓰레기더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하찮은 돌에서도 미를 찾아낼 만큼 뛰어난 심미안을 갖고 있습니다. 꼭 예술가의 4유형이 아니어도 말이지요. 그들의 눈에 띄게 되면 평범한 것도 특별한 것(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한마디코너:
결핍된 것보다는 현재의 긍정적인 면에 관심을 갖도록 자신을 격려해 주세요. 스스로 시시하게 여기는 당신의 재능이 사실은 큰 자산입니다.
이런 말을 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4유형은 꼭 귀담아 들으세요.
천당의 뜻
천당은 곧 자기에게 맞는 곳이다 내가 만약 물고기라면, 깊은 바다가 곧 나의 천당이다. 내가 만약 새라면, 하늘이 바로 나의 낙원이다. 슬픔은 자신의 역할을 잘못 아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스스로를 새라 여기고, 새가 스스로를 물고기라 여기는 것이다. <매일 매일이 좋은날 1>(채지충 지음, 정광훈 옮김, 느낌이있는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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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혁명 이룬 선수행자 잡스
스티브 잡스
타인 생각에 갇히지 않고 늘 마지막처럼 살았던 선수행자
<법보신문> 알랭 베르디에 | yayavara@yahoo.com
▲ 20대 시절 인도 여행에서 불교를 만난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를 창업한 뒤 선문화를 활용한 상품들을 선보였다.
‘단순함과 명료함’을 강조한 애플사의 IT제품들은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놓았다.
미국의 기업가였으며 애플사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에게도 고난의 시기는 있었다. 1975년, 스티브 잡스는 대학에 입학한지 6개월 만에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자퇴했다. 이후 수개월을 방황하다 동양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향했다. 인도로 떠나기 위해서다.
대학 중퇴 후 인도로 여행
삭발 후 명상하며 불교 매료
고향 돌아와 선불교 만난 후
수행 프로그램도 적극 참여
출가 뜻 접은 후 사업에 매진
선불교 활용해 아이디어 개발
명료하고 간결한 제품 출시
세계에 ‘디자인 혁명’ 일으켜
그는 미국 오리건(Oregon)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대학(Reed College) 철학과에 잠시 몸담았었다. 재학시절, 전공 공부에 집중하기보다는 동양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서적들을 들고 캠퍼스 구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가 캠퍼스에서 읽었던 책들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쵸감 트룽파 린포체(Chogyam Trungpa Rinpoche)의 ‘영적 물질주의를 해부하다(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1973)와 인도의 영적 스승 파라마한사 요가난다(Paramahansa Yogananda)가 집필한 ‘영혼의 자서전(Autography of a Yogi)’(1946)은 그가 항상 곁에 간직하고 아꼈던 책이다.
잡스가 인도로 향한 첫 번째 이유는 인도의 종교지도자 님 카롤리 바바(Neem Karoli Baba)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잡스가 인도에 도착했을 땐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잡스는 목표도, 목적지도 없이 인도 곳곳을 여행했다. 특히 종교 행사나 의식 등을 지켜보며 자신 또한 이곳저곳 정처 없이 떠도는 수도승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꿈을 키운다. 그는 삭발하고 명상을 배우면서 점차 불교에 빠져들었다.
애초 그가 인도로 향했던 이유는 힌두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인도를 여행하며 힌두교의 지나친 차별과 강압적인 율법을 발견했다. 이에 반해 불교는 인류에게 큰 위안을 주고 평화로운 종교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불교에 매료됐다.
특히 잡스는 끊임 없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다는 불교사상에 매료됐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일에 대한 그의 왕성한 에너지뿐 아니라 창조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의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잡스는 입양아였다. 시리아 출신의 무슬림 이민자였던 아버지와 미국 국적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갓난아기 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폴과 클라라 잡스(Paul and Clara Jobs) 부부에게 입양됐다.
▲ 일상 속 수행을 강조했던 순류 스즈키 선사. 잡
스는 순류 스즈키 선사가 저술한 ‘선심초심’을 통해 선불교를 처음 만났다.
인도에서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잡스를 마중 나왔던 그의 부모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잡스가 삭발을 했을 뿐 아니라 피부가 완전히 검게 그을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의 부모님은 물론 잡스 자신도 인도 여행이 그의 인생과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런 예상을 하지 못했다.
불교에서는 인생이란 “변화무쌍한 강물과도 같다. 모든 사물과 생명체는 쉼 없이 변화를 위해 움직임이고 이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철학은 잡스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던 불교를 사업에 적용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놓는 상품들을 내놓은 회사, ‘애플(Apple)’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인도 여행 후에도 잡스는 그곳에서 배운 명상을 계속 이어나갔다. 당시 그가 머물던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에는 선불교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는 일상 속 수행으로 전 세계에 획기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순류 스즈키(Shunryu Suzuki, 1904~1971) 선사가 저술한 ‘선심초심(Zen Mind, Beginner’s Mind’(1970)을 통해 선불교를 만났다.
▲ 스티브 잡스에게 선불교 가르침을 전한 코분 오토가와 선사.
그는 수행자가 될 것을 고민하던 잡스에게 “그 대신 미래를 바꿀 큰 일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스즈키 선사의 제자였던 코분 오토가와(Kobun Otogawa, 1938~2002) 스님으로부터 선불교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오토가와 스님은 잡스에게 선불교의 기본 철학과 수행에 관해 명료한 해답을 주었다. 잡스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토가와 스님을 찾아가 부처님 말씀을 새겨듣고 수행을 했다. 불자로서 잡스는 매우 신중하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명상했다. 당시 미국에 최초로 세워진 선불교센터인 타사자라(Tassajara)선불교센터에서 열리는 수행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했다. 선불교에 큰 매력을 느꼈던 잡스는 훗날 “그동안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스님이 돼 일본에서 선불교 수행과정을 밟고자 하는 마음까지 먹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토가와 스님은 그에게 “일본에 가는 대신 캘리포니아에 남아 미래를 바꿀 큰 일을 하라”고 조언했다.
오토가와 스님은 통찰력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잡스는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미래를 바꿨기 때문이다. 잡스가 만들어낸 상품 곳곳에는 선불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500년 동안 선불교는 불자들로 하여금 용기와 결단력, 그리고 절제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 잡스는 타사자라 선불교센터 수행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기업인이자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cson)에게 이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냥 앉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구경만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마음이 평화스럽기는커녕 불안상태에 빠질 겁니다. 일을 시작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작은 것에도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직관력은 더 발달되고 사물을 좀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되며 현실감각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고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매일 수행해야 합니다.”
잡스도 격랑의 시대였던 1960년대 젊은이였다. 히피 운동이 만연했던 시대를 살았던 그는 “환각제 사용조차 나에게는 상상력을 넓히고 창조력을 향상시키는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실리콘 벨리에서 잡스와 마주친 이들에게 잡스는 성질 급하고,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다. 사업에서건 가정생활에서건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친부모에게 버려져 입양이 되었던 경험과 젊은 시절 지나친 방황이 어찌보면 그의 이런 모난 성격에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잡스의 이런 성격이 단순함을 강조하는 선불교에 빠져들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잡스는 언제나 단순한 검정색 옷을 즐겨 입었다. 회사 상품의 모든 디자인에서도 ‘단순함 혹은 간소함’이라는 덕목을 강조했다. 선불교는 그가 제작하는 모든 상품들을 완벽하게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잡스의 성격은 종종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성격과도 비교된다. 잡스는 고흐가 환생한 인물이었을까?
고흐가 1888년 그린 자화상은 수행자를 닮은 듯하다. 그 자화상을 보면 이런 상상이 그저 우스갯소리는 아닌 것 같다. 고흐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가리켜 “영원히 부처님을 섬기는 스님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라고 했다. 몇몇 미술 평론가들은 “반 고흐는 광기 넘치는 자신과 상반된 수행자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흐 동생 테오는 그를 가리켜 “빈센트는 재능 있고 섬세한 창조자이자, 동시에 무정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고 묘사했다.
이는 잡스의 성격과도 매우 비슷했다. 잡스는 고흐처럼 영적인 것을 갈망했으며 창조적 에너지가 넘쳤던 사람이다. 하지만 고흐와 잡스는 괴팍한 성격과 복잡한 내면세계로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잡스는 졸업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남의 인생을 살기 위해 삶을 낭비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생각에 갇히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낸 수많은 디자인 혁명을 즐기는 동시에 그가 비교적 짧았던 인생 동안 많은 시간을 할애해 수행했던 그의 명상에 그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알랭 베르디에 yayavara@yahoo.com
*이 글은 법보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1133
오현 스님, 백담사 무문관 나오던 날
밖에서 문 잠긴 3평 독방 감옥은 안인가 밖인가 |
84살 노스님인 조실 무산 오현 스님
3년간 여름·겨울 2번씩 스스로 가둬
부자유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나를 직시하는 것
혼자이자 비로소 홀로가 아님 알아
한 몸 견성성불 못한 것보다
중생 뜨겁게 사랑 못한 게 더 한탄
겨울잠 깬 개구리처럼
우물 뛰쳐나와 세상 속으로
조실 스님 “자기를 먼저 보라” 사자후
“미꾸라지나 잡룡 아닌 잠룡이 있나”며
‘오늘’이라는 시조 읊어
“가재도 잉어도 살았던 봇도랑에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진흙탕 미꾸라지가 용트림하는 오늘”
백담사 90일 동안거 무문관 문 열어 84살 무산 오현 스님 감옥 나오던 날
*90일 독방수행을 마치고 무문관을 나서는 백담사 무금선원 조실 무산 오현 스님이 “무슨 사진이냐”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오른쪽 문 옆에 배식구가 있다.
*무문관을 나와 백담사로 가고 있는 조실 무산 오현스님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큰길에서 내설악 백담사까지 7㎞는 좁은 외길이다. 굽이굽이 구절양장이다. 지난 9일 눈이 쌓이면 길이 끊겨 고립무원이 된다는 백담사길에 들어섰다. 얼어붙은 외길을 차가 겨우 기어간다.
그 백담사에서도 무금선원 무문관은 더 깊숙이 눈밭 속에 잠겨 있다. ‘설악’(雪嶽)의 한자 자획을 풀어보면 ‘설산의 감옥’이니, 바로 이곳이 아닌가. 무문관은 밖에 열쇠가 채워진 감옥이다. 90일간의 겨울안거를 해제하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스님 9명이 석방됐다. 그중에는 84살의 노승인 무금선원 조실 무산 오현 스님도 있다. 스님은 지난 3년간 여름, 겨울 3개월씩 연중 절반은 자신을 이곳에 가뒀다. 감옥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옥을 자처한 이들에겐 부자유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을 직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애벌레가 나방이 된 것일까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조실 무산 오현 스님의 ‘내가 나를 보니’다. 선시조에 일가를 이룬 노승의 고백치고는 너무도 적나라하다. 그 애벌레가 나방이 된 것일까. 나이답지 않게 날렵한 몸과 사뿐한 걸음걸이다. 얼굴은 청수하다. 그보다 젊은 스님들도 해사하고 경쾌하긴 마찬가지다. 이번 무문관 결제에 동참한 법인 스님은 몸무게가 5㎏이 빠졌다.
이번 무문관 안거엔 선방 고참으로 무문관 주요 책임인 ‘유나 소임’을 맡고 있는 영진 스님과 선·교(禪·敎)를 겸비한 한산사 주지 월암 스님, 일지암 암주이자 참여연대 공동대표인 법인 스님, 지리산 백장암 전선원장 원융 스님, 백양사 선원장 무아 스님 등 고참이 많았다. 이들은 3평 독방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서 비로소 ‘홀로’가 아님을 알았다니 아이러니다. 이날 독방에서 나온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내 덕행으로 음식을 앉아 받아먹기가 너무도 부끄러웠다”고 했다. 월암 스님은 “한 끼 밥과 쌀 한 톨에 담긴 중생들의 은혜가 너무 커서, 가시방석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한 몸 견성성불을 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중생 한 분 한 분을 한번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워 참회가 되더라”는 것이다.
무문관엔 오전 10시30분~11시까지 한번의 식사가 배달됐다. 백담사 공양간에서 이곳까지 음식을 지게로 져나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젠가는 식사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식사가 들어오지 않았다. 2시간도 더 지나서야 행자가 배식구를 열었다. 행자는 눈물을 글썽인 얼굴을 푹 숙인 채 손을 모으며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밤사이 큰 눈이 와 행자 몇이서 눈 터널을 뚫어가며 오느라 그렇게 늦어진 것이었다. 밖에 일이 있어 출타한 대중들이 큰 눈으로 돌아오지 못해 갓 출가한 행자 몇명만이 노심초사하며 밥을 해 배달해온 것이다. 영진 스님은 “땀으로 범벅이 된 행자를 본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고 고백했다.
*동안거 해제법회에서 법문에 앞서 절을 받는 동안 합장하고 있는 무산 오현 스님
*오현 스님이 백담사 무금선원과 기본선원, 신흥사 향상선원에서 동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을 향해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라”는 법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월암 스님과 영진 스님, 법인 스님이 무문관을 나온 자신들을 마중나온 신자들과 만나고 있다.
‘산과 들 어혈 다 풀었다는 개구리’
그러니 아무도 보지 않는 안에서도 게을러질 수 없었다고 한다. 벽에 기대거나 오래 누우려고 해도 허리가 아파 그리할 수가 없고, 정좌로 앉아 참선하는 게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좁은 방에서 포행을 하거나 108배를 하거나 기침을 할 때도 옆방에 방해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단다.
그나마 지금은 시설이 많이 좋아졌다. 1998년 무문관을 처음 열었을 때만 해도 조실 스님이 “공부하는 출가자들이 바람 맞고 비 맞아가면서도 공부하는 것 아니냐”며 흙집에서 시작해 10년 넘게 그런 시설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한번은 옆방에서 문을 쾅쾅쾅 차며 악을 쓰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 소란이 계속되는데도 문이 잠겨 있으니 나가볼 수도 없었다. 영진 스님은 해제 날 옆방 스님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 방을 한번 보라”며 보여주는데, 흙벽이 뻥 뚫려 있었다. 갑자기 보일러가 터져 보일러실의 물이 방으로 밀려들어 물이 차오르는데도 피신할 수 없어 그랬다는 것이었다. 영진 스님은 “그때 보일러실 물이 덜 데워졌기에 망정이지, 닭백숙이 될 뻔했다”며 웃었다.
겨울잠을 깬 개구리처럼 이들은 우물을 뛰쳐나와 세상 속으로 향한다. ‘경칩, 개구리/ 그 한 마리가 그 울음으로// 방 안에 들앉아 있는/ 나를 불러쌓더니// 산과 들/ 얼붙은 푸나무들/ 어혈 다 풀었다 한다’
조실 스님의 시조 ‘출정’(出定)은 ‘선정에서 나올 때’, 즉 참선을 끝내고 세상에 나가는 것을 동면을 깬 개구리에 비유했다. 지금 얼어붙어 있는 것은 산과 들이 아니라 온 국민의 마음이다. 어떻게 어혈을 풀까.
“좋은 것에도 싫은 것에도 평등하게”
무문관 수행자들은 “무문관보다 우리를 더 구속하는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월암 스님은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뜻)에 지배당하는 것이야말로 구속이라고 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등 외부 상황에만 끌려다니는 게 진짜 속박”이라는 것이다. 법인 스님은 “좋아했던 것만 애착하고 싫어했던 것을 혐오하기만 하는 것이 진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더라”며 “좋은 것에도 싫은 것에도 평등하고 자애롭게 대할 때가 감옥에서 나오는 때”라고 했다. 그러니 “이곳이 감옥이 아니라 집착과 혐오에 사로잡힌 바깥세상이야말로 감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치열하게 자신을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선악 2분법의 세상에서는 “그러면 좋은 자와 나쁜 놈을 똑같이 대하라는 말이냐”고 면박당하기 일쑤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조실 스님은 그런데도 10일 해제법회에서 “자기를 먼저 보라”고 사자후를 토한다. “대통령, 대기업 회장, 고위 공직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검판사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이므로, 먼저 자신의 마음을 보고, 자신의 행위를 똑바로 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대선 정국과 관련해 “이번엔 삼독(탐욕·분노·무지)의 불길을 잡는 사람이 민심도 잡고 대권도 잡을 것”이라며 “먼저 자기 자신이 삼독에 젖어 있는지를 못 보면, 타인의 허물을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을 바로 세우기는커녕 자신도 그 허물을 되풀이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니 “자기의 허물을 먼저 봐야 공명정대해지고,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시인다운 해학을 담아 “미꾸라지나 잡룡이 아닌 잠룡이 있느냐”며 ‘오늘’이란 시조를 읊었다.
‘가재도 잉어도 다 살았던 봇도랑에/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진흙탕 좋아하는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할 만한 오늘’
백담사(인제)/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안나푸르나 절경보다 좋은 사람
덕기자 덕질기③
사람 한명이 천하절경보다 낫다
안나푸르나의 폭포들은 높고도 길다. 배낭보다 무거운 마음의 짐이 오래도록 미끄럼을 타고 쓸려내려간다. 그러니 그 ‘물소리가 장광설이요, 산색이 청정한 몸’이라는 소동파의 시를 어찌 실감치 않겠는가.
그러나 세인에겐 무인지경이 서너날만 계속되면, 그 무엇보다 더 반가운 것이 인간의 목소리다.
미국에서 막 대학을 졸업한 카터 롱과는 며칠 간격으로 가끔 만나 함께 걷다가 헤어지곤 했다. 그러나 청춘이 역시 빠르다. 그가 한 점으로 멀어져갈 때는 ‘무정한 녀석, 뒤도 안 돌아보네’라며, 가슴 한켠이 허해진다. 그러니 누군들 반갑지 않으랴. 할머니 두 분이 지나가자 삶은 감자 한 알씩을 건네주니, 안나푸르나 여신 같은 미소를 보내준다. 80살 인도인과 77살 독일인으로 친구라는 이 두 할머니는 5416미터 토롱라 고개에서 다시 만났다.
가장 오래 함께한 이들은 달바와 마르코 모자였다. 독일에서 음악교사를 했던 60대 후반의 달바는 3년 전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 살고 있고, 아들 마르코는 스페인에서 일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모자가 랑데부한 것이다.
가이드와 포터를 대동한 마르코는 대포만한 카메라를 메고 다녔다. 쓸만한 사진들은 그때 마르코가 찍어 보내준 것이다.
*브라질에서 온 달바와 조현 기자가 걷고 있는 모습을 달바의 아들 마르코가 찍었다.
4000미터를 넘자 랜드슬라이드가 나왔다. 바위와 돌이 굴러떨어지고 자갈이 미끄러운 곳이다. 한 트레커가 낙석에 맞아 계곡으로 추락하는 사람을 봤다고 했다. 달바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토롱페디에서 점심을 먹고 한시간 낮잠을 자고도 하루 더 쉬어야겠다며 손을 들고 말았다. 쓸쓸하지만 또 혼등할밖에.
4950미터 하이캠프는 꽁꽁 얼어 있었다. 숙소에 가니 서양인 두 명에 이어 잘생긴 한국인이 들어섰다. 마낭에서 본 적이 있지만, 한국인들과 거리를 두느라 내가 시선을 피했었다. 그런데 숨쉬기 어려운 고지대에서 다시 보니 산소를 만난 듯했다. 30대 초반인 서성일씨는 한국에서 길이 안 보여 카트만두로 날아와 중고 핸드폰을 팔며 무역을 개척했단다. 새 세상, 새 일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장하고 대견해 두 달간 아낀 김과 고추장을 내놓고, 다음날 새벽 토롱라를 넘는 동지가 됐다.
온천수가 있어서 산행의 피로를 씻는 타토파니에 가니, 달바 모자, 카터 롱, 서성일이 다 있었다. 그날 밤 우리의 마음이 설산보다 환해졌다. 혼등이 짜릿한 것은 설사 못난이라도 천하절경보다 더 낫다는 진실을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단식의 이유
단식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가 "미안, 나 지금 밥 못 먹어. 단식중이야"하는 거였다. 친구는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다이어트를 할 만큼 살이 찌지도 않았다. 내가 의아해하자 친구가 대답했다. "내가 요새 자꾸 애들한테 화를 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 대답이 이상하게도 내 맘에 오래 남았는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친구 생각이 났다. 자신의 불륜으로 낳은 아이가 신의 진노로 병에 걸리자,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는 단식을 하는 다윗의 장면이었을 거다. 순간 친구 생각이 났고 단식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이었다. 화가 나거나 슬플 때 술을 마시곤 하던 내가 얼마나 잘못된 인생을 살았는지도 느껴졌다. 술은 최고의 에너지원. 나는 분노하거나 슬플 때 술을 마심으로써 내 슬픔에, 내 분노에 최고의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일생 돌이키기 싫은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했던 것이라는 꺠달음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분노에 에너지를 더 공급하지 않기 위해 며칠 곡기를 끊은 것이었다. <시인의 밥상>(공지영 지음, 한겨레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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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가슴이 조여올때
두려움이 두려울 때
마주하고 말을 하게
작년 말, 체르노빌의 원전은 3만6천톤의 콘크리트와 철강으로 된 덮개로 씌워졌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종종, 2차 대전 중에 낙하됐지만 폭발하지 않고 묻혀있던 폭탄이 발견되어 주민들이 비상대피해야 합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문득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처치했다는 히드라가 생각났습니다. 히드라의 뿌리는 헤라클레스가 땅 속에 묻어버렸지만, 적당한 조건이 형성되면 다시 몇 백개의 뱀머리를 만들며 튀어나올 겁니다. 망가진 원전은 콘크리트 덮개로 씌워지긴 했지만 몇 천 년간 계속 방사물질을 유출할거고, 폭발하지 않은 폭탄은 하시라도 건드려지길 꿈꾸고 있었을테지요.
두려움을 대하는 우리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몸은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필요한 호르몬들을 분비하면서 비상상태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사실 생존에 필수적인 경보장치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오는 실제적인 위험없이 우리 마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두려움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까봐, 상사에게서 비난을 받을까봐,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무시당할까봐, 겁쟁이란 딱지를 받을까봐….두려움은 우리 안에서 낮은 소리로, 혹은 엄한 소리로 경고를 하기도 하고 질책하기도 하는데, 두려움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우린 여러가지 방법으로 무시하고 눌러버립니다. 억압된 두려움은 히드라처럼 때를 기다리고 있지요.
두려움의 진짜 얼굴을 알아내는 길이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과 마주 하는 것입니다.
저의 내담자 중 30대 말인 한 남자는, 심장과 뇌신경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데도 가슴이 늘 조여드는 느낌이었고, 눈의 근육이 제멋대로 욱실거리고, 숨쉬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두렵고 불안하니까 잠을 잘 못자고, 그래서 피곤하니까 불안감은 더 늘어만 갔답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게 되었지요. 그 정체가 무엇일까? 조여드는 가슴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 보라 권유했습니다. 고슴도치같이 생긴 놈이 그가 늘 타고 다니는 자전거에 올라앉아 자기를 빤히 쳐다본다고요. 왜 나를 이렇게 따라다니느냐고 묻자 눈빛은 그새 슬픔으로 변하면서, 쉬고 싶다고 한답니다.
“아무것도 하지말고 나랑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어.“
시작한 사업이 실패할까봐 그는 몸도 마음도 쉬어서는 않된다는 압박감을 '가슴'에 쥐고 있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더욱 일에 몰두했던 겁니다. 그 두려움을 느끼면 무너질 것 같아서지요. '고슴도치'가 원하는 대로 잠시잠시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두려움을 어루만져 주기 시작하자 가슴의 통증은 점차 사라졌고, 사업계획에서 있었던 오류도 찾아낼 수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몸은 아주 솔직합니다. 몸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두려움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조용한 자리를 내주면, 거기서 오히려 지혜를 얻게 됩니다.
글·그림 이승연(독일 심리치유사)
'마을 건달'이 환영받는 곳
언제 무슨 일이라도 척척, 우리마을 건달
*영화 <홍반장> 중에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 도움을 주는 영화 속 홍반장.
‘밝은 누리’에는 그런 홍반장이 여럿 있다. 특별한 직업 없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챙기는 이런 사람을 재밌게 마을건달이라 부른다. 직장에 매이지 않고 적게 벌면서 하고 싶은 일 하거나, 휴직과 실업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불안과 무기력한 소외감에 휘둘리기 쉬운 세상이지만, 오히려 마을에 활력을 주고 새로운 삶 꿈꾸며 산다.
마을서원에서 함께 공부하거나, 밭일, 집짓는 일, 밥상, 교육 등 마을에 필요한 일을 도우며 지낸다. ‘밝은 누리’로 함께 살며 주목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탱하고 윤택하게 만든다는 거다. 마을에 갑작스런 일이 생길 때, 중요한 첫 대처는 모두 이들 몫이다. 이사, 집수리, 장례, 혼인, 마을잔치 등 중요한 마을 일 어디에도 이들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서울 인수마을을 토대로 홍천에 농촌마을공동체를 분립할 때, 필요한 역할에 따라 귀촌 모둠을 꾸렸다. 농사짓고 집지을 사람, 학교 세우고 가르칠 사람, 문화와 복지 관련 된 일 을 할 사람, 그리고 마을건달! 마을건달은 어느새 우리 꿈을 현실화 하는 주체로 설정되어 있었다. 더불어 사는 삶은 쓸모없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생명들에 의해 이뤄진다. 규격화 되거나 상품화 되지 않은 작은 힘들이 모여 서로 살리는 삶을 만들어 간다.
서울과 홍천마을에 늘 술 취해 있는 이웃 분이 계신다. 서울 분은 그렇게 많은 도시인들 속에서 늘 홀로이고, 정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취직 못하고 돈 없고 늙고 병들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이 된다. 문제는 이런 생명 소외 현상이 구조적으로 이뤄진다는 거다. 홍천마을에 계시는 분은 늘 술 취해 있지만, 어떻게든 밭일을 하신다. 마을 분들이 서로 잘 알고, 함께 하는 마을 일과 놀이에 소외되지 않는다. 백발 할머니들도 밭일하고 함께 놀며 젊은이들을 여러모로 가르치신다. 생명 소외가 구조화 된 곳에서 노인은 불필요한 존재로 외면당하지만, 더불어 사는 마을에서 노인은 마을이 살아온 역사와 지혜를 품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청년실업과 조기퇴직, 중독과 우울 등 우리시대 중요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불어 사는 마을공동체 삶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명을 상품으로 대하고 효율과 경쟁을 기본 처세로 삼게 하는 구조와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밝은 누리’로 더불어 살며 깨닫는 것은 아무리 연약한 존재라도 이미 늘 다른 생명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깨닫고 공유하는 만큼 감격과 활력이 넘친다. 더불어 사는 삶은 연약한 생명이 행복한 만큼 행복한 거다. 가난하고 애통한 자에게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노자는 쓰임이 존재를 결정하지만, 비어있음이 그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같은 깨달음 속에 있으리라.
최철호(밝은누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