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과 푸시킨
*왼쪽부터 백석과 푸시킨. (백석 이미지 출처: 대산문화재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앞날에 살고/ 지금은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백석 역)
인생이란 제목으로 익숙한 푸시킨의 이 시는 단순한 인생 격언이 아니다. 시인의 나이 26살에 씌어졌다. 1825년은 푸시킨이 남러시아의 유배지에서 가족 영지로 이배된 이듬해로 데카브리스트(12월혁명당) 반란이 벌어진 해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농노 6000명당 귀족 1명이라는 사회 모순에 불만이 팽배했고, 급기야 봉기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반란을 주체한 다수는 20대들이었고 순진했다. 겨울궁전 앞에서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 개혁안을 낭독한 게 거사의 전부였다. 이렇게라도 시작하면 불길처럼 호응하리라 기대했지만 기민하고 노회하게 대응한 것은 황제의 비밀경찰과 친위대였다. 가담자들은 엄동설한에 줄줄이 엮여 종신노역의 시베리아 광산에 보내졌다.
푸시킨은 이 반란의 주동자 몇몇과 서신 교환을 한 것이 전부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러나 모의를 사전에 알았느냐는 황제의 추궁에는 러시아인이면 누구나 알았을 것이고, 수도에 있었다면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자기도 상원광장에 나갔을 것이라 대답했다.
이 시가 널리 읽히게 된 데는 시인 백석의 공로가 컸다. 그는 이 시를 러시아어로 수백번 암송한 뒤 번역했다. 푸시킨의 대표작이 아니라 백석 개인이 특별히 사랑한 시였던 것이다. 백석은 1949년과 55년 푸시킨 시 번역집을 냈는데 두번째 선집에는 이 시가 누락돼 있다.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북한 정권하에서 이 시 역시 불온했기 때문이었을까.
푸시킨이 국민시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러시아 시의 정형률을 완성시켰다는 데 있다. 그는 시로써 러시아풍 우수의 맛을 세계에 알렸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열린 창’을 슬로건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면, 푸시킨은 그것을 자신의 시와 문필로써 구현했다. 그의 문학이 이후 러시아의 영감과 사상을 낳았으니 그는 가히 러시아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만하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음란한 프랑스 소설들을 탐독하고 여자들에게 바치는 시를 쓰던 낭만시인은 몇 편의 시가 비밀결사 팸플릿에 인용되어 추방을 당하면서 러시아의 역사와 자기 인생의 격랑에 말려들어간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거쳐 <대위의 딸>에 이르러서는 역사와 인간의 의미를 묻는 예언자적 경지에 이르렀으나 예의 여자(아내) 문제로 38살의 이른 나이에 결투로 죽고 만다.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보지 못했지만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시인, 백석이 자신의 시작의 모범으로 삼았던 러시아의 백과사전 푸시킨. <백석 평전>을 사놓고 다 읽지 못한 터에 마침 <뿌쉬낀 평전>이 나왔다. 두 시인의 ‘평전’이 국내에서 나오기도 처음이지만 두 시인의 운명과 오늘의 뻔뻔한 세월을 헤아려 보니, “지금은 언제나 슬픈 것”인가?
천정근 안양 자유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