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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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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 돈, 명예 버리고 떠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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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버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은수자 성녀가 된 남장 창녀


액자양태자11.jpg

*뤼카스 판팔켄보르흐의 그림 <강자의 은수자>는 마치 펠라기아가 남장을 한 채 은둔해 수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집트 사막에서 살았던 대표적인 은둔 수도자는 안토니우스(251~356)다. 그가 은수자가 된 동기는 참으로 단순하다. 성서 마르쿠스 10장 21절에 있는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에 깊은 감화를 받고서다. 이 후 그는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눠 줘 버리고선 텅 빈 손으로 홀로 사막으로 떠난다. 모범적인 은수자로서 살았던 그의 삶은 후에 많은 이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세기를 갈수록 안토니우스처럼 무소유로 살고자 하던 많은 이들이 줄을 이어서 사막으로 떠났다. 이런 이들 중에는 남장한 여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 한 예가 안티오키아(오늘날 터키) 출신의 펠라기아다. 원래 이름이 마르가리토였던 그는 가무를 즐기던 전직 고급 창녀였다. 빼어난 미모를 지녔던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을 몸에 감았고 늘 거만한 자태가 줄줄 흘러내렸다. 옷과 보석을 치렁치렁 걸친 그는 당나귀를 탄 채 주교의 설교를 듣곤 했다. 그가 대중들 앞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짙은 향수 냄새 때문에 코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은수자였던 유명한 논노스 주교가 길거리에서 설교하던 어느 날이었다. 몸종까지 대동하고 당나귀를 탄 펠라기아는 교만 방자한 모습으로 이 거리 설교 장소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날 논노스 주교의 설교가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들어가 혼을 흔들었다. 이런 영적인 감회로 인해 그는 창녀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죄악감을 느낀다. 그는 깊은 묵상을 통해 자신의 환심을 사러 수많은 남정네들이 들고 온 그 값비싼 물건들이 물거품이요, 또한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은 미끼였다는 것까지도 감지하기에 이른다. 이런 영적인 감화에 젖어든 그는 먼저 가무와 창녀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먹은 뒤에 성당을 찾는다. 그는 성당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면서 많은 참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성당의 바닥이 축축해졌다고 한다. 이런 속죄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는 점점 더 성스러운 여인으로 변모해갔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막으로 떠난 이집트의 은수자,
안토니우스의 뒤를 이은
창녀 펠라기아의 놀라운 변화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출신 카스티시마
교황 자리마저 버린 안겔아이
그들의 버림에서 얻은 삶의 변화들


그가 어느 날 논노스 주교에게 알현을 청했을 때 주교는 공개석상에서만 만나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의 특출한 미모 때문에 이 신심이 깊고 경건했던 주교도 그에게 유혹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드디어 논노스 주교를 만난 그는 창녀로서 뭇 남자들을 유혹하면서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참회의 몸짓으로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가 새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자 사제들도 함께 감화의 눈물을 흘렸다. 주교가 자신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그는 즉시 그 자리에서 성사를 청했다. 하지만 주교는 먼저 그가 옛 생활을 청산했다는 증인이 필요하다는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교리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지금 당장 성사를 달라고 단호하게 청하면서 회개 자체가 중요하지 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이 주장에 공감한 논노스 주교는 즉시 성사를 베풀었다. 눈부신 미모로 뭇 남자를 주물렀던 한 창녀가 다시 새 삶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옛 이름을 버리고 펠라기아로 영세를 받았다. 사실 논노스 주교는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의심 덩어리를 다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혹시나 이 여인이 어쩌다 순간적으로 회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주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줘 버렸다. 마치 입안에 든 껌을 뱉어내듯이 소유한 재산을 다 내뱉어 버리고 나서 비워진 내적 공간에다 영적인 보화를 채워 넣었다.


그의 온전한 관심은 오직 ‘예수의 새 신부가 되어 그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영혼이 오직 예수를 신랑으로 모신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기쁨에 도취되고 싶다는 갈망이 전부였다. 이런 성사 절차를 통해 드디어 ‘예수의 신부’가 되었던 그는 야밤에 홀연히 어디론가로 떠나 버렸다.
이렇게 안티오키아를 떠나온 그는 이젠 남장을 했다. 이름도 남자처럼 펠라기우스라고 한 그는 예루살렘 부근의 올리브 산에 토굴을 짓고선 깊은 고독 속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채워 나갔다. 이렇게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속죄의 길로 들어섰다. 많은 단식과 금욕과 고행을 하다 보니 그의 옛 미모도 점점 더 바래져갔다. 그런데 그의 휑한 눈과 얼굴에서는 충만된 영적인 빛이 발광되었다. 스스로도 기쁜 나머지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그러자 이 남장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젠 더 이상 혼자만의 충만감에 빠질 수 없자, 그는 주어진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찾아온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는가 하면, 때론 사람들과 더불어 지칠 줄 모르는 기도, 침묵, 고행 속에서 머물렀다.
이런 생활을 하던 그는 457년에 생을 마쳤다. 다들 남자로 알고 있었던 그의 성은 죽은 다음에야 들통났다. 장례식을 준비하던 한 수도승이 남장한 여성 은수자임을 밝혔던 것이다. 이 후 교회는 그의 삶을 높이 치하하면서 성인으로까지 선포했다. 그의 기념일은 10월8일이다. 지금 서구에서는 특히 코미디언들과 배우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액자양태자2.jpg

*고대 펠라기아 성녀의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피에루아 질의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에서 그 미모, 회심 후 성결의 이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유사한 삶을 살다가 떠난 또 한 여인이 있다. 이름이 카스티시마인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최고의 귀족 출신에다 그야말로 특출 난 미모를 겸비했다. 부모가 한 귀족 아들과 혼사를 정하자 그는 바로 홀연히 고향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버린다. 부와 명예와 안락을 보장하는 삶보다는 고독과 침묵 속에서 오직 신과 더불어 사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터라,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남장을 한 그는 남자 수도원에 들어가 좀 살다가, 다시 홀로인 은수자의 삶을 택한다. 눈앞에 놓인 부귀영화를 꽃다운 18살의 나이에 다 놓아버린 그는 이제 수도원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더 큰 침묵과 고독 속에서 신의 경지와의 합일을 위하여 홀로 은수자로 떠났다. 이런 그의 삶의 광채는 펠라기아 못지않았다.


유사한 길을 걸었던 다른 한 사람도 마저 보자. 피에트로 안겔아이라는 교황이다. 그는 베네딕도 수도승으로 수도원까지 세운다. 하지만 1286년 원장 자리도 다 놓아버리고 다시 산속의 은수자로 돌아간다. 이런 그가 1294년 교황 쾰레스틴 5세로 당선되었지만, 몇 달 후에 스스로 교황 모자를 벗어던지고 사퇴하며 이 말을 남겼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도 구원을 못하는데, 어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안토니우스 성인과 펠라기아 성녀를 이어 물질적인 것을 뒤로하고 영적인 경지를 추구했던 카스티시마, 안겔아이 교황처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야 어디 쉽겠는가. 더구나 욕망의 노예가 되어, 내 것이라면 동전 한닢도 내놓지 않고 쥐고 쌓으려고만 하는 현대인들이 말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고결한 삶이 나를 온전히 녹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 부분에라도 스며든다면 각자 자기 몫을 조금씩 떼어 나누고, 더 타인을 배려하는 실천 정도는 해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이라도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양태자 박사(<중세의 뒷골목 풍경>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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