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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와 명예 중 무엇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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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세속의 꿈, 영원의 빛 진정한 승리자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일월서의 세불아여. 공자 왈 락 오장사의.

 

 (양호가 말하기를) 해와 달이 흘러가듯이,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내 장차 벼슬길에 나설 것입니다.

-‘양화’편 1장  



 

 

 

  


1. 공자와 양호

공자는 위대한 교사였지만 그가 역사 속에서 불리길 원한 진정한 이름은 ‘위대한 건설자’였다.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상국가의 건설, 그것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어떤 사(士·선비)가 그런 꿈을 가졌다면 벼슬길은 필연의 선택일 터. 하지만 공자는 그 벼슬의 적기(適期)를 오히려 정치권 밖에서 교육에만 전념했다. 공자의 나이 대략 40대에서 50대 초반의 시기이다. 훗날 공자는 이 때를 ‘불혹’(不惑)이라 이름했다. ‘흔들림없는 마음’을 뜻하는 불혹은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유혹이 강렬했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고백이리라. 공자는 그 유혹이 넘실대는 연부역강(年富力强)의 시기를 물 속에 잠긴 용처럼 ‘탈정치의 정치’로 흘려 보냈다. ‘불혹’은 어쩌면 바로 이 회심의 ‘역(逆)선택’을 은유한 것인지 모른다.


  

공자와 같은 유사(儒士)① 출신으로 노나라 정권을 거머쥔 양호(陽虎·<논어>에 나오는 양화(陽貨)와 동일인물이다②)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일찌감치 권세가의 가신으로 들어가 출세를 거듭해 막후 정치의 실세로 올라섰다. 곡부의 젊은이들에게 양호는 성공한 사(士)의 표상이었다. 그는 ‘능력있는 후배’ 공자를 자기 밑에 두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공자도 양호를 기피했다. 왜였을까?


두 사람은 출신, 정치철학, 심지어 외모까지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한가지가 있었다. 비유컨대 도덕혁명가와 폭력혁명가의 차이 비슷한 것이었다. 공자가 이 유력한 실세의 끈질긴 유혹을 끝까지 참아낸 것은 바로 이 내밀한 차이를 깊이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래 이상주의자는 인내심이 강한 법. 권모와 술수로 얼룩진 정권에 가담해 ‘타락 당’하기 보다는 허명(虛名)의 욕망을 누르고 하대(下待)의 수모를 견디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즐기는(?) ‘삶의 방식’이다. 후대의 사가는 이 시절의 공자와 양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나라 정권을 잡은) 양호는 계씨를 더욱 하찮게 여겼다. 계씨도 제 분수를 알지 못하고 공실보다 지나치게 행동하였으므로 배신(陪臣·대부의 신하)들이 정권을 잡은 모습이 되었다. 이에 노나라는 대부와 그 가신들까지 모두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멋대로 굴었다. 이에 공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물러서서 <시>(詩) <서>(書) <예>(禮) <악>(樂) 등 전적을 편찬했다. 제자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져 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공자에게 학문을 배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사기> ‘공자세가’③

 

공자13.jpg

*영화 <공자 - 춘추전국시대> 중에서



역사가의 말처럼 ‘벼슬길에서 물러나’ 교사로 명성을 쌓던 공자가 마침내 벼슬길에 오른 것은 서기전 501년, 그의 나이 51살 때였다. 공자는 노나라 조정으로부터 중도(中都·노나라 공실 소유의 읍으로, 역대 제후 묘역을 관리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의 재(宰)라는 지방장관급 벼슬을 제안받고 이를 수락했다. 공자가 이때에 이르러 장관급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두가지 현실적인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나라 정치관행에서 사계급은 50살이 되어야 낮은 벼슬아치를 통솔할 수 있는 대부(大夫), 즉 장관급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④ 50살이 지난 공자의 나이와 그의 직책은 우연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카이즈카 시게키, <공자의 생애와 사상>) 공자가 만년에 자신의 인생 중 이 무렵을 지천명, 즉 ‘자기 운명을 자각한 나이’(五十而知天命)라고 술회한 것 역시 이 정치 입문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리링,<논어 세번 찢다>) 두번째는 ‘권력자’ 양호의 정치적 부침(浮沈)이다. 공자보다 4~5살 위인 양호는 공자가 47살 때인 서기전 505년 권력을 잡았고, 공자가 중도재의 벼슬을 받기 직전인 서기전 501년 노나라에서 추방됐다. 양호가 축출된 정치무대에 새로이 등장한 유사(儒士)가 공자였던 것이다. 이 ‘선수 교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양호는 공자의 전 생애에 걸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어쩌면 정치 역정에 관한 한 양호는 공자에게 있어서 ‘필생의 라이벌’이었는 지도 모른다.⑤ 양호는 어떻게 노나라 정치의 핵폭탄이 되었으며, 공자는 왜 끝까지 양호를 ‘가까이해서는 안될 경쟁자’로 여겼을까?


 

2. 양호, 노나라 정권을 차지하다

공자가 곡부에 돌아와 학당을 재건한지 4년째가 되던 서기전 505년 노나라 집정대신 계손의여(계평자)가 가읍을 순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무려 30년간 정권을 전단해온 최고권력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노나라 정국에 파란을 몰고왔다. 막부의 신구세력간에 권력암투가 시작됐다.

  “신주(新主)가 섰으니 마땅히 정치도 신주가 맡아야지.” 

  “후주(後主)는 아직 구상유취(口尙乳臭). 당분간은 경험많은 선주(先主)의 충신들이 정치를 맡는게 정권안보에도 유리하다.”

먼저 칼을 뽑은 쪽은 죽은 계평자의 총신 양호였다. 양호는 계평자를 매장할  때 임금만이 할 수 있는 장식품을 관에 함께 넣어 매장하려 했다. 이는 죽은 계평자의 권위를 임금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그 후광에 힘입어 가신들이 계속 실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거의 성공할 뻔한 이 계책은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양호, 공산불요(公山弗擾·공산불뉴라고도 한다)와 더불어 가신그룹의 핵심인물로 계평자의 장례를 주관하고 있던 대부 중량회(中梁懷)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아무리 선주가 위대하신 분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임금의 신하요. 7년의 공위(空位)시대에도 임금자리만큼은 넘보지 않으셨는데, 이제와서 참월의 오명을 안겨드리자는 말씀이오?”

이 논리적인 반대로 양호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양호는 호락호락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 그 해 가을 양호는 ‘눈엣가시’ 중량회를 비리 혐의를 걸어 체포해 버린다. 가신들간의 세력다툼에 위기를 느낀 계씨 일족이 은밀하게 양호 제거에 나섰지만 오히려 양호에게 제압 당한다. 양호는 계평자의 아들 계손사(季孫斯·계환자의 이름)를 곡부의 성문앞에 나오게 한 뒤 아버지 계평자의 위패 앞에 맹세를 시켰다. 양호에게 섭정을 받겠다는 서약식이나 다름없었다.  


 

계씨 막부를 한 손에 틀어쥔 양호는 자신의 권력을 패권국인 진(晉)나라로부터 추인받고자 했다. 양호는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 광(匡)땅을 빼앗아(훗날 공자가 광 땅을 지날 때 양호로 오인받아 곤경을 겪는 것은 이 사건에서 비롯됐다)  그 전리품과 포로를 진정공의 부인에게 선물로 바쳤다. 뇌물공세로 진나라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자 양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양호는 임금인 노정공과 계손, 숙손, 맹손씨 등 삼환(三桓)의 모든  귀족들을 주공의 사당에 모아놓고 자신들의 가신에 불과했던 양호 정권에 사실상의 충성서약을 바치도록 했다. 양호 자신은 곡부의 오보지구(五父之衢·큰 거리 이름)에서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나라 수호신들에게 제사를 바쳤다. 상하인민에게 자신이 노나라 실세가 되었음을 공표한 것이다. 이후 양호는 제나라로부터 돌려받은 운과 양관 두 지역을 직접 수비한다는 명분으로 독차지한 다음, 그곳에 자신의 막부를 설치하고 노나라 국정을 주지(主持)했다.(<좌전> 노정공7년조) 이로써 주왕실의 적통 제후국이자 중국 제일의 문명국을 자부해온 노나라가 일개 대부의 가신 손에 들어갔다. 서기전 505년부터 503년, 공자 나이 47~49살 사이에 일어났던 노나라 초유의 사변이었다.

   “정권이 대부(삼환)의 수중에 들어간 지 4대째. 마침내 그 세력이 다하려나 보다…(政逮於大夫 四世矣 故夫三桓之子孫微矣-‘계씨’편 3장⑥)
어록에는 감회만 남아있지만, 그때 공자는 이 정치적 대격변을 목격하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3. 길에서 마주친 두사람

막부를 비롯해 독자적인 영지와 민심을 어느 정도 확보하자 양호는 감춰두웠던 야망을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양호의 본색은 일종의 계급혁명가. “임금이 현명하면 정성으로 섬기겠지만, 임금이 신통찮으면 교묘한 수단으로 그 자격을 시험해 볼 것”(主賢明 則悉心以事之 不肖 則飾姦而試之-<한비자> ‘외저설 좌하’편)을 공언한 사람이다. 양호는 계씨 집안이 형제간 불화까지 겹쳐 더욱 민심을 잃어가자, 이 틈을 이용해 삼환씨 3가를 모두 타도해 버리기로 결심한다. ‘군주에겐 삼환에게 빼앗긴 정권을, 백성들에겐 삼환이 독차지해 온 재부를 돌려준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면 상하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따라서 그가 수립할 새 정권은 기존의 삼환파가 아닌 참신하고 능력있는 새로운 인물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양호는 이 때를 위해 강호의 재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공자는 그 영입 대상 중에서도 일순위의 사람이었다. 양호가 공자를 만나 시문(詩文)같은 문답으로 자신의 진영에 들어오기를 권한 유명한 일화는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권력과 재물 앞에 장사없는 법. 중니가 나를 소인배처럼 경원한다지만, 내가 확실한 일인자임을 수긍하면 결국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양호는 공자가 집에 없는 날을 골라  삶은 돼지 한마리를 선물로 보냈다. 윗사람이 보낸 선물을 직접 받지 못하면 반드시 다시 찾아가 사례하는 예법을 이용해 공자의 답례방문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양호의 의도를 모를리 없는 공자 역시 양호가 집에 없는 틈을 타 답례 형식을 마칠 참이었다. 그렇게 급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군가가 공자를 막아섰다.


 “중니 나으리, 저와 같이 가십시다. 우리 주인께서 저쪽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자는 난감했지만 피할 도리가 없었다. 역시 이런 일은 양호가 한 수 위였다.

   “이리로 올라 오시오. 중니”

 양호가 손을 내밀어 공자를 자기 수레에 태워 나란히 앉았다.

 “지난번 보낸 돼지는 잘 드셨소?  예를 아는 중니께서 답례를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허허.”

 양호가 자세를 고쳐앉고 말한다.

 “중니에게 하나 묻겠소. 여기에 웅혼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대장부가 있다고 합시다. 만약 그의 나라가 도탄에 빠졌는데도 가만히 있는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겠소?”(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질문의 의도는 뻔했지만, 그렇다고 부인하기도 어려운 논리였다. 

 “그럴 수 없겠지요.”(曰 不可)

 “한 훌륭한 선비가 늘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라면서도, 출사할 때를 자꾸 놓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소?”(好從事而기(자주 기)失時 可謂知乎)

 “…할 수 없겠지요.” (曰 不可)

   양호가 공자의 손을 끌어당겨 잡고 말한다.

 “그대가 제나라에서 돌아온 이래 내가 종종 정치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그대는 번번히 사양하였소. 나는 그 사양하는 취지를 잘 알고 있기에 그동안 참고 기다려왔소. 그러나 이제는 때가 무르익었소.”

 그러면서 시를 읊듯이 말한다.

 “저 하늘의 해와 달이 흘러가듯이,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오.”(日月逝矣 歲不我與)

 이미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는 이상, 더이상 에두르는 것은 무의미했다. 공자가 대답한다.

 “알았습니다, 대부의 말씀. 이 구(丘)도 선비의 한 사람, 때가 되면 벼슬길에 나갈 것입니다.”(曰 諾 吾將仕矣) -이상 ‘양화’편 1장⑦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실제로는 동상이몽에 더 가까웠다- 대화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양호의 요청을 받아 그의 정권에 가담했다고 볼만한 기록이나 정황은 없다. 또 공자가 어떤 방식으로 양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 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공자는 어쩌면 이 무렵 양호에게 찬탈의 기운을 느끼고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해 어떤 핑계를 만들어 아예 지방여행을 떠나버렸는 지 모른다. 아니면 공자가 이러저런 이유를 만들어 시간을 끄는 사이에 양호는 자신의 시간표대로 ‘거사’에 나섰는 지도 모르겠다. 양호가 삼환을 타도하고 명실상부한 ‘양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돌입한 것은 그가 계씨 막부를 장악한 지 3년째 되는 서기전 502년, 공자가 50살이던 해였다.

 


공자2.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4. 양호의 몰락

양호는 이웃하고 있는 강대국 제나라의 은밀한 배후지원 아래 삼환씨 내부의 불만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계환자와 불화 중인 동생 계오에게는 형의 자리를, 숙손씨의 서자인 숙손첩에게는 가문의 수장 자리를 약속했다. 맹손 가문은 양호 자신이 차지하기로 했다.(양호의 집안은 본래 맹손의 몰락한 일족이었다는 설이 있다) 양호는 이렇게 삼환의 실세를 교체한 뒤 때를 보아 나머지 2가를 폐하여 종국적으로는 자신의 단독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서기전 502년 노정공 8년 10월 3일. 양호는 계환자를 비롯한 주요 일족을 연회에 초대해 척살하고, 전차부대를 동원해 계손부와 숙손부를 점령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이 전차부대의 출동명령이 맹손씨 본읍의 재(宰)이자 책사인 공렴처보(公斂處父)의 첩보망에 걸려든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양호의 부대가 선두에 서서 연회장으로 떠나고, 계환자를 태운 수레는 양호의 사촌동생 양월의 군대가 호송해 가고 있었다. 주군을 호종하는 것이 아니라 연행해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환자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계환자가 수레를 모는 마부 임초(林楚)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대는 대대로 우리집안 사람. 충직했던 조상들처럼 너도 나를 도와다오.”

  “각하. 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워낙 경비가 삼엄해 성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너의 충성을 잊지 않겠다. 나를 맹손부 앞까지만이라도 데려다 다오.”

이때 맹손부 앞에는 맹의자(孟懿子·맹손씨의 수장. 공자에게 학문을 배운 바 있다)의 가병 3백명이 인부로 위장한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행렬이 대로에 들어서자 맹손부 성루가 시야에 나타났다. 이때 임초가 일부러 채찍을 떨어뜨려 호위병들의 시선이 분산되는 틈을 노려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놀란 양월이 질주하는 수레를 향해 활을 쏘았으나 오히려 맹손부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양호쪽으로 기우는가 싶을 때, 공렴처보의 지원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양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궁성으로 들어가 노나라 군주권을 상징하는 보옥(寶玉)과 대궁(大弓)을 탈취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양관으로 퇴각했다. 승기를 잡은 공렴처보는 이 기회에 반란자 양호와 반란을 야기한 책임을 물어 계환자를 모두 처단하고 맹손부가 삼환의 정권을 인수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맹의자는 삼환 중 가장 약세인 맹손 가문의 힘만으로 노나라 정권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데다, 종국엔 공렴처보가 양호가 비워두고 간 ‘늑대의 자리’를 대신할 뿐임을 간파하고 이를 묵살해버렸다.

 

양호의 반란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삼환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견디지 못한 양호는 보옥과 대궁을 조정에 돌려주고 강화를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나라로 달아났다. 거기서 양호는 제경공에게 노나라 병탄을 거듭해 부추겼다. 양호를 중용하여 강력한 귀족세력를 견제하고 싶던 제경공도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양호의 노나라 정벌론은 제나라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

 "양호는 자기 주군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한 자입니다. 오히려 체포해 벌을 주어야 할 난신적자가 아닙니까!"

제나라 호족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귀족 사냥꾼’ 양호야말로 턱밑까지 들어온 비수였다. 결국 양호는 옷감운반 수레에 숨어 제나라 수도 임치를 탈출해 송나라로 갔다가 거기서도 신변의 위기가 계속되자 진(晉)나라로 달아나 권신 조앙(조간자의 이름)의 가신이 되었다.  (<좌전> 노정공 9년)

 

6. 누가 성공한 혁명가인가

양호는 춘추말기 계급변동의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낮은 계급 출신으로  상위의 지배계급을 정략과 무력으로 타도하려 했다. 노나라에서 실패하자 제나라와 송나라에서 다시 변란을 시도했고, 최종적으로는 조나라 실력자의 책사가 되어 거대한 패권국의 정치를 한 손에 주물렀다. 당시 권력자들이 양호의 어떤 점을 높이 샀는 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간자는 양호가 망명을 오자 그를 재상에 기용했다. 측근들이 깜짝 놀라 “양호는 정권을 훔치는 데 선수”라며 만류하자 조간자는 “그는 (다른 정권을) 빼앗아 나에게 주려 애쓰면 되고, 나는 (내 정권을) 지키려 애쓰면 된다”(陽虎務取之 我務守之-<한비자> ‘외저설 좌하’편)고 말한다. 약육강식 시대의 패권자들에게 양호는 ‘혁명가’가 아니라  단지 ‘정치 기술자’였던 것이다.


 

사실 공자나 양호나 기본적인 정치철학은 비슷했다. 특히 백성의 안위와 관계되는 정치적 지위를 귀족들이 세습하는 것을 반대했다.⑧ 두 사람 모두 ‘군주를 정점으로 한 현인 정치’를 이상적인 통치 제도(이것이 정치적 의미의 예(禮)이다)로 보고 이 시스템에 실력을 갖춘 사계급을 진출시키고자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점차 세습제를 소멸시켜 일종의 ’계급교체’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양호가 자신과 비슷한 정치사상을 품은 공자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태의 흐름⑨”이었다.


다만 양호가 공자와 달랐던 점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에 기울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양호의 혁명론은 결정적으로 순수성을 상실했다. 양호는 삼환 타도의 대가로 맹손씨의 재산과 군대를 자신이 차지하려 했다. 혁명의 결과를 사유화하려 한 것이다. 혁명의 중간단계였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혁명이란 명분은 가증스런 탐욕을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할 뿐’이란 기득권층의 선전에 증거 하나를 보탤뿐이었다. “계급타파란 결국 도둑질일 뿐이다. 백성들이여, 도(盜)에게 속지마라 !”  민중에 대한 지배층의 이 세뇌는 시대를 초월해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 양호와 같은 도덕부재 혁명론자들이 수천년을 되풀이해 온 최대의 해악이었다.

 

양호는 조간자의 충실한 ‘정치기술자’ 역할을 하며 영화로운 말년을 보냈다. 공자의 70평생은 누가봐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큰 꿈이어서 결코 실현불가능할 것 같던 공자의 정치노선은 그가 ‘패배자’로 죽은 지 2백수십여년 뒤에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의해 마침내 제도화(군현제 실시 등 봉건세습제 혁파, 한나라의 유교화, 수·당의 과거제 실시 등)의 길로 들어섰다.

공자는 양호처럼 권력을 얻지도 못했고, “이상주의자들에게 권력의 희망을 부여하지도 못했다. 대신 공자는 그들에게 권력보다 영구적인 힘을 가진 ‘군자’라는 이름의 자부심을 가슴에 심어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붓과 책을 창과 방패대신 주었으며, 인류애란 명분으로 인류애를 위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용감하게 나아가 권좌에 앉아 있는 강자를 대체하라는 사명을 부여했다. 공자가 죽었을 때는 공자 자신도 이와같은 ‘사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⑩ 그러나 이  ‘영구혁명’처럼 보였던 “혁명방식은 비록 오랜 시간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수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한번 완성되자 수천년 동안 면면히 이어지며⑪” 한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유사(儒士)는 사계급 중에서 ‘지식을 가르치고 예식을 보좌하는 일’(敎書相禮)을 업으로 삼는 직군(職群)을 말한다. 사(士)는 서민과 귀족의 중간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전통적으로 귀족에 고용되었거나, 귀족계급이 몰락하여 종사하게 된 계층으로 크게 문사와 무사로 나눠볼 수 있다. 유사는 대표적인 문사이며, 전쟁과 사냥에 종사하는 무사(武士)에 비해 지식을 무기로 점차 무사보다 지위가 향상됐다.(풍우란, <중국철학사>)

 

 ②양호와 양화를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필자는 다수설에 따라 동일인물로 간주한다.

 

 ③ 김원중 역

 

 ④ 당시 노나라에서 50대에 이른 사는 ‘애(艾)서열’에 해당하며, 40대는 낮은 벼슬을 할 수 있는 서열로 ‘강’(强)이라고 하였다.(카이즈카 시게키, <공자의 생애와 사상>)

 

 ⑤ 시라카와 시즈카, <공자전>

 

   ⑥ 계씨편 3장

 孔子曰 祿之去公室 五世矣 政逮於大夫 四世矣. 故 夫三桓之子孫微矣.(공자왈 록지거공실 오세의 정체어대부 사세의 고 부삼환지자손미의)

 이-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국록이 공실을 떠난지가 5대가 되고, 정사가 대부에게 맡겨진 지가 4대가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삼환의 자손들이 미약해진 것이다.”

 배-공자 말씀하시다. 경제권이 공실에서 떠난 지 5대요, 정권이 대부에 머문 지 4대가 되었다. 그러니 저 삼환씨의 자손들이 미약한 것이다.

 **공실 5세란, 노나라 정권이 계씨에게 넘어가기 시작한 선공으로부터 성공, 양공, 소공과 현재 임금인 정공에 이르는 5대를 말한다. 대부 4세란 계씨 집안을 일으킨 계문자로부터 계무자, 계무자의 손자인 계평자와 그의 아들 계환자 4 대를 일컬은다.

 L- Confucius said, “The revenue of the state has left the ducal House now for five generations. The government has been in the hands of the Great officers for four generations. On this account, the descendants of the three Hwan are much reduced.”

 

 ⑦ 양화편 1장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양화욕견공자 공자불견 귀공자돈 공자시기망야 이왕배지 우제도. 위공자왈 래 여여이언 왈)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기(자주 기)失時 可謂知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회기보이미기방 가위인호. 왈 불가. 호종사이기실시 가위지호. 왈 불가. 일월서의 세불아여. 공자왈 락 오장사의.)

 이-양화가 공자를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 만나주지 않으니 공자에게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내었기에, 공자께서도 양화가 집에 없는 때에 가서 사례하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양화가 공자에게 말하였다. “이리 오시오. 내 그대에게 할말이 있소. 귀중한 포부를 품에 간직하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버려두는 것이 인인(仁人)의 할 일이라고 일컬을 수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였다.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화가 말하였다. “국사를 다스리기를 좋아하면서도 자주 시기를 놓치는 것이 지자(知者)의 할 일이라고 일컬을 수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였다.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화가 말하였다. “해와 달은 빨리 가서 세월은 우리를 위하여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공자께서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장차 (기회를 보아) 벼슬을 할 것입니다.”

 배-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하였다.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공자에게 돼지를 보냈다. 공자는 그가 없는 때를 타서 사례를 하러 가던 차에, 길에서 만나버렸다. (양화가) 공자에게 일러 말하였다. 오시죠 내, 당신과 할말이 있소이다. 보배를 품고서도 그 나라를 혼미하게 버려두는 것을 인이라고 이를 수 있소이까? (공자)말씀하시다. 아니외다. 허면, 종사(從事)하길 좋아한다면서 자주 때를 잃는 것을 지(知)라 이를 수 있소이까? 말씀하시다. 아니외다. 날과 달은 흘러가고, 해는 나와 더불지 아니하는데… 공자 말씀하시다. 좋소이다. 내 장차 벼슬하리다.

   L-Yang Ho wished to see Confucius, but Confucius would not go to see him. On this, he sent a present of a pig to Confucius, who, having chosen a time when Ho was not at home, went to pay his respects for the gift. He met him, however, on the way. Ho said to Confucius, “Come, let me speak with you.” He then asked, “Can he be called benevolent who keeps his jewel in his bosom, and leaves his country to confusion?” Confucius replied, “No.” “Can he be called wise, who is anxious to be engaged in public employment, and yet is constantly losing the opportunity of being so?” Confucius again said, “No.” “The days and months are passing away; the years do not wait for us.” Confucius said, “Right; I will go into office.”

 

 ⑧ 후대 유가들이 정통으로 치는 춘추주석서인 <공양전>에서는 조정의 상대부 벼슬인 경(卿)의 지위를 세습하는 것은 예, 즉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라고 선언했다.(世卿非禮也)

 

   ⑨ 카이즈카 시게키, <공자의 생애와 사상>

 

 ⑩ H.G. 크릴, <공자, 인간과 신화>)

 

 ⑪ 신동준,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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