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에 평사제에게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하는 프란치스코교황 사진 <AP뉴시스>
교황의 무류성을 떠올리지 않고서라도 죄를 짓는 '신의 지상 대리인'은 참으로 생경하다. 작년 이맘쯤(2013년 3월 28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여느 신자처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사제에게 고개 숙여 자신의 죄를 고해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 2009년 봄(4월 28일), 이탈리아 중부의 유서 깊은 중세 도시 아퀼라(Aquila)에서도 이와 닮은 장면이 펼쳐졌다. 그날,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노구를 굽혀 자신의 선임자 중 한명이었던 첼레스티노 5세(재위 1294년 8월~12월)의 무덤위에 보편교회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팔리움(Pallium)을 내려놓았다.
이 이례적 장면들은 각국 언론을 통해 하나같이 겸양의 표양으로 타전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높은 권좌에서 친히 땅으로 내려오는 권력의 '황송한'겸손과는 달랐다. 베네딕도 16세는 몇 해 전 찾았던 무덤의 주인처럼 실제로 교황직을 사임했고(2013년 2월 11일), 지금의 교황 역시 얼마 전 자신의 재위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 밝히며 전임자와 같은 사임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한번쯤 머리 숙이는 권력의 퍼포먼스에 익숙한 우리에게 '종신의 힘'을 '실제로'내려놓는 모습은 겸손 그 이상을 떠올린다. 바로 위로다.
기독교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절기로 공교롭게도 이번 주 내내 이어지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수난주간'은 저 이례적 장면들보다 더 날것의 상징들로 가득 차있다. "여느 사람처럼"(필리피 2,6) 지상에 내려와 더 이상 빼앗길 것조차 없는 죄인으로, "벌받은 자,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이사야 53,4)로 죽고, 죽은 다음에도 죽음의 맨 밑바닥, 버림받은 이들을 어깨에 들쳐 메고 올라오려 쉬지 않고 그 길로 내쳐 어둠의 무저갱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까지, 시종일관 '아래로 내려가는'상징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인간에 관해 결코 재판정의 제삼자적 증인일 수 없는, '인간'
이라는 저 맨 밑바닥의 '사건'을 처음부터 끝가지 겪은 당사자이다. "사람의 아들"(마태오 18,0)은 따라서 이 "우러러볼 풍채도 위엄도 없는"(이사야 53,2) 주인공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 하느님다운 이름이다.
무엇보다 이 서사의 가장 빛나는 대목은 여느 사람처럼 '힘을 뺀 하느님'이다. 이 '힘을 뺀 하느님'으로 가장 격정적인 한 주의 드라마는 신의 고난에 참여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이야기로 변모한다. 통곡이 아닌 위로며 고통이 아닌 위안이다. 나와 같이, 여느 사람처럼 오늘의 곡절을 함께하는 동행, 힘을 뺀 하느님. 이보다 눈물겹고, 두근거리고, 든든하고, 빛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고 보면 작년 이맘쯤 남녘 바다의 생죽음들을 속수무책 지켜본 이후 우리가 줄곧 기다린 것은 진짜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팔복더위 광화문 네거리, 길을 멈춘 무개차에서 뻗어준 이역만리에서 온 잠시의 위로가 아닌,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겪은 살아남은 자의 위로, 동고동락의 눈물, 진심의 동행 말이다. 우리가 여전히 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