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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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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두 장과 36년만에 만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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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두 장 


지난 이른 봄, 인도산 독감으로 수업료를 단단히 냈다. 너무 오래 누워 있자니 별의 별 생각이 일어난다. 이대로 노인이 되어 가버리는가? 이러다간 산행도 어려워질 게 뻔하지 않은가? 몸을 추스르고자 생각해 낸 게 힘든 산행을 한 달 넘는 강행군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마침 군 전역을 하고 바로 일본 시코쿠 섬 '88개 사찰 도보 순례'를 한다는 롭쌍군과 함께 하기로 했다. 이 순례길은 일본 역사에 빛이 되는 홍법대사의 구도 고행길이며, 일본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으며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 중인 문화적으로도 빼어난 멋진 순례길이다. 유럽의 '산티아고'순례길과 함께 세계적인 도보 종교순례길로 이름나 있다.


일단 한국으로 나가 40일 정도의 걷기 훈련에 도전해, 쉽게 부산에서 배로 후쿠오카로 갔다. 비용도 아끼며 순례하기로 하다보니 짐이 보통이 아니었다. 배낭에 먹거리로 짬빠(미숫가루)부터 라닥산 살구며 히말라야 꿀 등등, 거기에 노숙도 한다며 매트리스와 옷가지가 20㎏은 되니 보통 짐이 아니다. 하루 약 30㎞ 정도를 걷는 계산이 나왔다. 힘든 걸음, 도보 산행이 환갑 진갑 다 지난 내 나이에 무리던지 8일째 오른쪽 발꿈치에 이상이 왔다. 힘줄이 댕겨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내심 함께 가는 젊은 놈에게 질 수 없다며 있는 힘을 다했지만 점점 힘들어졌다. 지방병원에 갔더니 무리한 걸음과 무거운 짐이 이런 이상 현상을 빚었다며 일단 쉬란다. 닷새 동안 쉬며 그래도 사찰 참배를 고집스럽게 해내다보니 26번 사찰 금강정사 까지는 순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젠 한계가 왔다. 더 이상 고집 피우며 걸을 수가 없어 순례를 포기하고 보름 남짓 순례길에서 그냥 한국으로 나와 버렸으니. 정말 내 산행 역사에 없는 자존심 팍 상하는 꼴이었다. 가던 길을 중도 하차하다니! 긴긴 인생길을 이런 식으로 마친다면? 후에 롭쌍군은 88번 사찰 대와사까지 마친 후 예정대로 돌아왔다.

 


* 순례 사흘째 부터 동행이 된 길동무: 교토에 산다는 유우끼와 프랑스 리용에 사는 삐에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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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 보다 한 달 일찍 들어와 버리니 남는 게 시간이다. 이왕 이리 되었으니 한국에서 초파일까지 보내고 잘 먹고 잘 쉬다가 인도로 돌아온 세월이 되었다. 고국에서 초파일 보낸 게 28년만에 처음이니 의미도 있었다. 밥 끼니마다에 반찬이 많은데 거의 김이 밥상에 올라왔다. 김이 흔하기도 하다. 홀연히 그 옛날 김을 아끼며 먹던 한 사건이 생각난다. 사연은 이렇다.

 
36년 전이다. 1979년 10월로 기억된다. 어찌된 인연으로 부안의 월명암에서 몇 스님들과 살게 되었다. 노스님으로 월인 선사와 당시 선객으로 쟁쟁한 초삼 스님, 종안 스님, 원효 스님과 함께 정진하는데 나야 그 땐 초참납자로 당연히 밥짖는 공양주 소임이었다. 먹을 게 귀한 때이기도 했지만 당시 암자 사정이 녹록치 않은 시절이었다. 아침은 멀건 죽이다. 그래도 간장 한 종지와 김치 한 보시기로 죽을 맛나게 먹었는데, 거기에 마른 맨김 한 장이 참 요긴했다. 이 김은 월인 노스님께서 손수 보관하며 아침 때에만 한 장씩 돌아가며 죽에 찢어 넣어 먹었다. 한 장씩 돌린 뒤엔 으레 당신이 남은 김은 따로 보관하였다. 그만큼 귀한 김이기도 했다.


그리 살고 있는데 하루는 한 젊은 객승이 왔다. 이튿날 아침 공양 시간, 죽을 빙 돌리고는 김 한 장을 각자 죽 바릿대에 찢어 넣는다. 두어 숟갈이나 들었을까, 갑자기 월인 노스님의 나무라시는 불호령이란! “아니, 저 놈 봐라! 저 놈! 대중이 한 장씩 먹는데 너만 두 장이냐!” 영문도 모르고 노스님 존안만 쳐다볼 수밖에. 알고 보니 어제 온 객승이 살며시 김 두 장을 자기 죽 발우에 찢어 넣는 것을 노스님이 알아차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에 넣어버린 걸 어떻게 할 건가. 노스님께서 다시 김 다발을 돌리며 하시는 말씀이라니, “저 놈 복 감하지 않도록 우리도 오늘 아침엔 김 두 장이요. 혼자서만 대중 먹는 걸 더 먹는다면 수행자로써 얼마나 부끄럽고 복 감할 일인가. 자 한 장씩 더 찢어 넣읍시다”하시니 그 날 아침엔 두 장의 김을 먹을 수 있었다.


자 지금은 어떤가? 승가 즉, 절 집안이 배가 부르게 되면서, 즉 부가 쌓이면서부터 수행은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정신세계에서는 춥고 배 고픈데서 도(영성)가 있다는 게 만고 진리 아닌가. 한참 때 지난 일이지만 지금 밥상에 흔하디 흔한 까만 김을 볼 때면 그 옛날 김 두 장이 떠오른다.

 
이젠 공양 지어 올리던 그 시절이 꿈속이다. 스님들도 다 입적하신지 오래다. 그런데 그 중 한 노스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니!

송광사에서 멀지 않은 태안사의 한 암자에서 일종식을 하시며 정진하고 계신 스님이 계시었으니 바로 화엄사의 종안 노스님이다. 송광사에서 일부러 맘 먹고 찾아갔다. 구십 둘 연세에도 혼자서 손수 끼니를 해 드시며 허리 하나 굽지 않은 모습에 눈물이 난다. 정정하심에 내심 놀랐다. 이런 것이 청정 비구의 수행력 아닌가! 생각해보니 삼십오륙 년 전에 헤어졌는데 과연 나를 알아보실까? 기억이나 하실까? 이건 기우에 불과했다. 손을 꼬옥 잡아주시며 외국 나가 공부한다더니 나를 찾아왔느냐며 바로 알아보시며 반기신다. 아 이 얼마만인가요! 말씀을 듣자하니 이젠 나이도 들어 지난 동안거가 끝나면서 죽음을 준비한다며 15일간 단식을 하셨단다. 그래도 안 죽어 이리 또 밥 한 끼니 씩 챙겨 드시며 정진하신다고.

 

*35년만에 만난 종안 노스님과 얘기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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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안 노스님의 건강을 빕니다. 공주가 고향이시라 지금도 말투엔 변함 없는 충청도 사투리가 말씀 마디마디에 배어나온다. 까만 맨김 한 톳이라도 챙겨가지 못하고 빈손으로 갔지만, 그 옛날 선방 해제하면 당신 좋아하시는 뭔가를 챙겨 사들고 찾은 세월이 고스란히 기억된다. 아 무상한 세월, 내 또 다시 뵐 날이 올까?  먼 훗날 노스님께서 입적 하신 후, 당신 지리산 묘향대 토굴 7년째에 일어난 눈물로 가슴이 여미는 사건(?)을 글로 써볼까 한다.

그리고 한국 땅에서는 귀하지 않은 김이 인도에서는 그냥 김이 아닌 금(金)이기도 하다. 필자는 무슨 복으로 때가 되면 여수에서 새 김을 꼭 챙겨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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