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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하느님이다, 사랑이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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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궁궐과 동굴에 갇힌 종교를 넘어서

 

2013.06.06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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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거사가 말했다. “중생(衆生)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온다.”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위의 두 말
씀이 결국 우리 시대 모든 종교들과
신앙인들의 ‘불편한 화두’가 되었다.


살림이 각박해지면 맘에 여유가 없어 사계의 아름다움과 그 변화를 놓치고 지낸다. 그러나 중년기가 넘어가면 자연에 눈을 돌리고, 노년기가 되면 어느 정도 자연주의자가 된다. 본래 종교란 게 깊은 산에서 숲을 성전 삼아 발전했기 때문인지, 사찰이나 성당 밖에서 종교가 무엇인지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 속는 방법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종교인이 종교라는 궁궐에 익숙해지면 사실 아닌 것을 믿게 되고, 종교동굴에 갇히면 사실을 믿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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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씨앗 같은 것이지 보석알 같은 것이 아니라는 함석헌 선생의 적절한 은유가 생각난다. 보석도 만들어지려면 지층 속에서 고열과 고압을 인내로써 견뎌야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구슬에서 싹이 돋지는 않는다. 필자는 함석헌의 ‘맘’이라는 종교시를 좋아하는데 그 시 앞부분과 끝부분을 아래에 옮겨 본다.

 

“맘은 꽃/ 골짜기에 피는 란(蘭)/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

맘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종교가 맨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 첫째, 앞선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삶의 퇴비가 되어 흙과 섞인 골짜기에, 삶의 뿌리를 내려 자란 꽃들이 오늘을 사는 너와 나의 생명임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다. 둘째, 영글어 가는 자기 생명에 감사와 긍지를 지니면서 동시에 자기는 뒤따라오는 후속 생명의 밥과 꿈이 되어주는 ‘생명의 징검다리’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그 진실을 깨달으면 사람 되는 것이고 아직 못 깨달으면 짐승 상태와 다름없다. 가방끈이 길고 짧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옛날 농사짓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우리 조상들은 고등교육 받은 요즘 지식인보다 그 진실을 훤히 더 잘 알았다. 우리 사회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성공한 사람은 제가 잘나서 지금의 자기가 된 줄로 착각하는 데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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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는 종교란 자라는 생목(生木)을 닮은 실재이지 원형대로 보존할 궁궐 같은 실재가 아니란 말이다. 생목은 이른 봄 새싹이 돋아난 뒤, 꽃 피고 열매 맺을 때까지 날마다 그리고 계절마다 ‘형태변화’라고 부르는 기적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의 눈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흔히 말한다. 하나는 기적이란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생명세계 모든 현실이 기적이라고 보는 눈이다. 일상의 삶과 주위 생명들 안에서 기적을 보도록 사람들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 종교의 본래 사명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위대한 전통과 조직체를 가진 세계적인 종교일수록, 자신의 종교를 생목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보석함을 간직한 궁궐이라고 생각하려 든다. 큰 가람과 성전을 짓기 시작하는 종교는 뽕잎을 잔뜩 먹은 뒤 자기 몸에서 실을 빼내 고치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는 누에와 같다고 입바른 함석헌이 말했다. 세계적으로 대형 교회 순위 20위 안에 드는 교회 절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고 한다. 큰 것은 무조건 좋고 선한 것이라고 맹신하는 시대인지라 자랑할 일 같지만, 종교란 심층을 문제 삼기 때문에 달리 보면 큰 누에고치 짓기에 불과할 수 있다. 시대정신에 해당하는 신선한 공기와 햇볕이 드나들지 않으면 누에고치는 누에나방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번데기와 명주실감 신세로 귀착되고 만다.

 

우리 시대 종교들은 겉치레와 자기과시 경쟁에 자못 소란스럽다. 비록 벌 나비가 앉기에는 너무 작은 싸락눈 같은 흰 꽃을 피우지만, 최선을 다해 앙증맞은 자기 꽃을 피워내는 풀꽃들의 그 당당함과 행복함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종교라야 한다. 그 작은 꽃 안에 전체 우주가 숨 쉬고 있음을 증언함이 종교의 몫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수만명 신도를 동원하는 교세 과시형 신앙집회, 세계 최대 순교자 성지 조성사업, 석탄일의 떠들썩한 종로거리 연등 행렬이 꼭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놀라게는 하지만 감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종교의 사회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이지만, 20세기 위대한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종교의 본질적 요소를 ‘홀로 있음의 고독’이라고 갈파한다. 그리고 사람이 홀로 있음의 고독을 회피하거나 모른다면 결코 종교적일 수 없다고 충고한다. 현대 종교의 위기는 철저한 고독과 내면적 신실성을 대신해주는 구원보장 보험회사가 되려는 유혹에서도 연유한다. 문이 크고 그 길이 넓어 찾는 자가 많은 종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복음서는 경고한다.

 

종교인은 예술적 감성과 과학적 지성을 더불어 갖추어, 경직된 ‘종교성’과 실증적 ‘과학주의’라는 동굴에 갇히지 않는 영성을 함양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종교를 모르는 과학과 과학을 무시하는 종교는 둘 다 플라톤이 비유하는 ‘동굴에 갇힌 노예들’이다. 요즘 한국 기독교의 행태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라고 알려진 예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을 이끌어 왔던 중요한 힘들 중 하나로서 위대한 종교이지만, ‘진리 자체’가 역사적 기독교보다 더 크고 근원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복음주의적 정통보수 기독교’라고 자처하는 부류는 성경과 교리 안에 하느님을 유폐시키거나 독점하고 자신들도 ‘기독교 동굴’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띠를 두르고 확성기를 가지고 명동거리, 공공장소, 전철 등 가릴 것 없이 안하무인 격인 전도행위라는 것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종교의 본질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 타자와 ‘전체 생명’을 살려내는 데 있다. 똥오줌통과 말씀 법문을 담은 가슴통과 머리통을 한 몸뚱이 안에 지니고 성직자는 설법 강단에 올라선다. 배설물과 거룩한 말씀이 함께 있다. “전체 생명은 하나의 유기체이다”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 정도만큼 사회의 난제와 남북관계도 풀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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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종교가 씨앗이며 생목이라고 비유하는 진짜 이유는 종교가 창조적 변화를 모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종교계 지도자들 눈에는 한국 사회가 종교 중흥기의 시운을 맞이한 듯한 생각도 들겠지만, 인류 문명사 흐름에서 종교는 어떤 종교이거나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 쇠퇴하는 원인을 따져보면, 종교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이미 충분히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생명 있는 것은 변화하면서 자라는 법이다. 생물체만이 아니라 종교도 창조적 진화를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생명의 특징은 지속하면서도 새로움을 경험하고 질적 도약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이웃 종교들과 다양한 학문들로부터 겸허하게 배우면서 변화하는 용기를 지닌 종교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품위를 유지해갈 것이다.

 

인도 뉴델리 간디박물관 입구에 “진리가 하느님이다”라고 쓰인 문구를 읽고 새삼스럽게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홀로코스트’ 비극을 체험하고 난 이후 현대인들의 신심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 하느님이시다”라고 고백하려 한다. 오늘의 종교들이 굶주리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지구촌의 수많은 아이들을 돕는다고 쥐꼬리만큼의 ‘적선’을 하고서 종단 중흥사업과 개별 교회 부흥에 더 많은 돈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결국 종교의 거룩한 위선이고 자기기만이며 큰 도둑질과 다름없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던 해, 삼선교 거리 어느 회색 건물벽에 검정 페인트로 쓴 불교 법문 한 구절을 보았는데 지금도 잊지 못한다. 유마거사가 말했다. “중생(衆生)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온다.”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위의 두 말씀이 결국 우리 시대 모든 종교들과 신앙인들의 ‘불편한 화두’가 되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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