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9년차, 아이 낳고 키우기 두렵습니다
10월 12일 저녁 7시부터 경기대 텔레컨벤션센터에서 수원 시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법륜 스님은 “교통이 불편하다는 데 잘 오셨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안 드신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앗따 많다. 적으면 사줄라고 했더만 안되겠네요”라고 농담을 던지며 짧게 인사말을 한 뒤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9년차 남자분이 결혼 9년차인데 경제적 형편 때문에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망설여진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종교가 천주교이지만 즉문즉설을 감명깊게 애청하고 있었기에 오늘 고민거리를 질문하러 왔습니다. 결혼을 좀 일찍 한 편인데 9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낳는 게 맞는지 아직도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굉장히 살기가 힘들어져가고 있고, 부모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울 수 있는 경제적 능력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가 아직까지는 너무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 아이를 낳고 키우기가 두렵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또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낳을지 여부를 결정해야 할 나이인 것 같아 굉장히 고민됩니다.”
부모가 그리 망설이면 아이가 겁이나 어찌 나올 수 있겠어요
법륜 스님이 답변에 나서 질문자와 즉문즉설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부모 될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낳으면 키울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이렇게 고민하는데 아이가 겁이 나서 어떻게 나올 수 있겠어요?(청중 웃음) 한번 생각해봐요. 어미 다람쥐가 새끼를 낳을 때 ‘요즘 같은 세상에 인간들이 지구를 다 파괴해서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새끼를 낳아도 될까?’ 이렇게 생각하고 새끼를 낳을까요? 그냥 낳을까요?”(청중 웃음)
“그냥 낳을 것 같습니다.”
“고양이는요?”
“그냥 낳을 것 같습니다.”
“개는요?”
“그냥 낳을 것 같습니다.”(질문자 웃음)
“질문자는 고양이보다 못해요?(청중 웃음) 고양이도 새끼 낳아 키우고 다람쥐도 새끼 낳아 키우고 개도 새끼 낳아 키우는데 왜 사람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요즘 사회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질문자의 부모님이 질문자를 낳아 키우던 시대보다는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요? 그래도 좀 더 나아요?”
“더 낫습니다.”
“정치적으로는요? 요즘도 독재니 어쩌니 하지만 그래도 30~40년 전보다는 사회가 좀 더 민주적으로 바뀌었어요? 좀 더 나빠졌어요?”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남북이 서로 전쟁을 하니 어쩌니 해도 우리의 국방력이, 즉 북한이 침략한다면 막아낼 수 있는 힘이 30~40년 전보다는 더 튼튼해졌어요? 약해졌어요?”
“튼튼해진 것 같습니다.”
“사는 집은 옛날보다 좋아졌어요? 나빠졌어요?”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먹는 음식은 어머니 세대가 먹던 것보다 지금 질문자가 더 잘 먹어요? 못 먹어요?”
“더 잘 먹는 것 같습니다.”
“입는 옷은 더 좋아졌어요? 나빠졌어요?”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더 좋아졌어요? 나빠졌어요?”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질문자의 부모님은 질문자를 어떻게 낳아서 키웠을까요? 훨씬 더 열악한 조건에서도 키워주셨어요. 아버지나 어머니는 형제가 몇이에요?”
“아버지는 7형제 중 막내이시고 어머니는 5형제 중 장녀이십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아서 키울 때는 아버지가 질문자를 낳아서 키울 때보다 더 어려웠을까요? 좋았을까요?”
“그때는 더 어려웠던 시절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식민지 치하에 양식도 부족해서 봄이 되면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고 얼굴에 부황이 들고 하루 끼니 때우기도 어렵던 시절에 7명이나 낳아서 키웠잖아요. 그리고 또 30~40년 전에 질문자의 부모님은 질문자보다 훨씬 더 어려운 조건에서 자식을 낳아 키웠잖아요. 질문자는 모든 게 다 좋은 조건에서 왜 하나도 낳아서 키우기가 어렵다고 해요? 무슨 심보예요?”(청중 웃음)
“고민이 해결된 것 같습니다.”(모두 웃음과 박수)
성경 구절에도 있는데, 성당 제대로 안 다녀셨어요?
스님은 질문만 계속 던질 뿐이었는데 문답이 오가는 사이에 질문자의 고민이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환하게 웃는 질문자에게 스님은 덧붙여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어디서 잘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새도 하느님께서 다 먹을 것을 주는데 어찌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겠느냐. 그러니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구절이 성경에 있죠? 질문자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어리버리한 걸 보니 성당에 제대로 안 다니는 것 같아요. 신앙심이 부족하네요.(청중 웃음)
조선시대에는 천주교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들 죽였습니까? 그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다들 자식 낳아서 살고 자기 신앙도 지키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에 비해서 보면 이렇게 좋은 세상에 왜 애를 낳아서 못 키우겠어요?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희생을 하기 싫다는 거예요. 엄마가 되어서 몸매 좀 나빠질까봐 사람 젖 안 먹이고 소젖 먹이잖아요. 아이가 엄마의 따뜻한 젖꼭지를 물고 가슴을 만지며 자라야 제대로 사람이 되지 고무통 쥐고 소젖 먹으며 자라도록 하니까 어떻게 심성이 고요해지겠어요?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아기를 낳아서 복되게 키우는 것이 최고의 은혜라고 볼 수 있는데, 옷 잘 입고 침대 좋은 거 사고 스마트폰 좋은 거 가지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까 지금 이렇게 좋은 세상에 살면서도 인심이 각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천국에 가는 걸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껍데기만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40년, 50년 전에 비하면 천국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더 각박하게 살잖아요. 천국은 좋아 보이지만 정작 가보면 못 살 곳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생각을 좀 바꿔야 해요. ‘아이를 낳아야 하겠다’, ‘안 낳아야 하겠다’ 생각하지 마세요. 생기면 하느님의 축복이라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서 키우면 됩니다. 어릴 때는 정성을 다해서 키우고,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손을 점점 떼 주고, 스무 살이 넘으면 간섭을 하지 말고 나가서 살도록 하고요. 옛날에는 7명씩 낳아도 어릴 때 낳아서 키울 때는 힘들었지만 열 몇 살 될 정도로 크면 다 자기가 알아서 밥 벌어먹고 부모도 봉양했잖아요.
낳기를 겁내면서도 낳으면 자식을 거꾸로 키워요
요즘은 여러분들이 아이 낳기를 겁내면서도 낳으면 거꾸로 키워요. 어릴 때는 남에게 갖다 맡기고 제대로 안 돌보다가 아이가 좀 크면 엄마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아이에게 집착해요. 그래서 자식이 스무 살은커녕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도 자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헐떡이며 살잖아요. 삶을 잘못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삶의 가장 큰 원칙은 자연 생태계를 보면 돼요. 제비가 새끼를 어떻게 키우나, 이런 걸 보면서 어미가 새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면 키우는 걸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아기에게 기저귀를 좋은 걸 채워주고 우유를 일제로 먹인다는 건 아기의 만족이 아니라 부모의 만족이에요. 자기 생각대로 키우는 겁니다. 부모는 아기를 위해서 희생해야지 자기 좋을 대로 하면 안 돼요. 아기는 엄마의 따뜻한 젖꼭지와 사랑이 중요하지 뭘 입히고 뭘 먹이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난한 가운데 자라도 다 잘 자랄 수 있는데 요즘은 아기를 낳아도 자기 직장생활에 장애가 된다 어쩐다 해서 아기를 낳자마자 이리 떠밀었다가 저리 떠밀잖아요. 옛날 왕족들을 보면 한 3대 내려가면 왕 중에 제대로 된 왕이 없어요. 낳자마자 어미가 안 키우고 유모가 키워서 이 손에 갔다, 저 손에 갔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낳았으면 자기가 키워야지 왜 할머니한테 갖다 맡기고 남한테 갖다 맡겨요?
국가 정책도 많이 잘못되었어요. 키우는 사람에게 지원을 해줘야 할 텐데 오히려 유아원에 갖다 맡기면 지원을 해주고, 직접 키우면 아무 지원도 안 해줘요. 그러니 직접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사람까지도 갖다 맡기잖아요. 아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부모가 가난하든 부자든 똑똑하든 안 똑똑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어머니 품에서 자라고 싶어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의 권리예요.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아이의 권리를 빼앗습니까? 할머니가 되어서 왜 손주의 권리를 빼앗아요? 할머니가 아이를 돌봐주는 것은 내 딸, 즉 아기 엄마에게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아기한테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나를 낳아준 엄마 품에서 자라고 싶은데 할머니가 빼앗아 가냔 말이에요. 정신 좀 차려야 해요.
남자가 군대 가는 것보다 여자가 아이 키우는 게 더 소중
엄마가 판사인지 검사인지 대통령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기를 낳으면 그냥 한 엄마예요. 그러니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게 필요합니다. 엄마 역할을 하는 게 사회 진출에 장애가 된다면 사회가 그걸 보장해줘야 합니다. 최소한의 자아가 형성되는 때까지 3년간은 엄마가 키워야 해요. 그러면 사회는 3년간 유급휴가를 줘야 해요. 국가예산이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유급휴가를 못 준다면 1년간 유급휴가를 주고 2년간은 무급휴가를 주더라도 직장의 자리를 보장해줘야 해요. 잘 흐르는 강을 직선으로 만든다고 24조원이나 퍼 넣고 녹색성장 한다고 녹조를 가득 키우는 데는 돈을 엄청나게 부으면서, 국가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가장 소중한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예산이 없다니 말이 돼요?(청중 박수)
남자들이 군대 가는 것만 국가를 위하는 게 아니에요. 여성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남자가 군대를 가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발전에 더 소중해요. 그러니 아기를 키우는 사람은 그걸 경력으로 인정해줘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웠다면 취직할 때 점수를 많이 줘야 해요. 돈이 부족하다면 아이를 안 낳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독신세를 거둬야 해요.(청중 웃음)
왕창 걷어서 아기 낳는 사람한테 지원해줘야 해요. 옛날에 낳지 말라 해도 많이 낳는 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지만 지금은 ‘낳아라, 낳아라’ 해도 다들 안 낳잖아요. 이제 아기 낳는 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입니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아기를 낳아야 하고 또 그 아이를 잘 키워야 합니다. 생태적으로는 그 어미가 책임지고 키워야 하지만, 그렇게 낳아 키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보장해줘야 해요.
이렇게 사회적 보장을 해주는 것은 공동체와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 보장을 안 해주더라도, 아무리 가난해도, 집이 없더라고 아기를 낳아서 키워야 해요? 질문자 같은 사람은 아기가 생기면 걱정이라고 하면서도 또 아기가 안 생긴다면 부처님 코 베어 먹어가면서 꼭 아기 낳겠다고 할 사람이에요.(청중 웃음)
9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고 해서 저는 아이 낳게 해달라는 질문인 줄 알았어요.(웃음)
생기면 낳고, 안 생겨도 난리 피우지 말고...
결혼해 살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 ‘낳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이가 안 생기면 잘 된 거예요. 내가 자연의 생태나 신의 창조 질서를 거스른 것도 아니잖아요. ‘신혼을 오래 가지라고 이러는구나’하고 생각하고 살면 돼요. 아이가 들어서면 또 낳으면 돼요. 물론 조절은 해야 되겠죠. 너무 많이 낳아서 인구가 너무 증가해도 안 되니까요, 자연조절은 우리가 할 수 있으니까 그리 하는 것은 괜찮지만, 안 생기는 걸 꼭 낳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또 생기는 걸 굳이 버린다고 난리를 피울 필요는 없습니다.
가능하면 자연의 질서를 따르면 좋지만 인간은 순수한 자연 속에서만 사는 건 아니고 자연을 약간 변형해가며 살잖아요. 그러나 자연을 너무 많이 변형하니까 지금은 자연 파괴가 우리에게 큰 위험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걸 그대로 놓아두고 살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큰 범위 안에서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되 작은 범위는 조금씩 개선하고 살듯이 아기 낳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자연의 질서에 맞게 하되 자기의 형편에 맞게 약간 조절하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질문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니까 신의 창조 질서에 맞게 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네.” (청중 박수)
신의 창조 질서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자 질문자는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큰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질문자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히 고려하여 그에 맞게 답변을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즉문즉설의 힘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특히 지금보다 훨씬 살기 어렵던 시절에도 아이를 잘 낳아 키웠는데 요즘 같은 좋은 세상에 무슨 걱정이냐는 질문은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해준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익이나 기쁨보다 지속가능해야 행복
마지막으로 스님은 진리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어떻게 매일 전국을 돌아다니는 무리한 일정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지 비유를 들며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진리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인생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돼요. 그렇지만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남을 해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손해가 돼요. 생각해보세요. 둘의 관계에서 계속 내가 이익을 보고 상대가 손해를 본다면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중간에 그만두든지 자기도 이익을 보려 들겠죠. 내 이익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상대가 이익 보고 내가 손해 보는 건 어떨까요? 희생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오래 지속되기 힘들어요. 세 번까지는 참지만 더 이상은 못 참아요.
그러니 지금의 이익, 지금의 기쁨이 꼭 행복이 아니에요. 지속가능해야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나도 이익이고 너도 이익일 때 행복이 지속가능해집니다. 제가 이 강연을 오래 지속하려면 이 강연이 저한테 재미있어야 해요. 여러분들도 계속 여기에 놀러 오려면 여기 오는 게 유익하든지 재미있어야 해요.
제가 재미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처럼 이런저런 질문을 해서 이야기를 많이 해줬지만, 십중팔구는 묻기만 했지 제 말 따라 하지 않아요.(청중 웃음) 그렇다고 제가 그걸 두고 ‘이건 시간 낭비다. 묻기만 하고 어차피 하지도 않을 인간들이잖아’라고 생각한다면 저부터가 재미를 못 느껴서 계속할 수 없어요. 묻는 것도 자기 사정이고 행하는 것도 자기 사정이에요. 저는 그냥 이야기만 해주고, 하든지 말든지는 상관 안해요. 오늘 안 물었어도 어차피 하고 살던 사람인 걸요, 뭐.(청중 웃음)
결혼해서 살기 힘들다는 소리 들을수록 힘이 됩니다
제게는 어떤 도움이 될까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는 보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결혼해서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많이 들을수록 제가 혼자 사는 데 굉장히 힘이 됩니다. 하하. 안 그러면 결혼생활이 좋은가 싶어서 부러워하며 껄떡거리다가 퇴속할 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가 젊어서부터 늘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혼자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약간 마음이 흔들리다가도 부부 싸우는 이야기를 한번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쥐약 먹으려다가 옆에서 죽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 듯이요. 그래서 이걸 상부상조라고 하잖아요.(청중 웃음)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핵심이 연기법입니다. 상의상존(相依相存),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 즉 서로 돕는 존재라는 말이에요. 지렁이 한 마리도 내 삶에 도움이 되는데 왜 내 부모, 내 형제가 내 삶에 도움이 안 되겠어요? 5년 살다 헤어졌다 해도 상대를 미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에 같이 안 살아본 사람도 안 미워하는데 그 사람은 그래도 5년이나 살아본 사람이잖아요. 그 인간 없었으면 내가 결혼이나 해봤겠어요? 그런 인간이라도 있기 때문에 그래도 총각 딱지 떼고 처녀 딱지 떼고 애라도 낳아본 거 아니에요?(청중 웃음)
그러니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예요. 제가 싱글거리며 다니는 이유를 아세요? 여러분들은 저를 보고 전국을 저리 돌아다니느라 힘들지 않느냐고 하죠? 그렇게 생각하면 힘들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온갖 사람을 다 만나고 온갖 구경을 다 하고 돌아다니잖아요. 그리고 비난받으면서 다니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별로 비난 안 받잖아요. 가끔 댓글 달아서 비난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좋아해주는 사람들하고 매일 만나니 저도 좋을 수밖에 없잖아요. 매일 인상 쓰는 사람들하고만 만나면 저도 물들 테지만요.
그래서 어떻게 사물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으로 보라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기쁨이 생기지만 아무리 좋아도 부정적으로 보면 항상 불만족이 생기고 자기가 자기를 해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절로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지는 듯 했습니다. 기쁜 마음이 된 청중들은 큰 박수로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글은 정토회 ‘스님의 하루’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