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전쟁과 평화> 한 장면.
클라우제비츠는 ‘전쟁터의 상황은 지휘관의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적절한 대답을 해 준 사람은 톨스토이다. <전쟁과 평화(바이나 이 미르)>의 ‘미르’는 ‘세상’의 뜻도 있다. ‘전쟁하는 세상’, ‘전쟁의 모습’이라 풀이된다. 역사는 누가 만드나? 지도자의 상상력이 만들어낸다? 톨스토이는 그 허구성과 무의미성을 반박한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프랑스군은 반 나폴레옹 연합군과 격돌했다. 바그라티온 장군은 몸소 적진에 돌격해 장병들에게 숭배를 받는다. 그는 부상을 입고 러시아는 패퇴했다. 군인의 귀감이었지만 패배한 지휘관이 되었다. 황제는 나폴레옹과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권력자들의 화해로 전쟁을 끝낸다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역사는 수만의 인간집단이 만들어내는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권력자들의 홍보용 팸플릿이 아니다. 톨스토이에게 그런 역사는 정치적 사기, 정신나간 우상숭배였다. 보로지노의 최후방어선에서 러시아는 다시 프랑스군을 맞게 된다.
그는 전쟁과 역사의 진상을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죽음을 통해 역설한다. 보로지노는 모스크바의 남서쪽에서 120km 떨어진 러시아의 평원이다. 1812년 9월 7일 25만~35만명을 동원한 양쪽 군대는 거기서 7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의 승리라고 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패배라 할 것도 아니었다. 톨스토이가 보여준 것은 전투의 양상이다. 지휘관이 전황을 만드는 것인지 보여주려고 현장을 물고 늘어졌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양측은 포격과 돌격전으로 살육을 감행했다. 오로지 죽지 않으려 상대방을 죽였다. 명령도 보급도 끊겼다. 육체의 기력도 소진됐다. 지휘체계란 무의미. 그런데도 병사들은 작가가 신비롭다고까지 표현한 어떤 힘에 이끌려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이 비현실성! 현장에서 소외된 채 이 모든 명령을 내린 자의 죄는 그래서 더 심각하다.
» 톨스토이
볼콘스키는 내심 나폴레옹을 흠모했다. 자신도 역사에 아로새겨진 숭고한 군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쿠투조프 사령관의 부관을 사양하고 전선에 나갔다. 결국 총상을 입고 쓰러져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간다. 그는 비로소 의아함을 느낀다. 정신을 압도하던 역사라는 중심을 벗어나니 무연고의 광야였다. 인생의 전부라 여겨온 신념이 무관한 대지에. 나폴레옹도 자신도 그 누구도 영웅이거나 지휘관이 아니었다. ‘저 영원한 하늘 아래서, 사람들은 왜?’ 그의 의혹은 톨스토이의 해답이다.
나폴레옹은 볼콘스키의 죽음을 ‘참으로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자신은 그 죽음에 참여할 수 없었다. 권력이 그를 진정한 역사로부터 일찌감치 추방해 버렸다. 권력자일수록, 독재자일수록, 영원의 하늘 아래 가장 소외되고 고립된 우스꽝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가 절해고도에서 홀로 죽어간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탄에 최후를 맞은 어느 독재자처럼. 현 정권의 역사전쟁에는 이런 진실과 기만이 간과돼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세월호에서 죽어간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 노란 꽃을 상복에 달고 유가족으로 부름 받는 이웃들과 함께 천갈래 만갈래 찢겨지고 있다. 맞다! 이 전쟁터의 상황은 과연 지휘관의 상상력의 소산이 아닌가.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