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인 오스트리아 황제, 생일축하식에서
점찍어 둔 언니 대신 한눈에 반해 청혼
어리다는 이유로 시어머니가 아이 양육 뺏어가
틈만 나면 여행 떠나 설움 달래
빈 자리 남편 위해 여자 연예인 소개
뒤바뀐 운명으로 황당하게 칼에 찔려 숨져
영국의 세자비 다이애나는 살았을 때도 거의 매일 유럽 매스컴을 탓다. 그녀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던 사람들의 물결에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잘 엿볼 수 있었다.
약 150년 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황제비였던 엘리자베트(1837-1898)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 1세와 결혼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1854년에 오스트리아의 세자비가 되었다. 애칭이 시시인 엘리자벳은 바이에른 지방의 막스 요셉 공작과 루도비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뮌헨지방의 한 성에서 자랐던 그녀는 공부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리저리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이런 딸의 성향을 빨리 파악했던 아버지는 그녀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취미생활에 몰두하게끔 도와 주었는데, 그녀의 주된 취미는 말 타는 것, 스케치, 시를 짓는 것이었다. 뒤에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셉과 인연을 맺게 된다.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말 타기나 스케치, 시 짓기 취미
프란츠 요셉이 23살로 아직 미혼이었을 때, 엄마 소피는 아들 신분에 상응하는 신붓감을 늘 찾고 있었다. 유럽의 여러 왕실과 귀족의 딸들이 그 물망에 올라와 있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들 때문에 엄마는 애를 먹었다. 엄마 소피는 드디어 여동생 루도비카의 첫 딸인 헬레네를 아들의 신붓감으로 찍고선 사촌 간의 혼사 말이 오가는 중이었다. 이럴 즈음 요셉 공작과 루도비카는 두 딸 헬레네와 엘리자베트를 데리고 사촌조카이인 젊은 황제의 생일 축하식에 참여했다. 그때 프란츠 요셉은 언니 헬레네보다 엘리자베트에게 더 관심을 보이더니, 결국은 헬레네를 뒤로하고 엘리자베트에게 청혼을 했다. 버림받은 헬레네는 이 일 때문에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갔을까? 어쨌든 합스부르크가의 사촌 간의 이런 결혼은 세기를 걸쳐서 내려오는 일종의 전통이었다.
며느리도 시부모 이름 부르고 사위도 장인 장모 이름 호칭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관계가 법적으로 허용된다면? 사돈과 사돈끼리 격식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우리에게는 사촌끼리의 사돈관계는 격식 자체부터가 좀 이상해 질 것 같다. 특히 말투부터다. 서양인들이 아저씨 아줌마로 뭉뚱거려 부를 수 있는 칭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칭호가 있는가? 이모 고모 숙모 백모 숙부 삼촌 등등. 여기에다 또 높낮이를 철저하게 따지는 언어 구조다. 독일 같은 경우는 가족끼리 친척끼리는 무조건 다 말을 놓는다. 말하자면 며느리가 시부·시모에게 철수야! 영희야!로 부르는 사회다. 그 반대로 사위도 물론 장인 장모에게도 영식아! 영숙아!라고 한다. 언어에서부터 이렇게 격식이 없다 보니 사돈 관계가 우리보다는 확실히 더 쉬울 것이다.
각설하고 다시 본 얘기로 돌아와, 1854년 4월 24일 빈에서 70명의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추기경 요셉 오트마르의 주례로 이 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딸의 결혼 지참금으로 공작부부는 5만 굴덴과 옷과 보석을 선물했다. 오늘날의 가치로 한 50억 원쯤 아니었을까? 중세 때부터 여자가 시집갈 때 지참금을 상당히 중요시했던 문화에 비추어보면 말이다. 그 한 예로 중세의 한 교황의 딸 루크레치아가 시집갈 때 30만 두카텐(당시의 돈 단위)을 지참금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가 대학교수로서의 일년 치 월급이 8두카텐이었다고하니, 30만 두카텐은 300억으로 봐도 될까?
두 딸 데리고 여행 도중에 설사와 고열로 둘째 딸 잃어
아무튼 사촌조카가 이 집안의 사위가 되었던 거였고, 반대로 사촌 질녀가 이 왕족의 며느리가 되었다. 결혼 후 약 일 년이 지났다. 엘리자베트가 겨우 17살이었을 때 첫딸 소피 프리데리케를 낳았고, 다음해엔 둘째 딸 기젤라를 낳았다. 이런 그녀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자기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품에 둘 수 없었다는 거였다 우리로 치면 이모이자 동시에 시모인 소피 때문이었다. 애 키우기에는 너무 젊다는 이유로 시엄마 소피는 애들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가 양육하였다. 시시가 애들의 얼굴 한번 보는 것도 늘 시모 소피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정도였고, 설령 엘리자베트가 아이들을 만났다 할지라도 소피의 감시(?)아래서만 가능했다.
시모 소피의 이런 지나친 보호가 싫었던 그녀는, 갖은 구실을 대고선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소피의 눈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아이들을 혼자 품에 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헝가리로 여행가는 도중에 두 딸이 설사와 열에 시달렸다. 10달 되었던 기젤라는 다행히도 살아남았지만, 2살짜리 소피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할머니의 군대식 교육에 질린 아들, 뒤에 자살
1858년 시시는 왕세자 루돌프 프란츠 칼 요셉을 낳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이 아들을 시모에게 넘겨 주어야만 했다. 아니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근데 시모는 이 왕세자 루돌프를 어릴 때부터 군인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예를 들자면, 아침에 손자 잠을 깨울 때는 더러는 차가운 물을 부어 깨우라고 보모에게 하달할 정도였다. 이렇게 군인식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아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그녀였지만 시모 소피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민하게 성장했던 루돌프는 뒤에 불행하게도 여자친구 메리 베제라와 함께 1889년 한 성에서 자살해버렸다. 엄마로서 너무나 가슴 아파했던 시시는 그 후 자주 검정 옷을 입고 다녔다.
1868년 그녀는 4번째이자 막내를 헝가리에서 낳았는데 이름은 마리 발레리였다. 다행히 이번 아기는 시모에게 넘기지 않고 그녀가 키웠다. 아들을 잃은 것이 시모의 잘못된 군대식 교육방법도 한몫했다는 생각을 지녔던 그녀는 시모와는 아주 다르게 틀에 박힌 가정교육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런 방법으로 딸을 키워가고 있을 즈음에 이 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어쩌면 프란츠 요셉이 아니고 헝가리의 한 공작일지 모른다고! 다행히도 이 소문은 곧 잠잠하게 잠재울 수 있었는데, 딸의 외모와 성격이 황제 프란츠 요셉과 너무나 닮았다보니 영락없이 아버지를 증명하는 지름길이 되었던 거다.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 유지
1860년 심한 기침에 시달렸던 그녀는 폐병일지도 모른다는 구실로 요양을 갔지만 진짜 이유는 궁중생활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던 의도가 더 컸다. 그 이후 그녀는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유럽은 물론이고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터키, 영국 등 많은 여행을 다녔다. 당시에는 이런 여행이 드물었던 시기였다. 얼마나 많은 수행원들이 그녀를 따랐겠는가?
이런 긴 여행 끝에 시시는 빈의 궁중에 다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여행을 통해서 많이 성숙해졌던 시시는 더불어 자신감 넘치는 성격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짐작컨데 시시는 시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많은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역마살이 붙어버린 그녀는 빈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빈에서의 생활이 좀 답답하다거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녀는 곧바로 여행을 떠났다. 이럴 즈음 시시는 그녀의 부재 시 느낄 남편의 고독감을 알아채고서는 남편의 고독을 덜어 줄 방편까지도 찾았는데 1885년에 연예인 카타리나를 남편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카타리나는 즉시 왕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잘 지냈다. 다행하게도 왕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이런저런 불미스런 소문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황제비 시시가 직접 두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아줘서 그랬던지, 이 둘은 친구 관계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시가 죽고 난 후에도 황제와 카타리아의 친분은 여전히 계속 되었지만 엘리자베트가 살아 있었을 때보다 그 친분이 오히려 시들해 졌다고 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황제는 시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겠다.
황제는 배 타는 걸 싫어해 동반여행은 안해
이렇게 반은 고독에 절은 황제 프란츠 요셉은 시시가 빈에 다시 돌아오는 날을 학수고대할 뿐 함께 동반여행은 안했다는데, 배 타는 걸 좋아하는 시시에 비해 그는 배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녀가 유럽을 두루 여행하는 동안, 두 사람은 끝없이 많은 편지를 교환하였다. 그 편지의 일부가 지금 남아 있는데, 주로 황제 쪽에서 그녀의 건강 염려와 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1898년 9월 9일 겐프의 호수에 사는 한 귀족의 초대를 받았던 시시는 비서 이르마를 대동하고 그 귀족 집에 도착 했다. 이들은 오케스트라가 무대에서 연주되는 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호사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앞날의 운명은 누구도 알 수 없듯이 그녀 역시 그러했다. 그녀가 다음날 비서 이르마를 대동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오후 1시 30분경 배에 탔을 때 한 이탈리아인이 그녀를 덮치며 칼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잡힌 범인이 나중에 진술했다. 그가 진짜 겨냥했던 사람은 헨리 필립페 왕자였는데 갑자기 여행계획을 바꾼 그가 겐프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대신 이 황제비를 죽였다고 했다. 그 대신 그녀가 죽어준 운명이라고나 할까?
다이애나처럼 숱한 얘기 남겨화장과 향수 멀리하고 자연미 중시쇠고기로 밤새 얼굴팩다이어트로 철저한 몸매 관리몸무게는 50kg 넘지 않게허벅지와 종아리 굵기까지 날마다 체크그녀에 관한 얘기도 영국의 다이애나처럼 많이 남아있다. 그녀의 말타는 솜씨는 어릴 때부터 탁월했다는 것부터, 미모 관리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 했다는 것 등. 타고난 미에다 이런 몸매 관리에 철저하다보니, 그 당시의 남자들과 심지어 여인들까지도 시시의 미모에 홀렸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신비스런 그녀의 분위기는 당시 어느 여인도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한다.그녀의 철저한 몸매 관리에 대한 일화다.스포츠로 몸을 다진 그녀는 지속적인 다이어트를 했을 뿐만 아니라, 콜셋트로 조인 허리는 늘 46cm였다고 한다. 당시의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했던 화장과 향수를 멀리했던 그녀는 자연미에 중점을 두었다. 그녀가 머리를 한번 감으면 온종일 걸렸다고 한다. 매일 몸무게를 저울에 다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고, 172cm의 키에 몸무게는 50kg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규정을 늘 지켰다고 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허벅지와 종아리의 굵기까지 자로 재었을 정도였다. 특히 그녀는 아름다운 피부를 간직 하기 위해서 압축한 쇠고기를 밤새 얼굴 위에 올려 두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그녀만의 미용법이겠다.오스트리아의 빈에는 시시박물관이 있다. 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이 기념관은 늘 관광객이 들끓는 곳이다. 이곳을 방문했을 때 입구에 걸린 글은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거였다. 필자는 지킴이에게 넌지시 당신들의 시시를 한국어로 한번 쓰고자 하는데 더불어 사진도 꼭 필요하니 좀 찍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 지킴이는 필자에게 예외적으로 허락은 해주면서 다만 다른 사람들이 안 볼 때 살짝 찍어 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녀가 사용했던 물건들은 엄청 많이도 전시되있다. 어마어마한 금으로 도금한 휘황찬란한 식기들에서부터 가재도구들까지.그녀에 관한 영화는 1920년, 1932년, 1940년, 1950년, 1972년 등 모두 5번이나 만들어졌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시시 영화들이 여전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의 특집영화 방송용으로 방영될 정도로. 유명한 배우인 로미 슈나이더가 시시역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배우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1932년에는 빈에서 그녀의 얘기가 오페라로도 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