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림 스님 칠순 넘어 고향 돌아와 ‘고반재’에 스스로 가둬
꿈 펼치는 곳이 아니라 꿈을 묻을 만한 곳 찾아 그저 홀로
땅이름조차 안의(安義:경남 함양)였다. 대의명분(義)이라는 꿈이 있어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편안(安)했던 까닭이다. 멀지 않은 곳에 평생 ‘선비의 꿈’을 위해 살았던 사림파의 대부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의 흔적인 덕천서원(산청 시천)이 남아있고, 큰 꿈을 안고서 문경 봉암사 결사를 이끈 퇴옹 성철(1912~1993)스님의 생가인 겁외사(劫外寺 산청 단성)도 있다.
해방 전후 무렵 이상사회를 꿈꾸던 사람들의 모임인 전국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대회가 인근 용추사(龍湫寺 함양 안의)에서 열렸다고도 전한다. 광복 무렵에 세워진 최초의 사립학교인 안의중고교가 이 지역유지들에 의해 세워졌으니 이 역시 꿈의 또 다른 표출이라고 하겠다. 혼자 꾸면 꿈으로 그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던가. 이래저래 이 지역은 여러 가지 유형의 이상주의자들의 꿈의 성지인 셈이다.
혼자 꾸면 꿈으로 그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
안의 출신인 이 시대 몽중인(夢中人) 종림 스님(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의 꿈꾸는 집인 ‘고반재(考槃齋)’를 찾았다. 몇 가구 살지도 않는, 덕유산과 지리산이 만나는 넓은 자락에서 일만평 쯤 차지하는 작은 분지마을이었다. 경운기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이 유일한 진입로인 그야말로 천옥(天獄)이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어릴 때 떠났던 고향 땅으로 다시 들어와 스스로를 가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늘 유토피아를 꿈꿨다. 몽중설몽(夢中說夢)이라고 했다. 꿈속에서 꿈을 설한다는 말이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꿈이라고 하지만 또 그 꿈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늘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꿈은 그 자체로 공능(功能)을 가지노라고 꿈 예찬론을 늘어놓는다. 어쨌거나 그 꿈은 공(空 변화)의 도리를 제대로 가르쳐준 또 다른 선지식이었다.
인류의 스승 공자 역시 주변인들로부터 이루지도 못할 꿈을 좇아다니는 몽상가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짧게 보면 비난일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결국 찬탄인 것이다. 힘들 때마다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씩이나 떨어질 정도로 대나무에 글자가 새겨진 옛책을 거듭거듭 읽었다. 책을 통해 위로받고 또한 ‘요순시대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물고 산도 좋지 않고 볼거리도 아무 것도 없지만...
어느 날 『시경(詩經)』「위풍(衛風)」을 읽다가 문득 ‘유토피아 고반’을 발견하고는 장탄식을 했다. “내가 ‘고반(考盤)’이라는 시(詩) 속에서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들의 번민하지 않는 삶을 보았다”
후학들은 ‘고반’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 고(考)는 이룬다(成也)는 뜻이고 반(槃)은 즐거움(樂也)이라고 새기면서 ‘군자의 즐거움’, ‘도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또 고(考)는 두드린다(敲也), 반은 그릇 반(盤也) 즉 ‘양재기를 두드리면서 장단을 맞추고 논다’고도 했다. 둘 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하는 삶이었다.
종림 스님은 ‘고반’ 분위기를 이 시대에 재현하고자 했다. 물도 산도 좋은 곳이 아니다. 그리고 볼거리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혼자 머물 곳, 혼자 몰두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살려야 했다. 도서관을 겸하는 책 박물관 용도로 지어진 제법 규모를 갖춘 건물이었다. 시멘트와 철골로 이루어진 통으로 된 복층이다. 윗층에는 수다를 떨 수 있는 널찍한 누마루방이 자리잡았다. 집들이 삼아 가야산에서 동행한 이들과 넓은 창문으로 들어 온 겨울 햇살을 안고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같이 일하던 목수가 책꽂이 만들 판재를 켜다가 손을 다쳐 현재 실내작업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뚫려있는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책은 박스조차 뜯지 못한 채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마음이야 그 맛에 땡겼지만 이미 몸이 바뀌어...
아직 부엌이 미완성인지라 단골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맵고 짜고 게다가 제피(산초)까지 듬뿍 뿌려진 왜~한 맛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시골음식이 나왔다. 대세를 따라가는 퓨전 내지는 개량을 거부한 주인 아지매(아줌마)의 고집이 느껴지는, 어릴 때 먹던 바로 그 맛이었다. 마음이야 그 맛에 땡겼지만 이미 바뀐 몸은 결국 원초적 국물맛을 소화하지 못한 채 국수건데기만 앞접시로 옮겨서 먹어야 했다.
어눌한 말투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절집에서 대장경 전산화 등 많은 일을 벌였고 또 나름대로 밥값을 했다. 이제 한 생을 회향할 나이가 되니 여럿이 힘을 모아야 하는 공동작업은 여러 가지로 버겁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았다. 이제 꿈을 펼치는 곳이 아니라 꿈을 묻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건 은둔이다. 덕분에 이제 고반재에서 ‘고반’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게 되었노라고 흐뭇해 한다. 돌아와 ‘고반’ 글을 찾았다. 비슷한 느낌의 3편 가운데 마지막 시를 가만가만 읽었다.
황량한 땅에 살면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았으니 이는 대인의 머뭄이로다.
(고반재륙考槃在陸하니 석인지축碩人之軸이로다)
홀로 자고 깨어나고 눕는 이 즐거움을 절대로 주변에 알려주지 않으리라.
(독매오숙獨寐寤宿이나 영시불고永矢弗告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