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비주의인가
양극화를 넘어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희망의 체험
정신분열과 양극화, 갈등과 고통의 시대. 이 모든 것을 넘어선 희열을 체험하고 싶은가. 비밀주의나 사이비로 비난받아온 신비주의에 대한 재평가가 왜 요구되는가. 이성의 시대는 많은 성과를 주었지만 우리 내면의 기쁨과 행복, 신비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빛에 의해 사로잡혔다. 나는 태양에 흡수되었으며, 내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빛이 돌았다.”
“날이 질 무렵 나는 다시 태어나 동굴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빛에 의해 사로잡혔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체험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나는 일자(一者)를 보았다. 나는 태양에 흡수되었으며, 내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빛이 돌았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는 창조의 근저에 자리하는 단순함 그 자체를 보았다. 그것은 언어와 마음을 넘어선 곳에 있기에 신의 도움 없이는 아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명료했던지, 우리가 그것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의 부분으로 항상 거기에 존재하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여태 알지 못했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어 비달이 소설 <줄리언>(율리아누스)에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신비적 합일 체험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간결하지만 감동스럽다. 신비주의라는 개념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mystery cult)에서 유래했고, ‘눈이나 입을 가리다’라는 뜻의 단어 ‘무오’(muo)가 그 어원이다. 이는 비밀 엄수를 의미한다. 신비종교는 입문자들을 엄격하게 골랐으며, 가르침은 비밀로 지켜져야만 했다. 이런 노력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우리는 신비종교의 전모를 아직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오늘날 신비주의는 인간 내면에 초월적 차원이 존재하고, 이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우리의 불멸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처럼 죽음, 재생, 불멸성의 획득 등이 그 핵심어이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가 근동의 신비종교 중 하나로 간주된 것은 놀랍지 않다.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는 ‘죽음-하계로의 여행-부활과 불멸성 획득’ 과정을 겪은 신비종교의 영웅인 오르페우스와 매우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크게 체험, 수행, 사상으로 구성된다. 체험은 궁극적 실재와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비적 합일 체험을 정점으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사건을 뜻한다. 수행은 체험을 얻기 위한 명상과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신비 사상은 궁극적 실재와 현상 세계의 관계,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참된 본성 등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의미한다. 요컨대 삶과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개인이 체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동서양 종교사에 불가결한 요소로 찬탄받았던 신비주의는 동시에 숱한 오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비주의는 초자연주의와 혼동된다. 비가시적 차원을 강조하기에 비이성적인 초자연주의로 비난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물질/정신, 신/인간, 자연/초자연 등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기를 꿈꾼다. 그러니 계시, 접신, 유체이탈, 임사체험, 초능력과 같은 현상을 싸잡아 신비주의라 일컫는 건 곤란하다. 이 경험들이 신비적 합일 체험의 하위 범주로 묶일 수 있지만, 초자연 현상이 곧바로 신비주의의 전부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 절대적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이상 신비주의라 이름 붙이기 어렵다.
동시에 서양에서 유래된 탓에 신비주의는 서양의 수준 낮은 종교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특히 유신론을 폄하하는 일부 동양 종교가 이런 비난을 펼쳤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동양 종교를 가치절하할 때도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태도는 전통이 인가하지 않은 종교적 주장들을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탄압했던 서구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신비주의란 곧 이단에 다름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편 신비주의는 동서양 종교의 정수로 간주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이 초월의 차원을 체험할 수 있다는 주장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주의적 태도는 자칫 궁극적 실재의 동일성에 경도되어, 교리나 수행 차원의 차이를 간과할 가능성이 크다. 또 신비적 합일 체험의 획득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이른바 ‘체험 지상주의’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나라에선 신비주의를 ‘비밀주의’와 혼동하는 현상마저 생겨났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같은 유명 인사들이 대중매체를 기피하는 것을 신비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즉, 의도적으로 노출을 피해 ‘신비롭게’ 보이려는 전략이 바로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신비주의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유일한 대항마로 부각되기도 했다. 종교적 세계관을 압살하려는 유물론적 과학주의에 반발한 사람들이 종교의 뿌리를 개인의 체험에서 발견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은 근대 이후에 본격화된 개인주의와도 잘 부합한 탓에 더욱 힘을 얻었다. 종교성의 참된 원천을 교리나 의례가 아닌 개인적인 종교 체험에서 찾았던 윌리엄 제임스가 대표적 인물이다.
결국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참으로 많은 사연을 켜켜이 안고 있다. 그러기에 신비주의는 우리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이원적 관계의 스펙트럼을 망라하는 탓에 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 신비주의는 ‘분리’가 극대화된 요즈음에 새롭게 각광받고 있기도 하다. ‘핵가족’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현대에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핵분열에 가까운 분리가 추구된다. 이런 경향은 그간의 집단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흐름에 반발해 개인을 삶의 주체로 세운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파편화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온다.
이런 상황이 신비주의의 재평가를 요청한다. 이 개념이 급진적 개인주의와 보편주의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는 모든 존재를 초월한 궁극적 실재가 개인에 의해 체험된다고 주장한다. 즉, 궁극적 실재의 체험 주체가 어디까지나 개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개인을 뛰어넘는 궁극 차원을 찾아내려는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는 개인주의의 파편화 경향을 극복해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시대적 요청에 절묘하게 부응한다.
게다가 신비주의자는 신비적 합일 체험이 법열(法悅), 아난다(ananda), 지복(bliss)과 같은 거대한 기쁨을 수반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내면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있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 신비주의자인 아빌라의 테레사를 모델로 삼은 베르니니의 조각을 보라!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표정은 지상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초월하는 지극한 복락이 얼마나 압도적인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근본 의미를 체득하는 신비적 합일 경험은 우리에게 절대적 기쁨을 부여한다. 요컨대 신비주의는 우리가 거대한 행복의 가능성을 내포한 존귀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런 연유로 신비주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신비주의가 이성/감정, 남성/여성, 초월/내재, 신/인간, 동양/서양, 물질/정신 등 여러 가지 이원적 관계들이 빚어내는 긴장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대립을 창조적으로 넘어서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진 환경에서 살고 있다. 신비주의야말로 오랫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대극의 통합’(coincidentia oppositorum)을 가능케 만드는 지혜를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 특히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려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신비주의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성해영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lohela@hanmail.net
요즘 휴심정은 오늘 휴심정을 ‘신비’하게 꾸민 휴심정 필자 성해영 교수는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문화관광부에서 일한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6년 만에 공무원을 사직하고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공부합니다. 그는 고교 재학 때인 17살에 우연히 찾아온 종교체험을 잊지 못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규명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신비주의의 역사를 보면 이단으로 정죄되거나 ‘이상한 무리의 이상한 짓쯤’으로 치부되곤 했지요. 요즘도 성령체험을 했다며 방언을 하고 치병을 한다고 혹세무민하거나 깨달았다면서도 색욕과 탐욕에만 물든 종교인들의 모습이 신비주의에 대한 왜곡된 시각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이겠지요. *성해영 교수(오른쪽)와 오강남 교수(왼쪽) 성 교수는 오강남 교수와 함께 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란 책과 휴심정 기고 글을 통해 신비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는 엑스터시(신비)란 한마디로 ‘종교라는 찐빵에 들어 있는 앙꼬’라고 합니다. 앙꼬 없는 찐빵만을 손에 쥔 채 교리와 형식, 규율, 예식, 제복에 갇혀 있는 종교가 그 골갱이를 되찾아 자비와 평화의 종교성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까지 불교와 힌두교와 도교 등 동양 종교들은 지나칠 만큼 신비주의적이었지요. 반면에 기독교에선 초기의 영지주의가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신비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서양이 외연 확장에, 동양이 내면에 더 천착한 것도 이런 종교성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엑스터시는 ‘내 밖에 서보는 것’이라는 그리스어를 그 기원으로 합니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건 얼마나 큰 희망인가요. 틀 밖에 서서 좀더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사랑하게 될 ‘우리’를 여는 신비주의를 기대해봅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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