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가지 기질 뿌리엔 상처보다 삶의 원동력이
왜 저러는지 알게 되고 인간관계 갈등 이해
2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그날 저녁 무렵 소파에 앉아서 느꼈던 나의 감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치 모래밭 위로 바닷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물이 차오르듯 슬픈 기운이 가슴에 점점 퍼지는 듯했다. 가끔씩 겪는 일이긴 하나 그날은 그 증후가 나에게 심각한 문제로 느껴졌다. 하루의 연장선에서 보면 난 조금도 우울할 이유가 없었다. 2박3일 연수도 잘 마치고 돌아와 마음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갑자기 우울해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 틈에 있는 걸 즐기진 않으나 사람을 기피하지는 않는다. 대중 앞에서 연극도 하고 노래도 잘 부른다.
우울의 원인을 찾아 과거 상처 더듬어
나의 이 우울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원인을 찾고 싶었다. 어릴 적, 무슨 상처가 있었나? 나는 수색의 방향을 무조건 과거로 틀고 있었다. 나에게 무슨 상처가 있었는지를 무척 두려웠지만 알고 싶었다.
며칠이 지났다. 한 원로 수녀님이 강의를 들으려 가는데 나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그 강의가 ‘에니어그램’이었다. 하지만 내가 참석한 때는 강의 기간 7일 중 3일이 흐른 뒤였다. 거기에 동시통역이라 지루하기만 했다. 강의 내내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마지막 날은 그룹으로 나뉘어 앉았다. 나도 한 그룹에 들어갔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의 얼굴 분위기가 서로 비슷비슷하다는 게 신기했다. 그날 강의는 대부분 질문을 받았다. 기회다 싶었다. 나는 손을 들고 내 안의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대해 물었다.
“저는 가끔 이유 없이 우울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게 과거의 상처에서 왔을까하여 기억을 더듬었으나 특별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필리핀 강사 수녀님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신 후, 당신의 우울은 타고난 기질에서 온 것이 맞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 그 우울은 부정적인 게 아니라 나에게는 삶의 원동력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의 기분은 한마디로 해방감이었다. ‘상처’라며 주홍글씨를 붙여놓았던 움츠린 감정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기원전 2500여 전 전 신비주의 수도승이 전수
‘에니어그램’의 말은 아홉이라는 희랍어 에니어(ennea)와 그림이라는 그라모스(grammos)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2500여 년에 고대 근동지방에서 신비주의 수도승인 수피파에 의해 전해져 왔다. 지도자는 에니어그램을 2명의 제자에게만 전수했으며 인간 이해와 영성 수련에 사용하였다.
오랜 옛날에는 수도자들이 은둔처에서 혼자 생활을 많이 했다. 그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도 생활도 사회적인 형태가 생기고, 단체가 필요하게 되면서 공동체 생활이 형성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찾았을 것이다. 에니어그램의 탄생을 나는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에니어그램을 간단히 축약한다면 타고난 ‘기질’을 알려주는 거라 할 수 있다. 기질이란 본능적으로 표출하는 정서적 반응인 성격의 기본구조를 말한다. 이 구조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청사진처럼 존재하며, 성장과 함께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사람의 기질은 환경 조건이 어떠하든 간에 변하지 않는다.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기질을 아홉 가지로 구분한다.
수도자인 나는 몇 년을 주기로 집을 옮긴다. 그때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에니어그램을 알고부터는 훨씬 편해졌다. 내가 상대의 기질을 인정하고 거기에 따른 반응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 심리학의 관념이 잘못 이끌어
흔히 우리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성격 차이로 본다. 또 은연중에 우리 내부에 깊이 자리 잡은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믿음 때문에 성장 과정에서 받은 상처의 부작용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나의 ‘우울’ 현상이 타고난 기질에서 오는 긍정적 에너지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증세로 판단할 뻔 했듯이 말이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를 잘못 이끈다. 많은 부분들이 기질로 인해 선택하고, 행동하며,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는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에니어그램 9가지 유형을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하고자 한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타고난 기질들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우리는 일에서보다 관계 면에서 소중한 에너지를 빼앗기며 산다. ‘왜 저러지 정말?’라고 할 때가 참 많다. 관계란 상대에게 맞춘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의 행동이 왜 그렇게 나오는가를 알 때 진정한 교류가 형성된다.
에니어그램을 알면 알수록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이해로 바뀔 것이다. 자신도 타인도 문제 삼지 않고, 타고난 기질이 나와 어떻게 다른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