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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구원보다 동반…“법복자락만 봐도 근심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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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대안학교 지평선학교 교장 정상현 교무

5.jpg
 
 정신 개벽 내세워 창시한 지 100년
 불교 현대화·생활화로 4대 종교로
 
 하얀 저고리 검정치마에 쪽 찐 머리
 개교 당시 신여성의 상징
 
 박중빈 대종사 고향 옆동네에서 태어나
 부모 따라 어릴 때부터 교당 다녀
 
 “앞으로는 여성의 시대” 양성 평등
 ‘세상 위해 사는 삶’에 이끌려
 
 소금창고 개조한 열악한 법당에서
 여름에도 겨울옷 입고 지낼 정도
 한때 종교인 포기하려고 짐 싸기도



 9명의 제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 앞에는 각각 회중시계와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단도가 하나씩 놓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한지를 꺼내 붓글씨를 썼다. ‘사무여한’(死無餘恨·죽어도 여한이 없다)의 네 글자였다. 글자 아래 제자들은 인주 없이 엄지손가락의 지문을 찍었다. 백지장(白指章)이었다. 아무런 표시도 안 났다. “이제 마지막 기도 장소로 떠나라.”
 스승의 목소리는 떨렸다. 제자들은 회중시계와 단도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기도 장소로 가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자결하는 일만 남았다. 지난 3개월 동안 이들은 기도에 전념했다. 하지만 스승은 기도가 부족하다고 했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은 1916년 원불교를 창시했고, 제자들과 함께 갯벌을 막아 농토로 만드는 방언공사를 진행해 8만2600여㎡의 농토를 일궜다. 또 저축조합운동을 펼쳐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 개혁을 이끌었다. 9명의 제자들은 이런 사업의 주역들이었다. 스승은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장차 도탄이 한이 없을지니, 그대들은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선용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기도하여 하늘을 감동시켜볼지어다”라고 기도를 하라고 했다. 

10.jpg» 전북 익산 원불교 본원에 있는 박중빈 대종사 동판.
 
 9명 제자의 ‘혈인기도의 기적’
 제자들은 아홉개의 봉우리에서 각자 같은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고 끝내길 3개월, 스승 대종사는 아직 제자들의 기도에 사념이 남아 있다며 죽음으로 하늘을 감동시키자고 했다. 제자들은 흔쾌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죽음으로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 창생이 구원만 받는다면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결을 위해 떠나던 제자들은 한순간 “돌아오라”는 스승의 음성을 마음으로 들었다. 돌아와 보니 백지장을 찍은 한지에는 제자들의 혈인(血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대종사는 “이것은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온 증거다. 그대들의 마음에 천지신명이 이미 감응했다.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다”라고 선언했다.
 이 사건은 원불교에서 ‘혈인기도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은 토종 종교인 원불교가 한국 교계에서 4대 종교로 인정받을 만큼 성장한 배경에는 원불교를 만든 박중빈 대종사(1891~1943)와 함께 9명의 제자들이 보여준 이소성대(以小成大·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룬다)와 무아봉공(無我奉公·내가 없이 공익을 위한 정신) 등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걸고, 불교의 현대화와 생활화를 주장하며 ‘생활불교’를 표방한 원불교는 초기부터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대학교(원광대)와 각급 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탈북 청소년을 위한 학교도 운영한다. 또 원불교는 11개의 대안학교도 운영한다. 지평선 중·고등학교도 그런 대안학교의 하나다.
 
 남자 교무가 탄생하면 박수 칠 정도
 3년 전부터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는 정상현(61) 교무는 “젊은 시절 원불교 지도자들의 흩날리는 법복자락만 봐도 마음속의 근심과 갈등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 그리고 정갈하게 빗은 쪽 찐 머리로 특징되는 원불교의 여신도 복장은 개교 당시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건국대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한 정 교무는 26살의 나이에 원불교에 입교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좋지만,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 더 가치있는 삶이야”라는 원불교 스승의 이야기에 끌렸다. 마침 박중빈 대종사 고향(전남 영광)의 옆동네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원불교 교당에 데리고 다니곤 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다시 입학해 대학원까지 마친 정 교무는 전북 임실의 조그마한 원불교 법당에 배치됐다. 소금창고를 개조한 법당은 생활하기에 너무나 열악했다. 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지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한때 종교인을 포기하려고 짐을 싸기도 했다.
 하지만 원불교의 동그란 ‘O’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일원’(一圓)의 진리는 박중빈 대종사가 자신이 깨친 것을 상징화해 표현한 원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대종사는 인간과 우주의 근원, 마음과 현상의 관계, 자연의 이치와 요소들이 운용되어가는 원리를 ‘하나’의 ‘일’과 텅 빈 허공인 ‘원’으로 형상화했다. 인간의 본래 마음을 상징하는 일원의 진리는 본래 크고 작음, 있고 없음의 일체의 상태를 초월한 ‘절대’이자, 어떤 한계나 경계도 없는 ‘무한’이다. 그는 신의 자리에 인간 마음의 ‘절대성’, ‘무한성’, ‘불멸성’을 대치시켜 인간이 이를 체득해 성인이 될 것을 요청했다.
 여성에 대한 원불교의 평등정책도 원불교의 여성 참여를 부추겼다. “초창기에 여성이 교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종교는 원불교가 유일했어요. 대종사께서는 앞으로 시대는 여성의 시대라고 말씀하셨어요. 남자 교무가 탄생하면 박수를 칠 정도였으니까요.” 

3.jpg» 박중빈 대종사 초상.
 
 흙의 철학 담아 햇살 환한 교사 지어
 정 교무는 2003년 지평선학교가 문을 열 당시부터 참여했다. 폐교된 학교를 인수해 새롭게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건축은 근사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이라는 말을 남긴 건축가 정기용(1945~2011)씨를 설득했다. “기존의 딱딱하고 무표정한 건물이 아닌 인문학적 사유와 사색을 할 수 있는 설계를 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드렸어요.”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새마을운동을 ‘삶과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 문화적 학살’이라고 정의했던 정씨는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흙의 철학으로 지평선학교의 교사를 지었다고 한다. 정 교무는 “자연의 빛을 끌어들이고, 창문을 액자처럼 배치해 철마다 변하는 자연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감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자기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불교를 상징하는 원형으로 지은 도서관 역시 천장에 난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도서관 구석구석을 비추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원불교는 젊은 종교입니다. 역사가 이제 100년입니다. 기존의 종교가 신의 구원을 바란다고 하면, 원불교는 인간과 같이 가는 동반자의 입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대종사께서는 ‘성스런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새 시대의 새로운 종교로, 원불교는 소리 없이 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 정 교무는 “원불교는 국내 530개 교당과 국외 24개국 69개 교당에 150만명의 교도가 있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불교는 다음달 1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5만명이 참가하는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이달 25일에는 서울광장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재난·재해로 인해 희생된 영령을 위한 천도재를 지낸다. 또 이달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와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익산/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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