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롭박스> 실제 주인공 이종락 목사
새벽 3시 반에 전화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죄송하고 미안합니다. 대문에….”다급하게 나가보니 탯줄도 안 자른 아기가교회 벽 뚫고 베이비 박스를 만들어문을 열면 자동으로 벨이 울리게 했다한달 평균 15명 이틀에 한 명꼴로 아기가 온다직접 탯줄 자른 아기도 120명이나 된다입양 안되는 전신마비 등 장애아 9명은 직접 키워미혼모 엄마 열 중 여섯은 10대산에 묻으려다가…하혈을 하며…교복에 둘둘 말아…수면제를 먹고 함께 세상을 떠나려다…베이비 룸 만들어 상담도 한다펑펑 울며 신세 한탄하다 다시 데려가면분유와 기저귀, 생활비 지원해준다미국 대학교 학생들이 다큐영화를 만들었다미국 전역 극장에서 상영돼 500만 관중 눈물관람‘베이비 박스’가 전세계로 번져나갔다인디아나주에서는 공공기관 의무적 설치 법안중국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필리핀 등으로
한밤중이었다. 새벽 3시 반. 전화가 울렸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대문에….” 한숨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아주 어린 소녀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순간 뛰어나갔다. 어두운 골목엔 찬바람만 불었다. 교회 대문 앞에는 종이박스가 놓여 있었다. 생선 비린내가 짙게 풍기는 낡은 종이 박스를 조심스럽게 풀어헤쳤다. 갓난 아기였다. 탯줄도 그대로 있었다. 울지도 않았다. 얼굴에 손을 대보니, 차가왔다. 아마도 대문 앞에 오래 놓여 있었던 것 같다.
태아를 갖다 놓은 소녀는 시간을 보내다가 전화했을 것이다. 종이 박스 주변엔 비린내를 맡고 온 덩치 큰 고양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리진, 아직 숨이 남아있는 아기를 가슴에 품은 이종락 목사(62·주사랑공동체교회·사진)는 결심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겠다고. 9년 전이었다.
제주도에서까지 아이 안고 온 미혼모도
철공소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갓난아기를 넣을 수 있는 상자를 만들었다. 교회 벽을 뚫어 설치했다. 부드러운 담요를 깔고, 바닥이 차지 않게 열선도 설치했다. 환기 시설도 만들고, 아이를 넣기 위해 문을 열면 자동으로 벨이 울리게 했다. ‘베이비 박스’라고 이름을 붙혔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 땅에 버려져 이 박스에 오는 아이가 없도록 해주소서. 이 박스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만 주님이 이 문을 열어 주소서.”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진 지 3개월만에 벨이 울렸다. 대낮이었다. 아이는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처음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아이를 보곤 모두 울었다. 다시 기도했다. “비록 부모는 이 아이를 버렸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서 이 땅에 크게 쓰임받는 아이로 자라게 도와 주소서.”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 지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갈대 바구니에 실려 나일강에서 흘러 왔듯이, 이 아이도 베이비 박스에 실려 험한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축복기도를 했다. 16년 전에 결혼했으나 아이가 없는 한 목사가 모세를 입양했다. 그 목사는 모세 말고도 베이비 박스에 온 아이를 세 명 더 입양해 잘 키우고 있다.
이후로도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다. 태어난 직후 산에 묻으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다시 안고 온 태아의 얼굴엔 흙이 묻어 있었다. 수면제를 먹고 함께 세상을 떠나려다 온 10대 산모도 있었고, 아이를 3층에서 던지고 자신은 5층에서 뛰어 내리려다 포기하고 찾아온 엄마도 있었다. 하혈을 하며 아이를 안고 온 소녀도 있었다. 교복에 둘둘 말아 넣어둔 아기도, 쌍둥이도 다섯 쌍이나 있었다. 제주도에서 아이를 안고 온 미혼모도 있었다.
“입양특례법은 잘못, 몰래 낳은 아이 어떻게 출생신고 하나”
지난 6년 동안 베이비 박스에 넣어진 아이들은 모두 946명. 한달 평균 15명 가량이니, 이틀에 한 명꼴로 아이가 온다. 이 목사가 직접 탯줄을 자른 아이도 120명이나 된다. “버려진 영아들의 60%는 엄마가 10대입니다. 또 90%는 결손 가정 출신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올바른 성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지난해부터 ‘베이비 룸’을 만들었다.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아기 부모들과 이야기하고 설득하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 목사는 미혼모에게 칭찬을 한다고 한다. “아이를 낙태하지 않고, 10달 동안 뱃속에서 잘 키우고, 잘 낳았으니 최선을 다했어요. 더구나 버리지 않고 이곳까지 안고 왔으니 한 생명을 살린 일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미혼모들은 펑펑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한다. 상담한 800여 명 중 약 150명이 직접 키우겠다며 다시 데려 갔다. 이들에겐 분유와 기저귀, 생활비를 지원해준다. 당장 못 키우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데려간다고 서약서를 쓰고 아이를 두고 가기도 한다.
특히 지난 2012년 8월부터 입양특례법이 실행되면서 이곳으로 오는 아이가 9배나 늘었다. 출생 신고를 해야 입양을 보낼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며, 출생 신고를 못하는 10대 미혼모가 버리는 아이가 늘어난 것이다. ”몰래 낳은 아기를 어떻게 출생신고합니까? 입양을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내는 겁니다. 현실을 무시한 법률입니다.”
이 목사는 모두 9명의 아이를 직접 입양했다. 9명 가운데 3명은 전신마비이고, 3명은 앉아서 생활해야 한다. 나머지 3명도 정신 지체이거나 다운증후군 환자이다. 베이비 박스에 온 아이 가운데 입양이 안되는 아이들을 직접 키우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입양을 하려 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으로 키웁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 19일 국내 개봉
이 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영화예술학교 학생들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나섰다. 브라이언 아이비 감독 등 12명의 학생이 2년 동안 베이비 박스 이야기를 촬영해 지난해 <드롭박스(Drop Box)>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개봉했다. 반응은 엄청났다. 미국 50개주 870개 극장에서 매진과 앙코르 상영이 계속되며 500만 관중이 눈물을 흘렸다. 애틀랜타주에서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고, 인디아나주에서는 베이비 박스를 병원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에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법안을 만들기도 했다. 중국에도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고,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필리핀 등 5개국에서 베이비 박스 설치를 위한 자문을 요청해 왔다.
영화 <드롭박스>는 오는 10일 열리는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개막작으로 한국 관객을 찾아온다. 영화는 이미 제9회 샌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 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에서 가장 정의로운 영화상을 수상했고, 제3회 밴쿠버기독영화제 등에 공식 초청됐다. 19일부터 국내 개봉된다.
지난 3일 오후 베이비 박스가 있는 서울 난곡동 이 목사의 교회에서 인터뷰하던 도중 베이비 박스의 벨이 울렸다. 순간 이 목사가 뛰어 나갔다. 아이는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이 호기심에 베이비 박스 문을 열어 본 것이다. “다행이네요, 휴우~.” 이 목사가 깊은 안도를 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