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혐오범죄’로 살해된 ㄱ(23)씨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글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꽃을 놓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오빠, 빨리 와. 엄마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동생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급하게 차를 돌려 어머니께 달려갔다. 침상에 웅크린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헐떡이고 계셨다. 그건 말기암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셨던 옛 얼굴이 아니었다. 이 년 반이나 독한 항암 치료를 견디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웃음은 사라졌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받지 않겠다며 입원을 거부하시던 당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메마른 손을 붙들고 치솟는 눈물을 억누르며 몸서리쳐 기도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한 모습으로, 어머니는 하늘로 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당시 고통스러워하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그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내 마음의 가책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고통이 있다. 이 년 전 어느 날, 수학여행 떠난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이 배에 갇혀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충격적인 광경을 실시간 현장 중계로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죽어가는 끔찍한 장면을 상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국민들은 빨리 구조하라고 외쳤지만, 정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전해 듣는 고통도 크지만,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고통은 훨씬 더 크고, 가책과 함께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 5월28일 구의역 스크린도어 작업 중 사망한 청년을 추모하기 위한 시민들의 추모 행동이 사고 장소에서 이어지고 있다. 박승화 기자
지금도 누군가의 방치 속에 죽어가는 생명이 있다.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죽어갔던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 가부장적인 성차별의 나라에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얻어맞고 성적인 노리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죽어갔던 청년의 비명 소리도 들린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오빠, 누군가의 친구가 죽어가고 있다. 사람의 생명보다 돈 몇 푼에 절절매는 돈 귀신 들린 나라에 태어난 죄로, 노예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 알바생으로 인턴으로 비정규직으로 사람대접 못 받으며 일하다가 자존심도 인권도 목숨도 잃고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는 자를 개인 탓이라며 바라보기만 할 뿐 손쓰지 못한 채 떠나보낸다면, 남은 자의 몫은 눈물과 가책, 그리고 다음은 내 차례일 수밖에 없다는 공포의 형벌이다. 이 공포의 세상에 구원은 어디 있는가? 일찍이 윤동주는 죽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예수의 비유에는 죽어가는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그는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가지 않았다. 그를 불쌍히 여겼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응급처치를 했고, 다른 사람과 함께 힘을 모아 치료했고, 이 일을 위해 비용을 감수했다. 예수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는 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고 말했다. 어쩌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이 윤동주가 말한 길,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