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예수
2013년 06월 20일 <당당뉴스> 지성수sydneytax1@hanmail.net
삶에서 웃음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아프리카에서 오지에서 모르는 종족끼리 서로 만났을 때 싸움을 피하려면 먼저 웃으면 된다고 했다.
오죽하면 ‘웃음치료’라는 것이 있을까? 웃음은 죽을 목숨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 웃음을 가져다주는 직업으로 코미디언이라는 것이 있다. 나도 한 번 코미디계로 진출할 뻔한 기회가 있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는 사단 마다 군악대를 중심으로 ‘문화선전대’라는 딴따라가 편성되어 있었다. 예능에 소질이 있는 병사들을 모아서 연습을 시켰다가 가요 학원이나 술집 등에서 싸구려 여자 가수들을 불러다가 부대마다 순회를 하면서 위문공연을 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백마 부대가 월남에 있을 때는 한국에서 위문단이 정기적으로 오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문화선전대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철수를 해서 귀국을 한 직후에 군단내 ‘문화선전대 경연대회’가 있다고 해서 문선대를 급하게 만들어야 하게 되었다. 평소에 나를 잘 아는 정훈장교가 책임을 맡게 되어서 나에게 사회자를 해보라고 했다. 나도 대학 때 축제에서 사회를 본 경험도 있고 해서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시작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대학이나 교회에서 한 가닥 하던 내 실력으로는 거친 군대 문화에서 사람을 웃길 수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웃기느라고 애를 써도 요즘 말로 분위기가 썰렁했다. 군단 경연대회 날짜가 다가오고 사회가 재미없다고 계속 태클이 들어오는데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빠져나갈 도리가 없나 하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서라벌 예대 출신의 신병이 전입해 왔다.
다행히도 소위 배추머리로 알려진 코미디언 김병조가 우리 부대로 전입을 해왔는데 한 번 시험 삼아 시켜 보았더니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았다. 아직 신병인 그가 군대 문화에 어떻게 그렇게 잘 적응이 되는 유머를 구사하는지 탄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연기를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코미디언으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경에 왜 예수가 웃는 이야기가 없을까? 예수의 웃음에 대해서는 어떤 전설도 전해지지 않고, 어떤 성화에서도 예수는 웃는 법이 없다. 근엄하고, 침울하고, 서글프고, 비통해 하는 얼굴. 지난 2000년 동안 수억 명의 기독교인이 보아왔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예수가 웃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유머와 풍자를 즐겨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마다 이미 간음을 한 자이니라.”라고 한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폼을 잔뜩 잡고 자기들의 경건을 내새울 때 “그려? 사랑을 하려면 원수를 사랑할 정도는 되어야제? 안 그려?” 또는 “그려? 진짜로 거룩하다면 여자가 보고도 꼴리지 않아야제? 안 그려?” 라는 정도의 풍자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웃음을 지으며, 예수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난해 두려운 권력들을 웃음으로 날려 보내던 나꼼수가 폭풍을 불러 일으켰었다. 비록 결과는 ‘찻잔 속의 태풍'되고 말았다는 것이 우리를 한 없이 슬프게 하지만 말이다. 나는 예수가 경건하고 권위적인 바리새들을 향하여 나꼼수식 멘트를 날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로이트는 웃음을 순진한 농담과 자의적 농담으로 나눈 뒤 밤에는 꿈이, 낮에는 농담이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꿈은 순전히 개인적인 데 반해 농담은 사회적이라고 한다. 즉 농담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말씀의 참맛은 풍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말씀은 당시 권세자들에 대한 날선 공격만이 아닌 독설, 유머 그리고 사회의 비판 등을 적절히 버무려서 당시 민중들을 깨우쳐 일깨우는 방편으로 '풍자 기법'을 이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구.....
*이 글은 당당뉴스(http://www.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