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새롭게 정착한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는 탑정호라는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호숫가 마을이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근처에 인가가 많지는 않고, 여행객을 겨냥한 식당과 숙박시설 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한적하고 운치있는 곳이다. “작년 여름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내려놓고 새 출발을 위한 모종의 변화가 필요하다 싶었을 때 논산이 다가왔어요. 저는 사실 고향이 싫어서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논산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지요. 서울을 뜨더라도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러 우연이 겹치면서 결국 논산으로 오게 됐네요.” 퇴역 교장 선생님이 지어서 살았다는 이 이층집이 작가의 마음을 끈 것은 크게 두 가지. 대문에서 마당에 이르는 진입로의 비스듬한 경사, 그리고 집 뒤꼍의 너른 암반과 그 아래 작은 연못이었다. “처음부터 언젠가 와 본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어요. 입구의 야트막한 경사는 저의 오랜 로망이었고, 뒤꼍의 바위는 앉아서 소주 한잔 하기 딱 좋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서울을 뜨기 싫다며 뒤에 남은 부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평창동 집을 나설 때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유배를 가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2011년 11월27일치 페이스북 일기에 썼다. ‘나는 대체 왜 이 길을 가려고 하는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듯 떠나온 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 논산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뜻밖에도 ‘귀신’들이었다. “낮에는 집 앞 호수와 그 너머 산들을 보거나 차를 몰고 논산 전역의 골목골목을 둘러보는 일로 소일할 수가 있어요. 문제는 밤이죠. 천지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집 안에 홀로 웅크려 있자니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우선은 책을 읽으면서 버텨 보지만, 밤 열 시쯤 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주를 아주 빠른 속도로 마시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취기가 돌면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이기도 해요. 결국은 그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지경까지 가는 거죠.” 논산 집에서 그가 만난 귀신들은 모두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라고 그는 말했다. “호수가 끝나는 안쪽이 계백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황산벌이에요. 미륵세상을 꿈꾸었던 견훤을 무너뜨리고서 왕건이 세운 절 개태사가 그 인근이구요. 동학의 남북 접주들이 모여 우금치 전투를 준비하던 곳도 근처입니다. 금강 유역이란 대대로 패배의 역사가 짙은 곳이죠. 5천 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을까요. 뗏장 밑의 억울한 영혼들이 저를 매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저를 이곳으로 부른 것만 같아요. 서울에 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죠.” 그는 또 조선 중기 예학(禮學)의 태두 격인 사계 김장생으로 대표되는 유구한 유학적 전통 역시 그가 발견한 고향 논산의 새롭고 중요한 면모라고 강조했다. “흔히들 논산 하면 육군훈련소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논산은 사실 매우 유서깊은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장입니다. 율곡 이이의 법통을 이은 게 김장생이고,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바로 사계의 제자입니다. 그 송시열의 제자 격임에도 주자학에 반기를 든 개혁적 지식인 윤휴에게 우호적이었던 윤증의 고택 역시 논산에 있습니다. 소론의 태두로 불리는 윤증이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보수의 거두 송시열과 진보의 거두 윤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소설도 쓰고 싶어요.” 수구초심이랬다고, 나이 든 작가가 고향으로 내려가면 대체로 자연과 벗하는 가운데 차분하게 삶을 정리하는 말년을 상상하기 쉽지만 ‘영원한 청년 작가’를 자처하는 박범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유유자적과 안빈낙도는 가라! 나는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 여기 왔다.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인간이 온 것이다!’ 예순을 훌쩍 지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안에 도사린 채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는 어느 불온한 청년이 그의 귀에 대고 외쳐 대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Attached Youtube Video 그렇게 내려간 고향에서 그는 그러나 아직 새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소설 <말굽>을 탈고한 때로부터 치자면 1년 반 동안 ‘작가 휴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90년대 초중반의 ‘절필’ 기간을 포함해 작가 생활 39년 동안 중단편집을 제하고 장편만도 39편을 낸 작가치고는 썩 이례적인 일이다. <은교>에서 <비즈니스>를 거쳐 <말굽>까지 세 장편을 1년 반 동안 몰아서 썼던 그 아닌가. “소설을 안 쓰는 게 더 힘들다”던 그가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게 걱정스럽다기보다는 그 배경이 궁금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해서 내려오긴 했는데, 그 방향이 어디일지에 대해 아직 확신이 서질 않네요. 1993년 절필 선언을 하고 96년에 <흰소가 끄는 수레>로 복귀한 뒤부터 <말굽>까지는 말하자면 초월을 향한 갈망에 끄달렸던 시기라 할 수 있지요. 지금은 그 갈망의 시기가 끝나고 내 문학 인생의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지점인데, 그게 어떤 것일지 저부터가 촉수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는 셈이에요. 그렇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작가, 그 공간 - 창작의 비밀을 간직한 장소 28> (최재봉 지음, 한겨레출판) '그가 지금 꿈꾸는 문학 - 소설가 박범신의 논산 집필실'중에서 ■저자 최재봉 1961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영어영문학과와 그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한겨레> 문학기자로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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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가, 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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