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신
“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무겁게 살죠? 매사에 너무 경건하고 심각하고 엄숙하고 공격적인 것 같아요…….”
어쩌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얼벙어리가 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왜 그럴까요? 본래 예수는 인간이 걸머진 삶의 무거운 멍에마저 가볍게 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했는데! 예수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삶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바꾸는 예술이라는데. 그런데 왜……?
나는 며칠 전 고인이 된 신현정의 시 <하나님 놀다 가세요>를 읽었습니다.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들판은 파랑 물이 들고/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옷 하얗게 입고/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나는 이 시의 첫 줄을 읽고 혼자 킥킥대며 웃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제 또래에게 장난을 걸듯 하는 유쾌하고 거침없는 말투 때문이었죠.
헉! 하나님이 ‘화내고 부어’ 있다니! 어쩌면 시인은 하나님을 좁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 인간의 왜소함에 딴지를 거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을 만나다 보면, 대개 그렇습니다. 마음이 좁쌀만 한 이가 믿는 하나님은 좁쌀만 하게 느껴지고, 마음이 하늘처럼 광활한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늘처럼 광활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치 딴지일보 총수처럼(!) 거침없이 하나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전지전능, 권위, 위엄 같은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던지고 파랑 물이 들고 있는 들판으로 내려와 한가로이 풀이나 뜯자고!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을 지닌 염소들이랑 섞이자고! 이 얼마나 유쾌하고 천진한 상상력입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자기 존재의 결핍을 호소하며 칭얼댑니다. 무얼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나 구걸하는 거지처럼. 이런 이들이 찾는 하나님은 자기 욕망을 투사한 ‘만들어진 하나님’이기 십상이지요. 만들어진 하나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야말로 우상 숭배가 아닌가요.
하지만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런 자기 결핍이나 욕망 때문이 아닙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은 ‘무위’(無爲)의 놀이지요. 그런 무위의 놀이 속에 하나님조차 끼워 넣고 싶은 것입니다. 그냥 이쪽으로 내려오시라고, 내려오셔서 한가로이 함께 놀자고.
“세상의 일들은 즐거운 숨바꼭질입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영원한 술래로 만들어 보려구요.”(신현정, <바보 사막> 시인의 말에서)
그러니까 시인은 우리의 삶을 아이들의 ‘숨바꼭질’ 같은 놀이로 여깁니다. 시인은 그래서 틈만 나면 개구쟁이처럼 발동하는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술래’로 만들어버리지요. 염소도 술래, 하나님도 술래……세상에, 술래 아닌 것들이 없지요.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무어 할 것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줄을 있는 대로 풀어주다가/아예 모가지를 벗겨주었다네.”(신현정,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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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노는 아이들. MBC <아빠 어디가> 중에서
시인의 천진하고 짓궂은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줄에서 풀려난 염소가 천방지축 날뛰며 달아나는 것을 보며 깔깔대는! 지금 시인이 염소랑 장난치는 들판은 하나님도 즐길 수 있는 유쾌한 공간입니다. 누가 염소인지 누가 하나님인지 눈치 채지 못하는 공간. 알량한 분별로 조물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런 공간. 이런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일 것입니다. 시인은 지배와 예속, 주인과 종의 수직적 관계를 아주 가볍게 수평적 관계로 바꾸어놓습니다. 이런 수평적 관계 속에서라야 나부끼는 ‘뿔도 서로 부딪치’는 놀이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호모 루덴스! 그렇습니다. 시인이 바라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놀이하는 인간’에 다름 아닙니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도 ‘놀이’야말로 신성에 부합하는 것이라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어떤 수도원을 찾으셨습니다. 사제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모에게 경배를 드렸지요.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했고, 어떤 이는 성서를 그림으로 옮겨 보여드렸습니다. 성인들의 이름을 외우는 사제도 있었습니다. 줄 맨 끝에 있던 사제는 볼품없는 사람이었는데, 제대로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지요.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습니다. 다른 사제들은 수도원의 인상을 흐려놓을까 봐 그가 경배 드리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더니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지요. 그것이 그가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습니다. 그 순간,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지요.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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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렇다면 참된 경배는 경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보다 ‘놀이’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놀이를 잃어버린 종교 의례는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을 지나친 경건과 심각함과 엄숙주의에 빠지게 만듭니다. 거기에 파릇파릇 움트는 영혼의 생기는 없습니다. 영혼의 생기가 없으면 거룩하신 이와의 생동하는 교감도 일어날 수 없지요.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겠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신을 믿는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춤은 따로 목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놀이엔 목적이 없습니다. 순수한 기쁨과 희열의 소산인 춤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나비의 춤, 풀꽃들의 춤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명성이나 박수갈채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염소들 곁에 내려와 서로의 뿔을 부딪치며 노는 하나님의 춤이 무슨 상품처럼 실용성을 지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춤을 통해 하늘과 땅, 조물주와 피조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은 소중하지요. ‘무엇을 위해?’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춤과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너무 경건하고 심각하고 엄숙하고 공격적인 종교인들을 만나면 이 시를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읽어주려 합니다.
“킥킥, 놀다 가세요……킥킥,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