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깸
늘 낡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노동자 배역을 마치고 막 세트장을 빠져나온 배우처럼, 매번 같은 차림이었다. 술자리에서도 옅은 미소로만 답할 뿐 말수 적은 이였다.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미사에서 그를 본지 석 달쯤 지나서야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빈소에는 상복도 입지 않은 열 살 남짓의 큰딸이 문상객을 맞았고, 어린 동생들은 문상객 어깨를 짚으며 음식상 사이를 철없이 뛰어다녔다. 이혼 후 딸 셋을 혼자 키웠다. 일이 고됐는지 주말이면 잠만 잤다. 그날 아침도 딸은 아빠가 잠을 자는 줄 알았단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목소리도 기억나질 않았다. 돌이켜보면 “미사 오는 노동자 중 하나”, 딱 고만큼이 그와 맺은 관계였다.
밀양 주민들의 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가 한창일 때, 우연히 산업통상자원부의 고위직과 만나게 되었다. 시종일관 깍듯한 매너와 겸손한 어투였지만 그는 “희생은 불가피하다. 더운 여름 직장에서 돌아와 전력 부족으로 에어컨을 켤 수 없다면 그것은 국민 삶의 질의 문제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칠십부터 구순 노인까지 순번을 돌아가며 오르던 산길, 일상적 불법채증과 몸싸움, 자책과 분노 등이 모두 에어컨 단추 하나로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삶의 질” 한마디와 고압 송전선로 밑의 또 다른 일상들을 맞바꾸는 그 ‘천진난만’은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였다. 한동안 전기 절약 때문이 아니라, 밀양 사람들이 생각나 에어컨을 켤 수 없었다.
세 딸의 아버지를 만나던 당시 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소임을 받아 동분서주하던 때다. 나름 성실하다고 믿었고 실제로 온갖 직종의 사람들을 시간을 쪼개가며 만났다. 뿌듯했다. 돌이켜보면 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관념을 사랑했던 것 같다. 정작 지척의 노동자는 만나지 못한 채 말이다. 세 딸의 아버지가 “노동자 중 하나”로 내게 정리되듯, 한 마을의 사연을 대하는 고위공직자의 저 말끔한 한마디처럼, 크기만 달랐지 타인의 삶에 대한 계량화는 이미 우리의 습속이 된 지 오래다.
인간사의 고통은 여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단어나 숫자에 온전히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등가를 이룰 수 없는 둘 사이 탈락된 무엇만큼 인간은 잔혹해지거나 비참해진다. 이 습속이 가장 고약하고 잔인해질 때는, 평범한 삶들이 억척스레 꾸려가는 일상을 절대 알지 못하는 천진무구 앞에서다. 이 무구함엔 304명의 죽음·실종에 대한 애타는 질문과 전쟁 무기를 안고 살아야 하는 일상들의 아우성은 한낱 불필요한 논쟁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힌 당사자 아닌 짓밟은 자와 합의하고, 수천수만 노동자들의 일터를 단박에 지워버리는 일쯤은 간단해 보여 더 잔인하다. 백치는 잔혹의 강도를 알지 못한다. 그에게 사람은 개돼지다.
누군가를 헤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고통일 때는 더 그렇다. 예언자가 그랬다. 도성 전체에 저주를 퍼붓다가도 끝내 괴로워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하느님을 편들었고,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들을 대변했다. 잿더미가 될 도성 안 사람들이 눈에 밟혀 재앙을 전해야 하는 몹쓸 운명을 저주했다. 괴롭지만, 이 경계의 칼날 위에서만이 그는 인간이다. 헤아릴 수 없거든 헤아리고자 할 때 인간일 수 있다. 오죽하면 신이 인간이 되었을까.
장동훈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