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정주영 회장 가슴 먹먹하게 한 호박잎에 싼 떡
밥을 벌기 위해서 밥을 먹는 건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서울=연합뉴스) 배재만 기자=천년고찰 진관사가 개산 천년을 기념해 13일 낮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 지역 어르신들들 초청해 만발공양(萬鉢供養) 행사를 열고 있다. 만발공양이란 많은 분들에게 발우에 공양을 대접하는 불교식 식사법으로 작은 음식물 찌꺼기도 소홀히 하지 않는 감사와 청결의 마음, 평등의 마음, 절약의 정신등이 담겨 있다. 2010.10.13 scoop@yna.co.kr
지금은 지구별을 떠난, 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그가 불교계의 행사에서 간혹 절집 인연을 소개한 사연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소년 시절에 그는 간 큰 일을 도모한다. 부친이 황소를 판 목돈을 가지고 친구와 집을 나선 것이다. 돈을 아끼려고 주린 배를 참으며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를 듣고 산사를 찾아 한 끼 밥을 청했다. 마침 그날은 절에서 큰 제를 올리는 날이어서 밥상이 푸짐했다. 지치고 허기지고 목마른 나그네 길이었으니 얼마나 꿀맛이었으랴! 너끈하게 배불리 밥을 먹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는데, 그 절 주지 스님이 길 가다가 먹으라고 호박잎에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싸주었다. 그때 소년 정주영은 가슴이 그만 먹먹하더란다. 절집을 생각하면 그때의 절밥과 주지 스님의 백설기 떡이 생각난다고 했다.
예부터 절집 인심은 공양간 밥에서 나온다고 했다. 누구나 절밥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절밥 인심은 인색하지 않다. 관악산 연주암은 등산객에게 내어주는 비빔밥 공양으로 유명하다. 국수 공양을 하는 절도 많다. 초하루와 보름 기도회, 일요 법회를 마치면 절에서는 으례 밥을 먹는다. 밥을 크게 집밥과 식당밥, 그리고 절밥으로 나눌 수 있겠다.
독일인이 낯설고 불편해 하는 정 문화
밥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고 감정을 훈훈하게 덥혀 주는 신묘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끈이 되기도 한다. 아마 작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여동생이 독일인 남편, 그리고 딸과 함께 내가 살고 있는 일지암에 찾아왔다. 그 가족은 밝고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다소의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차를 마시면서 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독일인은 예의와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문화에 익숙하다. 그것이 사회의 질서에는 좋은데 서로의 감정 교감에는 장애가 된다. 머리는 냉철하고 몸짓은 엄정한데 가슴이 허전하다. 그래서 부인은 인간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이 ‘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해관계와 규칙을 넘어 소소한 배려와 친절을 나누며 살고자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런데 이런 정을 남편과 독일인은 매우 낯설어하고 때로는 불편해 한다고 한다. 가령 독일인은 아이의 생활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로 아기일 때도 방에 따로 재우는데, 그 부인은 딸아이가 부모와 정서적 애착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같이 재웠다. 그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도 중요하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정을 나누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독일인 남편은 정에 대한 개념이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날, 두륜산을 등산하고 일지암 건너편에 있는 진불암에 들렀다. 그날은 마침 칠월칠석날이어서 시골 할머니들이 많이 오셨다. 진불암 주지 스님은 반갑게 맞이하며 “밥 먹고 가라”며 방으로 안내했다. 할머니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밥상을 차려 주었다. 외국인과 예쁜 딸을 보고 좋아라 하며 이것저것 밥상에 얹어준다. 독일인 남편과 딸은 특히 냉미역국이 맛있는지 잘 먹었다. 할머니들은 자기들끼리 밥을 먹으면서 이쪽 밥상을 보며 반찬이 떨어지면 다시 가져다주었다. 미역국도 한 그릇 듬뿍 가져다주셨다. 후식으로 수박과 참외도 푸짐하게 내오셨다. 시원하고 상큼한 매실차도 나왔다. 얼핏 곁눈으로 보니 독일인 남편의 표정이 다소 복잡하다. 상대방 식사량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막 퍼주는 이 상황이 생경한 모양이다. 다 먹고 마당에 나왔는데, 아이구야! 어느 할머니 보살님이 떡과 과일을 잔뜩 안겨준다.
»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은 ‘뭘 자꾸 멕이는 것’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소년 정주영이 받은 밥과 떡은 무엇이라도 ‘멕이고자’는 하는 인심과 인정이었다. 그날 밤 내가 독일인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 진불암에서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건넨 밥이 바로 ‘정’이라고. 사람의 자존감을 높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튼튼하게 이어주는 것에 진심과 사랑이 담긴 밥 이상의 것이 있을까 싶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명대사. 북한군 장교가 그저 재미있고 화목하게 지내는 두메산골 사람들이 신기하여 촌장에게 묻는다. “영감님! 대체 이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뭡네까?” 촌장이 답한다. “뭘 자꾸 멕이는 것이제.”
» 편의점 한 편에 서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청년들을 보면 심란하다. 박승화 기자
화목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밥은 매우 긴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밥상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하는 공감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대중이 살아가면서 세 가지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예불과 운력(노동), 그리고 공양이다. 함께 밥을 먹는 일이야말로 정서의 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절에서는 공양간이 있어 밥을 지어 먹는다. 하지만 타이와 미얀마 등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지금도 수행승들이 아침에 거리로 나가 신자들이 주는 밥을 얻어먹는 탁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천육백여년이 흐르도록 끊이지 않는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신자들이 수행승들에게 공양하는 일은 신심과 공경의 뜻을 담고 있으면서도, 수행승들은 신자들에게 일종의 책무를 느끼게 한다. 그 책무는 바로 소욕지족의 검박한 삶을 유지하면서 진리를 설하는 일이다. 즉 신자와 수행승들은 밥과 법(불법)을 주고받는 관계다. 이렇게 밥은 세간과 출세간, 몸과 마음을 이어 준다. 한 그릇의 밥에 담긴 은혜와 고마움을 느끼면서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
»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안전문(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체 직원 김아무개군의 가방에 있던 스패너 등의 작업공구와 컵라면, 스테인리스 숟가락, 일회용 나무젓가락. 유가족 제공
볼 일이 있어 서울에 가는데 아침 출근 시간대에 편의점 한 편에 서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청년들을 보면 심란하다. 씁쓸하고 애처로운 마음이 스며온다. 밥은 곧 평등이고 존엄이고 즐거움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밥은 여럿이 먹어야 하고 넉넉한 시간에 여유롭게 먹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밥 먹는 행위가 밥을 벌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내려앉았다. 구의역에서 세상을 떠난 젊은 청년이 남기고 간 컵라면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br>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br>정성이 깃든 이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br>이웃과 나누면서 살겠습니다.”
공양기도문이다. 밥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 시대 모두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하는가. 절실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