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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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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과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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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과 반야심경

 
편집기도하는노인.jpg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1. 공감하는 매력은?
 
종교를 떠나 모두가 공감하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의 기도문이다. 나는 이 기도문에서 사랑과 평화를 간구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는다. 무엇보다도 시적인 운율이 주는 감동은 이 기도문의 감동에 매력을 더한다. 그래서 이 기도문 그리스도를 신앙하지 않는 곳에서도 걸려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기도문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종교를 넘어 모두에게 울림을 주는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쉬운 문장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와 역사, 일상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지침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미움. 다툼, 분열, 의혹, 오류, 절망, 어둠, 슬픔은 곳곳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나와 타자는 고통스럽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집단의 몸부림은 미움과 다툼을 낳는다. 국가와 국가는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경제적 식민지를 만들고 전쟁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을 경전에서는 오탁악세(五濁惡世)라고 한다.
그러나 중생은 늘 모순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대안을 찾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발원한다. 사랑, 용서, 일치, 믿음으로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세상을 꽃 피우겠노라고.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위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온전히 주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다. 이러한 발원과 실천은 아파하는 모든 생명의 현실이고 미래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세속 권력에 관여하면서 숱한 역사적 오점을 남기면서도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한 것은 성찰과 사랑을 동시적으로 희구한 영지주의의 힘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15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함께 종래의 라틴어 성경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대중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곧 대중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접근을 이루어냈음을 말한다. 문제에 대한 응답! 그리고 대중적 언어의 사용은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강점이라 하겠다.

2. 대중의 반응과 선택은? 
 
나는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음미할 때마다 우리가 조석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기도문과 반야심경은 여러 면에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한글로 번역하여 독송하고 있기는 하지만 반야심경은 한문으로 읽는다. 기도문은 한글이다. 반야심경은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기도문은 지식과 종교에 관계없이 대중이 이해하기 쉽다. 내용이 어려우니 대중에게 반야심경은 감동으로 오지 않는다. 기도문은 이해와 감동을 함께 준다. 그리고 반야심경은 대중이 생각하기로는 왠지 모든 삶을 부정하는 소리로 들린다. 반면에 기도문은 분명한 실천을 제시하면서 희망의 세계를 보여준다. 반야심경은 불교와 수행승의 세계에서 통용하는 진리 같아서 심오한 것 같기는 한데 왠지 낯설다. 기도문은 민족과 종교를 넘어 유익하고 친근한 우리 모두의 기원이다. 산사와 불교에 갇혀 있는 반야심경과 광장과 거리에서 만나는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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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야심경이 지향하는 것은? 
 
내가 반야심경과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비교하는 까닭은 두 종교의 사상적 우열을 논하고자함이 아니다. 두 글의 상이점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불자들의 지향점을 다시 설정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기도문은 가치의 판단과 선택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분명히 규정하고, 바람직한 삶을 제시하고 있다. 현실의 진단과 가치의 선택이 명확하다.
반야심경은 일체 존재가 고정되고 결정된 불변의 실재가 아님을 통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사의 모든 사건과 결과가 미리부터 존재하고 영속하는 실재가 아님을 확연하게 깨달으면, 모든 번뇌와 집착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미리서부터 고정되고 결정된 불변하는 화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사고와 습관 등 반복된 행위의 집적물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안다면 ‘화를 잘 내는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이 위대한 점은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풍부한 철학적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공성(空性)이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반야심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도 과연 모든 이웃 중생을 자유와 행복의 길로 함께 가자는 대승불교의 지향에 부합하고 있는 것일까? 반야심경은 공(空)과 함께 자비의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일까? 만약 어느 누가 말하기를, ‘반야심경은 저마다 모든 이들이 일체 존재가 공임을 알고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나 대자유와 안락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대승보살의 원력을 가지고 있다.’ 라고 했다 하자.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은 ‘오온이 공한 것을 통찰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에 인간의 삶은 실로 복잡하다. 다양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삶이 전개되고 다양한 문제가 곳곳에 존재한다. 때문에 하나의 해답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파악하는 ‘지혜바라밀’과 문제를 눈높이에 맞게 해결해 주는 ‘방편바라밀’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4.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반야심경의 사상과 문법으로 바꾸어 보기로 하자.

오 부처님 나는 평화를 구현하는 자비의 보살이 되고자 발원합니다.
미움과 사랑이 본래 없고 
다툼과 용서가 본래 없고 
분열과 일치가 본래 없습니다.
의혹이 본래 없으니 심을 믿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할 일도 본래 없습니다.

오 부처님 나는 평화를 구현하는 자비의 보살이 되고자 발원합니다.
오류가 본래 없기에 진리가 본래 없고 
절망이 본래 없기에 희망도 본래 없고
어둠이 본래 없기에 광명 또한 본래 없습니다.
그리하여 슬픔도 본래 없기에 심어야 할 기쁨도 본래 없나이다.

오 부처님 나는 평화를 구현하는 자비의 보살이 되고자 발원합니다.
위로 받는 자와 위로 하는 자가 본래 없고
이해 받는 자와 이해하는 자가 본래 없고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가 본래 없나이다.
온전히 줄 자기가 본래 없기에
얻어야 할 영생도 본래 없나이다.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그 무엇도 본래 없다는 공(空)의 이치는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의 법칙이다. 마치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쓰레기장이 존재하지 않듯이, 화를 내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듯이, 차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등이라는 말이 탄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반야심경의 공의 이치는 존재의 법칙을 여실히 보는 ‘사실의 판단’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의 공사상은 모든 이항대립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판단’으로서 철학의 최고봉에 서 있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차별과 평등, 분열과 평화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 세계, 우리는 이를 진제(眞諦)라고 부른다. 언어와 개념과 사념조차 붙일 수 없는 세계.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제의 세계는 우리가 희구하는 세계다.  
 
 
5. 사실의 판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
 
우리 인간의 삶은 현실이고 실존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속제(俗諦)라고 부른다.  속제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는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 밥을 먹기 위하여 노동을 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존재’한다. 갈등과 반목이 존재한다. 국가와 민족이 존재한다. 신념과 문화의 차이가 다른 종교가 존재한다. 그래서 분열과 갈등이 존재하고 전쟁이 발생한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고통스럽다. 서로 미워하고 질투한다. 서로를 속이기도 한다. 절망과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위로 받고 싶어 한다. 이해 받고 싶어 한다. 사랑 받고 싶어 한다.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하게 대접 받고 싶어 한다. 이렇게 속제의 세계, 중생의 세계는 그 무엇을 발원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어 주겠노라는 대승보살의 원(願)바라밀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의 판단’ 하나만으로 모든 인간의 모든 고뇌가 해결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우리 사회는 청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다. 또 여러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절망하여 자살하는 비율은 매우 심각하다. 명문대학의 청년이,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이 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비통한 사람들 앞에서 “우울과 자살은 본래 텅비고 공하여서 본래 없는 것이다. 생사가 본래 공적한 것이다. 생과 사는 하늘에 뜬 구름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무모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비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5. 가치의 판단으로 읽어야 하는 경전
 
이제 다시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과 조건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세계에 있으며, 만들지 않으면 본래 없는 것이라는 공(空 )의 세계라는 ‘사실의 판단’위에 ‘가치의 판단’을 세워야 할 때이다. 
자, 세상의 법칙이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가치의 판단이다. 사실의 판단은 이렇다. “차별과 평등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구조의 문제 등 여러 원인의 결과로 차별은 존재하고 있다.” 그럼 가치의 판단은 어떤 것인가? “차별 받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사람은 저마다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차별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의 탐욕과 사회구조가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차별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소멸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로 한다.”
깨달음은 ‘사실의 판단’이며 자비는 ‘가치의 판단’이다. 우리 불자들은 그동안 ‘사실의 판단’을 최종의 지향점으로 삼고 매달리고 갇힌 것은 아닐까? 대승보살은 새의 양 날개로 사바를 횡단하고 수레의 두 바퀴로 중생과 역사의 복판을 운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6. 사바를 횡단하는 대승의 양날개
 
유마경과 반야경, 화엄경 등 모든 대승경전은 수레의 두 바퀴, 새의 양 날개로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유마경에서 보살은 다음과 같이 수레의 두 바퀴로 중생세간을 장엄하고 있다.

보살은 생사에 있으나 오염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열반에 있으나 적멸에도 취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비록 상(相, 관념)을 떠났지만 중생을 제도합니다.
비록 모든 법이 불생불멸임을 알지만 훌륭한 상호로 장엄합니다.
비록 모든 법이 텅 빈 모습임을 알지만 중생에게 응하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비록 모든 불국토가 영원히 적멸한 것이 공과 같음을 관찰하나 가지가지 청정한 불국토를 나나내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비록 불도를 얻어서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가나 보살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또 금강경은 다음과 같이 새의 양 날개로 ‘머묾’과 ‘나아감’에 자재하고 있다.
“보살은 그 어떤 것에도 갇히거나 묶이지 않고(응무소주 應無所住), 기꺼히 마음을 내어 실천합니다(이생기심 而生其心)

편집부처님석굴암위키.jpg

7. 이렇게도 말해야 한다
 
자, 마지막으로 유마경과 금강경의 문법으로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만들어 대승보살의 정신을 살려 보기로 하자.

미움과 사랑이 본래 없지만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워하는 자도 사랑하는 자도 없는,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분열과 일치가 본래 없지만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분열과 일치라는 말도 없는,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위로 받는 자와 위로 하는 자가 본래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 위로의  손을 내밀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위로 받는 자와 위로 하는 사람도 없는, 늘 자비와 헌신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이 글은 불교포커스(http://www.bulgyofocus.net)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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