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방송중인 문화방송텔레비전 드라마 <스캔들>에서 부도덕한 재벌총수 장태하(박상민분). 사진 문화방송
지난해 방송된 에스비에스텔레비전 드라마 <추적자>에서 부도덕한 대기업 총수 서회장(박근형분)과
사위인 대권 후보 강동윤(김상중분). 사진 에스비에스
우리는 주위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산다. 자기만 잘나갈 뿐 아니라 자식들도 잘되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다니고 부와 권력과 사회적 명성도 누리는 사람들이다. 거기다 건강과 평화로운 가정생활까지 따라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하기야 이 후자가 여의치 않아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제법 많다. 외적 조건만으로는 누가 봐도 행복할 것 같은데 건강이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어 어두운 얼굴로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위의 두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부러울지언정 존경심은 느끼지 않는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은 저나 나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순전히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겠는가? 우리가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좀 손해 보면서,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존경과 감동을 자아낸다.
세상에 자기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면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신의 활동 무대이자 자기를 키워 준 사회를 떠나 성공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람 가운데 제일 덜된 사람은 혼자 잘나서 된 줄 알고 사는 사람, 은혜를 모르고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수히 많은 가깝고 먼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공과 무아를 가르치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범사에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종교의 궁극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에 갇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이웃과 사회, 세계와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린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스리랑카의 저명한 민중신학자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는 가진 자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간단히 두 마디로 정의했다. ‘가난해지기 위한 노력’(struggle to be poor)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노력’(struggle for the poor)이다. 전자는 자발적 가난으로서 개인의 도덕성과 영성의 문제이며, 후자는 사랑과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을 말한다. 살면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조금이라도 느끼며 사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그만큼 모두가 함께 살 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성탄절을 앞두고 지난해 12월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드림씨티 노숙자지원센터 선교교회에서
찬양집회 및 노래자랑 행사에서 한참가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가난과 종교, 가난과 영성은 가까운 친구다. 둘이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신앙이 좋을수록 물질적으로 복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다운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기복신앙이 우리나라 종교계를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나라 종교들이 이런 ‘복 장사’ 하면서 재미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소득이 선진국 수준이 될 때도 여전히 그럴 수 있을까? ‘복’을 구하는 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신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복의 내용이다. 무엇이 진정한 복이며 진정한 행복인지를 올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이고 사명이다. 그렇게 하지 않거나 못하는 종교는 존재하나 마나 한 종교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대형 교회와 사찰과 종교 지도자들이 가난과 너무 멀어졌다. 성직자들이 무소유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무슨 대단한 일인 양 매스컴에 보도되고 세인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성직이 출세의 수단이 되고 신앙이 복덕 방망이가 되어 버린 종교는 희망이 없는 종교다.
길희성(서강대 명예교수 겸 심도학사 원장)